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메데이아가 코린토스에 정착한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을 그리고 있다. 이아손은 코린토스의 공주인 크레우사에게 새장가를 들고자 한다. 메데이아는 여성이자 아내로서 분노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그때 코린토스의 왕이자 이아손의 새 장인인 크레온이 찾아와 자신의 결정을 통보한다.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을 즉시 추방한다는 것이다. 크레온은 메데이아가 두렵다. 지혜롭고 ‘천성이 영리한 여인’인데다 헤카테의 사제로서 마법과 계략에 능한 그녀가 앙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하소연하여 하루의 말미를 얻어내지만, 사실 그 하루는 피의 복수를 위한 시간이다.
크레온이 퇴장한 후, 메데이아의 앞에 이아손이 등장한다. 그는 뻔뻔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코린토스 왕가에 새 장가를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메데이아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고. 출세가 우선인 이아손은 금전적 도움을 약속하지만 메데이아에게는 그마저도 모욕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 실성할 지경이 된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코린토스 왕가를 저주한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죽이고 싶다. 그럴 능력도 있다. 하지만 원수들을 모조리 죽인 다음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복수에 앞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다. 앞날이 막막한 메데이아 앞에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가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중 델포이에서 받은 신탁을 트로이젠에 들러 핏테우스에게 묻기 위해 찾아가던 도중 방문한 것이다. 영악한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를 홀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테네 망명과 신변의 보호를 약속받는다. 복수의 실천을 망설이게 만든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지자, 메데이아는 복수를 위한 계략을 짜내어 공개한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다시 불러 거짓으로 사과한 다음 짐짓 간절하게 한 가지 청을 한다. 자신은 추방령을 따라 코린토스를 떠나겠지만, 자식들만큼은 코린토스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새 신부 크레우사를 설득해달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주겠다면서. 그러나 이 선물은 축하가 아니라 파멸의 선물이다. 그녀는 닿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독을 옷과 장신구에 발라서 포장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크레우사를 찾아가 ‘직접’ 전달하도록 신신당부한다. 시간이 흘러, 선물을 전달한 자식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메데이아도 마냥 기쁘지는 않다. 이제 크레우사가 죽으면 선물을 전달한 아이들과 자신을 죽이러 이아손과 코린토스 인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녀는 극심한 내적 갈등에 빠진다. 메데이아는 자식들을 죽이고 싶다. 그래야 이아손에게 완전한 복수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죽일 수 없을 것 같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길고 긴 독백 끝에 메데이아는 마침내 자식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집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아이들을 도륙하고 자식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뒤늦게 이아손이 도착하지만, 자식들은 이미 죽었고,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가 보낸 용의 수레에 자식들의 시신을 실은 채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메데이아를 붙잡을 방법이 없었던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욕을 하며 자식들을 돌려달라고 청해보지만,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뒤로 한 채 아테네로 떠나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고전본문
그가 도착하면 저는 그에게 약한 소리를 할 거예요.
내게도 (이아손의 생각이) 똑같이 여겨지고, 당신이
나를 배신하고서 맺으려는 왕실과의 혼인은 경사스럽고
유익하며 훌륭하게 헤아린 것이라고요.
그런 다음 저는 내 아이들이 (여기) 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할 거예요. 아이들을 적들의 땅에 남김으로써
내 아이들이 적들에게 모욕당하도록 함이 아니라,
왕의 자식을 속임으로써 죽이기 위해서요.
저는 손에 선물을 들려서 아이들을 보낼 거예요.
[신부가 그것을 받으면, 그녀는 죽음을 피할 수 없죠.]
우아한 의복과 도금된 화관을요. 만약 그녀가 장신구를
집어서 피부에 걸치면, (그것들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고, 처녀와 접촉하는 자도 모두 죽일 거예요.
저는 선물들에다 그런 약을 바를 거예요.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776-789.
토론하기
(1) 우리는 소위 ‘수퍼 히어로’에 열광하곤 한다. 최근에는 헤라클레스나 슈퍼맨과 같이 예전부터 우리에게 알려진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히어로들과는 어딘가 많이 다른 히어로들, 예를 들면 데드풀이나 스타로드, 배트맨 등 다른 유형의 영웅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일정한 기준을 세어본 후, 각 집단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지 토론해보자.
(2) 작품 『메데이아』의 주인공인 메데이아도 영웅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거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를 ①에서 논의한 구분에 따라서 평가하고 그 논거를 말해보자.
(3)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를 통해서 사회에 어떠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을까? 그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대변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현실 속의 다른 어떤 집단을 대변하고 있을까?
해설읽기
메데이아는 오늘날까지 다양한 평가를 듣고 있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서구 문학사에서 남자를 홀리고 마법에 능하며 결국 그 남자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팜 파탈 혹은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 작품의 어엿한 주인공으로서 강력한 남성 중심적 사회질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했던 강인한 여인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웅적/반영웅적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영웅과 반영웅
전통적인 영웅은 매우 모범적이며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뛰어난 혈통에 능력이 탁월하며 생김새도 준수한데 윤리·도덕적으로도 훌륭하다. 영웅은 문제에 직면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작게는 개인의 영광을 얻고 크게는 공동체의 역경을 해소한다. 즉, 영웅은 개인의 힘으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뛰어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영웅은 영웅주의와 관련된다. 그것은 탁월한 개인이 그렇지 못한 공동체의 구성원들 다수를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봉건주의 계급사회에서 상류층 남성들에게 기대되던 모습이다. 계급사회 속에서 권력은 소수의 특권이고 다수가 차지하는 넓은 자리는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이 형성하는 힘의 공백지대인데, 영웅은 힘을 가진 소수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반영웅은 전통 영웅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모든 인물상을 망라한다. 앞서 말했듯이, 전통적인 영웅의 모습에서는 벗어나지만 여전히 영웅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은 물론, 외모나 능력 또는 덕성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소시민도, 모든 면에서 열등한 못난이나 심지어 악당마저도 반영웅적 인물로 취급할 수 있다. 때때로 이런 반영웅적 인물들에 더욱 주목하고 그들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영웅주의와 반대라는 의미에서 반영웅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권력이 다수의 일반 시민으로부터 창출되기 때문에, 반영웅주의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영웅과 반영웅의 원형은 서구 문명의 출발점인 고대 희랍의 신화와 문학에서 이미 관찰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등이 영웅의 대표적인 사례요, 이 글에서 소개한 악녀의 대명사, 메데이아는 반영웅의 한 예로 말할 수 있겠다. 희랍의 전통적인 영웅상에 비추어 메데이아의 반영웅적 면모를 한층 분명하게 알아보자.
메데이아는 영웅적 인물이다
영웅 아킬레우스에 관한 다른 셀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전형적인 영웅의 면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우리는 이를 메데이아의 영웅적 기질과 반영웅적 특성을 가늠하는 준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영웅은 신의 혈통을 가진 신들의 자손이다. · 영웅은 가사자(可死者)이자 필멸자(必滅者)인 인간이다. · 영웅은 비범한 능력을 갖는 동시에 한계와 결함도 보유한다. · 영웅은 삶의 절정기에 완벽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불멸의 영광을 완성한다. |
위에서 마련한 준거들을 가지고 메데이아의 영웅적 측면과 반영웅적 측면을 살펴보자. 먼저 메데이아는 위에서 제시한 영웅의 특성과 유사한 면모를 여럿 보여준다. 우선 그녀는 신들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 메데이아는 티탄 계열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인이기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손녀이자 아이에테스와 오케아노스의 딸 에이뒤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헬리오스는 오케아노스의 딸들 중 하나인 페르세이스와 결합해 아이에테스를 낳았고, 그는 다시 에이뒤아와 만나 메데이아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비록 페르세이스와 에이뒤아 모두 오케아노스와 테튀스의 딸들로 하위 신성인 뉨페였지만, 티탄의 혈통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메데이아는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뉨페였지만, 인간을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에, 반인반신의 다른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사자의 운명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메데이아는 매우 극단적인 능력과 성품을 보여준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가지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청동 황소들과 뱀의 이빨에서 태어난 전사들은 물론 크레테 섬을 지키던 청동인간 탈로스와 같이 무시무시한 적들을 모두 마법으로 제압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동생을 토막 내어 죽이거나, 친자식들을 살해하는 등 도덕적 측면에서 큰 결함을 동시에 노출한다.
메데이아는 반영웅이다
메데이아가 갖지 못한 영웅적 기질. 메데이아가 영웅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영웅상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결여하고 있는 영웅적 요소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요소다. 그것들은 각기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고 ‘삶의 절정기에서 완벽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불멸의 영광을 완성’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메데이아의 삶은 그 두 사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이아손과 헤어진 후 아테네와 콜키스를 거쳐 아시아로 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는가 하면, 살인도 계속해서 저지른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영웅에게 어울리는 올바른 명예나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죽음을 통해 불멸의 영광을 성취하려는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갖지 못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요소는 공통적으로 삶의 목표와 관련되어 있다. 영웅은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히 고정불변의 상태로 존재하는 식으로는 불사를 이룰 수는 없다. 그것은 신들이 불사하는 방법이다. 그 대신 영웅들은 인간적인 수준에서 실현할 수 있는 차선의 불사를 추구한다. 영웅은 명예와 영광을 획득함으로써 시인의 노래에 기록되고, 노래 속에 기록됨으로써 불멸의 기억으로 남아 불사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런 방식의 불사에서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바로 명예와 영광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스스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영웅은 나와 타자가 모두 ‘좋다’고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므로 영웅에게는 보편적 선을 지향할 수 있는 윤리·도덕적 반성능력이 반드시 요구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메데이아에게는 좋음과 나쁨에 관한 윤리·도덕적 반성능력이 없거나 최소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는데 결정적일 만큼 강력하지 못했고 당연히 보편적 선의 개념을 올바르게 지향할 수도 없었다. 메데이아가 자랑하는 지혜와 영리함은 올바른 목적을 추구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도구적 이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만 관여할 뿐, 무엇이 참으로 올바른 방향이며 좋은 목적인가에 대해서 알려주지 못한다. 메데이아는 지성적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도덕적 미덕은 결여하고 있다. 윤리·도덕적 반성능력의 결핍은 그녀로 하여금 보편적인 선과 진정한 좋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고, 영웅이라면 응당 추구해야 할 명예와 영광을 스스로도 추구하지 않을뿐더러, 절정기에 맞이하는 완벽한 죽음으로 불멸의 영광을 얻어 노래 속에 기록되고 기억의 형태로 불사하려는 노력 또한 그녀에게서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메데이아가 희랍의 전형적인 영웅상에서 벗어난 부분이자 그녀를 반영웅적 인물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다.
남성들의 세상 속에서 여성을 대변하는 반영웅 메데이아
고대 희랍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매우 억압받는 존재였다. 혼인은 물론 바깥출입조차 남성의 허가가 필요했고 시민권도 부여받을 수 없었다. 메데이아는 그러한 고대 희랍의 성차별적 문화의 부당함에 대해 거침없이 저항하고 폭로하는 강력한 여성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여신 헤카테의 추종자로서 마법에 능통하고 각종 계략들을 능란하게 사용함으로써, 행동하는 여성, 저항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여성은 남성들에 의한 억압 체제의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며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음을 몸소 입증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아손을 따라서 머나먼 타국 코린토스까지 오게 되었지만, 남편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맞게 된 위기상황 속에서, 고대 아테네의 가부장적 성격과 그 약점을 대담하게 고발한다. 작품 초반, 메데이아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부짖으며 여자의 처지를 비관한다. 여자들은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상전으로 모셔야 하고, 남편이 나쁜 사람일 경우에도 함부로 헤어지거나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논거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따진다. 이것은 당시 여성들이라면 모두가 절감하고 있었을 가부장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다. 여성들의 환호가 코러스의 대사에 묻어 나온다. 그들은 시종 메데이아에게 호의를 표하고 친구를 자처하며 이아손에 대한 메데이아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그 어떤 남성 영웅보다 큰 결단과 희생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당당한 여인상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남성 편향적 문화가 팽배한 사회의 관객들로 하여금 여성의 가치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오랜 기간 사회적 약자로 억압받아온 여성들을 훌륭하게 대변하는 반영웅적 인물이었다.
키워드
메데이ㅇ, 반영웅, 복수, 여성, 영웅, 이아손
전후맥락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메데이아가 코린토스에 정착한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을 그리고 있다. 이아손은 코린토스의 공주인 크레우사에게 새장가를 들고자 한다. 메데이아는 여성이자 아내로서 분노하면서도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다. 그때 코린토스의 왕이자 이아손의 새 장인인 크레온이 찾아와 자신의 결정을 통보한다. 메데이아와 그녀의 자식들을 즉시 추방한다는 것이다. 크레온은 메데이아가 두렵다. 지혜롭고 ‘천성이 영리한 여인’인데다 헤카테의 사제로서 마법과 계략에 능한 그녀가 앙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하소연하여 하루의 말미를 얻어내지만, 사실 그 하루는 피의 복수를 위한 시간이다.
크레온이 퇴장한 후, 메데이아의 앞에 이아손이 등장한다. 그는 뻔뻔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코린토스 왕가에 새 장가를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메데이아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고. 출세가 우선인 이아손은 금전적 도움을 약속하지만 메데이아에게는 그마저도 모욕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나 실성할 지경이 된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코린토스 왕가를 저주한다. 그녀는 그들 모두를 죽이고 싶다. 그럴 능력도 있다. 하지만 원수들을 모조리 죽인 다음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복수에 앞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다. 앞날이 막막한 메데이아 앞에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 아테네의 왕 아이게우스가 자식이 없어 고민하던 중 델포이에서 받은 신탁을 트로이젠에 들러 핏테우스에게 묻기 위해 찾아가던 도중 방문한 것이다. 영악한 메데이아는 아이게우스를 홀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테네 망명과 신변의 보호를 약속받는다. 복수의 실천을 망설이게 만든 마지막 걸림돌이 사라지자, 메데이아는 복수를 위한 계략을 짜내어 공개한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다시 불러 거짓으로 사과한 다음 짐짓 간절하게 한 가지 청을 한다. 자신은 추방령을 따라 코린토스를 떠나겠지만, 자식들만큼은 코린토스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새 신부 크레우사를 설득해달라는 것이다. 그 대가로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할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주겠다면서. 그러나 이 선물은 축하가 아니라 파멸의 선물이다. 그녀는 닿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독을 옷과 장신구에 발라서 포장한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크레우사를 찾아가 ‘직접’ 전달하도록 신신당부한다. 시간이 흘러, 선물을 전달한 자식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메데이아도 마냥 기쁘지는 않다. 이제 크레우사가 죽으면 선물을 전달한 아이들과 자신을 죽이러 이아손과 코린토스 인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녀는 극심한 내적 갈등에 빠진다. 메데이아는 자식들을 죽이고 싶다. 그래야 이아손에게 완전한 복수를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죽일 수 없을 것 같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길고 긴 독백 끝에 메데이아는 마침내 자식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집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아이들을 도륙하고 자식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뒤늦게 이아손이 도착하지만, 자식들은 이미 죽었고,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가 보낸 용의 수레에 자식들의 시신을 실은 채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메데이아를 붙잡을 방법이 없었던 이아손은 메데이아에게 욕을 하며 자식들을 돌려달라고 청해보지만,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뒤로 한 채 아테네로 떠나며 작품이 마무리된다.
고전본문
그가 도착하면 저는 그에게 약한 소리를 할 거예요.
내게도 (이아손의 생각이) 똑같이 여겨지고, 당신이
나를 배신하고서 맺으려는 왕실과의 혼인은 경사스럽고
유익하며 훌륭하게 헤아린 것이라고요.
그런 다음 저는 내 아이들이 (여기) 남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할 거예요. 아이들을 적들의 땅에 남김으로써
내 아이들이 적들에게 모욕당하도록 함이 아니라,
왕의 자식을 속임으로써 죽이기 위해서요.
저는 손에 선물을 들려서 아이들을 보낼 거예요.
[신부가 그것을 받으면, 그녀는 죽음을 피할 수 없죠.]
우아한 의복과 도금된 화관을요. 만약 그녀가 장신구를
집어서 피부에 걸치면, (그것들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고, 처녀와 접촉하는 자도 모두 죽일 거예요.
저는 선물들에다 그런 약을 바를 거예요.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776-789.
토론하기
(1) 우리는 소위 ‘수퍼 히어로’에 열광하곤 한다. 최근에는 헤라클레스나 슈퍼맨과 같이 예전부터 우리에게 알려진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히어로들과는 어딘가 많이 다른 히어로들, 예를 들면 데드풀이나 스타로드, 배트맨 등 다른 유형의 영웅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들을 구분할 수 있는 일정한 기준을 세어본 후, 각 집단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지 토론해보자.
(2) 작품 『메데이아』의 주인공인 메데이아도 영웅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거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를 ①에서 논의한 구분에 따라서 평가하고 그 논거를 말해보자.
(3) 에우리피데스는 『메데이아』를 통해서 사회에 어떠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을까? 그녀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대변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현실 속의 다른 어떤 집단을 대변하고 있을까?
해설읽기
메데이아는 오늘날까지 다양한 평가를 듣고 있는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서구 문학사에서 남자를 홀리고 마법에 능하며 결국 그 남자의 삶을 파멸로 이끄는 팜 파탈 혹은 악녀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하지만 한 작품의 어엿한 주인공으로서 강력한 남성 중심적 사회질서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했던 강인한 여인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웅적/반영웅적 면모도 확인할 수 있다.
영웅과 반영웅
전통적인 영웅은 매우 모범적이며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뛰어난 혈통에 능력이 탁월하며 생김새도 준수한데 윤리·도덕적으로도 훌륭하다. 영웅은 문제에 직면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함으로써, 작게는 개인의 영광을 얻고 크게는 공동체의 역경을 해소한다. 즉, 영웅은 개인의 힘으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뛰어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영웅은 영웅주의와 관련된다. 그것은 탁월한 개인이 그렇지 못한 공동체의 구성원들 다수를 올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봉건주의 계급사회에서 상류층 남성들에게 기대되던 모습이다. 계급사회 속에서 권력은 소수의 특권이고 다수가 차지하는 넓은 자리는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이 형성하는 힘의 공백지대인데, 영웅은 힘을 가진 소수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반영웅은 전통 영웅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모든 인물상을 망라한다. 앞서 말했듯이, 전통적인 영웅의 모습에서는 벗어나지만 여전히 영웅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은 물론, 외모나 능력 또는 덕성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소시민도, 모든 면에서 열등한 못난이나 심지어 악당마저도 반영웅적 인물로 취급할 수 있다. 때때로 이런 반영웅적 인물들에 더욱 주목하고 그들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영웅주의와 반대라는 의미에서 반영웅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권력이 다수의 일반 시민으로부터 창출되기 때문에, 반영웅주의가 한결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영웅과 반영웅의 원형은 서구 문명의 출발점인 고대 희랍의 신화와 문학에서 이미 관찰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등이 영웅의 대표적인 사례요, 이 글에서 소개한 악녀의 대명사, 메데이아는 반영웅의 한 예로 말할 수 있겠다. 희랍의 전통적인 영웅상에 비추어 메데이아의 반영웅적 면모를 한층 분명하게 알아보자.
메데이아는 영웅적 인물이다
영웅 아킬레우스에 관한 다른 셀에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전형적인 영웅의 면모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우리는 이를 메데이아의 영웅적 기질과 반영웅적 특성을 가늠하는 준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영웅은 신의 혈통을 가진 신들의 자손이다. · 영웅은 가사자(可死者)이자 필멸자(必滅者)인 인간이다. · 영웅은 비범한 능력을 갖는 동시에 한계와 결함도 보유한다. · 영웅은 삶의 절정기에 완벽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불멸의 영광을 완성한다. |
위에서 마련한 준거들을 가지고 메데이아의 영웅적 측면과 반영웅적 측면을 살펴보자. 먼저 메데이아는 위에서 제시한 영웅의 특성과 유사한 면모를 여럿 보여준다. 우선 그녀는 신들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 메데이아는 티탄 계열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인이기 때문이다.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손녀이자 아이에테스와 오케아노스의 딸 에이뒤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헬리오스는 오케아노스의 딸들 중 하나인 페르세이스와 결합해 아이에테스를 낳았고, 그는 다시 에이뒤아와 만나 메데이아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비록 페르세이스와 에이뒤아 모두 오케아노스와 테튀스의 딸들로 하위 신성인 뉨페였지만, 티탄의 혈통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또 메데이아는 죽을 운명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뉨페였지만, 인간을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에, 반인반신의 다른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사자의 운명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메데이아는 매우 극단적인 능력과 성품을 보여준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가지고 귀환하는 과정에서, 청동 황소들과 뱀의 이빨에서 태어난 전사들은 물론 크레테 섬을 지키던 청동인간 탈로스와 같이 무시무시한 적들을 모두 마법으로 제압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동생을 토막 내어 죽이거나, 친자식들을 살해하는 등 도덕적 측면에서 큰 결함을 동시에 노출한다.
메데이아는 반영웅이다
메데이아가 갖지 못한 영웅적 기질. 메데이아가 영웅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통적인 영웅상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결여하고 있는 영웅적 요소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요소다. 그것들은 각기 ‘명예와 영광을 추구’하고 ‘삶의 절정기에서 완벽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불멸의 영광을 완성’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메데이아의 삶은 그 두 사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이아손과 헤어진 후 아테네와 콜키스를 거쳐 아시아로 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는가 하면, 살인도 계속해서 저지른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영웅에게 어울리는 올바른 명예나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죽음을 통해 불멸의 영광을 성취하려는 의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갖지 못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요소는 공통적으로 삶의 목표와 관련되어 있다. 영웅은 인간이기 때문에 영원히 고정불변의 상태로 존재하는 식으로는 불사를 이룰 수는 없다. 그것은 신들이 불사하는 방법이다. 그 대신 영웅들은 인간적인 수준에서 실현할 수 있는 차선의 불사를 추구한다. 영웅은 명예와 영광을 획득함으로써 시인의 노래에 기록되고, 노래 속에 기록됨으로써 불멸의 기억으로 남아 불사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런 방식의 불사에서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바로 명예와 영광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스스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으로부터 받아야 한다. 따라서 영웅은 나와 타자가 모두 ‘좋다’고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선이 무엇인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명예와 영광이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므로 영웅에게는 보편적 선을 지향할 수 있는 윤리·도덕적 반성능력이 반드시 요구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메데이아에게는 좋음과 나쁨에 관한 윤리·도덕적 반성능력이 없거나 최소한 자신의 행위를 선택하는데 결정적일 만큼 강력하지 못했고 당연히 보편적 선의 개념을 올바르게 지향할 수도 없었다. 메데이아가 자랑하는 지혜와 영리함은 올바른 목적을 추구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도구적 이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만 관여할 뿐, 무엇이 참으로 올바른 방향이며 좋은 목적인가에 대해서 알려주지 못한다. 메데이아는 지성적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도덕적 미덕은 결여하고 있다. 윤리·도덕적 반성능력의 결핍은 그녀로 하여금 보편적인 선과 진정한 좋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고, 영웅이라면 응당 추구해야 할 명예와 영광을 스스로도 추구하지 않을뿐더러, 절정기에 맞이하는 완벽한 죽음으로 불멸의 영광을 얻어 노래 속에 기록되고 기억의 형태로 불사하려는 노력 또한 그녀에게서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메데이아가 희랍의 전형적인 영웅상에서 벗어난 부분이자 그녀를 반영웅적 인물로 분류할 수 있는 이유다.
남성들의 세상 속에서 여성을 대변하는 반영웅 메데이아
고대 희랍의 사회에서 여성들은 매우 억압받는 존재였다. 혼인은 물론 바깥출입조차 남성의 허가가 필요했고 시민권도 부여받을 수 없었다. 메데이아는 그러한 고대 희랍의 성차별적 문화의 부당함에 대해 거침없이 저항하고 폭로하는 강력한 여성으로 나타난다. 그녀는 여신 헤카테의 추종자로서 마법에 능통하고 각종 계략들을 능란하게 사용함으로써, 행동하는 여성, 저항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여성은 남성들에 의한 억압 체제의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며 얼마든지 반항할 수 있음을 몸소 입증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아손을 따라서 머나먼 타국 코린토스까지 오게 되었지만, 남편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맞게 된 위기상황 속에서, 고대 아테네의 가부장적 성격과 그 약점을 대담하게 고발한다. 작품 초반, 메데이아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울부짖으며 여자의 처지를 비관한다. 여자들은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상전으로 모셔야 하고, 남편이 나쁜 사람일 경우에도 함부로 헤어지거나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녀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논거를 들어가며 조목조목 따진다. 이것은 당시 여성들이라면 모두가 절감하고 있었을 가부장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다. 여성들의 환호가 코러스의 대사에 묻어 나온다. 그들은 시종 메데이아에게 호의를 표하고 친구를 자처하며 이아손에 대한 메데이아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단언한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그 어떤 남성 영웅보다 큰 결단과 희생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당당한 여인상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남성 편향적 문화가 팽배한 사회의 관객들로 하여금 여성의 가치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녀는 오랜 기간 사회적 약자로 억압받아온 여성들을 훌륭하게 대변하는 반영웅적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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