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애덤 스미스는 이기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고 번영하게 되는지를 연구했다. 그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규범은 신의 계시나 이성의 명령이 아니라, 감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상상력을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덕에 인간의 동물적 격정과 이기적인 본성은 제어된다고 말한다. 아래 본문에서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사회 질서 토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전본문
육체의 눈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물들은 그것들의 실제 크기가 아니라 그 사물들의 위치에 따라서 크거나 작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자연이 부여한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이라는 기관들의 결점들을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바로잡는다. 현재 내 위치에서 거대한 초원과 숲 그리고 멀리 있는 산의 풍경은 기껏해야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자리 옆의 작은 창문에 들어갈 정도로 보이고, 내가 앉아 있는 방보다도 적게 보인다. 상상을 통해 나 자신을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만 큰 사물들과 작은 사물들 사이에서 올바른 비교를 할 수 있다. 다른 자리에서 나는 거의 같은 거리에서 두 대상을 살펴볼 수 있고, 그것들의 실제 크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습관과 경험 덕에 나는 이런 일을 아주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않는다. 만일 사물들의 실제 크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이 그 대상들을 부풀리고 확대시키지 않았다면, 멀리 있는 그 사물들이 얼마나 눈에 적게 보일 것인지 완전히 확신하기 전까지 어느 정도는 시각의 원리에 반드시 익숙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타고난 격정들 탓에 우리 자신의 매우 작은 이익을 잃거나 얻는 것은 우리와 특별한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보다 엄청나게 더 중요해 보이거나, 훨씬 강렬한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훨씬 더 강렬한 욕구나 혐오를 일으킨다. 그 사람의 이익들이 이러한 위치에서 살펴지는 한 우리의 이익과 결코 균형을 이룰 수 없고, 그 사람에게 아무리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결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대립하는 이익들 사이에 올바른 비교를 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입장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서도 그리고 그 사람의 자리에서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도 그 사람의 눈으로도 보아서는 안 되고, 두 사람 누구와도 관련이 없고 우리 사이에서 공평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제3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도, 습관과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행위를 매우 쉽고 간편하게 하는 법을 배우게 되어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만일 적정성과 정의에 대한 의식이 우리의 감정들의 자연적 불평등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이웃의 가장 큰 관심사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이익을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상대방과 관련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얼마나 적게 영향을 받는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역시 약간의 자기 성찰과 철학이 필요하다.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 제3부 제3장, 「양심의 영향력과 권위」 中에서
토론하기
(1) 윗글에서 육체적 시각은 정신의 태도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이 비유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2) 정서적인 유대나 이해 관계 때문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던 경험을 말해 봅시다.
(3) 스미스가 말하는 제3자의 시각과 동양문화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개념을 비교하여 생각해 봅시다.
해설읽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어떻게 해서 인간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면서 붕괴되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와 씨름한 학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애덤 스미스(Adam Smith)이다. 경제학의 시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을 도덕 철학자로 이해했다.-그가 살던 때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없었다. 그는 인간의 감정에 주목하면서 도덕적 규범의 저변에 칭찬과 비난에 대한 감정적 반응, 타인에 대한 자애심, 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 공감 능력과 같은 감정적 요인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적인 격정(激情: passion)에 지배되고 있으며, 남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재산과 권력을 추구한다. 만일 모든 인간이 이렇듯 자신의 욕구, 허영심,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며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라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생각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스미스가 경험적으로 관찰한 인간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스미스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행복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는 그가 인간이 천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은 ‘동감’(同感: sympathy) 능력에 의해서 억제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동감이란 단순히 타인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될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 우리가 어떤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할 때, 그 사람과 우리 사이에 연대감이 형성된다. 반대로 어떤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무관심할 때, 그 타인과 우리 사이는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스미스가 말하는 동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에 함께 반응하는 능력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동감은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제3자의 입장에 대한 동감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얻었을 때, 그 이득이 부정의한 이득일 경우라도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이때 일어나는 동감은 올바른 동감이 아니다. 만일 우리와 가깝지 않은 제3자가 그 이득을 본다면, 그때 일어나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분노일 것이다. 스미스가 말하는 동감이란 이 제3자의 감정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이 제3자를 스미스는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 또는 양심(良心)이라고 부른다.
위의 글에서 스미스는 육체적 눈의 오류는 상상력을 통해 위치를 바꾸어 볼 수 있는 태도 전환 그리고 시각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교정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감정과 욕구에서 발생하는 오류도 상상력과 자기 성찰 능력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태도 전환 능력은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공평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잘못된 행위가 비난받을 만한 행위임을 인식하게 하여 비도덕적 행위를 제어할 수 있게 해 준다. 공자(孔子)의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己所不欲勿施於人, <논어>, 「위령공」)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자로서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오히려 전체 사회의 부를 증대시킨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그가 인간의 이기심 자체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실 그가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공평한 관찰자가 이기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인간 사회에 정의와 질서를 가져다주고, 인간의 이기적인 추구는 바로 이 정의로운 질서 안에서만 용인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그의 국부론(國富論)의 철학적 기초로 자리를 잡고 있다.
키워드
공정한 관찰자, 동감, 상상력, 이기심, 정의
전후맥락
애덤 스미스는 이기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가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고 번영하게 되는지를 연구했다. 그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도덕적 규범은 신의 계시나 이성의 명령이 아니라, 감정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특히 상상력을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덕에 인간의 동물적 격정과 이기적인 본성은 제어된다고 말한다. 아래 본문에서 스미스는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사회 질서 토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전본문
육체의 눈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물들은 그것들의 실제 크기가 아니라 그 사물들의 위치에 따라서 크거나 작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자연이 부여한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는 것에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이라는 기관들의 결점들을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바로잡는다. 현재 내 위치에서 거대한 초원과 숲 그리고 멀리 있는 산의 풍경은 기껏해야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자리 옆의 작은 창문에 들어갈 정도로 보이고, 내가 앉아 있는 방보다도 적게 보인다. 상상을 통해 나 자신을 다른 자리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만 큰 사물들과 작은 사물들 사이에서 올바른 비교를 할 수 있다. 다른 자리에서 나는 거의 같은 거리에서 두 대상을 살펴볼 수 있고, 그것들의 실제 크기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습관과 경험 덕에 나는 이런 일을 아주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않는다. 만일 사물들의 실제 크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이 그 대상들을 부풀리고 확대시키지 않았다면, 멀리 있는 그 사물들이 얼마나 눈에 적게 보일 것인지 완전히 확신하기 전까지 어느 정도는 시각의 원리에 반드시 익숙해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의 이기적이고 타고난 격정들 탓에 우리 자신의 매우 작은 이익을 잃거나 얻는 것은 우리와 특별한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보다 엄청나게 더 중요해 보이거나, 훨씬 강렬한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훨씬 더 강렬한 욕구나 혐오를 일으킨다. 그 사람의 이익들이 이러한 위치에서 살펴지는 한 우리의 이익과 결코 균형을 이룰 수 없고, 그 사람에게 아무리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결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대립하는 이익들 사이에 올바른 비교를 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입장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리에서도 그리고 그 사람의 자리에서도, 그리고 우리 자신의 눈으로도 그 사람의 눈으로도 보아서는 안 되고, 두 사람 누구와도 관련이 없고 우리 사이에서 공평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제3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도, 습관과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행위를 매우 쉽고 간편하게 하는 법을 배우게 되어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만일 적정성과 정의에 대한 의식이 우리의 감정들의 자연적 불평등을 교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이웃의 가장 큰 관심사에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 이익을 취해야 하는지 그리고 상대방과 관련한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의해서 우리가 얼마나 적게 영향을 받는지를 확신하기 위해서 역시 약간의 자기 성찰과 철학이 필요하다.
-애덤 스미스, <도덕 감정론> 제3부 제3장, 「양심의 영향력과 권위」 中에서
토론하기
(1) 윗글에서 육체적 시각은 정신의 태도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 이 비유를 통해 저자가 말하고 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2) 정서적인 유대나 이해 관계 때문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했던 경험을 말해 봅시다.
(3) 스미스가 말하는 제3자의 시각과 동양문화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개념을 비교하여 생각해 봅시다.
해설읽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정의에 반대할 사람은 없겠지만, 어떻게 해서 인간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면서 붕괴되지 않는지 그 이유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와 씨름한 학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애덤 스미스(Adam Smith)이다. 경제학의 시조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자신을 도덕 철학자로 이해했다.-그가 살던 때에는 경제학이라는 학문은 없었다. 그는 인간의 감정에 주목하면서 도덕적 규범의 저변에 칭찬과 비난에 대한 감정적 반응, 타인에 대한 자애심, 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 공감 능력과 같은 감정적 요인이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적인 격정(激情: passion)에 지배되고 있으며, 남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재산과 권력을 추구한다. 만일 모든 인간이 이렇듯 자신의 욕구, 허영심,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며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 상태라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생각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스미스가 경험적으로 관찰한 인간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스미스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행복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는 그가 인간이 천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은 ‘동감’(同感: sympathy) 능력에 의해서 억제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동감이란 단순히 타인을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 타인의 입장이 될 수 있는 마음을 뜻한다. 우리가 어떤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할 때, 그 사람과 우리 사이에 연대감이 형성된다. 반대로 어떤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무관심할 때, 그 타인과 우리 사이는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스미스가 말하는 동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에 함께 반응하는 능력을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동감은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제3자의 입장에 대한 동감을 의미한다. 가령, 우리와 가까운 사람이 경제적, 사회적 이득을 얻었을 때, 그 이득이 부정의한 이득일 경우라도 함께 기뻐할 수 있다. 이때 일어나는 동감은 올바른 동감이 아니다. 만일 우리와 가깝지 않은 제3자가 그 이득을 본다면, 그때 일어나는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분노일 것이다. 스미스가 말하는 동감이란 이 제3자의 감정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이 제3자를 스미스는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 또는 양심(良心)이라고 부른다.
위의 글에서 스미스는 육체적 눈의 오류는 상상력을 통해 위치를 바꾸어 볼 수 있는 태도 전환 그리고 시각의 원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교정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감정과 욕구에서 발생하는 오류도 상상력과 자기 성찰 능력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태도 전환 능력은 인간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공평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평가할 수 있게 한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잘못된 행위가 비난받을 만한 행위임을 인식하게 하여 비도덕적 행위를 제어할 수 있게 해 준다. 공자(孔子)의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己所不欲勿施於人, <논어>, 「위령공」)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경제학자로서 스미스는 인간의 이기심이 오히려 전체 사회의 부를 증대시킨다는 역설적인 주장을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그가 인간의 이기심 자체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실 그가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은 인간 안에 있는 공평한 관찰자가 이기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인간 사회에 정의와 질서를 가져다주고, 인간의 이기적인 추구는 바로 이 정의로운 질서 안에서만 용인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은 그의 국부론(國富論)의 철학적 기초로 자리를 잡고 있다.
키워드
공정한 관찰자, 동감, 상상력, 이기심,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