전후맥락
트로이아 전쟁 10년차, 그리스 군대는 트로이아의 이웃 도시를 함락시키고 재물과 여인들을 약탈, 납치한 뒤에, 공을 세운 순서에 따라 영웅들에게 명예의 상으로 분배한다. 한편,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 왕은 아폴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명예의 상으로 차지했던 여인 크뤼세이스를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는 크뤼세이스를 돌려보내는 대신, 자신의 명예를 보충하고자 동료였던 아킬레우스가 받은 명예의 상인 브뤼세이스를 빼앗으려 한다. 그리스 연합군 최강의 전사이자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아킬레우스는 크게 분노하며 아가멤논을 위한 전쟁에 더는 참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가멤논이 결국 브리세이스를 빼앗아가자, 아킬레우스는 분노와 슬픔에 빠져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에게 기도한다.
고전본문
아킬레우스는 잿빛 바다의 기슭에 홀로 앉아 끝없는 바다 저편을 바라보며
두 손을 내밀고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어머니, ① 어머니께서 나를 단명하도록 낳아 주셨으니
높은 곳에서 우레를 치시는 올뤼폼스의 제우스께서는 내게 명예만이라도
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허나 그분은 조그마한 명예도 주지 않았습니다.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나를
모욕하며 내 명예의 상을 제멋대로 빼앗아 가졋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그의 존경하는 어머니가 바다 깊숙한 곳,
그녀의 늙은 아버지 곁에 앉아 있다가 그의 기도를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체없이 잿빛 바다 속에서 안개처럼
떠올라와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아들 앞에 앉아
손으로 그를 어루만지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왜 울고 있느냐? 마음 속에 무슨 슬픔이 있느냐?
숨김 없이 말해보아라. 우리 둘 다 알도록 말이다.”
[……]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향해 위협의 말을 했고, 또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눈매가 고운 아카이아인들이 여인을 날랜 배에 태워
크뤼세로 보내고 왕에게 바칠 선물을 가져가고 있는 동안
방금 전령들이 와서 브리세우스의 딸을, 아카이아의 아들들이
내게 준 그녀를 내 막사에서 데리고 나갔습니다.
② 그러니 어머니 가능하시다면 나를 도와주십시오.
어머니께서 일찍이 말과 행동으로 제우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린
적이 있다면, 지금 올륌포스로 가서 제우스께 간청해보세요.
[……]
그렇게 하시면 아마 그분께서 트로이아인들에게 도움을 내려주시고
도륙당하는 아카이아인들을 바닷가의 뱃고물 사이에 가두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들 그들의 왕이 어떤 자인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카이아인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를 모욕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요.”
그러자 그를 향해 테티스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 내아들아! 이런 불행을 당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낳아
길렀단 말이냐? 네 명이 짧고 길지 않을 진대, 너는 마땅히
눈물도 고통도 없이 함선 옆에 앉아 있었어야 할 것이다.
하거늘 지금 너는 명도 짧은데다가 누구보다도 불행하구나.
이런 비참한 운명을 맛보게 하려고 궁전에서 너를 낳았단 말인가!
아무튼 네 말을 우레를 좋아하시는 제우스께 전하기 위해
내 몸소 눈 덮인 올륌포스로 가겠다. 아마 들어주실 것이다.
그동안 너는 아카이아인들에 대한 노여움을 거두지 말고
빨리 달리는 함선 옆에 앉아있을 것이며, 전쟁에는 일체 관여치 말라.
제우스께서는 어제 나무랄 데 없는 아이티옵스 족의 잔치에
참석코자 오케아노스로 가셨고 다른 신들도 모두 따라갔다.
열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내 그때 문턱이 청동으로 된 제우스의 궁전에 가서
그분의 무릎을 잡겠다. 아마 내 청을 들어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아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나갔다.
토론하기
(1)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어머니를 통해 제우스에게 동족인 그리스인들의 패배와 적국인 트로이아의 승리를 탄원해달라고 부탁한다. 당신은 자신의 명예 또는 자존심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 또는 가까운 사람과 대립한 적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보자.
(2) 단명하되 불멸의 명예를 얻는 것과 장수하되 이름 없이 살다 가는 것, 당신이 둘 장 하나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영웅의 이미지에 담긴 인간의 욕망
‘영웅’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건장한 체격, 강한 힘, 불굴의 정신력, 약자에 대한 연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에 잘 부합하는 영웅들로 디즈니 만화와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들을 떠올릴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런 이미지에 부합하는 현실 속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예컨대 극한의 경쟁 속에서 승리한 올림픽 메달리스트, 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한 소방관 등의 모습에서 우리는 영웅들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들을 찬양한다. 그런데 우리가 서구 문명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영웅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이미지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서기전 8세기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이다. 그는 그리스의 영웅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전사로 손꼽힌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 간의 10년 전쟁에서 그는 항상 선두에 서서 싸웠고, 적들은 아킬레우스가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데 그는 10년 간이나 연합군 측에서 열심히 싸우다가 막판에 여자 문제로 자신의 동지이자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과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적의 도시를 정복한 뒤에 명예의 상으로 얻게 된 브리세이스라는 여인을 아가멤논이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여인을 빼앗김으로써 명예를 잃었다고 생각한 아킬레우스는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만나 그리스인들이 패하고 트로이아인들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탄원해줄 것을 부탁한다. 위의 인용문은 바로 아킬레우스와 어머니 테티스 간의 대화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아킬레우스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을 빼앗겨 화가 난다는 이유로 아군의 패배와 적군의 승리를 그것도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게 탄원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도 경기 중에 같은 팀 동료에게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상대 팀을 돕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전쟁 중에 상대의 승리를 탄원하다니, 반역도 이런 반역은 없다. 하지만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대로 제우스에게 탄원을 하고, 제우스는 테티스의 탄원을 받아들인다. 결국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아 군대에게 패퇴를 거듭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 작품의 서시(序詩)에 해당되는 맨 앞부분에서 시인은 아킬레우스의 가공할 분노로 인해 수많은 영웅들이 죽었고, “그들의 혼은 하데스(지옥)로 갔고, 그들의 시체는 개들과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고 노래한다. 과연 이런 인간을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상식과 가치관에 따라 보면, 아킬레우스는 엽기적인 성격의 반역자에 다름아니다. 그러핟면 그리스인들은 무엇을 보고서 이러한 아킬레우스를 그리스 최강의 영웅이라고 불렀던 것일까?
왜 영웅인가? 명예의 중요성
그리스인들에게 영웅은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다. 많은 경우 신화 속 영웅들은 부모 중 한 명이 신이다. 영웅은 신의 피가 섞여 있기에 보통의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 하지만 나머지 피의 절반은 인간의 것이기에 신이 되지 못하고 인간으로 머문다. 그런데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의 차이는 바로 불사냐 죽느냐이기 때문이다. 신은 죽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은 아무리 강하고 지혜롭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웅은 힘과 지략에서는 신에 버금갈 수도 있지만, 결국 죽는다는 점에서는 인간임을 벗어날 수 없다.
다음으로 신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해보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부나 명예, 지위와 권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진 자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미 불사인 신에게는 목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이다. 신은 그 자체로 우월한 자이며 인간들에게 숭배의 대상이다. 그런 신이 명예를 잃고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며 영웅은 어떨까? 영웅은 신에 가깝게 우월하며 탁월한 힘을 지녔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영웅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불사를 추구한다. 그것은 바로 세세손손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불멸의 명예를 얻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영원히 지속하는 명예를 통해 불사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들이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명예의 추구에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의 모험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불멸의 명예에 대한 욕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운명: 명예 없이 장수할 것인가? vs. 단명하되 불멸의 명예를 얻을 것인가?
자, 이제는 왜 아킬레우스가 모든 것을 뒤엎을 만큼 분노했는지를 살펴보자. 아킬레우스는 인간 영웅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테티스는 자기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매우 슬퍼하여 여러 차례 불사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가 성인이 될 무렵에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에게는 양자택일 가능한 신탁이 떨어진다. 그것은 그가 전쟁에 참여한다면 전쟁 중에 단명하되 불멸의 명예를 얻을 것이요, 전쟁을 피한다면 장수하되 아무런 명예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신탁이었다. 아들의 단명을 두려워했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주저 없이 참전을 결정한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불멸의 명예를 얻음으로써 물리적인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위의 대목 ①은 아킬레우스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그는 참전한 이상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내일일 수도 있고, 오늘 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감수하는 대신 누구보다도 오래 지속하는 명예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명예의 상으로 받은 여인을 아가멤논이 빼앗음으로써 목숨을 대가로 얻고자 했던 명예마저 잃게 된 것이다. 이미 목숨을 포기한 아킬레우스는 명예까지 잃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죽음을 피하는 수단으로서의 명예
아킬레우스는 어떻게 자신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까? 밑줄 친 ②에서 아킬레우스는 제우스의 힘을 통해 명예를 되찾으려고 한다. 제우스가 트로이아의 편을 들어 그리스 군대를 패퇴시킨다면, 그리스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아킬레우스의 부재를 아쉬워할 것이다. 패퇴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아킬레우스의 복귀를 원할 것이요, 이를 통해 실추된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엽기적이고 잔인한 욕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같은 편이 더 많이 죽고 더 많은 고통을 당할수록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동지들의 목숨과 안전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영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먼저 생각해둬야 할 것은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정의나 의리와 같은 개념들은 영웅들에게 그다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극단적 개인주의 내지는 이기주의처럼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영웅들이 신과 닮아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신들은 불사일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의 탁월함으로 인해 어떠한 결핍도 느끼지 않은 자족적인 자들이다. 따라서 신들은 살아가기 위해 타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비록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올륌포스 산의 신궁에 모여 산다고는 해도,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그들이 바친 제물을 향유하고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불완전하고 항상 결핍을 느끼기에 생존을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인간에게 공동체는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인 셈이다. 그런데 공동체가 유지되고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과 규범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정의와 도덕이다. 이것들이 깨지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인간의 생존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영웅은 어떨까? 영웅 역시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의 능력과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원하는 것은 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월한 자로서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죽음을 운명 대신 불멸하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타인을 배려하거나 눈치를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아킬레우스가 아무런 주저함 없이 어머니를 통해 제우스에게 그리스인들의 패배와 트로이아인들의 승리를 탄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연유한다. 그리스인들이 패퇴하면 할수록, 그들은 아킬레우스의 빈 자리를 절실하게 느낄 것이요, 그들이 아킬레우스의 복귀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의 명예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후반부를 보게 되면, 결국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인들이 해변까지 밀려나고, 사랑하는 동료인 파트로클로스가 적장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서야 전장에 복귀한다. 즉 그는 모든 그리스인들이 파멸을 생각하던 그 순간 싸움터로 복귀함으로써 최고의 명예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영웅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그 시대의 영웅의 모습 속에 투영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의 신화의 영웅들은 신을 닮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인물들이었다. 요컨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대신하여 불멸의 명예를 얻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키워드
명예, 불사, 신, 영웅, 운명, 인간, 죽음
전후맥락
트로이아 전쟁 10년차, 그리스 군대는 트로이아의 이웃 도시를 함락시키고 재물과 여인들을 약탈, 납치한 뒤에, 공을 세운 순서에 따라 영웅들에게 명예의 상으로 분배한다. 한편,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 왕은 아폴론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명예의 상으로 차지했던 여인 크뤼세이스를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는 크뤼세이스를 돌려보내는 대신, 자신의 명예를 보충하고자 동료였던 아킬레우스가 받은 명예의 상인 브뤼세이스를 빼앗으려 한다. 그리스 연합군 최강의 전사이자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아킬레우스는 크게 분노하며 아가멤논을 위한 전쟁에 더는 참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아가멤논이 결국 브리세이스를 빼앗아가자, 아킬레우스는 분노와 슬픔에 빠져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에게 기도한다.
고전본문
아킬레우스는 잿빛 바다의 기슭에 홀로 앉아 끝없는 바다 저편을 바라보며
두 손을 내밀고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
“어머니, ① 어머니께서 나를 단명하도록 낳아 주셨으니
높은 곳에서 우레를 치시는 올뤼폼스의 제우스께서는 내게 명예만이라도
주었어야 할 것입니다. 허나 그분은 조그마한 명예도 주지 않았습니다.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 나를
모욕하며 내 명예의 상을 제멋대로 빼앗아 가졋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그의 존경하는 어머니가 바다 깊숙한 곳,
그녀의 늙은 아버지 곁에 앉아 있다가 그의 기도를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체없이 잿빛 바다 속에서 안개처럼
떠올라와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아들 앞에 앉아
손으로 그를 어루만지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아, 왜 울고 있느냐? 마음 속에 무슨 슬픔이 있느냐?
숨김 없이 말해보아라. 우리 둘 다 알도록 말이다.”
[……]
“아트레우스의 아들은 화를 내며 벌떡 일어서더니
나를 향해 위협의 말을 했고, 또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눈매가 고운 아카이아인들이 여인을 날랜 배에 태워
크뤼세로 보내고 왕에게 바칠 선물을 가져가고 있는 동안
방금 전령들이 와서 브리세우스의 딸을, 아카이아의 아들들이
내게 준 그녀를 내 막사에서 데리고 나갔습니다.
② 그러니 어머니 가능하시다면 나를 도와주십시오.
어머니께서 일찍이 말과 행동으로 제우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린
적이 있다면, 지금 올륌포스로 가서 제우스께 간청해보세요.
[……]
그렇게 하시면 아마 그분께서 트로이아인들에게 도움을 내려주시고
도륙당하는 아카이아인들을 바닷가의 뱃고물 사이에 가두실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들 그들의 왕이 어떤 자인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카이아인들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를 모욕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요.”
그러자 그를 향해 테티스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아, 내아들아! 이런 불행을 당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낳아
길렀단 말이냐? 네 명이 짧고 길지 않을 진대, 너는 마땅히
눈물도 고통도 없이 함선 옆에 앉아 있었어야 할 것이다.
하거늘 지금 너는 명도 짧은데다가 누구보다도 불행하구나.
이런 비참한 운명을 맛보게 하려고 궁전에서 너를 낳았단 말인가!
아무튼 네 말을 우레를 좋아하시는 제우스께 전하기 위해
내 몸소 눈 덮인 올륌포스로 가겠다. 아마 들어주실 것이다.
그동안 너는 아카이아인들에 대한 노여움을 거두지 말고
빨리 달리는 함선 옆에 앉아있을 것이며, 전쟁에는 일체 관여치 말라.
제우스께서는 어제 나무랄 데 없는 아이티옵스 족의 잔치에
참석코자 오케아노스로 가셨고 다른 신들도 모두 따라갔다.
열이틀째 되는 날 다시 올륌포스로 돌아오실 것인즉,
내 그때 문턱이 청동으로 된 제우스의 궁전에 가서
그분의 무릎을 잡겠다. 아마 내 청을 들어주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아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나갔다.
토론하기
(1)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어머니를 통해 제우스에게 동족인 그리스인들의 패배와 적국인 트로이아의 승리를 탄원해달라고 부탁한다. 당신은 자신의 명예 또는 자존심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 또는 가까운 사람과 대립한 적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보자.
(2) 단명하되 불멸의 명예를 얻는 것과 장수하되 이름 없이 살다 가는 것, 당신이 둘 장 하나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영웅의 이미지에 담긴 인간의 욕망
‘영웅’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건장한 체격, 강한 힘, 불굴의 정신력, 약자에 대한 연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감 등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들에 잘 부합하는 영웅들로 디즈니 만화와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들을 떠올릴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런 이미지에 부합하는 현실 속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예컨대 극한의 경쟁 속에서 승리한 올림픽 메달리스트, 사고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한 소방관 등의 모습에서 우리는 영웅들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그들을 찬양한다. 그런데 우리가 서구 문명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영웅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 이미지가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서기전 8세기의 서사시인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이다. 그는 그리스의 영웅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전사로 손꼽힌다.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 간의 10년 전쟁에서 그는 항상 선두에 서서 싸웠고, 적들은 아킬레우스가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치기 바빴다. 그런데 그는 10년 간이나 연합군 측에서 열심히 싸우다가 막판에 여자 문제로 자신의 동지이자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과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적의 도시를 정복한 뒤에 명예의 상으로 얻게 된 브리세이스라는 여인을 아가멤논이 빼앗아갔기 때문이다. 여인을 빼앗김으로써 명예를 잃었다고 생각한 아킬레우스는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를 만나 그리스인들이 패하고 트로이아인들이 승리하게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탄원해줄 것을 부탁한다. 위의 인용문은 바로 아킬레우스와 어머니 테티스 간의 대화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아킬레우스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을 빼앗겨 화가 난다는 이유로 아군의 패배와 적군의 승리를 그것도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게 탄원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도 경기 중에 같은 팀 동료에게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상대 팀을 돕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전쟁 중에 상대의 승리를 탄원하다니, 반역도 이런 반역은 없다. 하지만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대로 제우스에게 탄원을 하고, 제우스는 테티스의 탄원을 받아들인다. 결국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아 군대에게 패퇴를 거듭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된다. 이 작품의 서시(序詩)에 해당되는 맨 앞부분에서 시인은 아킬레우스의 가공할 분노로 인해 수많은 영웅들이 죽었고, “그들의 혼은 하데스(지옥)로 갔고, 그들의 시체는 개들과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고 노래한다. 과연 이런 인간을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상식과 가치관에 따라 보면, 아킬레우스는 엽기적인 성격의 반역자에 다름아니다. 그러핟면 그리스인들은 무엇을 보고서 이러한 아킬레우스를 그리스 최강의 영웅이라고 불렀던 것일까?
왜 영웅인가? 명예의 중요성
그리스인들에게 영웅은 신에 가장 가까운 인간이었다. 많은 경우 신화 속 영웅들은 부모 중 한 명이 신이다. 영웅은 신의 피가 섞여 있기에 보통의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 하지만 나머지 피의 절반은 인간의 것이기에 신이 되지 못하고 인간으로 머문다. 그런데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신과 인간의 차이는 바로 불사냐 죽느냐이기 때문이다. 신은 죽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은 아무리 강하고 지혜롭다 하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영웅은 힘과 지략에서는 신에 버금갈 수도 있지만, 결국 죽는다는 점에서는 인간임을 벗어날 수 없다.
다음으로 신과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해보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부나 명예, 지위와 권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진 자가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보다도 목숨을 소중히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미 불사인 신에게는 목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이다. 신은 그 자체로 우월한 자이며 인간들에게 숭배의 대상이다. 그런 신이 명예를 잃고 영원히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며 영웅은 어떨까? 영웅은 신에 가깝게 우월하며 탁월한 힘을 지녔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영웅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불사를 추구한다. 그것은 바로 세세손손 사람들이 기억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불멸의 명예를 얻는 것이다. 즉 생물학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영원히 지속하는 명예를 통해 불사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들이 행동하는 이유는 바로 명예의 추구에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의 모험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불멸의 명예에 대한 욕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운명: 명예 없이 장수할 것인가? vs. 단명하되 불멸의 명예를 얻을 것인가?
자, 이제는 왜 아킬레우스가 모든 것을 뒤엎을 만큼 분노했는지를 살펴보자. 아킬레우스는 인간 영웅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테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테티스는 자기 아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매우 슬퍼하여 여러 차례 불사로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 아킬레우스가 성인이 될 무렵에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에게는 양자택일 가능한 신탁이 떨어진다. 그것은 그가 전쟁에 참여한다면 전쟁 중에 단명하되 불멸의 명예를 얻을 것이요, 전쟁을 피한다면 장수하되 아무런 명예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신탁이었다. 아들의 단명을 두려워했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신탁의 내용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주저 없이 참전을 결정한다. 그가 원했던 것은 불멸의 명예를 얻음으로써 물리적인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위의 대목 ①은 아킬레우스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그는 참전한 이상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내일일 수도 있고, 오늘 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을 감수하는 대신 누구보다도 오래 지속하는 명예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명예의 상으로 받은 여인을 아가멤논이 빼앗음으로써 목숨을 대가로 얻고자 했던 명예마저 잃게 된 것이다. 이미 목숨을 포기한 아킬레우스는 명예까지 잃게 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죽음을 피하는 수단으로서의 명예
아킬레우스는 어떻게 자신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을까? 밑줄 친 ②에서 아킬레우스는 제우스의 힘을 통해 명예를 되찾으려고 한다. 제우스가 트로이아의 편을 들어 그리스 군대를 패퇴시킨다면, 그리스인들은 영문도 모르고 아킬레우스의 부재를 아쉬워할 것이다. 패퇴를 거듭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아킬레우스의 복귀를 원할 것이요, 이를 통해 실추된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엽기적이고 잔인한 욕구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같은 편이 더 많이 죽고 더 많은 고통을 당할수록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동지들의 목숨과 안전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런 영웅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먼저 생각해둬야 할 것은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한다는 사실이다. 정의나 의리와 같은 개념들은 영웅들에게 그다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극단적 개인주의 내지는 이기주의처럼 보이는 이러한 태도는 영웅들이 신과 닮아있음을 생각해본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신들은 불사일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의 탁월함으로 인해 어떠한 결핍도 느끼지 않은 자족적인 자들이다. 따라서 신들은 살아가기 위해 타자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다. 비록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올륌포스 산의 신궁에 모여 산다고는 해도,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거나 그들이 바친 제물을 향유하고 잔치를 즐기기 위해서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불완전하고 항상 결핍을 느끼기에 생존을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인간에게 공동체는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인 셈이다. 그런데 공동체가 유지되고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과 규범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정의와 도덕이다. 이것들이 깨지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인간의 생존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영웅은 어떨까? 영웅 역시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지만, 그의 능력과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원하는 것은 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신만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우월한 자로서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죽음을 운명 대신 불멸하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타인을 배려하거나 눈치를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아킬레우스가 아무런 주저함 없이 어머니를 통해 제우스에게 그리스인들의 패배와 트로이아인들의 승리를 탄원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연유한다. 그리스인들이 패퇴하면 할수록, 그들은 아킬레우스의 빈 자리를 절실하게 느낄 것이요, 그들이 아킬레우스의 복귀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의 명예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후반부를 보게 되면, 결국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인들이 해변까지 밀려나고, 사랑하는 동료인 파트로클로스가 적장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서야 전장에 복귀한다. 즉 그는 모든 그리스인들이 파멸을 생각하던 그 순간 싸움터로 복귀함으로써 최고의 명예를 얻으려 했던 것이다. 어쩌면 영웅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구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이 그 시대의 영웅의 모습 속에 투영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의 신화의 영웅들은 신을 닮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인물들이었다. 요컨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을 대신하여 불멸의 명예를 얻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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