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는 국가와 국가의 대립에서부터, 작게는 공동체 내부에서 자행되는 부정의, 회사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들, 그리고 불합리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내 안에 일정한 분노를 발생시키고, 문제의 시정을 위한 행동이나 발언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구는 내가 처한 현실과 부딪히면서 두려움을 발생시키고 나를 망설이게 한다. 나에게 닥칠지도 모를 이 모든 나쁜 것들을 감수하고서 정의를 실현하려 할 때, 그때 나는 용기의 문제와 조우하게 된다. 이제 살펴볼 고대 그리스인들의 대화는 용기의 본질에 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라는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용기라는 덕목의 본성을 탐구한다. 먼저 적극적인 행동파인 라케스 장군은 용기가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적과 싸우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전쟁터에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다양한 위험에 직면하거나, 두려움이 발생하는 순간, 또는 고통과 쾌락의 앞에서도 용기라는 덕목을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동의하며 용기를 다시금 정의하려 한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라케스님, 그러면 당신께서도 용기에 대해 그렇게 말씀해 보시지요. 쾌락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방금 말했던 그 모든 것들 속에서도 동일하게 있는 그것이 무슨 힘이기에 용기라고 불리는지 말입니다.
라케스: 자, 그러면 그것은 ‘영혼의 일종의 인내’라고 나는 생각하오. 모든 경우에 나타나는 그 본성을 말해야 한다면 말이오.
소크라테스: 물론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제기된 질문에 대해 우리 스스로 대답하려면요. 자, 그런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적어도 당신께서 모든 인내를 다 용기라고는 생각하시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그렇게 추측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라케스님. 왜냐하면, 저는 당신께서 용기는 아주 훌륭한 것에 속한다고 생각하신다는 걸 대략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케스: 그래요, 가장 훌륭한 것들에 속하는 걸로 아셔도 좋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현명함을 동반한 인내가 아름답고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라케스: 물론이오.
소크라테스: 반면에 어리석음을 동반한 인내는 어떻습니까? 앞의 것과 반대로 해롭고 유해하지 않겠습니까?
라케스: 그렇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유해하고 해로운데도 그런 것을 훌륭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라케스: 당연히 안 되지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그럼 당신은 적어도 어리석은 인내가 용기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인내는 훌륭하지 않을 테니까요. 반면에 용기는 훌륭한 것이지요.
라케스: 당신 말이 맞소.
소크라테스: 그럼 당신 말에 따르면, 현명한 인내가 용기일 수 있겠네요.
라케스: 그런 것 같소.
토론하기
1. 혹시 ‘치킨 게임’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용기를 입증하기 위해 친구들과 두려움에 맞서는 내기를 벌여본 적이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2. ‘한 때는 용기라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어리석은 만용이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영혼의 인내로서의 용기
용기는 전쟁터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요구되는 덕목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을 수용한 라케스는 다시 새롭게 용기를 ‘영혼의 인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인내’로 옮긴 그리스어는 ‘카르테리아(karteria)’라는 말로서, 이 단어는 굳건하게 버티는 것 혹은 참을성을 의미한다. 즉 용기는 공포나 두려움에 맞서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버티는 것, 또는 고통이나 쾌락을 참고 견디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용기가 영혼의 인내라는 이번 정의는 앞서 라케스가 했던 첫 번째 주장, 즉 용기는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적과 맞서는 것’이라는 주장의 일반화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임전무퇴란 결국 전선에서 적들과 죽음의 공포에 맞서 굳세게 버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화를 통해서 영혼의 인내는 단지 전쟁 상황뿐만 아니라, 앞서 소크라테스가 열거했던 다른 모든 상황들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영혼의 인내는 용기를 정의하는 데 충분한 답변이 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의문: 어떤 인내가 필요한가?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의 답변을 일단 받아들인다. 하지만 라케스의 정의가 제대로 된 것인지는 여전히 검토가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인내라는 주장에 일단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왜냐하면 영혼이 보여주는 모든 인내와 참을성이 다 용기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 기준이란 ‘용기는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반문하겠지만, 이때 용기가 좋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좋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용기는 어떤 측면에서도 결코 나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덕의 기원과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용기는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들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우리가 ‘덕(德, vritue)’으로 번역하는 그리스어는 ‘아레테(aretē)’라는 말로서 이 단어는 사람, 동물, 혹은 물건의 탁월함(혹은 훌륭함)을 뜻한다. 이때의 탁월함은 관련된 대상의 본성과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함을 의미한다. 예컨대 개의 탁월함(아레테)은 집을 잘 지키는 것이다. 말(馬)의 탁월함은 잘 달리는 것이며, 물건인 칼의 탁월함은 잘 자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탁월함(아레테)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본성과 기능, 즉 인간다움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다움이란 잘 달리거나, 힘이 세서 잘 싸우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삶을 잘 꾸려나가는 것과 관련된다. 즉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목적의식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인 탁월함, 즉 덕은 바로 공동체에서 훌륭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 덕은 공동체에서 정의, 지혜, 절제, 경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용기 역시 이 덕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의 삶을 훌륭하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따져봤을 때, 덕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지, 결코 나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덕은 인간이 인간다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행복해지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학자들은 덕이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에 그치지 않고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인간은 덕을 갖추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데 덕만 있으면 되는지, 아니면 다른 것들도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지만, 덕이 좋은 것이라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용기가 덕의 하나라면, 용기 역시 좋은 것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는 아주 훌륭한 것에 속하지 않냐’라고 묻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인 것이다. 그리고 라케스 역시 용기는 그냥 훌륭한 것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라고 단언하며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인내는 어떨까?
용기는 현명함이 깃든 인내?
용기가 좋은 것이라면, 인내 역시 좋은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라케스는 용기를 일종의 영혼의 인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기가 절대적으로 좋은 것과 달리, 인내는 약간 미묘하다. 왜냐하면 참고 견디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정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뒤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며 노력을 한다면, 그러한 인내는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전혀 실현될 수 없는 것을 앞뒤 가리지 않고 정한 뒤에 미련하게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인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어리석은 지휘관이 질 게 뻔한 전투로 병사들을 몰아넣고서 굳세게 버틸 것을 명령한다면, 이때 병사들의 인내는 좋은 것이기는커녕, 그들 자신과 부대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는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유해하고 해로운 것은 나쁜 결과를 산출하기에 결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인내 중에서 지혜가 결여된 어리석은 인내는 나쁜 결과를 산출한다. 따라서 아무런 헤아림도 없이 무턱대고 참고 버티는 것은 용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용기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현명함과 지혜가 깃든 인내뿐이다. 그렇다면 용기를 영혼의 인내라고 정의했을 때, 이것이 용기의 성질(즉 좋은 것)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지혜로운 인내’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적은 용기를 무모함이나 만용과 구별하라는 경고인 것처럼 보인다. 무모함이나 만용 모두 자신의 능력이나 현실에 대한 헤아림 없이 참고 버티는 측면이 있다. 이것들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타인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종종 자기 자신에게 커다란 피해와 불이익을 발생시키곤 한다. 종종 우리가 ‘용감한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 사실은 아무런 숙고나 헤아림도 없이, 그저 아집과 자존심만으로 고집스럽게 버티면서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용기의 본성에 관한 라케스의 답변은 처음에 ‘전선에서 싸우며 물러서지 않는 것’에서 ‘영혼의 인내’로 바뀌었고, 다시 이번에는 ‘영혼의 현명한 인내’로 수정되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용기라는 덕목에 관한 라케스의 생각이 점차 발전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듯 대화자의 지적인 각성과 진보가 바로 소크라테스식 대화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속에서 대화자는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고민하게 되고, 그 속에서 영혼의 각성과 지적인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라케스와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명함이 깃든 인내’가 과연 용기에 대한 적절한 정의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몇 가지 검토할 내용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만용, 비겁, 어리석음, 용기, 인내, 현명함(지혜)
전후맥락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라는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용기라는 덕목의 본성을 탐구한다. 먼저 적극적인 행동파인 라케스 장군은 용기가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적과 싸우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전쟁터에서만 발휘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다양한 위험에 직면하거나, 두려움이 발생하는 순간, 또는 고통과 쾌락의 앞에서도 용기라는 덕목을 찾아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동의하며 용기를 다시금 정의하려 한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라케스님, 그러면 당신께서도 용기에 대해 그렇게 말씀해 보시지요. 쾌락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방금 말했던 그 모든 것들 속에서도 동일하게 있는 그것이 무슨 힘이기에 용기라고 불리는지 말입니다.
라케스: 자, 그러면 그것은 ‘영혼의 일종의 인내’라고 나는 생각하오. 모든 경우에 나타나는 그 본성을 말해야 한다면 말이오.
소크라테스: 물론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적어도 제기된 질문에 대해 우리 스스로 대답하려면요. 자, 그런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적어도 당신께서 모든 인내를 다 용기라고는 생각하시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그렇게 추측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라케스님. 왜냐하면, 저는 당신께서 용기는 아주 훌륭한 것에 속한다고 생각하신다는 걸 대략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케스: 그래요, 가장 훌륭한 것들에 속하는 걸로 아셔도 좋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현명함을 동반한 인내가 아름답고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라케스: 물론이오.
소크라테스: 반면에 어리석음을 동반한 인내는 어떻습니까? 앞의 것과 반대로 해롭고 유해하지 않겠습니까?
라케스: 그렇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유해하고 해로운데도 그런 것을 훌륭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라케스: 당연히 안 되지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그럼 당신은 적어도 어리석은 인내가 용기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런 인내는 훌륭하지 않을 테니까요. 반면에 용기는 훌륭한 것이지요.
라케스: 당신 말이 맞소.
소크라테스: 그럼 당신 말에 따르면, 현명한 인내가 용기일 수 있겠네요.
라케스: 그런 것 같소.
토론하기
1. 혹시 ‘치킨 게임’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용기를 입증하기 위해 친구들과 두려움에 맞서는 내기를 벌여본 적이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2. ‘한 때는 용기라고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어리석은 만용이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영혼의 인내로서의 용기
용기는 전쟁터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요구되는 덕목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을 수용한 라케스는 다시 새롭게 용기를 ‘영혼의 인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인내’로 옮긴 그리스어는 ‘카르테리아(karteria)’라는 말로서, 이 단어는 굳건하게 버티는 것 혹은 참을성을 의미한다. 즉 용기는 공포나 두려움에 맞서 흔들리지 않고 굳세게 버티는 것, 또는 고통이나 쾌락을 참고 견디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용기가 영혼의 인내라는 이번 정의는 앞서 라케스가 했던 첫 번째 주장, 즉 용기는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적과 맞서는 것’이라는 주장의 일반화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임전무퇴란 결국 전선에서 적들과 죽음의 공포에 맞서 굳세게 버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화를 통해서 영혼의 인내는 단지 전쟁 상황뿐만 아니라, 앞서 소크라테스가 열거했던 다른 모든 상황들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영혼의 인내는 용기를 정의하는 데 충분한 답변이 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의문: 어떤 인내가 필요한가?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의 답변을 일단 받아들인다. 하지만 라케스의 정의가 제대로 된 것인지는 여전히 검토가 필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용기가 인내라는 주장에 일단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왜냐하면 영혼이 보여주는 모든 인내와 참을성이 다 용기인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데, 그 기준이란 ‘용기는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야?’라고 반문하겠지만, 이때 용기가 좋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좋다는 뜻이다. 달리 말해서 용기는 어떤 측면에서도 결코 나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덕의 기원과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용기는 인간이 가져야 할 덕목들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우리가 ‘덕(德, vritue)’으로 번역하는 그리스어는 ‘아레테(aretē)’라는 말로서 이 단어는 사람, 동물, 혹은 물건의 탁월함(혹은 훌륭함)을 뜻한다. 이때의 탁월함은 관련된 대상의 본성과 기능을 가장 잘 발휘함을 의미한다. 예컨대 개의 탁월함(아레테)은 집을 잘 지키는 것이다. 말(馬)의 탁월함은 잘 달리는 것이며, 물건인 칼의 탁월함은 잘 자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탁월함(아레테)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인간의 고유한 본성과 기능, 즉 인간다움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다움이란 잘 달리거나, 힘이 세서 잘 싸우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삶을 잘 꾸려나가는 것과 관련된다. 즉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목적의식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인 탁월함, 즉 덕은 바로 공동체에서 훌륭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 덕은 공동체에서 정의, 지혜, 절제, 경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용기 역시 이 덕들 가운데 하나로서 인간의 삶을 훌륭하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따져봤을 때, 덕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지, 결코 나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덕은 인간이 인간다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행복해지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학자들은 덕이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에 그치지 않고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인간은 덕을 갖추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데 덕만 있으면 되는지, 아니면 다른 것들도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지만, 덕이 좋은 것이라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용기가 덕의 하나라면, 용기 역시 좋은 것일 수밖에 없다. 소크라테스가 ‘용기는 아주 훌륭한 것에 속하지 않냐’라고 묻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인 것이다. 그리고 라케스 역시 용기는 그냥 훌륭한 것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라고 단언하며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인내는 어떨까?
용기는 현명함이 깃든 인내?
용기가 좋은 것이라면, 인내 역시 좋은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라케스는 용기를 일종의 영혼의 인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기가 절대적으로 좋은 것과 달리, 인내는 약간 미묘하다. 왜냐하면 참고 견디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누군가가 실현 가능한 목표를 정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뒤에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며 노력을 한다면, 그러한 인내는 좋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전혀 실현될 수 없는 것을 앞뒤 가리지 않고 정한 뒤에 미련하게 붙들고 늘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인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에 어리석은 지휘관이 질 게 뻔한 전투로 병사들을 몰아넣고서 굳세게 버틸 것을 명령한다면, 이때 병사들의 인내는 좋은 것이기는커녕, 그들 자신과 부대 전체를 파멸로 몰아넣는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유해하고 해로운 것은 나쁜 결과를 산출하기에 결코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인내 중에서 지혜가 결여된 어리석은 인내는 나쁜 결과를 산출한다. 따라서 아무런 헤아림도 없이 무턱대고 참고 버티는 것은 용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용기는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현명함과 지혜가 깃든 인내뿐이다. 그렇다면 용기를 영혼의 인내라고 정의했을 때, 이것이 용기의 성질(즉 좋은 것)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지혜로운 인내’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적은 용기를 무모함이나 만용과 구별하라는 경고인 것처럼 보인다. 무모함이나 만용 모두 자신의 능력이나 현실에 대한 헤아림 없이 참고 버티는 측면이 있다. 이것들은 자신을 과시하거나 타인보다 우위에 서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종종 자기 자신에게 커다란 피해와 불이익을 발생시키곤 한다. 종종 우리가 ‘용감한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들 가운데, 사실은 아무런 숙고나 헤아림도 없이, 그저 아집과 자존심만으로 고집스럽게 버티면서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도 있겠다.
용기의 본성에 관한 라케스의 답변은 처음에 ‘전선에서 싸우며 물러서지 않는 것’에서 ‘영혼의 인내’로 바뀌었고, 다시 이번에는 ‘영혼의 현명한 인내’로 수정되었다. 이렇듯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서 용기라는 덕목에 관한 라케스의 생각이 점차 발전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렇듯 대화자의 지적인 각성과 진보가 바로 소크라테스식 대화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는 속에서 대화자는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고민하게 되고, 그 속에서 영혼의 각성과 지적인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라케스와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명함이 깃든 인내’가 과연 용기에 대한 적절한 정의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몇 가지 검토할 내용이 남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