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오뒷세우스의 모험을 노래하기에 앞서 먼저 음송시인은 기예를 주관하는 무사(Mousa)여신에게 오뒷세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 짤막한 기도 부분을 ‘서시’라고 하는데, 대개의 경우 서시에는 작품의 주제와 교훈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기도에 응답한 여신은 시인의 몸으로 들어와 그의 입을 통해 신들과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오뒷세이아>의 서시에서 시인은 트로이아를 함락시킨 오뒷세우스가 자신에게 부과된 힘겨운 운명을 감내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해달라고 여신에게 기도한다.
고전본문
그 남자에 대해 내게 말씀해 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꾀가 많은 그 남자,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에 정말 많이도 떠돌았던 그 남자에 대해!
그는 수많은 도시를 보았고 그들의 생각을 알았으며
바다에서 그 마음을 통해 수많은 고통을 겪었으니,
자신의 목숨과 동료들의 귀향을 구하려다 그랬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토록 원했건만 동료들을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 없음 때문에 파멸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 어리석은 자들은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들을
잡아먹었고, 그러자 [신이] 그들에게서 귀향의 날을 앗아가버렸으니까요.
그 사건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여신이시여, 제우스의 따님이시여, 우리게에게도 이야기해주소서.
토론하기
(1) 서사시의 주인공은 자신과 동료들의 귀향을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에는 배와 동료들을 모두 잃게 될 운명이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인간은 삶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신은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해설읽기
그리스의 축제에는 서사시 공연이 종종 등장한다. 이 공연에는 마치 판소리처럼 음송시인(소리꾼)과 악기연주자(고수)가 등장하며, 시인은 기예를 주관하는 무사 여신에 대한 기도로 공연을 시작한다. 이 기도를 ‘서시(序詩)’라고 하는데, 위의 인용문은 <오뒷세이아>의 서시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오뒷세이아> 전체는 약 1만2천행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이지만, 서시는 위에서 보듯이 불과 10행 남짓으로 매우 짧다. 하지만 이 짧은 서시 안에는 작품 전체의 주제와 이야기의 성격, 그리고 교훈이 담겨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글을 쓸 때, 주제가 글의 앞에 오는 것을 두괄식(頭括式), 뒤에 오는 것을 미괄식(尾括式)이라 부르는데, 서양의 글쓰기에서 두괄식의 전통이 확립된 것은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부터이다.
서시에 따르면, <오뒷세이아>의 주제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그런데 주제라면, 적어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위의 서시에는 아무런 이름도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이름은 없지만, 청중들이 듣기만 하면 다 아는 그 남자의 별명이 이름 대신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첫 행의 마지막에 있는 ‘꾀 많은 남자’라는 표현이다. ‘꾀가 많은’, 혹은 ‘다양한 수단을 지닌’이라는 수식어는 그리스의 수많은 영웅 가운데 오직 오뒷세우스 단 한 사람에게만 붙는 별칭이다. 머리가 좋고 임기응변에 능한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여 다양한 계략을 써서 수많은 공을 세웠고, 마지막에는 목마 작전을 주도하여 전쟁 10년만에 트로이아를 함락시킨다. 그래서 오뒷세우스에게는 ‘발이 날랜(아킬레우스)’이나 ‘인간의 아들(아가멤논)’과 같은 수식어가 아니라, ‘꾀 많은’이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고유한 별칭으로 갖게 되었다.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그리스인들 역시 시인이 특별히 주인공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저 ‘꾀 많은 남자’이라고만 해도, ‘아! 이 노래는 오뒷세우스라는 영웅에 관한 이야기로구나’라는 것을 즉각 알게 되는 것이다.
서시의 나머지 부분은 오뒷세우스가 행하거나 겪게 될 일들을 예고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인공의 귀향을 둘러싼 모험이라는 것이다. 즉 오뒷세이아는 무엇인가를 구하러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난 뒤에 돌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일이 쉽기만 하다면 굳이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인은 오뒷세우스의 귀향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시인은 오뒷세우스가 겪은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그것은 귀향의 와중에 자신의 배와 동료들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배와 동료들을 잃은 책임이 오뒷세우스가 아니라 동료들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부하들이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었기에 분노한 신이 그들을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대목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오뒷세우스가 자신과 동료들의 귀향을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의 노력은 신들의 의지나 분노라는 한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오뒷세우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이타케의 왕이다. 그는 왕이기에 백성들을 지배하며 그들에 대한 절대적인 명령권을 갖는다. 하지만 왕은 백성들위에 군림하는 대신, 그들을 지키고 보살펴야 할 책임을 갖는다. 백성에 대한 왕의 지배권은 절대적이지만, 그만큼 전쟁이나 재난, 가난 등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야 할 의무 역시 무겁다. 그래서 간혹 혹독한 재해나 전쟁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지 못할 경우, 왕은 백성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열두 척의 배와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10년의 전쟁과 다시 10년의 귀향 속에서 배와 병사를 모두 잃고 만다. 즉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인은 서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병사들이 어리석은 실수와 신의 분노로 인한 파멸을 언급함으로써 오뒷세우스를 옹호한다. 병사들의 파멸은 그들이 신의 소유물을 건드림으로써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신이 분노할 경우, 인간인 오뒷세우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병사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오뒷세우스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신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인간의 삶과 죽음이 갈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기회를 이용하여 귀향을 위해 분투할 것임을 서시의 마지막 대목은 알려주고 있다.
이렇듯 시인은 서시를 통해서 정해진 운명 속에서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바람을 포기하지 않는 오뒷세우스의 모험을 예고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인이 이 서시에서 이미 관객들에게 모험의 결말을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오뒷세우스는 귀향 과정에서 온갖 모험을 겪지만, 결국에는 배와 동료들은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서시에서 결말이 드러나 버리는 이런 식의 언급은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스포일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에서 결말에 대한 언급은 청중들의 몰입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청중들이 기대하는 것은 결말의 반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자기들 모두가 알고 있고, 오직 주인공 자신만 모르고 있는 스스로의 운명을 오뒷세우스가 어떻게 감내하고 헤쳐나가는지를 들으면서 그와 함께 절망하고 또 기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워드
신, 운명, 의지, 인간
전후맥락
오뒷세우스의 모험을 노래하기에 앞서 먼저 음송시인은 기예를 주관하는 무사(Mousa)여신에게 오뒷세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 짤막한 기도 부분을 ‘서시’라고 하는데, 대개의 경우 서시에는 작품의 주제와 교훈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기도에 응답한 여신은 시인의 몸으로 들어와 그의 입을 통해 신들과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오뒷세이아>의 서시에서 시인은 트로이아를 함락시킨 오뒷세우스가 자신에게 부과된 힘겨운 운명을 감내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해달라고 여신에게 기도한다.
고전본문
그 남자에 대해 내게 말씀해 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꾀가 많은 그 남자,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에 정말 많이도 떠돌았던 그 남자에 대해!
그는 수많은 도시를 보았고 그들의 생각을 알았으며
바다에서 그 마음을 통해 수많은 고통을 겪었으니,
자신의 목숨과 동료들의 귀향을 구하려다 그랬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토록 원했건만 동료들을 구해내지 못하였으니,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 없음 때문에 파멸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 어리석은 자들은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들을
잡아먹었고, 그러자 [신이] 그들에게서 귀향의 날을 앗아가버렸으니까요.
그 사건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여신이시여, 제우스의 따님이시여, 우리게에게도 이야기해주소서.
토론하기
(1) 서사시의 주인공은 자신과 동료들의 귀향을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에는 배와 동료들을 모두 잃게 될 운명이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인간은 삶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당신은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해설읽기
그리스의 축제에는 서사시 공연이 종종 등장한다. 이 공연에는 마치 판소리처럼 음송시인(소리꾼)과 악기연주자(고수)가 등장하며, 시인은 기예를 주관하는 무사 여신에 대한 기도로 공연을 시작한다. 이 기도를 ‘서시(序詩)’라고 하는데, 위의 인용문은 <오뒷세이아>의 서시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오뒷세이아> 전체는 약 1만2천행으로 이루어진 장편 서사시이지만, 서시는 위에서 보듯이 불과 10행 남짓으로 매우 짧다. 하지만 이 짧은 서시 안에는 작품 전체의 주제와 이야기의 성격, 그리고 교훈이 담겨 있어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글을 쓸 때, 주제가 글의 앞에 오는 것을 두괄식(頭括式), 뒤에 오는 것을 미괄식(尾括式)이라 부르는데, 서양의 글쓰기에서 두괄식의 전통이 확립된 것은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부터이다.
서시에 따르면, <오뒷세이아>의 주제는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 그런데 주제라면, 적어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위의 서시에는 아무런 이름도 언급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비록 이름은 없지만, 청중들이 듣기만 하면 다 아는 그 남자의 별명이 이름 대신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첫 행의 마지막에 있는 ‘꾀 많은 남자’라는 표현이다. ‘꾀가 많은’, 혹은 ‘다양한 수단을 지닌’이라는 수식어는 그리스의 수많은 영웅 가운데 오직 오뒷세우스 단 한 사람에게만 붙는 별칭이다. 머리가 좋고 임기응변에 능한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여 다양한 계략을 써서 수많은 공을 세웠고, 마지막에는 목마 작전을 주도하여 전쟁 10년만에 트로이아를 함락시킨다. 그래서 오뒷세우스에게는 ‘발이 날랜(아킬레우스)’이나 ‘인간의 아들(아가멤논)’과 같은 수식어가 아니라, ‘꾀 많은’이라는 수식어를 자신의 고유한 별칭으로 갖게 되었다. 또한 그런 이유로 해서 그리스인들 역시 시인이 특별히 주인공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그저 ‘꾀 많은 남자’이라고만 해도, ‘아! 이 노래는 오뒷세우스라는 영웅에 관한 이야기로구나’라는 것을 즉각 알게 되는 것이다.
서시의 나머지 부분은 오뒷세우스가 행하거나 겪게 될 일들을 예고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인공의 귀향을 둘러싼 모험이라는 것이다. 즉 오뒷세이아는 무엇인가를 구하러 모험을 떠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난 뒤에 돌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일이 쉽기만 하다면 굳이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인은 오뒷세우스의 귀향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시인은 오뒷세우스가 겪은 고통의 이유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그것은 귀향의 와중에 자신의 배와 동료들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배와 동료들을 잃은 책임이 오뒷세우스가 아니라 동료들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부하들이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었기에 분노한 신이 그들을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대목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오뒷세우스가 자신과 동료들의 귀향을 위해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의 노력은 신들의 의지나 분노라는 한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오뒷세우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이타케의 왕이다. 그는 왕이기에 백성들을 지배하며 그들에 대한 절대적인 명령권을 갖는다. 하지만 왕은 백성들위에 군림하는 대신, 그들을 지키고 보살펴야 할 책임을 갖는다. 백성에 대한 왕의 지배권은 절대적이지만, 그만큼 전쟁이나 재난, 가난 등으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야 할 의무 역시 무겁다. 그래서 간혹 혹독한 재해나 전쟁으로부터 백성들을 구하지 못할 경우, 왕은 백성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 오뒷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열두 척의 배와 수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10년의 전쟁과 다시 10년의 귀향 속에서 배와 병사를 모두 잃고 만다. 즉 왕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자격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인은 서시의 마지막 대목에서 병사들이 어리석은 실수와 신의 분노로 인한 파멸을 언급함으로써 오뒷세우스를 옹호한다. 병사들의 파멸은 그들이 신의 소유물을 건드림으로써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들의 잘못으로 인해 신이 분노할 경우, 인간인 오뒷세우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병사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오뒷세우스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신화의 세계에서는 신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인간의 삶과 죽음이 갈리기도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 오뒷세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기회를 이용하여 귀향을 위해 분투할 것임을 서시의 마지막 대목은 알려주고 있다.
이렇듯 시인은 서시를 통해서 정해진 운명 속에서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바람을 포기하지 않는 오뒷세우스의 모험을 예고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인이 이 서시에서 이미 관객들에게 모험의 결말을 이야기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오뒷세우스는 귀향 과정에서 온갖 모험을 겪지만, 결국에는 배와 동료들은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서시에서 결말이 드러나 버리는 이런 식의 언급은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스포일러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에서 결말에 대한 언급은 청중들의 몰입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청중들이 기대하는 것은 결말의 반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미 자기들 모두가 알고 있고, 오직 주인공 자신만 모르고 있는 스스로의 운명을 오뒷세우스가 어떻게 감내하고 헤쳐나가는지를 들으면서 그와 함께 절망하고 또 기뻐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워드
신, 운명, 의지,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