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기를 벗어나 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보면 모두가 똑같은 답을 써내야 하는 국‧영‧수 과목이 중요하다는 것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와 세상이 맺고 있는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예체능 계열의 활동 속에서 더 큰 재미를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음악이나 미술 또는 체육에서 얻는 즐거움은 꼭 직접 체험해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전문적인 예술가나 운동선수의 활동을 관전하는 간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어릴 적에 동경하던 가수나 스포츠 스타가 한두 명씩은 있다. 성악을 좋아해서 소프라노 조수미를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사람도 있고 락 밴드가 멋있어 보여서 영국 밴드 Queen의 앨범을 밤새가며 듣던 사람도 있으며 축구를 좋아해서 데이빗 베컴의 킥을 따라하던 사람도, 농구를 좋아해서 마이클 조던처럼 나도 언젠가 자유투 라인에서 점프해서 덩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덜 흔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내 주위의 어떤 친구들은 바둑기사 조훈현, 만화가 황미나 씨를 좋아해서 직업을 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저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뛰어난 기예를 가진 예술가나 운동선수들의 능력에 대해서 환호하고 열광한다. 그러다가 스스로는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서기 어렵다는 점을 깨달을 즈음, 이 점에 대해서 궁금함을 느끼곤 한다.
‘저 사람의 재능은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저 사람이 가진 능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예술적 재능의 원천에 대한 오늘날의 생각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 문구는 토머스 에디슨이 남긴 명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문구는 경쟁사회 속에서 남들보다 노력하는 자세를 강조하는 말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 어쩌면 이 말이 예술적 재능이 어디로부터 발원하는가에 관한 현대인들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능력을 결정하는 요인에 영감이나 재능 등이 없지는 않겠지만,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고 나아가 더욱 결정적이라는 믿음은, 자기에게 허용된 자유를 타인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마음껏 사용해도 되는 세상에서 태어난 현대의 인류에게는 절대적인 원칙이다. 만약 노력으로 재능을 극복할 수 없고, 그래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의 노력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재능에 따라 전부 결정되어 있고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없지 않을까. 그렇기에 우리는 한 인간을 바라볼 때 가문이나 기질과 같은 선천적 요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태어난 뒤 걸어온 삶의 이력과 같은 후천적 요인들을 통해서 파악할 때 더욱 의미있고 객관적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인격과 능력의 형성에 있어서 재능이나 선천적 요인들보다 노력과 같은 후천적 요인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에디슨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였다고 생각해왔다.
만약 이러한 관점을 예술적 기예의 영역까지 확장한다면, 현대인들은 예술적 능력의 원천에 있어서 재능의 기여를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기술적 훈련과 노력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을 거라고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대 희랍인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런 사람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처음부터 우리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고대 희랍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에디슨의 경우만 하더라도 우리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에디슨이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통해서 강조하려는 메시지가 이른바 ‘노오력’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에디슨은 해당 문구가 기자에 의해 곡해된 인터뷰 문구였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는 노력이 아닌 영감의 중요성이었다고 말하며 인터뷰에서 실제로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1%의 영감이 없다면 99%의 노력은 쓸모가 없다.’
예술적 재능의 원천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
고대 희랍인들도 예술 활동과 관련해서 영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도 각종 예술들을 어떤 앎이나 지식 또는 기술 지혜를 습득한 결과로서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지만, 그에 앞서서는 예술을 선택받은 특정 인간이 인간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로부터 영감을 이어받아 신 지핀 상태가 되어 수행하는 활동이라고 여겼다. 예술적 재능의 원천에 대한 이러한 부류의 생각은 플라톤의 『이온』에 나름대로 세련된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이온』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찾아온 이온과 나눈 대화 끝에 시인이 보여주는 예술적 능력의 원천은 어떤 종류의 앎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적인 영감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것은 이온처럼 대중 교육자로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시인들이 듣기에는 다소 거북한 말이었을 것이다. 당시 시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체로 옛 시인들이 남긴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였고 그러한 이야기는 희랍 대중들에게 삶의 모범과 교훈을 주는 교양으로 여겨졌다. 이런 까닭에 시인들은 앎과 지혜가 풍부하다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소크라테스는 시인인 이온 앞에서, 시인은 앎과 지식을 가지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게 된 것일까? 그것은 둘의 대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동시에 같은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경우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호메로스가 A에 대해서 말하고 이 점에 대해 이온이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이온이 A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헤시오도스가 A에 대해서 노래하더라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자 이온은 호메로스와 다른 시인들이 같은 주제에 대해서 말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어쨌든 자기는 호메로스의 시를 더욱 잘 노래한다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가 이번에는 질문을 바꿔서, 같은 주제 A에 대해서 호메로스와 다른 시인들 중 누가 더 훌륭하게 말하는지 답해줄 수 있냐고 묻는다. 이에 이온은 호메로스가 더 훌륭하게 말한다고 확신에 차서 단언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어이없다는 듯 이온을 타박한다.
“여보시오! 그렇다면 이온은 호메로스와 다른 시인들에 능하다고 우리가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구려. 같은 사람이 같은 주제에 관해 말하는 모든 사람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고,
그리고 사실상 모든 시인은 같은 주제를 다룬다고 그대도 인정하셨으니까요.” (532b-c)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질문과 태도의 배후에는 두 가지 전제가 숨어있다. 하나는 ‘A에 대해서 앎을 가진 사람만이 A에 대해서 말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온이 A에 대해서 앎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A라는 주제에 대해 누가 더 말을 잘하는지 알 수 있다 는 것은 그 사람이 A라는 주제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다. A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 그에 관해 설명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평가 준거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에게 두 외국인이 부르는 애국가를 들려준 다음, 누가 더 애국가를 잘 불렀냐고 물어본다면 한국 사람들은 거의 다 애국가를 알고 있으니까 대부분 정확히 판결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외국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면, 외국인들 중 애국가를 아는 사람은 적을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제대로 판결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이온이 소크라테스의 질문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자신이 옛 시인들이 들려주는 주제들에 대해서 앎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포기해야만 한다. 대중 교육자인 시인으로서, 그 중에서도 대회 우승자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 있지만, 이온은 그렇게 편협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 우기는 일 없이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시인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능력의 원천에 관한 자신의 생각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간추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