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디오티마로부터 에로스의 탄생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소크라테스는 그녀에게 에로스가 신도 아닌 정령이고 아름답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다면, 에로스가 인간에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고 묻는다.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를 향해 에로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러한 에로스를 모든 인간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사실은 연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져 있는 중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고전본문
그리고 내가 말했네. “좋아요, 부인. 훌륭한 말씀이군요. 하지만 에로스가 그런 자라면 사람들에게 어떤 이익을 주나요?”
“내가 이것들 다음으로 당신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왜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겁니까, 소크라테스님과 디오티마님.”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이렇겠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겁니까?” 그녀가 말했네.
그리고 내가 말했네. ‘자기 것이 되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답변은 이러한 질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됩니까?” 그녀가 말했네.
나는 아직 이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는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다네.
“질문을 바꾸어 ‘아름다운 것’ 대신 ‘좋은 것’이라는 말을 사용해 묻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방식으로 제가 묻겠습니다. 자, 소크라테스, 좋은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요?’ 그녀가 이야기했네.
“자기 것이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말했지.
“그런데 좋은 것들이 자기 것이 되면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됩니까?”
“,이것은 한결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는 행복하게 될 겁니다.”
“맞아요. 행복한 사람들은 좋은 것들 소유함으로써 행복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소망과 이 사랑이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모든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 항상 있기를 원한다고 믿으시나요, 아니면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공통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 만일 진정 우리 모두가 동일한 것을 늘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왜 누군가는 사랑을 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녀가 말했네.
“저 또한 놀랐습니다.”
[출전] 플라톤, 『향연』 204b-205b.
토론하기
(1) 인류에게 사랑과 성욕이 본성으로 주어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외로워하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걸까? 본문을 읽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본문을 읽은 다음에는 디오티마의 생각과 비교해보자.
(2) 본문에서 디오티마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무엇이라고 설명하였나? 또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인가 혹은 공통된 것이 아닌가?
해설읽기
디오티마에 따르면 에로스는 불사자인 신도 아니고 가사자인 인간도 아니다. 그는 그들은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자인 정령이다. 그런데 이 정령은 알려진 것과 달리 똑똑하면서도 어딘가 덜 떨어졌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태어나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포로스(방법, 수단)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획득할 계책이 항상 풍부하다. 그러나 어머니가 페니아(결핍)라서 자신이 추구하고 획득한 아름다움을 금방 잃어버린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훌륭한 것)이기도 하니까 에로스는 좋음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자동급수가 되는 밑 빠진 독이랄까.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로부터 에로스의 정체와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에로스를 본성으로 타고나는데, 그런 에로스가 그처럼 덜 떨어졌다면, 우리 인간에게 에로스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다. 확실히 에로스가 그 자체로 아름답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다면 유익할 성 싶지 않아 보인다.
에로스의 궁극적 목적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듣고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지 묻는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란 에로스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것을 타고난 우리 인간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에로스도 우리도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아름다움이 뭘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 걸까.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아름다움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디오티마는 ‘아름다운 것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되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려워하며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자 그녀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묻는다. ‘좋은 것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되나요?’ 이것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과 진정으로 좋은 것은 같은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아름다운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꾼 질문이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한결 쉽게 대답할 수 있다며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에로스의 목적은 행복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고 에로스는 행복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디오티마는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추가한다. 그는 행복이 단순히 곁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곁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에로스의 목적은 행복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에로스를 본성으로 가진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불사의 운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필멸자인 인간이 영원하고 끝나지 않는 불사적 행복을 갖도록 하는 것은 제아무리 방책과 수단의 신 포로스의 아들인 에로스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인간들이 최대한 불사에 참여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인간적 차원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과연 좋음의 영구적 소유 또는 불사적 행복을 위해 에로스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게 될까?
에로스의 공통성 :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중?!
남중‧남고를 다니던 예전의 남학생들은 여자 인간과 친구들의 조우를 외계 문명과 인류 사이의 만남에 준하는 엄청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저 길만 물어보는 경우조차 친구들에게 그런 모습을 들켰다가는 한 달 내내 알나리깔나리 송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마치 자기들은 사랑이나 에로스로부터 완벽하게 멸균 처리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 친구들에게 사랑은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부끄럽지만 부럽기도 한 일탈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일부의 사람만 사랑을 하는 것이고 대개는 사랑이나 에로스가 화강암처럼 식어서 굳어버린 채 살아가는 걸까? 디오티마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디오티마는 사람들 모두가 이미 사랑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좋음과 행복이 자기 것이 되기를 욕구하는데 바로 그러한 욕구가 실상 에로스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움과 좋음이 자기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있을까? 그녀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언어를 좁은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말은 실상 모든 종류의 ‘제작’에 대해서 널리 적용할 수 있지만, 의미의 범위를 좁혀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해서만 작가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사랑’도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대해서 적용할 수 있지만, 그 범위를 좁혀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좋음을 욕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이상 우리 모두는 사랑에 빠져있는 셈인데.
키워드
다이몬, 디오티마, 사랑, 소크라테스, 쉼포지움, 에로스, 정령, 중간자, 플라톤, 향연
전후맥락
디오티마로부터 에로스의 탄생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소크라테스는 그녀에게 에로스가 신도 아닌 정령이고 아름답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다면, 에로스가 인간에게 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고 묻는다.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를 향해 에로스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러한 에로스를 모든 인간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사실은 연인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빠져 있는 중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고전본문
그리고 내가 말했네. “좋아요, 부인. 훌륭한 말씀이군요. 하지만 에로스가 그런 자라면 사람들에게 어떤 이익을 주나요?”
“내가 이것들 다음으로 당신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왜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겁니까, 소크라테스님과 디오티마님.”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이렇겠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무엇을 사랑하는 겁니까?” 그녀가 말했네.
그리고 내가 말했네. ‘자기 것이 되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답변은 이러한 질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됩니까?” 그녀가 말했네.
나는 아직 이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는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다네.
“질문을 바꾸어 ‘아름다운 것’ 대신 ‘좋은 것’이라는 말을 사용해 묻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 방식으로 제가 묻겠습니다. 자, 소크라테스, 좋은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무엇을 사랑하는 걸까요?’ 그녀가 이야기했네.
“자기 것이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말했지.
“그런데 좋은 것들이 자기 것이 되면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됩니까?”
“,이것은 한결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는 행복하게 될 겁니다.”
“맞아요. 행복한 사람들은 좋은 것들 소유함으로써 행복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소망과 이 사랑이 모두에게 공통적이고, 모든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 항상 있기를 원한다고 믿으시나요, 아니면 어떻게 말씀하시나요?”
“이런 식으로 모두에게 공통적이라고 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네.
“소크라테스. 만일 진정 우리 모두가 동일한 것을 늘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왜 누군가는 사랑을 하는데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녀가 말했네.
“저 또한 놀랐습니다.”
[출전] 플라톤, 『향연』 204b-205b.
토론하기
(1) 인류에게 사랑과 성욕이 본성으로 주어져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외로워하다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걸까? 본문을 읽기 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고 본문을 읽은 다음에는 디오티마의 생각과 비교해보자.
(2) 본문에서 디오티마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무엇이라고 설명하였나? 또 그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인가 혹은 공통된 것이 아닌가?
해설읽기
디오티마에 따르면 에로스는 불사자인 신도 아니고 가사자인 인간도 아니다. 그는 그들은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자인 정령이다. 그런데 이 정령은 알려진 것과 달리 똑똑하면서도 어딘가 덜 떨어졌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태어나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포로스(방법, 수단)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획득할 계책이 항상 풍부하다. 그러나 어머니가 페니아(결핍)라서 자신이 추구하고 획득한 아름다움을 금방 잃어버린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훌륭한 것)이기도 하니까 에로스는 좋음도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자동급수가 되는 밑 빠진 독이랄까.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로부터 에로스의 정체와 본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의아해한다. 사람들은 모두가 에로스를 본성으로 타고나는데, 그런 에로스가 그처럼 덜 떨어졌다면, 우리 인간에게 에로스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이다. 확실히 에로스가 그 자체로 아름답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다면 유익할 성 싶지 않아 보인다.
에로스의 궁극적 목적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듣고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지 묻는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란 에로스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것을 타고난 우리 인간을 가리킬 수도 있다. 에로스도 우리도 아름다움을 사랑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아름다움이 뭘 어떻게 되기를 원하는 걸까.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아름다움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디오티마는 ‘아름다운 것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되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어려워하며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자 그녀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묻는다. ‘좋은 것이 자기 것이 될 때, 그에게 무엇이 있게 되나요?’ 이것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과 진정으로 좋은 것은 같은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아름다운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꾼 질문이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한결 쉽게 대답할 수 있다며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에로스의 목적은 행복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고 에로스는 행복이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인데, 디오티마는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추가한다. 그는 행복이 단순히 곁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곁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에로스의 목적은 행복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에로스를 본성으로 가진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인간은 불사의 운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필멸자인 인간이 영원하고 끝나지 않는 불사적 행복을 갖도록 하는 것은 제아무리 방책과 수단의 신 포로스의 아들인 에로스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에로스는 인간들이 최대한 불사에 참여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인간적 차원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 과연 좋음의 영구적 소유 또는 불사적 행복을 위해 에로스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게 될까?
에로스의 공통성 :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중?!
남중‧남고를 다니던 예전의 남학생들은 여자 인간과 친구들의 조우를 외계 문명과 인류 사이의 만남에 준하는 엄청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저 길만 물어보는 경우조차 친구들에게 그런 모습을 들켰다가는 한 달 내내 알나리깔나리 송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했다. 마치 자기들은 사랑이나 에로스로부터 완벽하게 멸균 처리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그 친구들에게 사랑은 극히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부끄럽지만 부럽기도 한 일탈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일부의 사람만 사랑을 하는 것이고 대개는 사랑이나 에로스가 화강암처럼 식어서 굳어버린 채 살아가는 걸까? 디오티마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디오티마는 사람들 모두가 이미 사랑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좋음과 행복이 자기 것이 되기를 욕구하는데 바로 그러한 욕구가 실상 에로스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움과 좋음이 자기 것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만 사랑이라는 말을 쓰고 있을까? 그녀에 의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언어를 좁은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라는 말은 실상 모든 종류의 ‘제작’에 대해서 널리 적용할 수 있지만, 의미의 범위를 좁혀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해서만 작가라는 말을 사용하듯이, ‘사랑’도 행복을 추구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에 대해서 적용할 수 있지만, 그 범위를 좁혀 이성 간의 사랑에 대해서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움과 좋음을 욕구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이상 우리 모두는 사랑에 빠져있는 셈인데.
키워드
다이몬, 디오티마, 사랑, 소크라테스, 쉼포지움, 에로스, 정령, 중간자, 플라톤, 향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