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뒷세우스는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10년째 귀향하지 못하고 온 세상을 떠돈다. 모험의 마지막 단계에서 오뒷세우스의 일행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 근처에 이른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를 도왔던 예언자와 요정은 그에게 섬에 머무는 동안 태양신의 가축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무사히 귀향할 것이나, 만일 가축을 잡아먹는다면 배와 동료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힘겹게 귀향할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예언의 무서움을 상기한 오뒷세우스는 무사한 귀향을 위하여 동료들에게 섬에 들르지 말고 계속 항해를 이어가자고 설득하기로 마음 먹는다.
고전본문
[…」 우리는 곧 신의 나무랄 데 없는 섬에 도착했소.
그곳에는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이마가 넓은 훌륭한 [*휘페리온: 태양신을 말한다.]
소들이 있었고 힘센 작은 가축들도 많이 있었소.
그때 내가 검은 배를 타고 아직 바다 위에 있었음에도
축사에 갇힌 소 떼의 ‘음매’ 하고 우는 소리와 양떼의
‘매매’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소.
그러자 눈먼 예언자 테바이의 테이레시아스와 아이아이에 섬의 요정 키르케가 한 말이
내 마음에 떠올랐소. 그녀는 인간을 기쁘게 해주는
헬리오스의 섬을 피하라고 내개 신신당부했던 것이오.
그래서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전우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소.
“전우들이여! 그안 고생 많았소. 하지만 내 말을 들어보시오!
나는 그대들에게 테이레시아스와 아이아이에 섬의 키르케의
예언을 말하고자 하오. 그녀는 인간을 기쁘게 해주는
헬리오스의 섬을 피하라고 내게 신신당부했소. 그곳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소.
그러니 검은 배를 옆으로 몰아 저 섬을 지나치도록 합시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맥이 풀렸소.
그때 에우륄로코스*가 대뜸 이렇게 적의에 찬 말로 대답했소. [* 오뒷세우스의 부하, 이인자]
무정하시도다. 오뒷세우스여! 그대는 힘이 절륜하고 그대의 사지는
지칠줄 모르오. 그대는 정말이지 온통 무쇠로 만들어져 있소이다.
그래서 그대는 피로와 졸음에 지쳐있는 그대의 전우들이 육지를
밟는 것조차도 허용하시지 않는구려! 저기 저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우리는 맛있는 저녁을 준비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오!
그대는 오히려 지칠대로 지친 우리더러 섬을 지나쳐
날랜 밤을 헤치며 안갯빛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라고
명령하시는구려. 배들에게 파멸을 안겨주는 역풍들은 밤에
생기는 법이오! 남풍이든, 세차게 불어대는 서풍이든,
갑자기 폭충이 불어온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갑작스런
파멸에서 벗어난단 말이오? […]
그러니 지금은 어두운 밤의 명령에 따르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날랜 배 옆에 머물며 저녁 준비를 할 것이고
아침이 되면 넓은 바다로 나갈 것이오.”
에우륄로코스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전우들도 이에 찬동했소.
그러자 나는 어떤 신이 재앙을 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향해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했소.
“에우륄로코스여! 나는 혼자이니 그대들이 나를 강요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니 자, 그대들은 모두 내게 엄숙하게 엄숙하게
맹세헤주시오. 우리가 소 떼나 큰 양 떼를 발견하더라도
아무도 사악하고 못된 짓을 저질러 소나 작은 가축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이오. 대신 그대들은
불사의 요정 키르케가 준 음식을 얌전히 먹도록 하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즉시 내가 명령한 대로
하겠다고 맹세했소. 그들이 맹세를 모두 마치자
우리는 잘 만든 배를 속이 빈 포구 안 달콤한 샘물
근처에 세웠소. 그러자 전우들이 배에서 내려
능숙하게 저녁 준비를 했소.
토론하기
(1) 당신이 오뒷세우스라면 에우륄로코스와 부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예언자와 여신의 충고에 따라 당신의 주장을 밀고 나갈 것인가? 만일 후자라면, 당신은 에우륄로코스의 반대 주장을 어떤 내용과 논리로 반박할 것인가?
해설읽기
오뒷세우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이타케의 왕으로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하자 12척의 배와 수백 명의 전우들을 이끌고 그리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강력한 힘과 무력을 자랑하는 대개의 신화 속 영웅들과 달리, 오뒷세우스는 영리하고 지략이 뛰어난 영웅으로 묘사된다. 결국 그는 난공불락이었던 트로이아의 성 안으로 특공대를 태운 목마를 집어넣는 데 성공함으로써 1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하지만 그의 귀향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배와 병사들을 거의 다 잃고 10년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무수한 위험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은 것은 배 한 척과 약 20여 명의 충성스러운 부하들, 이제 오뒷세우스는 마지막 한 고비만 넘기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태양신 헬리오스가 관장하는 트리나키아라는 섬을 지나치는 것이다. 오뒷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을 앞두고 그를 도와줬던 여신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당신은 트리나키아 섬에 들르게 될 것이다. 거기서는 절대로 헬리오스의 소와 가축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아무 일 없이 섬을 나올 경우 당신은 부하들과 함께 무사히 귀향에 성공할 것이다. 반면에 만일 헬리오스의 소와 가축을 잡아먹을 경우, 당신은 배와 부하들을 모두 잃고, 당신 혼자만 그것도 가까스로 귀향할 것이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운명으로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사한 귀향과 고통스러운 귀향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당연히 오뒷세우스는 –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 무사하고 편안한 귀향을 원할 것이다. 게다가 그 방법 또한 특별히 복잡하거나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남의 물건(여기서는 태양신의 가축)에 손만 대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위험의 원인을 아예 피해가자고 마음먹는다. 헬리오스의 가축이 있는 트리나키아섬을 아예 들르지 않고 항해를 하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이러한 생각을 부하들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여신과 예언자가 번갈아가며 경고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즉각 부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특히 그의 부하이자 부대의 이인자인 에우륄로코스 적극적으로 반대 주장을 하는데, 위의 인용문은 그의 반론 내용이다. 그의 반론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오뒷세우스는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아 쉬지 않고 항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둘째 밤에는 역풍이 불기에 밤에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셋째, 우리는 섬에 오래 머물 것이 아니다. 하루밤만 보내고 아침에 일찍 출발할 것이다. 트로이아를 함락시킬 만큼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도 에우륄로코스의 주장은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에우륄로코스의 주장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법정이나 민회에서 즐겨 사용하던 설득의 기술이 잘 나타나 있다.
멀리 보이는 운명, 가까이 있는 욕구
먼저 에우륄로코스의 첫째 주장인 ‘당신’은 힘이 세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라는 발언은 오뒷세우스를 부하들과 분리시키고, 그를 다수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 비록 오뒷세우스는 왕이자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을 다스리고 명령을 내리는 위치이지만, 부하들로부터 온전히 고립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특히 큰 배를 몰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하기에, 오뒷세우스 혼자서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둘째, 이미 밤이 되어 야간 항해는 위험하다는 주장은 그리스인들의 상식에 호소하는 힘을 갖는다. 고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노동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항해는 해가 떠있는 동안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스의 배들은 주로 노와 돛을 동력으로 사용하였으며, 가까운 거리는 노를 저어갔고, 먼 거리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 항해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과학 기술로는 배가 큰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와 다름없었다. 지중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큰 바다가 아닌, 다닥다닥 붙어있는 섬과 섬을 건너듯이 항해해야 했으며, 그러한 항해 역시 주로 해가 떠있는 동안에 해안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반면에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부근의 항구나 포구에 배를 정박시키고 휴식을 취하며 이튿날 해가 뜰 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항해 상식을 감안할 때, 항해를 계속하자는 오뒷세우스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을 기대할 수 없다. 즉 오뒷세우스가 내세우는 예언자와 여신의 경고는 오랜 기간 항해를 해온 뱃사람들의 상식적인 믿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에우륄로코스는 부하들은 물론 오뒷세우스마저도 흔들리게 만드는 제안을 하는데, 그것은 ‘단 하룻밤만 머물고 떠나면 된다’는 주장이다. 배에 있는 식량으로 저녁을 지어 먹고, 하룻밤 휴식을 취한 뒤에 내일 새벽 일찍 떠나면 되니, 헬리오스의 가축을 건드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는 확신 섞인 반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에우륄로코스의 주장에는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다. 그가 오뒷세우스를 비판하는 근거는 모두 상식에 부합하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지친 상태에서의 항해는 위험하고 더욱이 그것이 야간 항해라면 자살행위와 다름없으며, 우린 그저 단 하룻밤만 쉬고 아침 일찍 떠나면 된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인간이 이 주장에 반대할 수 있을까? 결국 천하의 오뒷세우스도 에우륄로코스에게 설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아무리 왕이고 강력한 영웅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배를 몰 수 없다. 더욱이 왕으로서 그는 단순히 명령권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이자 백성들을 보호하고 함께 고향으로 데려가야 한다. 결국 그는 선원들에게 헬리오스의 가축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요구한 뒤에 배를 섬에 정박시키도록 한다. 그러나 배가 섬에 정박한 순간, 이제 오뒷세우스의 운명을 가르는 신들의 테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선택지가 정해진 운명 앞에서 시련을 겪는 오뒷세우스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것은 멀리 보면 당연한 것 같은 삶의 목표가 언제나 가까이 놓여있는 여러 가지 유혹과 제약, 그리고 현실의 필요에 의해 흔들리고 꺾인다는 사실이다. 오뒷세우스는 헬리오스의 가축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안전하고 편안한 귀향이 보장된다는 것을 예언으로 들어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아예 헬리오스의 섬을 들르지 않고 지나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부하들의 반대로 꺾이고 만다. 더군다나 반대의 근거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한계 안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서 제기되는 인간적인 요구들로 인해, 멀리 상정한 목표와 계획이 위험해지는 역설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먼 미래를 바라보며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맞게 계획을 수립한다. 그것은 내집마련일 수도 있고, 원하는 직장에의 취업이나 사업에서의 성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획대로라면 언젠가 도달할 것만 같은 미래의 전망은 일상의 삶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요구들과 문제들 속에서 조금씩 흐려지고 불확실해지기도 한다. 오뒷세우스는 에우륄로코스와 부하들의 반대 주장에 승복하면서 예언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접었지만, 어쩌면 에우륄로코스와 부하들의 진짜 정체는 우리의 내면에 숨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현실에 안주하라고 유혹하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일지도 모른다.
키워드
예언, 운명, 의지, 인간
전후맥락
트로이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오뒷세우스는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10년째 귀향하지 못하고 온 세상을 떠돈다. 모험의 마지막 단계에서 오뒷세우스의 일행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섬 근처에 이른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를 도왔던 예언자와 요정은 그에게 섬에 머무는 동안 태양신의 가축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무사히 귀향할 것이나, 만일 가축을 잡아먹는다면 배와 동료를 모두 잃고 혈혈단신으로 힘겹게 귀향할 것이라고 경고한 적이 있다. 예언의 무서움을 상기한 오뒷세우스는 무사한 귀향을 위하여 동료들에게 섬에 들르지 말고 계속 항해를 이어가자고 설득하기로 마음 먹는다.
고전본문
[…」 우리는 곧 신의 나무랄 데 없는 섬에 도착했소.
그곳에는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이마가 넓은 훌륭한 [*휘페리온: 태양신을 말한다.]
소들이 있었고 힘센 작은 가축들도 많이 있었소.
그때 내가 검은 배를 타고 아직 바다 위에 있었음에도
축사에 갇힌 소 떼의 ‘음매’ 하고 우는 소리와 양떼의
‘매매’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소.
그러자 눈먼 예언자 테바이의 테이레시아스와 아이아이에 섬의 요정 키르케가 한 말이
내 마음에 떠올랐소. 그녀는 인간을 기쁘게 해주는
헬리오스의 섬을 피하라고 내개 신신당부했던 것이오.
그래서 나는 비통한 마음으로 전우들 사이에서 이렇게 말했소.
“전우들이여! 그안 고생 많았소. 하지만 내 말을 들어보시오!
나는 그대들에게 테이레시아스와 아이아이에 섬의 키르케의
예언을 말하고자 하오. 그녀는 인간을 기쁘게 해주는
헬리오스의 섬을 피하라고 내게 신신당부했소. 그곳에서
가장 끔찍한 재앙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소.
그러니 검은 배를 옆으로 몰아 저 섬을 지나치도록 합시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맥이 풀렸소.
그때 에우륄로코스*가 대뜸 이렇게 적의에 찬 말로 대답했소. [* 오뒷세우스의 부하, 이인자]
무정하시도다. 오뒷세우스여! 그대는 힘이 절륜하고 그대의 사지는
지칠줄 모르오. 그대는 정말이지 온통 무쇠로 만들어져 있소이다.
그래서 그대는 피로와 졸음에 지쳐있는 그대의 전우들이 육지를
밟는 것조차도 허용하시지 않는구려! 저기 저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우리는 맛있는 저녁을 준비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오!
그대는 오히려 지칠대로 지친 우리더러 섬을 지나쳐
날랜 밤을 헤치며 안갯빛 바다 위를 떠돌아다니라고
명령하시는구려. 배들에게 파멸을 안겨주는 역풍들은 밤에
생기는 법이오! 남풍이든, 세차게 불어대는 서풍이든,
갑자기 폭충이 불어온다면 우리는 대체 어떻게 갑작스런
파멸에서 벗어난단 말이오? […]
그러니 지금은 어두운 밤의 명령에 따르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날랜 배 옆에 머물며 저녁 준비를 할 것이고
아침이 되면 넓은 바다로 나갈 것이오.”
에우륄로코스가 이렇게 말하자 다른 전우들도 이에 찬동했소.
그러자 나는 어떤 신이 재앙을 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를 향해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했소.
“에우륄로코스여! 나는 혼자이니 그대들이 나를 강요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니 자, 그대들은 모두 내게 엄숙하게 엄숙하게
맹세헤주시오. 우리가 소 떼나 큰 양 떼를 발견하더라도
아무도 사악하고 못된 짓을 저질러 소나 작은 가축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이오. 대신 그대들은
불사의 요정 키르케가 준 음식을 얌전히 먹도록 하시오.”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즉시 내가 명령한 대로
하겠다고 맹세했소. 그들이 맹세를 모두 마치자
우리는 잘 만든 배를 속이 빈 포구 안 달콤한 샘물
근처에 세웠소. 그러자 전우들이 배에서 내려
능숙하게 저녁 준비를 했소.
토론하기
(1) 당신이 오뒷세우스라면 에우륄로코스와 부하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예언자와 여신의 충고에 따라 당신의 주장을 밀고 나갈 것인가? 만일 후자라면, 당신은 에우륄로코스의 반대 주장을 어떤 내용과 논리로 반박할 것인가?
해설읽기
오뒷세우스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인 이타케의 왕으로 트로이아 전쟁이 발발하자 12척의 배와 수백 명의 전우들을 이끌고 그리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강력한 힘과 무력을 자랑하는 대개의 신화 속 영웅들과 달리, 오뒷세우스는 영리하고 지략이 뛰어난 영웅으로 묘사된다. 결국 그는 난공불락이었던 트로이아의 성 안으로 특공대를 태운 목마를 집어넣는 데 성공함으로써 1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하지만 그의 귀향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배와 병사들을 거의 다 잃고 10년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무수한 위험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남은 것은 배 한 척과 약 20여 명의 충성스러운 부하들, 이제 오뒷세우스는 마지막 한 고비만 넘기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은 태양신 헬리오스가 관장하는 트리나키아라는 섬을 지나치는 것이다. 오뒷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을 앞두고 그를 도와줬던 여신과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당신은 트리나키아 섬에 들르게 될 것이다. 거기서는 절대로 헬리오스의 소와 가축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아무 일 없이 섬을 나올 경우 당신은 부하들과 함께 무사히 귀향에 성공할 것이다. 반면에 만일 헬리오스의 소와 가축을 잡아먹을 경우, 당신은 배와 부하들을 모두 잃고, 당신 혼자만 그것도 가까스로 귀향할 것이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운명으로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사한 귀향과 고통스러운 귀향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당연히 오뒷세우스는 –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 무사하고 편안한 귀향을 원할 것이다. 게다가 그 방법 또한 특별히 복잡하거나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남의 물건(여기서는 태양신의 가축)에 손만 대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위험의 원인을 아예 피해가자고 마음먹는다. 헬리오스의 가축이 있는 트리나키아섬을 아예 들르지 않고 항해를 하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오뒷세우스는 이러한 생각을 부하들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실 그것이 쉬운 일이라면 여신과 예언자가 번갈아가며 경고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즉각 부하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다. 특히 그의 부하이자 부대의 이인자인 에우륄로코스 적극적으로 반대 주장을 하는데, 위의 인용문은 그의 반론 내용이다. 그의 반론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오뒷세우스는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아 쉬지 않고 항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둘째 밤에는 역풍이 불기에 밤에 항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셋째, 우리는 섬에 오래 머물 것이 아니다. 하루밤만 보내고 아침에 일찍 출발할 것이다. 트로이아를 함락시킬 만큼 지략이 뛰어난 오뒷세우스도 에우륄로코스의 주장은 반박할 수 없었다. 사실 에우륄로코스의 주장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법정이나 민회에서 즐겨 사용하던 설득의 기술이 잘 나타나 있다.
멀리 보이는 운명, 가까이 있는 욕구
먼저 에우륄로코스의 첫째 주장인 ‘당신’은 힘이 세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라는 발언은 오뒷세우스를 부하들과 분리시키고, 그를 다수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다. 비록 오뒷세우스는 왕이자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을 다스리고 명령을 내리는 위치이지만, 부하들로부터 온전히 고립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특히 큰 배를 몰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하기에, 오뒷세우스 혼자서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둘째, 이미 밤이 되어 야간 항해는 위험하다는 주장은 그리스인들의 상식에 호소하는 힘을 갖는다. 고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노동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항해는 해가 떠있는 동안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스의 배들은 주로 노와 돛을 동력으로 사용하였으며, 가까운 거리는 노를 저어갔고, 먼 거리는 바람의 힘을 이용하 항해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과학 기술로는 배가 큰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와 다름없었다. 지중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큰 바다가 아닌, 다닥다닥 붙어있는 섬과 섬을 건너듯이 항해해야 했으며, 그러한 항해 역시 주로 해가 떠있는 동안에 해안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반면에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부근의 항구나 포구에 배를 정박시키고 휴식을 취하며 이튿날 해가 뜰 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러한 고대인들의 항해 상식을 감안할 때, 항해를 계속하자는 오뒷세우스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을 기대할 수 없다. 즉 오뒷세우스가 내세우는 예언자와 여신의 경고는 오랜 기간 항해를 해온 뱃사람들의 상식적인 믿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으로 에우륄로코스는 부하들은 물론 오뒷세우스마저도 흔들리게 만드는 제안을 하는데, 그것은 ‘단 하룻밤만 머물고 떠나면 된다’는 주장이다. 배에 있는 식량으로 저녁을 지어 먹고, 하룻밤 휴식을 취한 뒤에 내일 새벽 일찍 떠나면 되니, 헬리오스의 가축을 건드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는 확신 섞인 반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에우륄로코스의 주장에는 틀린 내용이 하나도 없다. 그가 오뒷세우스를 비판하는 근거는 모두 상식에 부합하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판단이다. 지친 상태에서의 항해는 위험하고 더욱이 그것이 야간 항해라면 자살행위와 다름없으며, 우린 그저 단 하룻밤만 쉬고 아침 일찍 떠나면 된다는 것이다. 과연 어떤 인간이 이 주장에 반대할 수 있을까? 결국 천하의 오뒷세우스도 에우륄로코스에게 설득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가 아무리 왕이고 강력한 영웅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배를 몰 수 없다. 더욱이 왕으로서 그는 단순히 명령권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이자 백성들을 보호하고 함께 고향으로 데려가야 한다. 결국 그는 선원들에게 헬리오스의 가축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요구한 뒤에 배를 섬에 정박시키도록 한다. 그러나 배가 섬에 정박한 순간, 이제 오뒷세우스의 운명을 가르는 신들의 테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선택지가 정해진 운명 앞에서 시련을 겪는 오뒷세우스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것은 멀리 보면 당연한 것 같은 삶의 목표가 언제나 가까이 놓여있는 여러 가지 유혹과 제약, 그리고 현실의 필요에 의해 흔들리고 꺾인다는 사실이다. 오뒷세우스는 헬리오스의 가축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안전하고 편안한 귀향이 보장된다는 것을 예언으로 들어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아예 헬리오스의 섬을 들르지 않고 지나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부하들의 반대로 꺾이고 만다. 더군다나 반대의 근거는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한계 안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서 제기되는 인간적인 요구들로 인해, 멀리 상정한 목표와 계획이 위험해지는 역설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먼 미래를 바라보며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맞게 계획을 수립한다. 그것은 내집마련일 수도 있고, 원하는 직장에의 취업이나 사업에서의 성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획대로라면 언젠가 도달할 것만 같은 미래의 전망은 일상의 삶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요구들과 문제들 속에서 조금씩 흐려지고 불확실해지기도 한다. 오뒷세우스는 에우륄로코스와 부하들의 반대 주장에 승복하면서 예언을 따르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접었지만, 어쩌면 에우륄로코스와 부하들의 진짜 정체는 우리의 내면에 숨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현실에 안주하라고 유혹하는 인간의 나약한 본성일지도 모른다.
키워드
예언, 운명, 의지,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