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은 행복을 삶의 목표로서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필요한데, 그중에는 건강이나 재산, 혹은 명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덕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덕이 있으며, 그것들 각각의 특정이 어떠한지를 살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III권 6장부터 용기, 절제, 정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덕들의 본성을 탐구하고, 덕의 획득 조건을 살펴본다.
고전본문
먼저 용기에 대해 논의해보자. 두려움과 대담함에 관련된 중용이 있다는 것은 이미 명백히 한 바 있다. 우리가 두려운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하며, 이것들은 단적으로 말하면 나쁜 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나쁜 것들에 대한 예감으로 규정한다. […]
두려운 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인간을 능가하는 두려운 것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적어도 지각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것이리라. 반면에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두려운 것들은 그 크기나 많고 적음에서 차이를 갖는다. 반대로 대담함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더 많이 두려워할 수도 있고, 더 적게 두려워할 수도 있으며, 사실은 두렵지 않은 것을 두려운 것인 양 두려워할 수도 있다. 우리가 범하는 잘못들로는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 마땅히 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두려워해서는 안 될 때 두려워하는 것 등이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용감한 사람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과 마땅히 그래야 할 때, 참고 두려워하며, 또 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담한 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용감한 사람은 그가 직면한 문제의 가치에 걸맞게, 또 이성이 그럴 것 같은 방식으로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
한편 대담함에 있어서 지나친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다. 그런데 무모한 사람은 허풍을 떠는 사람으로, 용감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어쨌든 용감한 사람이 두려운 것들에 대해 갖는 태도를 무모한 사람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무모한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용감한 사람을 모방하려 한다. 그런 까닭에 무모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무모한 겁쟁이’이기도 하다. 모방의 경우에는 무모하게 버티다가 두려운 것들을 시레조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두려워함에 있어서 지나친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그는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두려워하며, 또한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을 겪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비겁한 사람은 일종의 의기소침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용감한 사람은 이와 정반대이다. 대담하다는 것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겁한 사람, 무모한 사람, 용감한 사람 모두 동일한 것들에 관계하지만, 그것들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앞의 두 사람은 지나치거나 모자란 반면, 셋째 사람은 중간의 방식으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또 무모한 사람은 경솔해서 위험이 닥쳐오기 전에는 위험을 바라지만, 실제로 위험에 처해서는 물러선다. 반면에 용감한 사람은 그 전에는 평정을 유지하다가 행동을 취할 때는 빠르고 강렬하게 행동한다.
따라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용기란 우리가 언급했던 상황들에서 두려운 것들과 대담함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관련된 중용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용감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선택하고 견뎌낸다. 가난을 피하기 위해, 혹은 성적인 욕구를, 혹은 어떤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 죽는 것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비겁한 자나 하는 일이다. 고생스러운 일을 회피하는 것은 유약함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기 때문에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회피하려고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하기
(1) 삶 속에서 용기와 비겁함, 용기와 무모함을 구별하는 저마다의 기준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각자의 기준을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인간 삶의 목적으로서의 행복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기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들인 니코마코스를 위하여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을 썼는데, 윤리학은 인간의 삶과 가치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의 분야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실천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내가 공부하는 것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함이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은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함이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는 것은 안락하고 여유로운 가정을 얻기 위함이고, 이와 같은 모든 행위와 실천은 결국 행복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다른 무엇을 위해서이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은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맨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부의 삼분설: 외적인 부, 신체적인 부, 영혼의 부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좋은 것들이 필요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 그리고 영혼의 부로 나눈다. 외적인 부로는 재산과 권력, 명예 등을 들 수 있다. 신체적인 부로는 건강과 힘, 아름다운 외모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부는 바로 덕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는 절대적으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것들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예컨대 부와 권력을 남용하다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라든가,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힘을 과신하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덕은 어떨까?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덕을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는 기능적인 탁월함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본성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며, 이때 사회적 존재에 어울리는 기능적인 탁월함이란 바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 즉 정의, 용기, 절제, 지혜 등과 같은 훌륭함을 가리킨다. 외적인 부나 신체적인 부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유익할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는 것과 달리, 덕은 어떻게 사용되든지 간에 좋을 수밖에 없다. 또한 영혼의 부인 덕을 기준으로 삼아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를 사용한다면, 그때 인간은 비교적 안전하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덕은 영혼의 부에 속한다. 이 말은 외적인 부를 위해 재산을 모으거나, 신체적인 부를 위해 몸을 단련하듯이, 영혼의 부에 해당되는 덕을 얻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고유한 훈련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론적인 덕과 성격적인 덕, 그리고 중용으로서의 덕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즉 인간 역시 동물이긴 하지만, 이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에 이성적인 측면과 비이성적인(즉 동물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덕 가운데 지혜와 같은 것은 이성적인 측면에 속하며 이론적인 숙고와 사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용기나 절제와 같은 덕들은 이성보다는 오히려 성격적인 측면이 강하며, 이것은 숙고와 사색보다는 일상생활에서의 바른 습관과 훈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용기의 경우에는 그저 용기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서 용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꾸준한 단련과 바른 습관을 통해 올곧은 성격을 유지함으로써 용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와 같은 성격적인 덕들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이 덕들이 양 극단 사이의 중용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절제는 방탕함과 무감각 사이의 중용이며, 온화함은 성마름과 무심함 사이의 중용이라는 것이다. 용기 역시 성격적인 덕에 속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의 중용에 해당된다.
무모함과 비겁 사이: 중용으로서의 용기
위의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두려움과 대담함과 관련된 중용을 용기라고 본다. 용기가 생겨나거나 요구될 때는 우리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 혹은 두려운 대상에 맞서 대담한 행동과 실천이 필요할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나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사실 좋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나쁜 것들을 충분히 극복하거나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대담해질 수 있다. 따라서 두려움과 대담함은 나쁘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두려움이나 대담함과 관련하여 잘못을 범하기도 하는데, 예컨대 사실은 전혀 나쁘지 않은 대상을 나쁜 것으로 착각하여 두려운 감정에 빠지거나, 사실은 나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다고 착각하여 대담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용감하게 행동하기에 앞서, 주어진 문제가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두려움이나 대담함을 야기하는 대상은 우리에게 양극단의 태도를 촉발시키는데, 그 하나는 무모함이고, 다른 하나는 비겁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모함은 대담함이 지나친 것을 말한다. 대담함이 지나쳐서 두려움을 갖고서 피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덤벼드는 사람은 용감한 게 아니라 무모한 사람이다. 반면에 비겁함은 두려움이 지나친 것을 의미한다. 두려움이 지나친 나머지 사실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고 대담하게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물러서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용기는 바로 이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의 적정한 중간에 위치한다. 즉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피할 줄 알고, 대담하게 맞서야 할 상황에서는 피하지 않고 맞서는 것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다. 용기가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두려운 상황과 대담해도 될 만한 상황을 구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혜만으로는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실제로 두려워해야 할 상황임을 알면서도 자존심이나 분노로 인해 맞서려 드는가 하면, 대범하게 맞서야 하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기의 덕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와 별개로 각각에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품성을 기를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한다.
키워드
대담함, 두려움, 무모함, 비겁, 용기, 중용
전후맥락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은 행복을 삶의 목표로서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필요한데, 그중에는 건강이나 재산, 혹은 명예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덕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덕이 있으며, 그것들 각각의 특정이 어떠한지를 살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III권 6장부터 용기, 절제, 정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덕들의 본성을 탐구하고, 덕의 획득 조건을 살펴본다.
고전본문
먼저 용기에 대해 논의해보자. 두려움과 대담함에 관련된 중용이 있다는 것은 이미 명백히 한 바 있다. 우리가 두려운 것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하며, 이것들은 단적으로 말하면 나쁜 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두려움을 나쁜 것들에 대한 예감으로 규정한다. […]
두려운 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인간을 능가하는 두려운 것도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적어도 지각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것이리라. 반면에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두려운 것들은 그 크기나 많고 적음에서 차이를 갖는다. 반대로 대담함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더 많이 두려워할 수도 있고, 더 적게 두려워할 수도 있으며, 사실은 두렵지 않은 것을 두려운 것인 양 두려워할 수도 있다. 우리가 범하는 잘못들로는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 마땅히 해야만 하는 방식으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두려워해서는 안 될 때 두려워하는 것 등이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용감한 사람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것을,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과 마땅히 그래야 할 때, 참고 두려워하며, 또 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담한 마음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용감한 사람은 그가 직면한 문제의 가치에 걸맞게, 또 이성이 그럴 것 같은 방식으로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
한편 대담함에 있어서 지나친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다. 그런데 무모한 사람은 허풍을 떠는 사람으로, 용감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어쨌든 용감한 사람이 두려운 것들에 대해 갖는 태도를 무모한 사람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무모한 사람은 할 수 있는 한 용감한 사람을 모방하려 한다. 그런 까닭에 무모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무모한 겁쟁이’이기도 하다. 모방의 경우에는 무모하게 버티다가 두려운 것들을 시레조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두려워함에 있어서 지나친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다. 그는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는 안 되는 방식으로 두려워하며, 또한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을 겪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비겁한 사람은 일종의 의기소침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용감한 사람은 이와 정반대이다. 대담하다는 것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겁한 사람, 무모한 사람, 용감한 사람 모두 동일한 것들에 관계하지만, 그것들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앞의 두 사람은 지나치거나 모자란 반면, 셋째 사람은 중간의 방식으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또 무모한 사람은 경솔해서 위험이 닥쳐오기 전에는 위험을 바라지만, 실제로 위험에 처해서는 물러선다. 반면에 용감한 사람은 그 전에는 평정을 유지하다가 행동을 취할 때는 빠르고 강렬하게 행동한다.
따라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용기란 우리가 언급했던 상황들에서 두려운 것들과 대담함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에 관련된 중용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용감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선택하고 견뎌낸다. 가난을 피하기 위해, 혹은 성적인 욕구를, 혹은 어떤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기 위해 죽는 것은 용감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비겁한 자나 하는 일이다. 고생스러운 일을 회피하는 것은 유약함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고귀하기 때문에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회피하려고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론하기
(1) 삶 속에서 용기와 비겁함, 용기와 무모함을 구별하는 저마다의 기준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각자의 기준을 이야기해보자.
해설읽기
인간 삶의 목적으로서의 행복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기전 3세기에 활동한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들인 니코마코스를 위하여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책을 썼는데, 윤리학은 인간의 삶과 가치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의 분야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실천은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내가 공부하는 것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함이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는 것은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함이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는 것은 안락하고 여유로운 가정을 얻기 위함이고, 이와 같은 모든 행위와 실천은 결국 행복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다른 무엇을 위해서이다’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은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맨 끝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부의 삼분설: 외적인 부, 신체적인 부, 영혼의 부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좋은 것들이 필요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 그리고 영혼의 부로 나눈다. 외적인 부로는 재산과 권력, 명예 등을 들 수 있다. 신체적인 부로는 건강과 힘, 아름다운 외모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영혼의 부는 바로 덕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는 절대적으로 좋다고 할 수는 없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것들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예컨대 부와 권력을 남용하다가 불행에 빠진 사람들이라든가,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힘을 과신하다가 낭패를 본 사람들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덕은 어떨까?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덕을 인간의 본성에 어울리는 기능적인 탁월함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본성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며, 이때 사회적 존재에 어울리는 기능적인 탁월함이란 바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 즉 정의, 용기, 절제, 지혜 등과 같은 훌륭함을 가리킨다. 외적인 부나 신체적인 부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유익할 수도 있고 해로울 수도 있는 것과 달리, 덕은 어떻게 사용되든지 간에 좋을 수밖에 없다. 또한 영혼의 부인 덕을 기준으로 삼아 외적인 부와 신체적인 부를 사용한다면, 그때 인간은 비교적 안전하게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덕은 영혼의 부에 속한다. 이 말은 외적인 부를 위해 재산을 모으거나, 신체적인 부를 위해 몸을 단련하듯이, 영혼의 부에 해당되는 덕을 얻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고유한 훈련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론적인 덕과 성격적인 덕, 그리고 중용으로서의 덕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즉 인간 역시 동물이긴 하지만, 이성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에 이성적인 측면과 비이성적인(즉 동물적인) 측면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덕 가운데 지혜와 같은 것은 이성적인 측면에 속하며 이론적인 숙고와 사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반면에 용기나 절제와 같은 덕들은 이성보다는 오히려 성격적인 측면이 강하며, 이것은 숙고와 사색보다는 일상생활에서의 바른 습관과 훈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용기의 경우에는 그저 용기가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서 용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꾸준한 단련과 바른 습관을 통해 올곧은 성격을 유지함으로써 용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와 같은 성격적인 덕들에 관하여 매우 독특한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이 덕들이 양 극단 사이의 중용을 통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절제는 방탕함과 무감각 사이의 중용이며, 온화함은 성마름과 무심함 사이의 중용이라는 것이다. 용기 역시 성격적인 덕에 속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의 중용에 해당된다.
무모함과 비겁 사이: 중용으로서의 용기
위의 인용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를 두려움과 대담함과 관련된 중용을 용기라고 본다. 용기가 생겨나거나 요구될 때는 우리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 혹은 두려운 대상에 맞서 대담한 행동과 실천이 필요할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나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사실 좋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나쁜 것들을 충분히 극복하거나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대담해질 수 있다. 따라서 두려움과 대담함은 나쁘다고 여겨지는 대상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는 두려움이나 대담함과 관련하여 잘못을 범하기도 하는데, 예컨대 사실은 전혀 나쁘지 않은 대상을 나쁜 것으로 착각하여 두려운 감정에 빠지거나, 사실은 나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다고 착각하여 대담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용감하게 행동하기에 앞서, 주어진 문제가 나쁜 것인지 좋은 것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데 두려움이나 대담함을 야기하는 대상은 우리에게 양극단의 태도를 촉발시키는데, 그 하나는 무모함이고, 다른 하나는 비겁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모함은 대담함이 지나친 것을 말한다. 대담함이 지나쳐서 두려움을 갖고서 피해야 할 대상에 대하여 덤벼드는 사람은 용감한 게 아니라 무모한 사람이다. 반면에 비겁함은 두려움이 지나친 것을 의미한다. 두려움이 지나친 나머지 사실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고 대담하게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물러서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용기는 바로 이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의 적정한 중간에 위치한다. 즉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피할 줄 알고, 대담하게 맞서야 할 상황에서는 피하지 않고 맞서는 것이 바로 용기라는 것이다. 용기가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두려운 상황과 대담해도 될 만한 상황을 구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혜만으로는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실제로 두려워해야 할 상황임을 알면서도 자존심이나 분노로 인해 맞서려 드는가 하면, 대범하게 맞서야 하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기의 덕을 얻기 위해서는 지혜와 별개로 각각에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품성을 기를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한다.
키워드
대담함, 두려움, 무모함, 비겁, 용기, 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