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는 국가와 국가의 대립에서부터, 작게는 공동체 내부에서 자행되는 부정의, 회사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들, 그리고 불합리한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살아가면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내 안에 일정한 분노를 발생시키고, 문제의 시정을 위한 행동이나 발언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를 실현하려는 욕구는 내가 처한 현실과 부딪히면서 두려움을 발생시키고 나를 망설이게 한다. 나에게 닥칠지도 모를 이 모든 나쁜 것들을 감수하고서 정의를 실현하려 할 때, 그때 나는 용기의 문제와 조우하게 된다. 이제 살펴볼 고대 그리스인들의 대화는 용기의 본질에 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라는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용기라는 덕목의 본성을 탐구한다. 먼저 적극적인 행동파인 라케스 장군은 용기가 두려움과 고통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참고 버티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라케스의 규정만으로는 용기와 만용을 구별할 수가 없다. 라케스의 뒤를 이어 신중하며 철학적 토론에 익숙한 니키아스 장군이 대화에 참여하는데, 그는 용기가 좋은 것이라면 지혜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고전본문
니키아스: 자, 소크라테스, 나는 아까부터 두 분께서 용기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소. 나는 이미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당신이 잘 말씀하셨던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두 분께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 어떤 걸 말인가요, 니키아스?
니키아스: 내가 들은 것은 당신이 종종 우리 각자가 자신이 지혜로운 것들에 있어서는 훌륭하지만, 자신이 무지한 것들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오.
소크라테스: 제우스께 맹세코, 당신 말이 맞아요, 니키아스!
니키아스: 그렇다면 만일 용감한 자가 훌륭하다면, 그가 지혜롭다는 것은 분명하오.
소크라테스: 들으셨나요, 라케스?
라케스: 내 듣긴 했지만, 그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는 이해 못하겠소.
소크라테스: 저는 이해한 것 같네요. 니키아스는 아마 용기가 일종의 지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라케스: 어떤 지혜 말이오,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 자, 그럼 니키아스, 라케스에게 말씀해주시지요.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떤 지혜가 용기일는지요? […]
니키아스: 나는 말이오, 라케스! 용기는 이런 거라고 말하는 것이오. 즉 ‘두려워할 것들과 안심하고 행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이라고 말이오. 전쟁에서든, 다른 모든 상황에서든 말이오.
라케스: 이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요, 라케스?
라케스: 무엇 때문이냐고요? 지혜는 분명 용기와 구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 니키아스는 어쨌든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라케스: 제우스께 맹세코, 그는 정말 그게 아니라고 말하네요. 이것 참! 그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소크라테스: 그럼 니키아스에게 가르쳐줍시다. 욕하지 말고요.
니키아스: 아니에요, 소크라테스. 내가 보기에 라케스는 나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바라는 것 같소. 자기도 방금 전에 그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오.
라케스: 분명 그렇소, 니키아스! 그리고 난 어쨌든 그걸 밝혀 보겠소.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의사들은 질병과 관련하여 두려워할 것들을 알고 있지 않소? 당신은 용감한 자들이 그걸 안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당신은 의사들을 용감한 자라고 부릅니까?
니키아스: 결코 그렇지 않소.
라케스: 당신은 농부들 역시 용감한 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농부들은 분명 농사일과 관련하여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그밖에 다른 장인들도 모두 자기들의 기술 영역에서 두려워할 것들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있소. 그러나 이들은 결코 용감한 자들이 아니오. […]
니키아스: [소크라테스를 향해] 라케스는 의사들이 아픈 자들에 관하여 건강하고 병든 상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분명 의사들은 그만큼만 알 뿐이오. 만일 어떤 이에게 아픈 것보다 오히려 건강한 것이 두려운 일일 경우, 라케스, 당신은 의사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혹시 병에서 회복되는 것보다 회복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경우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
소크라테스: 라케스, 이분이 말씀하시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시겠습니까?
라케스: 난 이해하오. 그는 예언자들을 용감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
토론하기
1. 용감해지는 데 굳이 앎이니 지혜니 하는 것이 필요할까? 용기가 ‘두려워할 것과 대담해도 되는 것에 대한 앎’이라는 니키아스의 정의를 평가하고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제시해보자.
2. 당신은 의사이다. 어느 날 당신의 병원에 희대의 연쇄 살인마가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져 실려 온다. 그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으며, 몸만 성하면 죽을 때까지 살인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복잡하게 꼬여서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당신의 선택지는 두 가지, 즉 그를 치료해서 살려주거나, 아니면 죽도록 방치하고 도망치는 것뿐이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또 왜 그런 선택을 할 것인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용기는 일종의 지혜?
두 명의 장군과 용기의 본성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라케스 다음으로 니키아스 장군과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앞서 대화했던 라케스가 말보다는 행동을 더 중요시하고 철학적 대화에 서툰 사람인 것과 반대로, 니키아스는 신중하고 논리적이며,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식 대화와 토론에 익숙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여러 번 참여했는데, 용기와 같이 인간의 덕목을 다루는 데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항상 강조하던 것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다른 모임에서 언급했던 것을 오늘은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인간이 각자 지혜로운 것에 대해서는 훌륭하지만 무지한 것에 대해서는 훌륭하지 않다는 언급이다. 이 말을 풀어보면, 우리가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잘 안다면, 좋은 것은 찾아 선택하고 나쁜 것은 피할 수 있는 반면, 우리가 행하려는 것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기에,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행위의 좋고 나쁨이 앎, 즉 지혜에 달려있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용감한 자가 훌륭하다면, 그는 지혜로운 자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용기는 지혜라는 것이다.
임전무퇴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라케스와는 달리, 용기를 지혜로 환원시킨 니키아스의 정의는 다소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도 유명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의 구절을 떠올려보면, 니키아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진정한 용기는 그너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나와 적을 알고, 피해야 할 때와 싸워야 할 때를 잘 헤아림으로써 승리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니키아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용기는 끓어오르는 분노나 기개, 혹은 담대함 등과 같은 감정이나 기질적인 특징보다는, 현실에 동요되지 않는 냉철한 이성과 적들의 의도와 수를 읽어낼 수 있는 지적인 능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니키아스는 용기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에게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서는 훌륭한 반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훌륭하지 않다’라는 생각인데,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종종 주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는 니키아스의 지적을 바로 이해하고서, ‘용기는 일종의 지혜’라고 니키아스의 입장을 정리해준다. 문제는 또 다른 대화자인 라케스이다. 그는 용기가 지혜라는 니키아스의 주장과 문제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따라서 니키아스가 용기를 정의하고 그 본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라케스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래서 용기에 관한 라케스의 탐구가 소크라테스와 함께 두 명이서 진행된 것과 달리, 용기에 관한 니키아스의 탐구에는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라케스도 끼어들며, 실질적으로는 라케스와 니키아스 간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진다.
용기가 지혜라면, 그것은 무엇에 관한 지혜인가?
용기는 앎, 즉 일종의 지혜이다. 하지만 과학자나 기술자의 지식과는 다를 것이다. 또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나 종교인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무엇에 관한 지혜냐라는 질문에 니키아스는 ‘두려워할 것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앎’이라고 답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예컨대 적과의 싸움터에서 용감한 장수는 퇴각해야 할 때와 나아가 싸울 때를 잘 구별해야 한다. 퇴각할 때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상황, 즉 패배할 위험이 높은 상황일 것이다. 반면에 대담하게 나아가 싸울 때는 아군에게 승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일 것이다. 요컨대 두려워할 것과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지혜란 전선에서 퇴각해야 할 때와 과감하게 맞서 싸울 때를 잘 아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고, 이것에 대한 앎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케스가 보기에 두려워할 것과 안심하고서 행하는 것에 대한 지혜는 너무 막연하고 광범위한 주장이다. 그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반박한다. 의사는 질병과 관련하여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또 무엇에 대해 안심해도 되는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의사는 용감한 사람인가?농부 역시 농사와 관련하여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안심하고서 행해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부를 용감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요컨대 두려워 할 것과 대담해도 될 것에 대한 앎은 다른 기술 지식에도 다양하게 적용되기에, 이 지혜를 가지고서 용기를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주는 것과 대담해도 될 것에 대한 지혜와 선택의 문제
그렇다면 니키아스가 답해야 하는 것은 용감한 자의 지혜가 어떤 점에서 의사나 농부의 지혜와 구별되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케스의 지적에 따르면, 이들의 지혜는 모두 두려움을 주는 것과 안심해도 될 것들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니키아스는 의사의 예를 들어 답변을 하는데, 그의 답변은 우리가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의사는 질병과 관련하여 두려움을 주는 것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동해도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 지혜를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한다. 이때 두려움을 주는 것은 환자를 죽게 만드는 치료나 처방일 것이고,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은 환자를 낫게 해주는 치료나 처방이라 하겠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전자를 피하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전념하는 것은 전적으로 질병을 낫게 해주는 것에 국한된다. 반면에 환자에 대해서는 어떨까?
니키아스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만일 어떤 이에게 아픈 것보다 오히려 건강한 것이 두려운 일일 경우, 라케스, 당신은 의사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의사는 자신에게 오는 환자는 가리지 않고 치료한다. 그가 지닌 의학 지식은 환자의 질병과 관련하여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에 대해 안심하고서 치료해도 되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학 지식은 환자의 질병에만 관계할 뿐, 환자라는 인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다. 만일 환자가 희대의 연쇄 살인마라든가, 반인륜적인 학살을 자행한 독재자라고 하자. 만일 그들이 질병에서 회복될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즉 의사의 치료를 통해서 인류의 두려움이 현실화될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죽는다면, 인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의 지혜로는 환자를 선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학 지식은 환자를 괴롭히고 있는 질병에 있어서 두려워할 것과 안심해도 될 것을 구별할 뿐, 환자가 두려움을 줄 사람인지 안심해도 될 사람인지를 구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술과 달리 용기는 그런 사람들을 구별해줄 수 있는 지혜라고 니키아스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케스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는 한 인간에 대하여 그가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은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에언자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니키아스는 용기가 두려워할 것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동해도 될 것에 대한 앎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의 나쁜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악에 대해서는 고통과 분노를 갖는다. 과거의 악에 대해서는 혐오의 감정을 가질 수는 있으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가 장차 나쁜 일을 저지르거나 나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래의 악을 전문적으로 예견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이다. 따라서 니키아스의 주장대로라면, 두려워할 것과 안심해도 될 것을 아는 사람은 결국 예언자들이며, 예언자들이 곧 용감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결국 위의 대화에서 니키아스는 라케스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용기는 무모함이나 어리석은 만용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용기는 일종의 지혜이거나 적어도 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경우 용기라는 지혜는 다른 모든 지혜들, 예컨대 기술 지식이나, 예술 혹은 종교에서의 지혜 등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니키아스는 두려움과 안심에 관한 앎을 다른 지혜들과의 구별 기준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기준을 통해서는 여전히 용기가 다른 지식(예컨대 의술)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자 니키아스는 두려움과 안심에 대한 앎을 통해 죽음과 삶까지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용기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라케스는 그런 앎은 예언자들에게나 어울릴 뿐이라고 비꼰다. 사실 니키아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용기의 덕을 가질 수 있으며,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전후맥락
소크라테스는 라케스와 니키아스라는 두 명의 장군과 함께 용기라는 덕목의 본성을 탐구한다. 먼저 적극적인 행동파인 라케스 장군은 용기가 두려움과 고통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참고 버티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라케스의 규정만으로는 용기와 만용을 구별할 수가 없다. 라케스의 뒤를 이어 신중하며 철학적 토론에 익숙한 니키아스 장군이 대화에 참여하는데, 그는 용기가 좋은 것이라면 지혜로운 것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고전본문
니키아스: 자, 소크라테스, 나는 아까부터 두 분께서 용기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소. 나는 이미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당신이 잘 말씀하셨던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두 분께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 어떤 걸 말인가요, 니키아스?
니키아스: 내가 들은 것은 당신이 종종 우리 각자가 자신이 지혜로운 것들에 있어서는 훌륭하지만, 자신이 무지한 것들에 대해서는 나쁘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오.
소크라테스: 제우스께 맹세코, 당신 말이 맞아요, 니키아스!
니키아스: 그렇다면 만일 용감한 자가 훌륭하다면, 그가 지혜롭다는 것은 분명하오.
소크라테스: 들으셨나요, 라케스?
라케스: 내 듣긴 했지만, 그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는 이해 못하겠소.
소크라테스: 저는 이해한 것 같네요. 니키아스는 아마 용기가 일종의 지혜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라케스: 어떤 지혜 말이오, 소크라테스? […]
소크라테스: 자, 그럼 니키아스, 라케스에게 말씀해주시지요.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어떤 지혜가 용기일는지요? […]
니키아스: 나는 말이오, 라케스! 용기는 이런 거라고 말하는 것이오. 즉 ‘두려워할 것들과 안심하고 행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앎’이라고 말이오. 전쟁에서든, 다른 모든 상황에서든 말이오.
라케스: 이 사람은 참으로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요, 라케스?
라케스: 무엇 때문이냐고요? 지혜는 분명 용기와 구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소크라테스: 니키아스는 어쨌든 그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라케스: 제우스께 맹세코, 그는 정말 그게 아니라고 말하네요. 이것 참! 그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요!
소크라테스: 그럼 니키아스에게 가르쳐줍시다. 욕하지 말고요.
니키아스: 아니에요, 소크라테스. 내가 보기에 라케스는 나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도록 바라는 것 같소. 자기도 방금 전에 그런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오.
라케스: 분명 그렇소, 니키아스! 그리고 난 어쨌든 그걸 밝혀 보겠소.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의사들은 질병과 관련하여 두려워할 것들을 알고 있지 않소? 당신은 용감한 자들이 그걸 안다고 생각하시오? 아니면 당신은 의사들을 용감한 자라고 부릅니까?
니키아스: 결코 그렇지 않소.
라케스: 당신은 농부들 역시 용감한 자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농부들은 분명 농사일과 관련하여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소. 그밖에 다른 장인들도 모두 자기들의 기술 영역에서 두려워할 것들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알고 있소. 그러나 이들은 결코 용감한 자들이 아니오. […]
니키아스: [소크라테스를 향해] 라케스는 의사들이 아픈 자들에 관하여 건강하고 병든 상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뭔가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오. 그러나 분명 의사들은 그만큼만 알 뿐이오. 만일 어떤 이에게 아픈 것보다 오히려 건강한 것이 두려운 일일 경우, 라케스, 당신은 의사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혹시 병에서 회복되는 것보다 회복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경우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
소크라테스: 라케스, 이분이 말씀하시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시겠습니까?
라케스: 난 이해하오. 그는 예언자들을 용감한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
토론하기
1. 용감해지는 데 굳이 앎이니 지혜니 하는 것이 필요할까? 용기가 ‘두려워할 것과 대담해도 되는 것에 대한 앎’이라는 니키아스의 정의를 평가하고 찬성 혹은 반대 의견을 제시해보자.
2. 당신은 의사이다. 어느 날 당신의 병원에 희대의 연쇄 살인마가 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져 실려 온다. 그는 이미 수십 명의 사람을 죽였으며, 몸만 성하면 죽을 때까지 살인을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사정이 복잡하게 꼬여서 경찰에 신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당신의 선택지는 두 가지, 즉 그를 치료해서 살려주거나, 아니면 죽도록 방치하고 도망치는 것뿐이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또 왜 그런 선택을 할 것인지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용기는 일종의 지혜?
두 명의 장군과 용기의 본성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라케스 다음으로 니키아스 장군과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런데 앞서 대화했던 라케스가 말보다는 행동을 더 중요시하고 철학적 대화에 서툰 사람인 것과 반대로, 니키아스는 신중하고 논리적이며,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식 대화와 토론에 익숙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여러 번 참여했는데, 용기와 같이 인간의 덕목을 다루는 데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항상 강조하던 것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다른 모임에서 언급했던 것을 오늘은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인간이 각자 지혜로운 것에 대해서는 훌륭하지만 무지한 것에 대해서는 훌륭하지 않다는 언급이다. 이 말을 풀어보면, 우리가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잘 안다면, 좋은 것은 찾아 선택하고 나쁜 것은 피할 수 있는 반면, 우리가 행하려는 것의 본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저 운에 맡길 수밖에 없기에,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행위의 좋고 나쁨이 앎, 즉 지혜에 달려있다고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용감한 자가 훌륭하다면, 그는 지혜로운 자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용기는 지혜라는 것이다.
임전무퇴를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라케스와는 달리, 용기를 지혜로 환원시킨 니키아스의 정의는 다소 소극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에게도 유명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손자병법의 구절을 떠올려보면, 니키아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진정한 용기는 그너 막무가내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나와 적을 알고, 피해야 할 때와 싸워야 할 때를 잘 헤아림으로써 승리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니키아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용기는 끓어오르는 분노나 기개, 혹은 담대함 등과 같은 감정이나 기질적인 특징보다는, 현실에 동요되지 않는 냉철한 이성과 적들의 의도와 수를 읽어낼 수 있는 지적인 능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재미있는 점은 니키아스는 용기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소크라테스에게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서는 훌륭한 반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훌륭하지 않다’라는 생각인데,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종종 주장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소크라테스는 니키아스의 지적을 바로 이해하고서, ‘용기는 일종의 지혜’라고 니키아스의 입장을 정리해준다. 문제는 또 다른 대화자인 라케스이다. 그는 용기가 지혜라는 니키아스의 주장과 문제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따라서 니키아스가 용기를 정의하고 그 본성을 밝히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라케스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래서 용기에 관한 라케스의 탐구가 소크라테스와 함께 두 명이서 진행된 것과 달리, 용기에 관한 니키아스의 탐구에는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라케스도 끼어들며, 실질적으로는 라케스와 니키아스 간의 대결 구도가 만들어진다.
용기가 지혜라면, 그것은 무엇에 관한 지혜인가?
용기는 앎, 즉 일종의 지혜이다. 하지만 과학자나 기술자의 지식과는 다를 것이다. 또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나 종교인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도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무엇에 관한 지혜냐라는 질문에 니키아스는 ‘두려워할 것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앎’이라고 답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예컨대 적과의 싸움터에서 용감한 장수는 퇴각해야 할 때와 나아가 싸울 때를 잘 구별해야 한다. 퇴각할 때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키는 상황, 즉 패배할 위험이 높은 상황일 것이다. 반면에 대담하게 나아가 싸울 때는 아군에게 승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일 것이다. 요컨대 두려워할 것과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지혜란 전선에서 퇴각해야 할 때와 과감하게 맞서 싸울 때를 잘 아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을 잘 아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고, 이것에 대한 앎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케스가 보기에 두려워할 것과 안심하고서 행하는 것에 대한 지혜는 너무 막연하고 광범위한 주장이다. 그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반박한다. 의사는 질병과 관련하여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또 무엇에 대해 안심해도 되는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의사는 용감한 사람인가?농부 역시 농사와 관련하여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안심하고서 행해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농부를 용감한 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요컨대 두려워 할 것과 대담해도 될 것에 대한 앎은 다른 기술 지식에도 다양하게 적용되기에, 이 지혜를 가지고서 용기를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주는 것과 대담해도 될 것에 대한 지혜와 선택의 문제
그렇다면 니키아스가 답해야 하는 것은 용감한 자의 지혜가 어떤 점에서 의사나 농부의 지혜와 구별되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케스의 지적에 따르면, 이들의 지혜는 모두 두려움을 주는 것과 안심해도 될 것들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니키아스는 의사의 예를 들어 답변을 하는데, 그의 답변은 우리가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의사는 질병과 관련하여 두려움을 주는 것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동해도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 지혜를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한다. 이때 두려움을 주는 것은 환자를 죽게 만드는 치료나 처방일 것이고, 대담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은 환자를 낫게 해주는 치료나 처방이라 하겠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전자를 피하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러나 의사가 전념하는 것은 전적으로 질병을 낫게 해주는 것에 국한된다. 반면에 환자에 대해서는 어떨까?
니키아스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만일 어떤 이에게 아픈 것보다 오히려 건강한 것이 두려운 일일 경우, 라케스, 당신은 의사들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의사는 자신에게 오는 환자는 가리지 않고 치료한다. 그가 지닌 의학 지식은 환자의 질병과 관련하여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고, 무엇에 대해 안심하고서 치료해도 되는가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의학 지식은 환자의 질병에만 관계할 뿐, 환자라는 인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다. 만일 환자가 희대의 연쇄 살인마라든가, 반인륜적인 학살을 자행한 독재자라고 하자. 만일 그들이 질병에서 회복될 경우,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즉 의사의 치료를 통해서 인류의 두려움이 현실화될 것이다. 반대로 그들이 죽는다면, 인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의 지혜로는 환자를 선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학 지식은 환자를 괴롭히고 있는 질병에 있어서 두려워할 것과 안심해도 될 것을 구별할 뿐, 환자가 두려움을 줄 사람인지 안심해도 될 사람인지를 구별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술과 달리 용기는 그런 사람들을 구별해줄 수 있는 지혜라고 니키아스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케스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는 한 인간에 대하여 그가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은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에언자밖에 없다고 항변한다. 니키아스는 용기가 두려워할 것과 안심하고서 대담하게 행동해도 될 것에 대한 앎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미래의 나쁜 것을 의미한다. 현재의 악에 대해서는 고통과 분노를 갖는다. 과거의 악에 대해서는 혐오의 감정을 가질 수는 있으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가 장차 나쁜 일을 저지르거나 나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래의 악을 전문적으로 예견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이다. 따라서 니키아스의 주장대로라면, 두려워할 것과 안심해도 될 것을 아는 사람은 결국 예언자들이며, 예언자들이 곧 용감한 사람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결국 위의 대화에서 니키아스는 라케스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용기는 무모함이나 어리석은 만용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용기는 일종의 지혜이거나 적어도 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경우 용기라는 지혜는 다른 모든 지혜들, 예컨대 기술 지식이나, 예술 혹은 종교에서의 지혜 등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니키아스는 두려움과 안심에 관한 앎을 다른 지혜들과의 구별 기준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 기준을 통해서는 여전히 용기가 다른 지식(예컨대 의술)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자 니키아스는 두려움과 안심에 대한 앎을 통해 죽음과 삶까지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용기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라케스는 그런 앎은 예언자들에게나 어울릴 뿐이라고 비꼰다. 사실 니키아스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용기의 덕을 가질 수 있으며,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