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올륌포스 신들
오늘날의 시각을 가지고 ‘신’의 기준을 세운다면, 올륌포스 신들은 아마도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신보다는 인간들과 훨씬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어딘가 모자라면서 어설프다. 먼저 성품과 능력의 측면에서 인간적이다. 요즘 세상에 어디 가서 신이라고 명함 좀 내밀 수 있으려면 그 존재는 전지‧전능‧전선해야 한다. 하지만 올륌포스 신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신들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데메테르는 자신의 딸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된 사실을 알지 못해서 9일 밤낮을 헤매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탄탈로스가 내놓은 음식이 그의 아들 인간 펠롭스를 요리한 것이라는 점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살점을 베어 먹은 것도 역시 그녀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전능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레스는 신도 아닌 거인족 형제 오토스와 에피알테스에게 패배하여 13개월 동안 청동 항아리에 갇혀야 했다. 제우스라고 언제나 성공하지는 못한다. 신들과 인간들의 왕인 그조차 튀폰이라는 괴물에게 패한 적이 있고 다른 신들의 기습에 포박당한 바 있다. 그럼 올륌포스 신들이 전적으로 선한가? 제우스의 잦은 외도와 난봉꾼 기질을 생각할 때 그가 요즘 세상에 살고 있다면 아마도 전자발찌를 주렁주렁 차고 다녔을 것이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역시 후처의 자식인 아르테미스의 뺨을 후려 치고는 미소 지으며 좋아한다. 육체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저마다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고 아프로디테는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올륌포스 신들은 인간들이 음식을 섭취하고 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라는 신식과 신주를 먹고 마신다. 무기에 찔린 상처에서 피와 유사한 액체를 흘리는 장면도 있다.
신들이 인간적으로 묘사된 이유
이처럼 올륌포스 신들이 인간적으로 묘사되는 까닭은 고대 희랍인들이 그들로서는 이해하고 설명하기 힘들었던 자연의 사물이나 현상 등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미 알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신을 동원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희랍어로 신을 ‘테오스’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놀랍다는 뜻의 ‘타우마제인’에서 온 말이다. 고대 희랍인들은 그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던 대상들마다 신(테오스)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신들 중 상당수가 자연물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다. 헬리오스, 셀레네, 아스테리아, 가이아, 우라노스 등등. 우리야 이런 이름들이 이국적으로 보이지만 희랍인들 입장에서는 그냥 신들을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해신, 달신, 별신, 땅신, 하늘신.’ 더 나아가 자연의 속성을 신의 성격과 연관시켜 이해하기도 했다. 예컨대, 해상무역이 발달했던 그리스에서 바다는 평소에 잔잔하다가도 한 번 폭풍이 불기 시작하면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래서 포세이돈은 불같은 성미를 가지고 있는 신으로 묘사된다.
신과 인간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
고대 희랍인들은 이처럼 신들을 인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묘사했지만, 신과 인간의 경계를 분명하게 했다.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면, 고대 희랍의 종교관에서 인간은 신과 혈통부터 다르다. 희랍 세계에서는 인간이 신의 자손이라거나 그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종류의 종교관이 비주류에 속했다. 희랍인들은 신과 인간의 구분을 상당히 분명하게 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경계선의 기준점은 바로 불멸성이다. 올륌포스 신들은 다수이기 때문에 이미 완전할 수 없다. 자기 외부에 다른 신들이 존재하는 만큼 그 신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희랍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신들은 인간과 달리 불멸‧불사한다는 점이었다. 신들도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지만 그 피는 부패하지 않는 피다.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도 부패하지 않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들에게 탄생과 시작은 있을 수 있지만, 죽음과 종말은 허용되지 않는다. 희랍인들에게는 이것이 신들을 인간들로부터 갈라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 : 에로스가 찾아낸 대안적 방법
디오티마에 의하면 방책의 신 포로스의 아들 에로스가 찾아낸 불사적 행복의 소유를 위한 인간적 차원의 대안은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출산과 분만’이다. 우리의 에로스는 우리로 하여금 좋음의 영구적 소유 또는 불사적 행복을 달성토록 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것 속에서 출산하고 분만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잠시만 들어보시라. 에로스가 불사적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고안한 수단인 ‘아름다운 것 속에서의 출산과 분만’은 다시금 구체적으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육체를 통한 출산과 분만’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을 통한 출산과 분만’이다.
먼저 육체를 통한 출산과 분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로스를 통해 선택하게 되는 불사적 행복의 수단이다. 인간은 어느 정도 육체적 성숙이 이루어지면 이성에게 이끌리고 그런 방식으로 사랑에 애타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방식의 출산과 분만을 통해서는 가사적 자손인 아이를 얻는다. 많은 사람들은 육체를 통한 출산과 분만을 통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불사를 달성하게 되는데, 이 경우 개체의 수준에서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이성 안에서 자신과 최대한 닮은 것을 낳아 죽어서 떠나갈 자신의 빈자리에 남김으로써 종적 수준에서는 불사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치 세포 분열을 통해 기존 세포가 자신의 자리를 새로운 세포에게 남기고 자기 자신은 탈락하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다음은 영혼을 통한 출산과 분만이다. 이것은 육체를 통한 출산과 달리 불사적 자손을 남긴다. 인간이 육체적 성숙의 시기를 지나 정신적인 성숙까지 이루게 되면, 영혼에 있어서도 지적 출산의 욕구를 느끼게 된다. 그러면 그는 자신과 더불어 혹은 자신을 도와 지성적 출산을 할 아름다운 영혼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런 영혼을 만나면 그와 교제하며 출산하길 원했던 종류의 자손을 출산하게 된다. 작곡가 지망생은 명곡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껴 자신을 잘 지도해줄 선생이나 교수를 찾아가 배움으로써 마침내 원하던 명곡을 써내고, 과학자는 좋은 논문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껴 훌륭한 교수나 동료를 찾아가 함께 연구함으로써 끝내 원하던 논문을 쓰게 되는 경우가 바로 영혼을 통한 출산과 분만의 경우에 해당하겠다. 이렇게 탄생한 자손들은 육체적 출산을 통해 낳은 가사적 자손보다 훨씬 수명이 길고 불사적이다. 플라톤의 가사적 자손인 그의 두 아들들은 100년을 한참 채우지 못하고 죽었겠지만, 그의 불사적 자손인 대화편들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승되어 플라톤의 정신을 전해주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