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에뤽시마코스는 연설을 마치면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이 멈췄음을 알린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뤽시마코스의 연설에 대해서 평을 남기기에 앞서 그의 처방에 대해서 놀랍다고 말한다. 듣기에 따라서 칭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묘한 어법으로 말이다. 이제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뤽시마코스의 순서를 이어받아 찬양연설을 시작해야 한다. 만약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뤽시마코스의 연설이 탐탁지 않았다면 그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에뤽시마코스보다 더 그럴 듯하고 멋진 연설을 들려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뤽시마코스처럼 자연학적 전문지식을 내세울 수도 없고 파이드로스처럼 소피스트 수사술적 논변을 구사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해서는 경쟁력이 부족하다. 순수 ‘문과적인’ 인간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 최고의 희극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연설들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 에뤽시마코스, 자네와 파우사니아스가 말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할 생각이야.” 그렇게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시작된다. (플라톤, 『향연』, 189c2-4.)
고전본문
일단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그것에 대해 벌어진 재앙에 대해서 알아야 하네. 왜냐하면 오래 전 우리들의 본성은 지금과 같지 않고 달랐거든. 우선 인간들의 성은 현재는 둘이지만 그때는 셋이었다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세 번째 것은 그 둘이 조합된 것이었는데, 이름만 남아있고 그 자체는 사라져버렸지. 개별적인 인간들의 전체적인 형태는 등과 옆구리가 붙어 둥근 구체였는데,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었고 다리도 마찬가지였으며 원통 모양의 목 위에는 전체적으로 닮아있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네. 하나의 머리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서로 다른 두 얼굴이 있었고 귀는 네 개에 치부는 둘이었지. 그리고 다른 것들은 모두 그것들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형태였고. 그런데 그들은 힘과 활력이 무시무시했고 엄청난 생각을 갖게 되어 신들을 공격하기 이르렀다네. 제우스는 어렵게 생각을 짜내어 말했지. “어떻게 하면 인간들을 한결 쇠약해져서 방종을 멈추게 만들 수 있을지 내게 어떤 계획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그들 각각을 둘로 쪼갤 것이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인간들이 한결 약해질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적으로 많아져서 우리에게 더 쓸모 있게 될 것이야. 그들은 두 다리로 걸어 다니게 되겠지. 만약 그래도 여전히 방종하게 굴며 조용히 굴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둘로 쪼개리라. 다리 하나로 깡충깡충 걷도록.
그러자 본성이 두 개로 쪼개졌기 때문에, 각각의 반쪽은 자신의 반쪽과 다시 결합되기를 열망했고 서로 팔로 휘감아 안고서 뒤엉켜 다시 하나가 되기만을 원할 뿐, 결코 서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 굶주려서 혹은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죽어갔네. 그러자 제우스는 연민을 느끼고 다른 방법을 찾아 그들의 치부를 앞쪽으로 옮겨놓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상대방에 의해서 생명의 잉태가 생겨나게 되었다네. 이렇게 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을 만날 경우 성적인 결합과 함께 자손을 낳아 종족을 유지하고, 남성이 남성을 만날 경우에도 어쨌든 함께함에서 얻는 만족감은 갖게 되어 결합을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가 여타의 삶을 돌볼 수 있게도 되었지. 그래서 그토록 오래 전부터 서로에 대한 사랑이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은 옛 본성을 모아 주고 둘에서 하나를 만들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려 노력한다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부절들이야.
[출전] 플라톤, 『향연』, 189d5-191d2 passim.
토론하기
(1) 아리스토파네스는 연설에 앞서 에뤽시마코스에게 자신은 기존의 연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할 생각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파이드로스의 연설과 비교할 때,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2)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기원을 원초인간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기발하고 재미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이야기에 나타난 사랑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이야기에 드러난 사랑의 한계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3)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원초인간 이야기를 참고하여 자유롭게 말해보자.
해설읽기
뮈토스와 로고스
아리스토파네스는 연설에 앞서 자신은 에뤽시마코스나 파우사니아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다른 방식’이란 무엇일까. 그의 연설이 나머지 연설들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이 ‘로고스λόγος’가 아니라 ‘뮈토스μῦθος’라는 점이다.
로고스는 에뤽시마코스와 파우사니아스 등 다른 연사들이 취하고 있는 형태의 설명 방식으로서 입증 책임이 화자 자신에게 주어지는 글과 말을 의미한다. 희랍어 ‘로고스λόγος’는 설명, 이성, 추론 등을 가리키는 명사로서 그 외연이 무척이나 넓은 말인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성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생각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로고스적 사유의 형태의 한 사례로 ‘소크라테스는 죽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고 사람은 모두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논증을 들 수 있다. 누군가 어떤 결론을 내세울 경우, 그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는 일도 그의 몫이 된다. 이때 그의 논증은 제시된 근거가 참되고 논증 전체가 형식적으로 보편·타당해야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로고스적 사유는 합리성과 엄밀성을 지향하며 이를 통해 인류는 철학과 과학을 갖게 되었다. 반면, 뮈토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취하고 있는 형태의 설명 방식이며 화자에게 입증 책임이 주어지지 않는 글과 말을 일컫는다. ‘뮈토스μῦθος’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진실이나 논리적 증명과 관계없는 이야기도 포함된다. 시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뮈토스의 한 예시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는 한 마리의 사자’라고 노래하지만 이 명제가 논리적 참일 리는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영웅 아킬레우스는 야생동물이 아니잖은가. 그러나 어떤 이가 위 구절을 인용하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꺼내도 ‘당신 정신 나갔군! 그가 사자였다는 것을 증명해보시오!’하며 문제 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입증 책임이 화자에게 있지도 않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참·거짓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 위 사례의 경우라면 아킬레우스가 사자만큼 용맹스러웠다는 – 지금까지 연설에 나섰던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 그리고 에뤽시마코스가 모두 주장에 대한 입증의 책임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로고스적 방식의 연설을 보여줬다면, 아리스토파네스는 입증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한결 운치가 있으면서도 매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입증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로운 뮈토스적 방식의 연설을 보여준다.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불행한 세계
아리스토파네스가 들려주는 사랑이야기는 『향연』이 남긴 최고의 히트 상품일 것이다. 이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이나 관련 신화보다도 원초인간 이야기가 더 유명하니 말이다. 뮤지컬로도 유명한 영화 『헤드윅』에서는 주인공들이 『향연』의 원초인간 이야기를 주제로 한 노래인 ‘Origin of Love’를 불러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 이야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사랑은 대단히 낭만적으로 보인다. 에로스가 하나가 되려는 욕구라고 할 때, 그 욕망의 대상은 이 세계에 유일하다. 에로스는 유일한 상대방이 가진 고유한 개별성에 대한 지향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반쪽으로 오직 한 명의 운명적 사랑의 대상을 가지고 있고 그 운명의 상대와 만나 에로스를 통해 단지 성적 결합이 아니라 본성의 회복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꾀하게 된다. 달리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빈 곳을 상대방의 존재로 채움으로써 본성을 회복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선인 행복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세계관이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그곳에는 모태솔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세계관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매우 행복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왜냐하면 만약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될 경우, 우리는 우리가 가진 매우 당연하면서 중요한 믿음 한 가지를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은 자족적인 것으로서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행복은 인간이 지향할 수 있는 가장 큰 좋음이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하려고 하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행복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행복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열심히 살아갈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힘들게 뭐 하러 열심히 살겠는가. 그런데 원초인간 이야기에서 인간의 행복은 노력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있다. 그곳에서 행복의 핵심 조건은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인데,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솔로도 없지만 커플도 없는 외로운 세상.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이야기 속 세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서는 불리하지 않을까.
키워드
사랑, 쉼포지움,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 플라톤, 향연
전후맥락
에뤽시마코스는 연설을 마치면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이 멈췄음을 알린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뤽시마코스의 연설에 대해서 평을 남기기에 앞서 그의 처방에 대해서 놀랍다고 말한다. 듣기에 따라서 칭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묘한 어법으로 말이다. 이제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뤽시마코스의 순서를 이어받아 찬양연설을 시작해야 한다. 만약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뤽시마코스의 연설이 탐탁지 않았다면 그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에뤽시마코스보다 더 그럴 듯하고 멋진 연설을 들려주는 것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뤽시마코스처럼 자연학적 전문지식을 내세울 수도 없고 파이드로스처럼 소피스트 수사술적 논변을 구사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해서는 경쟁력이 부족하다. 순수 ‘문과적인’ 인간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 최고의 희극시인이다. 그는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동시에 지금까지의 연설들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 에뤽시마코스, 자네와 파우사니아스가 말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말할 생각이야.” 그렇게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 시작된다. (플라톤, 『향연』, 189c2-4.)
고전본문
일단 우리는 인간의 본성과 그것에 대해 벌어진 재앙에 대해서 알아야 하네. 왜냐하면 오래 전 우리들의 본성은 지금과 같지 않고 달랐거든. 우선 인간들의 성은 현재는 둘이지만 그때는 셋이었다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세 번째 것은 그 둘이 조합된 것이었는데, 이름만 남아있고 그 자체는 사라져버렸지. 개별적인 인간들의 전체적인 형태는 등과 옆구리가 붙어 둥근 구체였는데, 네 개의 팔을 가지고 있었고 다리도 마찬가지였으며 원통 모양의 목 위에는 전체적으로 닮아있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네. 하나의 머리에 반대 방향을 향하는 서로 다른 두 얼굴이 있었고 귀는 네 개에 치부는 둘이었지. 그리고 다른 것들은 모두 그것들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형태였고. 그런데 그들은 힘과 활력이 무시무시했고 엄청난 생각을 갖게 되어 신들을 공격하기 이르렀다네. 제우스는 어렵게 생각을 짜내어 말했지. “어떻게 하면 인간들을 한결 쇠약해져서 방종을 멈추게 만들 수 있을지 내게 어떤 계획이 떠올랐다. 나는 이제 그들 각각을 둘로 쪼갤 것이다. 그러면 한편으로는 인간들이 한결 약해질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적으로 많아져서 우리에게 더 쓸모 있게 될 것이야. 그들은 두 다리로 걸어 다니게 되겠지. 만약 그래도 여전히 방종하게 굴며 조용히 굴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둘로 쪼개리라. 다리 하나로 깡충깡충 걷도록.
그러자 본성이 두 개로 쪼개졌기 때문에, 각각의 반쪽은 자신의 반쪽과 다시 결합되기를 열망했고 서로 팔로 휘감아 안고서 뒤엉켜 다시 하나가 되기만을 원할 뿐, 결코 서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 굶주려서 혹은 다른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죽어갔네. 그러자 제우스는 연민을 느끼고 다른 방법을 찾아 그들의 치부를 앞쪽으로 옮겨놓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상대방에 의해서 생명의 잉태가 생겨나게 되었다네. 이렇게 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을 만날 경우 성적인 결합과 함께 자손을 낳아 종족을 유지하고, 남성이 남성을 만날 경우에도 어쨌든 함께함에서 얻는 만족감은 갖게 되어 결합을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가 여타의 삶을 돌볼 수 있게도 되었지. 그래서 그토록 오래 전부터 서로에 대한 사랑이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은 옛 본성을 모아 주고 둘에서 하나를 만들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려 노력한다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한 인간의 부절들이야.
[출전] 플라톤, 『향연』, 189d5-191d2 passim.
토론하기
(1) 아리스토파네스는 연설에 앞서 에뤽시마코스에게 자신은 기존의 연사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할 생각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파이드로스의 연설과 비교할 때,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2)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기원을 원초인간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기발하고 재미있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이야기에 나타난 사랑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이야기에 드러난 사랑의 한계는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3)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원초인간 이야기를 참고하여 자유롭게 말해보자.
해설읽기
뮈토스와 로고스
아리스토파네스는 연설에 앞서 자신은 에뤽시마코스나 파우사니아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다른 방식’이란 무엇일까. 그의 연설이 나머지 연설들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그것이 ‘로고스λόγος’가 아니라 ‘뮈토스μῦθος’라는 점이다.
로고스는 에뤽시마코스와 파우사니아스 등 다른 연사들이 취하고 있는 형태의 설명 방식으로서 입증 책임이 화자 자신에게 주어지는 글과 말을 의미한다. 희랍어 ‘로고스λόγος’는 설명, 이성, 추론 등을 가리키는 명사로서 그 외연이 무척이나 넓은 말인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성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생각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로고스적 사유의 형태의 한 사례로 ‘소크라테스는 죽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고 사람은 모두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와 같은 논증을 들 수 있다. 누군가 어떤 결론을 내세울 경우, 그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는 일도 그의 몫이 된다. 이때 그의 논증은 제시된 근거가 참되고 논증 전체가 형식적으로 보편·타당해야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로고스적 사유는 합리성과 엄밀성을 지향하며 이를 통해 인류는 철학과 과학을 갖게 되었다. 반면, 뮈토스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취하고 있는 형태의 설명 방식이며 화자에게 입증 책임이 주어지지 않는 글과 말을 일컫는다. ‘뮈토스μῦθος’는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에는 진실이나 논리적 증명과 관계없는 이야기도 포함된다. 시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뮈토스의 한 예시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는 한 마리의 사자’라고 노래하지만 이 명제가 논리적 참일 리는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영웅 아킬레우스는 야생동물이 아니잖은가. 그러나 어떤 이가 위 구절을 인용하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꺼내도 ‘당신 정신 나갔군! 그가 사자였다는 것을 증명해보시오!’하며 문제 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입증 책임이 화자에게 있지도 않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참·거짓이 아니라 그 이면에 담긴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 위 사례의 경우라면 아킬레우스가 사자만큼 용맹스러웠다는 – 지금까지 연설에 나섰던 파이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 그리고 에뤽시마코스가 모두 주장에 대한 입증의 책임이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로고스적 방식의 연설을 보여줬다면, 아리스토파네스는 입증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한결 운치가 있으면서도 매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입증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로운 뮈토스적 방식의 연설을 보여준다.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불행한 세계
아리스토파네스가 들려주는 사랑이야기는 『향연』이 남긴 최고의 히트 상품일 것이다. 이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이나 관련 신화보다도 원초인간 이야기가 더 유명하니 말이다. 뮤지컬로도 유명한 영화 『헤드윅』에서는 주인공들이 『향연』의 원초인간 이야기를 주제로 한 노래인 ‘Origin of Love’를 불러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 이야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사랑은 대단히 낭만적으로 보인다. 에로스가 하나가 되려는 욕구라고 할 때, 그 욕망의 대상은 이 세계에 유일하다. 에로스는 유일한 상대방이 가진 고유한 개별성에 대한 지향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반쪽으로 오직 한 명의 운명적 사랑의 대상을 가지고 있고 그 운명의 상대와 만나 에로스를 통해 단지 성적 결합이 아니라 본성의 회복을 통해서 자기완성을 꾀하게 된다. 달리 말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빈 곳을 상대방의 존재로 채움으로써 본성을 회복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선인 행복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세계관이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그곳에는 모태솔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세계관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면 매우 행복하지 않을까? 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왜냐하면 만약 이 모든 것이 현실이 될 경우, 우리는 우리가 가진 매우 당연하면서 중요한 믿음 한 가지를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복은 자족적인 것으로서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행복은 인간이 지향할 수 있는 가장 큰 좋음이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어떤 것을 하려고 하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행복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행복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행복이 우리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열심히 살아갈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힘들게 뭐 하러 열심히 살겠는가. 그런데 원초인간 이야기에서 인간의 행복은 노력의 범위를 한참 벗어나있다. 그곳에서 행복의 핵심 조건은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인데,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솔로도 없지만 커플도 없는 외로운 세상. 아리스토파네스의 원초인간 이야기 속 세계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서는 불리하지 않을까.
키워드
사랑, 쉼포지움, 아리스토파네스, 에로스, 플라톤,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