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지금이야 ‘철학’이 뭔가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어떤 것에 관한 담론을 다룬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최초의 철학자들은 다분히 ‘이과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철학자들의 의문은 ‘대체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진걸까?’ 혹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관통하는 제 1원리는 무엇일까?’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만물의 물질적 기초에 관한 것인데 사실 이것은 오늘날 물리학자들도 아직까지 전부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으므로 변변한 도구도 없는 그들이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어려웠다. 그리스에서 한 머리 한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음으로써 이 문제는 철학의 대상을 관찰의 대상인 우주자연에서 관찰의 주체인 인간으로 옮기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에 비해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인데, 피타고라스 이래로 – 수학책에 나오는 그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계가 수학적 질서와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 그리스 사상계는 우리가 바라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세계의 배후에 그 모든 것들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비물질적 원리들의 세계가 있고 그것이 더욱 ‘진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처럼. 그런데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할 때 혼자서 no를 외치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독특하게도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는 이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이 세상 만물의 본질은 바로 변화, 즉 대립자들의 투쟁에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고전본문
히폴뤼토스(DK22B53)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은 신으로 또 어떤 이들은 인간으로 드러내며, 어떤 이들은 노예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모든 이교적 학설들에 대한 논박』 IV. 9)
오리게네스(DK22B80)
전쟁은 공통된 것이고 투쟁이 정의이며, 모든 것은 투쟁과 필연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켈소스에 대한 반박』 VI. 42)
아리스토텔레스(DK22B8)
대립하는 것은 한곳에 모이고, 불화하는 것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은 투쟁에 의해 생겨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55b4)
히폴뤼토스(DK22B51)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그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뤼라의 경우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이다.
(『모든 이교적 학설들에 대한 논박』 IX. 9)
토론하기
(1)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세계와 눈이 아니라 지성을 통해 파악해야 하는 가지적 세계 가운데 어떤 것이 더욱 참되고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시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물질세계가 진짜라는 사실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매우 자명하지 않은가? 반대로,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는 사실 99% 비어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 물리학도 지성으로 파악해야 하는 세계에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성으로 포착해야 하는 가지적 세계의 실재성에 더욱 신뢰가 가지 않는가?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자.
(2)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만물의 원리로 삼고 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우주론과 연결시켜 본다면, 전쟁이 모든 것을 종말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가져오고 점차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부터 평화가 비롯되듯이, 평화에서는 전쟁이 비롯될 것이므로, 이 세계가 전쟁과 평화를 끝없이 반복하는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연결될 수 있다. 만약 세상이 정말 그처럼 전쟁과 평화 사이를 순환하여 왕복한다면, 그러한 조건 위에서 맞이하는 평화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그곳에서 평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3) 키케로는 ‘부당한 평화가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평화라는 이름은 달콤하고 그 자체는 유익하지만, 평화와 노예 상태는 다르다. 평화는 평온함 속에 주어지는 자유이지만, 노예 상태는 전쟁뿐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막아야 할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악’이라는 말도 남겼다. 만약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평화를 이유로 노예와도 같은 입장에 처해야 한다면, 그러한 평화는 선택할 가치가 있는가?
해설읽기
그리스 초창기 철학자들은 자연을 실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 재료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자연 철학자들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단일요소 혹은 단일원리인 ‘아르케arche’를 관찰경험에 입각하여 찾고자 했다. 사물을 쪼개고 쪼개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을까? 더 이상 쪼개지지 않고 그 사물을 이루고 있던 존재의 시작점. 그것이 아르케였다. 자연철학자들은 정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들 생각에 아르케로 구성되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은 모두 변화를 받아들이지만, 정작 그것을 구성하는 아르케 자신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즉, 눈앞에 놓인 물질세계는 변화무쌍하지만, 그 배후에 놓여있는 세계의 참된 본질은 영원불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보기에 세상 만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변화라는 운동을 하고 있었고, 생성하고 또 소멸하는 세계야말로 허상이 아니라 실재였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의 참된 본질이 오히려 변화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변화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한다. 불화하는 대립자들이 벌이는 싸움과 투쟁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오히려 세계의 참된 본질이 변화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의 본질이 변화에 있다면, 변화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란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A에서 A로 가는 것은 변화일 수 없고 A에서 A가 아닌 것으로의 운동이 변화일 텐데. 여기서 A와 A가 아닌 것은 대립자다.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으로서 변화는 생동하는 우주의 본질이며 만물의 파괴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가 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를 겪는데, 각각의 사물은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강은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항상 흐르고 있기 때문에, 방금 전에 들어갔던 강물과 지금 들어가 있는 강물은 다르다. 이처럼 강물은 항상 변화라는 운동 중에 있으며, 이러한 운동을 중단할 경우, 강은 더 이상 강으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흐르지 않는 강은 강이 아니라 호수일 테니까. 활과 고대 희랍의 악기인 뤼라도 마찬가지다. 활은 원래 모양대로 고정되어 있으려는 활대와 그러한 고정 상태를 무너뜨리려는 시위 사이의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화살을 날릴 수 있는 활로서 존재하며 뤼라 또한 고정되어 있으려는 몸체와 운동하려는 현 사이의 투쟁을 통해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사물은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을 통해서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키워드
대립, 대립자, 불화, 전쟁, 투쟁, 평화, 헤라클레이토스
전후맥락
지금이야 ‘철학’이 뭔가 추상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그 어떤 것에 관한 담론을 다룬다고들 생각하지만, 사실 최초의 철학자들은 다분히 ‘이과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철학자들의 의문은 ‘대체 이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진걸까?’ 혹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관통하는 제 1원리는 무엇일까?’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문제는 만물의 물질적 기초에 관한 것인데 사실 이것은 오늘날 물리학자들도 아직까지 전부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으므로 변변한 도구도 없는 그들이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어려웠다. 그리스에서 한 머리 한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답을 내놓음으로써 이 문제는 철학의 대상을 관찰의 대상인 우주자연에서 관찰의 주체인 인간으로 옮기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에 비해 다분히 ‘형이상학적’인 문제인데, 피타고라스 이래로 – 수학책에 나오는 그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는 이 세계가 수학적 질서와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고 생각했다. – 그리스 사상계는 우리가 바라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세계의 배후에 그 모든 것들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비물질적 원리들의 세계가 있고 그것이 더욱 ‘진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처럼. 그런데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할 때 혼자서 no를 외치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독특하게도 우리가 보고 만지고 듣는 이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이 세상 만물의 본질은 바로 변화, 즉 대립자들의 투쟁에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고전본문
히폴뤼토스(DK22B53)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은 신으로 또 어떤 이들은 인간으로 드러내며, 어떤 이들은 노예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모든 이교적 학설들에 대한 논박』 IV. 9)
오리게네스(DK22B80)
전쟁은 공통된 것이고 투쟁이 정의이며, 모든 것은 투쟁과 필연에 따라서 생겨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켈소스에 대한 반박』 VI. 42)
아리스토텔레스(DK22B8)
대립하는 것은 한곳에 모이고, 불화하는 것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것은 투쟁에 의해 생겨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55b4)
히폴뤼토스(DK22B51)
그것이 어떻게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그 자신과 일치하는지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활과 뤼라의 경우처럼, 반대로 당기는 조화이다.
(『모든 이교적 학설들에 대한 논박』 IX. 9)
토론하기
(1)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세계와 눈이 아니라 지성을 통해 파악해야 하는 가지적 세계 가운데 어떤 것이 더욱 참되고 ‘진짜’라고 할 수 있을까? 시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 물질세계가 진짜라는 사실은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매우 자명하지 않은가? 반대로, 사물을 구성하는 원자는 사실 99% 비어있는 공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 물리학도 지성으로 파악해야 하는 세계에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성으로 포착해야 하는 가지적 세계의 실재성에 더욱 신뢰가 가지 않는가?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자.
(2) 헤라클레이토스는 전쟁을 만물의 원리로 삼고 있다. 만약 이러한 생각을 우주론과 연결시켜 본다면, 전쟁이 모든 것을 종말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가져오고 점차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으로부터 평화가 비롯되듯이, 평화에서는 전쟁이 비롯될 것이므로, 이 세계가 전쟁과 평화를 끝없이 반복하는 ‘순환론적 세계관’으로 연결될 수 있다. 만약 세상이 정말 그처럼 전쟁과 평화 사이를 순환하여 왕복한다면, 그러한 조건 위에서 맞이하는 평화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그곳에서 평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3) 키케로는 ‘부당한 평화가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평화라는 이름은 달콤하고 그 자체는 유익하지만, 평화와 노예 상태는 다르다. 평화는 평온함 속에 주어지는 자유이지만, 노예 상태는 전쟁뿐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막아야 할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악’이라는 말도 남겼다. 만약 어떤 개인이나 국가가, 평화를 이유로 노예와도 같은 입장에 처해야 한다면, 그러한 평화는 선택할 가치가 있는가?
해설읽기
그리스 초창기 철학자들은 자연을 실체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궁극적 재료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자연 철학자들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단일요소 혹은 단일원리인 ‘아르케arche’를 관찰경험에 입각하여 찾고자 했다. 사물을 쪼개고 쪼개면 마지막에는 무엇이 남을까? 더 이상 쪼개지지 않고 그 사물을 이루고 있던 존재의 시작점. 그것이 아르케였다. 자연철학자들은 정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들 생각에 아르케로 구성되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은 모두 변화를 받아들이지만, 정작 그것을 구성하는 아르케 자신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즉, 눈앞에 놓인 물질세계는 변화무쌍하지만, 그 배후에 놓여있는 세계의 참된 본질은 영원불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보기에 세상 만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변화라는 운동을 하고 있었고, 생성하고 또 소멸하는 세계야말로 허상이 아니라 실재였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의 참된 본질이 오히려 변화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변화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한다. 불화하는 대립자들이 벌이는 싸움과 투쟁이 세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오히려 세계의 참된 본질이 변화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다. 세계의 본질이 변화에 있다면, 변화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란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A에서 A로 가는 것은 변화일 수 없고 A에서 A가 아닌 것으로의 운동이 변화일 텐데. 여기서 A와 A가 아닌 것은 대립자다.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으로서 변화는 생동하는 우주의 본질이며 만물의 파괴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가 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를 겪는데, 각각의 사물은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강은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항상 흐르고 있기 때문에, 방금 전에 들어갔던 강물과 지금 들어가 있는 강물은 다르다. 이처럼 강물은 항상 변화라는 운동 중에 있으며, 이러한 운동을 중단할 경우, 강은 더 이상 강으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흐르지 않는 강은 강이 아니라 호수일 테니까. 활과 고대 희랍의 악기인 뤼라도 마찬가지다. 활은 원래 모양대로 고정되어 있으려는 활대와 그러한 고정 상태를 무너뜨리려는 시위 사이의 투쟁을 통해서 비로소 화살을 날릴 수 있는 활로서 존재하며 뤼라 또한 고정되어 있으려는 몸체와 운동하려는 현 사이의 투쟁을 통해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렇듯 모든 사물은 대립자들 사이의 투쟁을 통해서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키워드
대립, 대립자, 불화, 전쟁, 투쟁, 평화, 헤라클레이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