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런던에 사는 증권 중개인으로 두 아이를 둔 가장이다. 작품 초반에서 그는 예술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부인과 달리 무미건조해 보이는 삶과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평범한 중년 가장이 갑자기 사라진다. 지인들은 틀림없이 그가 외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친분이 있는 아내의 친구인 소설의 화자는 부인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스트릭랜드을 찾아 나선다. 스트릭랜드를 찾아낸 화자는 그가 외도 때문에 파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화가가 되기 위해서 그곳으로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어려서 그림을 시작해도 화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화자로서는 스트릭랜드의 선택이 허황된 것만 같다. 하지만 화자는 그의 태도에서 순수한 열정을 발견한다. 바로 이 점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화자가 이 인물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화자는 이 기이한 인간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면서도 알 수 없는 그의 매력에 끌려다닌다. 스트로브라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엿보고 온갖 친절을 베풀었으나 그는 그의 매력에 빠진 스트라보의 아내와 같이 살게 된다.
고전본문
나라면 기회들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는 더 이상 젊지 않고, 아내와 두 자녀를 둔 존경받는 지위를 가진 증권 중개업자이다. 내게는 자연스러운 길이겠지만 그에게는 터무니없은 일이다. 나는 꽤 공정한 입장이 되고 싶었다.
“물론 기적은 일어날 수 있고, 당신이 위대한 화가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는 것을 당신도 인정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가서 당신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으면 정말 망친 장사가 될 것입니다.”
“난 그려야 한다니까.” 그는 되풀이했다.
“당신이 고작 삼류 화가 정도 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삶에서 다른 일을 선택해서 그렇게 잘하지 못한다 해도 큰 문제는 안됩니다. 그저 적절한 선에서 일을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다릅니다.”
“당신은 빌어먹을 바보야.”라고 그는 말했다.
“명백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바보짓이 아니라면, 제가 왜 바보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소.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요.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그가 수영을 잘하든 못하든 중요하지 않소, 그는 빠져나와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익사할 것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진정한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 사람 안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강렬한 힘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 힘은 나에게 매우 강하고, 압도적인 어떤 것을 느끼게 했다. 그 힘은 그를 사로잡고 있었고, 말하자면 그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 악마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제12장 中
토론하기
1.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어떤 점에 감동을 받았는가?
2. 우리는 사회적 통념이나 평가 때문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선택을 하기 어려운 경우들을 종종 경험한다. 우리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스트릭랜드의 선택을 비교해보자.
3. 사회적 편견은 우리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기 때문에, 남자이거나 여자이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부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의 폭은 무척 좁아진다. 그런 사회적 편견은 왜 생겨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사랑하는 가족을 버릴 만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숭고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적 소명이나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개인적인 삶을 희생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존경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성취가 가족을 저버릴 만큼 가치가 있는지 묻게 된다. 하지만 소설 전체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에게 예술은 한낱 취향이나 성공의 수단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에게 예술은 종교적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예술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트릭랜드가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 런던 그리고 그곳에서 증권 중개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인물의 기행(奇行)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 그리고 숫자로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 한 가운데서 그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그림에 취미가 있었지만 경제적 가치와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에서 예술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은 사회의 주된 흐름에 끼지 못하고 도태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속물들로 가득한 런던에서 그는 어린 시절 꿈꾸었던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일어났고 그것을 용기 있게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고 가족을 버린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적어도 스트릭랜드를 다음과 같이 변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을 포함한 기성의 제도, 도덕, 가치라는 것은 한낱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에게 문명이란 진실된 삶을 감추고 잘못된 욕망을 위해서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하다. 이는 스트릭랜드의 최종 행선지가 물질문명에 덜 물들어 있는 타이티 섬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그가 물질을 위해서 예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죽기 직전 그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한 것에서도 증명된다.
작품의 화자가 스트릭랜드의 비상식적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그에게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예술에 대한 진실성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장차 얻게 될 돈과 명성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예술가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예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말 그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인물이었고, 이것이 소설의 화자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대목이다.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게 한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우리는 개인적 욕망의 실현 수단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삶에서 발생하는 적지 않은 문제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친구, 가족, 종교적 대상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을 수단으로 여기는 순간 삶은 질서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어떤 사상가는 수단과 목적의 전도 현상을 배와 배의 종착지인 고향을 뒤바꾸어 생각하는 것에 비유한다. 어떤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타고 가는 배는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배가 제공해 주는 여러 유익들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누리는 배에서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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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런던에 사는 증권 중개인으로 두 아이를 둔 가장이다. 작품 초반에서 그는 예술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부인과 달리 무미건조해 보이는 삶과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평범한 중년 가장이 갑자기 사라진다. 지인들은 틀림없이 그가 외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 친분이 있는 아내의 친구인 소설의 화자는 부인의 부탁을 받고 파리로 스트릭랜드을 찾아 나선다. 스트릭랜드를 찾아낸 화자는 그가 외도 때문에 파리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화가가 되기 위해서 그곳으로 떠났던 것이다. 하지만 어려서 그림을 시작해도 화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화자로서는 스트릭랜드의 선택이 허황된 것만 같다. 하지만 화자는 그의 태도에서 순수한 열정을 발견한다. 바로 이 점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화자가 이 인물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화자는 이 기이한 인간에 대해 불쾌감을 가지면서도 알 수 없는 그의 매력에 끌려다닌다. 스트로브라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는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엿보고 온갖 친절을 베풀었으나 그는 그의 매력에 빠진 스트라보의 아내와 같이 살게 된다.
고전본문
나라면 기회들이 있다고 하겠지만, 그는 더 이상 젊지 않고, 아내와 두 자녀를 둔 존경받는 지위를 가진 증권 중개업자이다. 내게는 자연스러운 길이겠지만 그에게는 터무니없은 일이다. 나는 꽤 공정한 입장이 되고 싶었다.
“물론 기적은 일어날 수 있고, 당신이 위대한 화가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만에 하나라는 것을 당신도 인정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가서 당신이 생각한 대로 되지 않으면 정말 망친 장사가 될 것입니다.”
“난 그려야 한다니까.” 그는 되풀이했다.
“당신이 고작 삼류 화가 정도 된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러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삶에서 다른 일을 선택해서 그렇게 잘하지 못한다 해도 큰 문제는 안됩니다. 그저 적절한 선에서 일을 하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다릅니다.”
“당신은 빌어먹을 바보야.”라고 그는 말했다.
“명백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바보짓이 아니라면, 제가 왜 바보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소. 나도 어쩔 수 없단 말이요.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그가 수영을 잘하든 못하든 중요하지 않소, 그는 빠져나와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익사할 것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진정한 열정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 사람 안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강렬한 힘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그 힘은 나에게 매우 강하고, 압도적인 어떤 것을 느끼게 했다. 그 힘은 그를 사로잡고 있었고, 말하자면 그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정말 악마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제12장 中
토론하기
1. 화자는 스트릭랜드의 어떤 점에 감동을 받았는가?
2. 우리는 사회적 통념이나 평가 때문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선택을 하기 어려운 경우들을 종종 경험한다. 우리의 순응주의적 태도와 스트릭랜드의 선택을 비교해보자.
3. 사회적 편견은 우리의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기 때문에, 남자이거나 여자이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부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의 폭은 무척 좁아진다. 그런 사회적 편견은 왜 생겨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사랑하는 가족을 버릴 만큼 그림을 그리는 것이 숭고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적 소명이나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개인적인 삶을 희생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존경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성취가 가족을 저버릴 만큼 가치가 있는지 묻게 된다. 하지만 소설 전체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그에게 예술은 한낱 취향이나 성공의 수단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에게 예술은 종교적 진리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예술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던 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스트릭랜드가 당시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 런던 그리고 그곳에서 증권 중개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인물의 기행(奇行)을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세상 그리고 숫자로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 한 가운데서 그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그림에 취미가 있었지만 경제적 가치와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회에서 예술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은 사회의 주된 흐름에 끼지 못하고 도태되는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속물들로 가득한 런던에서 그는 어린 시절 꿈꾸었던 순수한 예술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일어났고 그것을 용기 있게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고 가족을 버린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적어도 스트릭랜드를 다음과 같이 변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을 포함한 기성의 제도, 도덕, 가치라는 것은 한낱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 그에게 문명이란 진실된 삶을 감추고 잘못된 욕망을 위해서 조작해 낸 것에 불과하다. 이는 스트릭랜드의 최종 행선지가 물질문명에 덜 물들어 있는 타이티 섬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그가 물질을 위해서 예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죽기 직전 그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한 것에서도 증명된다.
작품의 화자가 스트릭랜드의 비상식적 행동에 분개하면서도 그에게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예술에 대한 진실성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술 활동을 하면서도 장차 얻게 될 돈과 명성을 기대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예술가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스트릭랜드는 예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말 그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인물이었고, 이것이 소설의 화자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대목이다. 비단 예술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욕망은 우리와 관계된 모든 것을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게 한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우리는 개인적 욕망의 실현 수단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삶에서 발생하는 적지 않은 문제들은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친구, 가족, 종교적 대상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들을 수단으로 여기는 순간 삶은 질서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어떤 사상가는 수단과 목적의 전도 현상을 배와 배의 종착지인 고향을 뒤바꾸어 생각하는 것에 비유한다. 어떤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타고 가는 배는 수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배가 제공해 주는 여러 유익들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는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누리는 배에서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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