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는 국가와 국가의 대립에서부터, 작게는 공동체 내부에서 자행되는 부정의, 회사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들, 그리고 불합리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내 안에 일정한 분노를 발생시키고, 문제의 시정을 위한 행동이나 발언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구는 내가 처한 현실과 부딪히면서 두려움을 발생시키고 나를 망설이게 한다. 나에게 닥칠지도 모를 이 모든 나쁜 것들을 감수하고서 정의를 실현하려 할 때, 그때 나는 용기의 문제와 조우하게 된다. 이제 살펴볼 고대 그리스인들의 대화는 용기의 본질에 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라는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용기라는 덕목의 본성을 탐구한다. 먼저 적극적인 행동파인 라케스 장군은 용기가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적과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전쟁 이외에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용기라는 덕목이 요구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기를 영혼의 굳센 인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지혜가 결여된 인내는 어리석은 아집과 만용에 다름아니다. 그러자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따라 용기는 영혼의 지헤로운 인내일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탐구를 이어간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그럼 봅시다. 용기는 무엇과 관련하여 현명한 인내인가요? 크든 작든 모든 것과 관련해서인가요? 가령 어떤 자가 지금 돈을 지출해야 더 많이 벌 거라는 점을 알고서 현명하게 (아까워함을) 꾹 참고서 돈을 지출한다면, 당신은 그런 살마을 용감한 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라케스: 맹세코 결코 아니오!
소크라테스: 그럼 가령 어떤 의사가 있다고 하죠. 그의 아들이나 다른 누군가가 폐렴에 걸린 상태로 그에게 마실 거나 먹을 거를 달라고 요구할 때, 그가 줄 수 없다며 굽히지 않고 버틴다면, 의사는 용감한 사람인가요?
라케스: 그런 것도 결코 용기가 아니오.
소크라테스: 그러면 전선에서 버티며 싸우려는 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현명하게 헤아림으로써, 즉 다른 이들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요, 자기가 싸우려는 적들은 수도 적고 변변치 않으며, 게다가 자기가 상대보다 더 많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헤아리는 가운데, 그렇게 현명함과 대비를 갖추고서 버틴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를 더 용감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상대방 진영에서 버티려는 적을 더 용감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라케스: 상대편 진영에 있는 적이 더 용감하다고 나는 생각하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하지만 상대편의 인내가 그자의 인내보다 더 어리석은 것 아닌가요?
라케스: 당신 말이 맞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당신은 기마술의 지식을 갖추고서 기마전에서 버티는 자 역시 그런 지식 없이 버티는 자보다 덜 용감하다고 말씀하시겠군요?
라케스: 나로서는 그리 생각되오. […]
소크라테스: 그러면 우물에 들어가 잠수하는 것은 어떤가요?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이런 일이나 이와 비슷한 다른 일에서 버티려는 자들에 대해서도, 당신은 이들이 능력이 뛰어난 자들보다 더 용감하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라케스: 누군들 달리 뭐라 말할 수 있겠소,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 그렇지만 라케스, 그런 사람들은 말이에요, 기술을 갖고서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정말 더 어리석게 버티며 모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라케스: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어리석은 만용과 인내는 우리에게 수치스럽고 해로울 뿐이라고 앞에서 보지 않았나요?
라케스: 물론 그랬소.
소크라테스: 반면에 용기는 훌륭한 것이라는 데 우리가 동의했고요.
라케스: 동의했지요.
소크라테스: 그러나 이제는 다시 거꾸로 우리가 이 수치스러운 것이, 즉 어리석은 인내가 용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네요.
라케스: 그러는 것 같네요.
토론하기
1. 위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모든 용기가 현명한 인내지만, 모든 현명한 인내가 용기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2. 전투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 혹은 죽음이 임박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싸우려는 군인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과연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용기 탐구의 과정: 임전무퇴에서 영혼의 굳셈을 거쳐 영혼의 현명한 인내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의 라케스를 읽다 보면, 용기라는 덕목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애초에 라케스 장군은 용기를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용기의 정의라기보다는 용기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라는 덕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일종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쟁터보다 용기를 더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따라 이 모범 사례를 일반화함으로써 용기를 죽음의 공포나 두려움, 고통이나 쾌락 등에 맞서 참고 버티는 힘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용기는 무턱대고 버티는 무모함이나 만용과는 거리가 멀다. 용기는 좋은 것이지만, 무모함과 만용은 좋기는커녕 오히려 커다란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고 버티는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에다 지혜가 더해져야 한다. 라케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군말 없이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라케스는 ‘현명한 인내’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저 ‘좋은 게 좋다’라고 보아, 용기에 좋은 말만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이를 검증하고자 한다.
지혜롭게 버티지만 굳이 용감할 필요는 없는 사례들
먼저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투자자와 현명한 의사의 예를 든다. 어떤 투자자가 장래가 유망한 사업 분야를 내다보고서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끈기 있게 투자를 지속한다고 가정해보자.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 투자자는 현명하게 버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투자자를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까? 라케스는 그런 투자자는 결코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이번에는 어떤 현명한 의사가 환자의 건강한 해로운 몇몇 음식을 금지시켰다고 해보자. 환자가 참지 못하고 의사에게 해당 음식을 먹게 해달라고 요구하더라도, 의사는 환자의 건강을 위하여 자신의 처방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거부한다면, 그 의사는 용감한 사람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라케스는 의사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적어도 소크라테스가 든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영혼이 현명하게 버티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두 사례 모두 용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단지 ‘지혜로운 인내’만으로는 용기를 정의하기에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모든 용기는 지혜로운 인내이다. 하지만 모든 지혜로운 인내가 용기인 것은 아닌 셈이다. 무엇인가가 더 필요해 보인다.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의 버티기
이번에는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들었던 예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거론한다. 그는 먼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의 예를 든다. 그런데 이 군인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적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즉 자기편이 적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무기와 장비에서도 압도하며, 게다가 좋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지혜롭게 헤아리고서 버티는 군인이 더 용감할까, 아니면 병력과 무기, 주둔지 등 모든 측면에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지키고 있는 적군이 더 용감할까? 이 질문에 라케스는 적이 더 용감하다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계속 제시한다. 기마술에 대한 지식 없이 버티는 기마병, 수영할 줄도 모르면서 우물에 들어가는 사람 등, 한 마디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 – 아마도 이것은 지혜의 다른 말일 것이다 – 없이 위험에 맞서 인내하는 자들과 지혜롭게 버티는 자들 중 누가 용감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케스는 불리한 상태로 버티는 자들이 더 용감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러한 인내는 모두 현명함이 결여된 것이며, 그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좋지 않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용기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용기는 좋은 것이라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따라 용기가 영혼의 지혜로운 인내라는 데 동의했지만, 막상 예를 들어서 검증해본 결과, 앞서 동의한 용기의 정의와 반대되는 사례들을 용감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케스가 실패한 까닭
그렇다면 라케스는 왜 앞의 정의를 끝까지 고수하지 못했을까?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사례들 중에서 라케스의 답변을 망설이게끔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들었던 투자자와 의사의 사례, 그리고 뒤에서 들었던 중무장 보병과 기마병, 그리고 우물에 뛰어든 사람의 사례 등은 모두 ‘현명하게 인내하는 사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들을 용기라고 부르기에는 한 가지 부족한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을 야기하는 것, 예컨대 죽음이나 고통 등의 위험을 들 수 있다. 즉 용기라는 덕목은 안전하고 편안한 상황에서는 발휘되지 않는다. 반대로 용기는 자칫 목숨을 잃는다거나 커다란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위험한 상황에서 발휘되거나 요구된다. 그러한 위험한 상황은 인간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키는데, 인간은 용기를 통해서 그런 공포와 두려움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아마도 라케스는 모든 것을 이미 계산한 뒤에 안전한 상태에서 현명하게 버티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맞서 버티는 사람을 더 용감하다고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무모함과 만용에 의한 버티기는 용기가 아니다. 반대로 용기는 지혜로운 인내라는 데 동의했지만, 안전하고 상태에서 지혜롭게 인내하는 것 역시 뭔가 용기에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용기는 무엇일까?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요기의 본성이 가깝게 다가온 것 같기는 하다. 현명한 인내에 위험이라는 상황 요소를 덧붙여보면 어떨까? 하지만 아쉽게도 라케스의 답변은 여기까지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속에서 상당히 답변을 진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라케스는 더 이상 용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며 탐구의 실패를 고백한다. 그리고 용기에 관한 나머지 탐구는 그의 또 다른 동료인 니키아스에게로, 그리고 이 대화편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키워드
만용, 비겁, 어리석음, 용기, 인내, 현명함(지혜)
전후맥락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라는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용기라는 덕목의 본성을 탐구한다. 먼저 적극적인 행동파인 라케스 장군은 용기가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적과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통해 전쟁 이외에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용기라는 덕목이 요구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용기를 영혼의 굳센 인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지혜가 결여된 인내는 어리석은 아집과 만용에 다름아니다. 그러자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따라 용기는 영혼의 지헤로운 인내일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만족하지 않고 계속 탐구를 이어간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그럼 봅시다. 용기는 무엇과 관련하여 현명한 인내인가요? 크든 작든 모든 것과 관련해서인가요? 가령 어떤 자가 지금 돈을 지출해야 더 많이 벌 거라는 점을 알고서 현명하게 (아까워함을) 꾹 참고서 돈을 지출한다면, 당신은 그런 살마을 용감한 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라케스: 맹세코 결코 아니오!
소크라테스: 그럼 가령 어떤 의사가 있다고 하죠. 그의 아들이나 다른 누군가가 폐렴에 걸린 상태로 그에게 마실 거나 먹을 거를 달라고 요구할 때, 그가 줄 수 없다며 굽히지 않고 버틴다면, 의사는 용감한 사람인가요?
라케스: 그런 것도 결코 용기가 아니오.
소크라테스: 그러면 전선에서 버티며 싸우려는 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가 현명하게 헤아림으로써, 즉 다른 이들이 자기를 도와줄 것이요, 자기가 싸우려는 적들은 수도 적고 변변치 않으며, 게다가 자기가 상대보다 더 많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헤아리는 가운데, 그렇게 현명함과 대비를 갖추고서 버틴다고 한다면, 당신은 그를 더 용감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상대방 진영에서 버티려는 적을 더 용감하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라케스: 상대편 진영에 있는 적이 더 용감하다고 나는 생각하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하지만 상대편의 인내가 그자의 인내보다 더 어리석은 것 아닌가요?
라케스: 당신 말이 맞소.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당신은 기마술의 지식을 갖추고서 기마전에서 버티는 자 역시 그런 지식 없이 버티는 자보다 덜 용감하다고 말씀하시겠군요?
라케스: 나로서는 그리 생각되오. […]
소크라테스: 그러면 우물에 들어가 잠수하는 것은 어떤가요?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데도 이런 일이나 이와 비슷한 다른 일에서 버티려는 자들에 대해서도, 당신은 이들이 능력이 뛰어난 자들보다 더 용감하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라케스: 누군들 달리 뭐라 말할 수 있겠소,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 그렇지만 라케스, 그런 사람들은 말이에요, 기술을 갖고서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정말 더 어리석게 버티며 모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라케스: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어리석은 만용과 인내는 우리에게 수치스럽고 해로울 뿐이라고 앞에서 보지 않았나요?
라케스: 물론 그랬소.
소크라테스: 반면에 용기는 훌륭한 것이라는 데 우리가 동의했고요.
라케스: 동의했지요.
소크라테스: 그러나 이제는 다시 거꾸로 우리가 이 수치스러운 것이, 즉 어리석은 인내가 용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네요.
라케스: 그러는 것 같네요.
토론하기
1. 위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모든 용기가 현명한 인내지만, 모든 현명한 인내가 용기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2. 전투 상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 혹은 죽음이 임박해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싸우려는 군인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과연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용기 탐구의 과정: 임전무퇴에서 영혼의 굳셈을 거쳐 영혼의 현명한 인내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의 라케스를 읽다 보면, 용기라는 덕목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애초에 라케스 장군은 용기를 전선에서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용기의 정의라기보다는 용기의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라는 덕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일종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전쟁터보다 용기를 더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따라 이 모범 사례를 일반화함으로써 용기를 죽음의 공포나 두려움, 고통이나 쾌락 등에 맞서 참고 버티는 힘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용기는 무턱대고 버티는 무모함이나 만용과는 거리가 멀다. 용기는 좋은 것이지만, 무모함과 만용은 좋기는커녕 오히려 커다란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고 버티는 것이 좋은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에다 지혜가 더해져야 한다. 라케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군말 없이 동의한다. 하지만 과연 라케스는 ‘현명한 인내’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저 ‘좋은 게 좋다’라고 보아, 용기에 좋은 말만 갖다 붙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는 이를 검증하고자 한다.
지혜롭게 버티지만 굳이 용감할 필요는 없는 사례들
먼저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투자자와 현명한 의사의 예를 든다. 어떤 투자자가 장래가 유망한 사업 분야를 내다보고서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끈기 있게 투자를 지속한다고 가정해보자.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 투자자는 현명하게 버티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투자자를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까? 라케스는 그런 투자자는 결코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이번에는 어떤 현명한 의사가 환자의 건강한 해로운 몇몇 음식을 금지시켰다고 해보자. 환자가 참지 못하고 의사에게 해당 음식을 먹게 해달라고 요구하더라도, 의사는 환자의 건강을 위하여 자신의 처방을 굽히지 않고 꿋꿋하게 거부한다면, 그 의사는 용감한 사람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도 라케스는 의사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무엇이 문제일까? 적어도 소크라테스가 든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영혼이 현명하게 버티는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두 사례 모두 용기와 어울리지 않는다면, 단지 ‘지혜로운 인내’만으로는 용기를 정의하기에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모든 용기는 지혜로운 인내이다. 하지만 모든 지혜로운 인내가 용기인 것은 아닌 셈이다. 무엇인가가 더 필요해 보인다.
안전이 확보된 상황에서의 버티기
이번에는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들었던 예들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다시 거론한다. 그는 먼저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의 예를 든다. 그런데 이 군인은 모든 면에서 자기가 적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즉 자기편이 적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무기와 장비에서도 압도하며, 게다가 좋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지혜롭게 헤아리고서 버티는 군인이 더 용감할까, 아니면 병력과 무기, 주둔지 등 모든 측면에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지키고 있는 적군이 더 용감할까? 이 질문에 라케스는 적이 더 용감하다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계속 제시한다. 기마술에 대한 지식 없이 버티는 기마병, 수영할 줄도 모르면서 우물에 들어가는 사람 등, 한 마디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 – 아마도 이것은 지혜의 다른 말일 것이다 – 없이 위험에 맞서 인내하는 자들과 지혜롭게 버티는 자들 중 누가 용감하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케스는 불리한 상태로 버티는 자들이 더 용감하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러한 인내는 모두 현명함이 결여된 것이며, 그 결과는 결코 좋을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좋지 않은 결과를 산출하는 것은 용기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용기는 좋은 것이라는 데 동의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라케스는 소크라테스의 충고에 따라 용기가 영혼의 지혜로운 인내라는 데 동의했지만, 막상 예를 들어서 검증해본 결과, 앞서 동의한 용기의 정의와 반대되는 사례들을 용감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라케스가 실패한 까닭
그렇다면 라케스는 왜 앞의 정의를 끝까지 고수하지 못했을까?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사례들 중에서 라케스의 답변을 망설이게끔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크라테스가 앞에서 들었던 투자자와 의사의 사례, 그리고 뒤에서 들었던 중무장 보병과 기마병, 그리고 우물에 뛰어든 사람의 사례 등은 모두 ‘현명하게 인내하는 사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들을 용기라고 부르기에는 한 가지 부족한 요소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을 야기하는 것, 예컨대 죽음이나 고통 등의 위험을 들 수 있다. 즉 용기라는 덕목은 안전하고 편안한 상황에서는 발휘되지 않는다. 반대로 용기는 자칫 목숨을 잃는다거나 커다란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위험한 상황에서 발휘되거나 요구된다. 그러한 위험한 상황은 인간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키는데, 인간은 용기를 통해서 그런 공포와 두려움에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했을 때, 아마도 라케스는 모든 것을 이미 계산한 뒤에 안전한 상태에서 현명하게 버티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에 맞서 버티는 사람을 더 용감하다고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자, 그렇다면, 무모함과 만용에 의한 버티기는 용기가 아니다. 반대로 용기는 지혜로운 인내라는 데 동의했지만, 안전하고 상태에서 지혜롭게 인내하는 것 역시 뭔가 용기에 잘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다.
자,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용기는 무엇일까? 대화를 통해 어느 정도 요기의 본성이 가깝게 다가온 것 같기는 하다. 현명한 인내에 위험이라는 상황 요소를 덧붙여보면 어떨까? 하지만 아쉽게도 라케스의 답변은 여기까지다. 소크라테스와의 대화 속에서 상당히 답변을 진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라케스는 더 이상 용기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며 탐구의 실패를 고백한다. 그리고 용기에 관한 나머지 탐구는 그의 또 다른 동료인 니키아스에게로, 그리고 이 대화편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