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19세기말 유럽의 몇몇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이미 제국주의가 되어 무시무시한 이빨과 발톱으로 세계 각지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유럽의 지식 사회는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치밀하게 무장하고 있었고, 생존경쟁이야말로 자연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이며 결국 강하고 흉포하며, 교활한 자만이 살아남는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다윈의 불독’으로 불리던 헉슬리는 다윈의 생존경쟁 개념을 더욱 좁혀 인류 사회도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88년 헉슬리가 「인간사회에서 생존경쟁」을 발표하였는데, 이를 보고 크로포트킨은 생존경쟁 이론을 철저하게 반박하고 상호부조 사상을 옹호하는 이론을 수립하기로 결심했다. 전반부의 약 100페이지는 주로 동물의 상호부조에 대해, 후반부인 약 250페이지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발견된 상호부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크로포트킨은 이를 통해 인간은 사회로부터 과도한 권력 관계나 억압적인 제도 등을 없앨 수만 있다면 본래의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아름다운 사회를 꾸려나갈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고전 본문’은 맨 처음에 다윈의 후계자들이 다윈을 너무 협소화시켰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실제 자연에서는 상호투쟁과 상호부조가 모두 관찰되며 의미와 중요성에 비춰보자면 도리어 상호부조가 더 중요한 진화의 요인임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초반에 전체적인 큰 틀을 제시하는 대목이다. 이후 1, 2장 「동물의 상호부조」에서 시작해 야만인과 미개인의 상호부조(3, 4장), 중세 도시의 상호부조(5, 6장), 근대인의 상호부조(7, 8)로 책은 마무리된다.
고전본문
수많은 찰스 다윈 추종자들은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해버렸다. 그들의 동물의 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에 주린 개체들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다. (…)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물학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상호 멸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는 투쟁하지 않으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위협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 사실 숲에 한번 들어가 보거나, 동물 사회를 한번 관찰해 보거나 아니면 동물의 삶을 진지하게 다룬 책을 읽어 보았다면, (…) 동물의 삶에서 사회적 생활이 차지하는 부분을 자연주의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자연에서 조화와 평화만을 보게 되지는 않듯이 역시 자연에서 도살장만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루소가 자신의 사상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도외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면, 헉슬리는 정반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루소의 낙관론도 헉슬리의 비관론도 자연을 공정하게 해석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실험실이나 박물관이 아니라 숲이나 목초지에서, 혹은 스텝 지대 나 산악 지대에서 동물을 연구하게 되면 우리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즉, 다양한 종들, 특히 다양한 부류의 동물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엄청나게 다투고 몰살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종이나 적어도 같은 집단에 속한 동물들끼리는 그러한 싸움과 몰살에 상응할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서로를 부양하고 도와주며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회성 역시 상호투쟁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사실의 상대적인 중요도를 대략으로나마 수치로 환산해서 평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서 “끊임없이 서로 싸우는 종들과 아니면 서로 도움을 주는 종들 중에서 어느 쪽이 적자(適者)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에 던진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상호부조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 적자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지며, 각기 자신들의 부류 내에서 최고도로 발달 된 지능과 신체 조직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무수한 사실들을 모두 고려하면, 상호부조야말로 상호투쟁과 맞먹을 정도로 동물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는 듯하다. 아니,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종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도록 보증해주면서 그러한 습성과 성격을 발전하게 해주기 때문에 어쩌면 상호투쟁보다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상호부조론』 1장 초반부 중에서
*헉슬리 : 다윈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고 옹호했던 동물학자. 그래서 ‘다윈의 불도그’라는 별명도 붙을 정도였다.
*적자 : 적합한 자, 생존에 적합한 특징을 가진 자를 말한다.
토론하기
(1) 자연에는 조화와 평화만 있지도 않고 도살장만 있지도 않은데, 왜 “루소는 자신의 사상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도외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헉슬리는 정반대의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유명한 사상가나 과학자들은 왜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걸까요?
(2) “끊임없이 서로 싸우는 종들과 아니면 서로 도움을 주는 종들 중에서 어느 쪽이 적자(適者)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후자 쪽일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집단이나 종이 아니라 개체들도 마찬가지일까요?
(3) 진화가 육체적인 발전이나 변화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도 포함한다면,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종이 더 많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견해와 생물계의 엄연한 현실인 치열한 생존 경쟁은 어떻게 조화롭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해설읽기
19세기말 서유럽은 자본주의가 확실히 정립되고 세계 전체를 식민지화하며 제국주의 행위를 일삼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런 양상을 ‘생존 투쟁’과 ‘적자 생존’이라는 논리로 잘 설명해주었다. 물론 다윈의 학설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도 있었지만, 제국주의에 열광하는 서유럽 지식 사회는 편협하게 이 측면에만 집중하였다. 동물의 세계를 늑대나 사자 같은 포식자들이 지배하는 세계로 간주하고 약한 동물은 기껏 도망가거나 실패하면 잡아먹히는 것으로만 그려졌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며 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말하고 국가에 복종할 것을 설득했다면, 그것의 자연계 버전이 바로 ‘생존 경쟁 – 적자 생존’론이었다.
그러나 자연계에는 이런 측면 외에도 여러 가지 면모들이 있기 때문에 루소 같은 사상가는 거꾸로 조화와 평화에만 주목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자연계에는 치열한 상호투쟁과 몰살도 벌어지지만 같은 종이나 집단 내에서는 서로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현상과 광범위하게 관찰된다. 또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각자 살아가는 생물들도 많은데,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쪽이 가장 많다고 한다.
크로포트킨은 자연계에 잔학한 면과 평화로운 면 등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걸 먼저 인정한다. 상호부조와 상호투쟁은 자연법칙으로 광범위하게 관찰되는 양대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상호부조가 중심 원리인 집단과 상호투쟁이 중심 원리인 집단 중 어느 쪽이 적자이겠는가? 어느 쪽이 자연 속에서 더 살아남을 기회가 많겠는가? 최고도로 발달된 지능과 신체 조직은 어느 쪽이 획득하겠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은 상호부조 집단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상호부조야말로 상호투쟁과 맞먹을 정도로 동물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아니,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종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도록 보증해주면서 그러한 습성과 성격을 발전하게 해주기 때문에 어쩌면 상호투쟁보다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개미 등 초사회성 동물들이 고도의 사회조직을 이루며 다수의 개체군을 자랑하는 것도 이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을 것이다.
키워드
낙관론, 비관론, 상호부조, 상호투쟁, 생존경재, 이익, 자연법칙, 적자 진화
전후맥락
19세기말 유럽의 몇몇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이미 제국주의가 되어 무시무시한 이빨과 발톱으로 세계 각지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유럽의 지식 사회는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치밀하게 무장하고 있었고, 생존경쟁이야말로 자연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이며 결국 강하고 흉포하며, 교활한 자만이 살아남는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다윈의 불독’으로 불리던 헉슬리는 다윈의 생존경쟁 개념을 더욱 좁혀 인류 사회도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88년 헉슬리가 「인간사회에서 생존경쟁」을 발표하였는데, 이를 보고 크로포트킨은 생존경쟁 이론을 철저하게 반박하고 상호부조 사상을 옹호하는 이론을 수립하기로 결심했다. 전반부의 약 100페이지는 주로 동물의 상호부조에 대해, 후반부인 약 250페이지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발견된 상호부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크로포트킨은 이를 통해 인간은 사회로부터 과도한 권력 관계나 억압적인 제도 등을 없앨 수만 있다면 본래의 도덕적 본성을 가지고 아름다운 사회를 꾸려나갈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
‘고전 본문’은 맨 처음에 다윈의 후계자들이 다윈을 너무 협소화시켰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실제 자연에서는 상호투쟁과 상호부조가 모두 관찰되며 의미와 중요성에 비춰보자면 도리어 상호부조가 더 중요한 진화의 요인임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초반에 전체적인 큰 틀을 제시하는 대목이다. 이후 1, 2장 「동물의 상호부조」에서 시작해 야만인과 미개인의 상호부조(3, 4장), 중세 도시의 상호부조(5, 6장), 근대인의 상호부조(7, 8)로 책은 마무리된다.
고전본문
수많은 찰스 다윈 추종자들은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해버렸다. 그들의 동물의 세계를 반쯤 굶어 서로 피에 주린 개체들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세계로 여기게 되었다. (…) 이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무자비한’ 투쟁을 인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물학 원리로까지 끌어올렸다. 상호 멸절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는 투쟁하지 않으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위협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 사실 숲에 한번 들어가 보거나, 동물 사회를 한번 관찰해 보거나 아니면 동물의 삶을 진지하게 다룬 책을 읽어 보았다면, (…) 동물의 삶에서 사회적 생활이 차지하는 부분을 자연주의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으며, 자연에서 조화와 평화만을 보게 되지는 않듯이 역시 자연에서 도살장만을 보게 되지는 않는다. 루소가 자신의 사상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도외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면, 헉슬리는 정반대의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루소의 낙관론도 헉슬리의 비관론도 자연을 공정하게 해석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실험실이나 박물관이 아니라 숲이나 목초지에서, 혹은 스텝 지대 나 산악 지대에서 동물을 연구하게 되면 우리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즉, 다양한 종들, 특히 다양한 부류의 동물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엄청나게 다투고 몰살시키지만, 그와 동시에 같은 종이나 적어도 같은 집단에 속한 동물들끼리는 그러한 싸움과 몰살에 상응할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서로를 부양하고 도와주며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회성 역시 상호투쟁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이다. 물론 이 두 가지 사실의 상대적인 중요도를 대략으로나마 수치로 환산해서 평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서 “끊임없이 서로 싸우는 종들과 아니면 서로 도움을 주는 종들 중에서 어느 쪽이 적자(適者)인가?”라는 질문을 자연에 던진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상호부조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이 적자임을 바로 알게 된다.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지며, 각기 자신들의 부류 내에서 최고도로 발달 된 지능과 신체 조직을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무수한 사실들을 모두 고려하면, 상호부조야말로 상호투쟁과 맞먹을 정도로 동물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는 듯하다. 아니,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종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도록 보증해주면서 그러한 습성과 성격을 발전하게 해주기 때문에 어쩌면 상호투쟁보다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상호부조론』 1장 초반부 중에서
*헉슬리 : 다윈의 학설을 적극 지지하고 옹호했던 동물학자. 그래서 ‘다윈의 불도그’라는 별명도 붙을 정도였다.
*적자 : 적합한 자, 생존에 적합한 특징을 가진 자를 말한다.
토론하기
(1) 자연에는 조화와 평화만 있지도 않고 도살장만 있지도 않은데, 왜 “루소는 자신의 사상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도외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헉슬리는 정반대의 실수”를 저질렀을까요? 유명한 사상가나 과학자들은 왜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는 걸까요?
(2) “끊임없이 서로 싸우는 종들과 아니면 서로 도움을 주는 종들 중에서 어느 쪽이 적자(適者)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후자 쪽일 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집단이나 종이 아니라 개체들도 마찬가지일까요?
(3) 진화가 육체적인 발전이나 변화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도 포함한다면,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종이 더 많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견해와 생물계의 엄연한 현실인 치열한 생존 경쟁은 어떻게 조화롭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해설읽기
19세기말 서유럽은 자본주의가 확실히 정립되고 세계 전체를 식민지화하며 제국주의 행위를 일삼았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이런 양상을 ‘생존 투쟁’과 ‘적자 생존’이라는 논리로 잘 설명해주었다. 물론 다윈의 학설은 다르게 해석될 여지도 있었지만, 제국주의에 열광하는 서유럽 지식 사회는 편협하게 이 측면에만 집중하였다. 동물의 세계를 늑대나 사자 같은 포식자들이 지배하는 세계로 간주하고 약한 동물은 기껏 도망가거나 실패하면 잡아먹히는 것으로만 그려졌다. 홉스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며 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말하고 국가에 복종할 것을 설득했다면, 그것의 자연계 버전이 바로 ‘생존 경쟁 – 적자 생존’론이었다.
그러나 자연계에는 이런 측면 외에도 여러 가지 면모들이 있기 때문에 루소 같은 사상가는 거꾸로 조화와 평화에만 주목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자연계에는 치열한 상호투쟁과 몰살도 벌어지지만 같은 종이나 집단 내에서는 서로 도와주고 보호해주는 현상과 광범위하게 관찰된다. 또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각자 살아가는 생물들도 많은데,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쪽이 가장 많다고 한다.
크로포트킨은 자연계에 잔학한 면과 평화로운 면 등이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걸 먼저 인정한다. 상호부조와 상호투쟁은 자연법칙으로 광범위하게 관찰되는 양대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상호부조가 중심 원리인 집단과 상호투쟁이 중심 원리인 집단 중 어느 쪽이 적자이겠는가? 어느 쪽이 자연 속에서 더 살아남을 기회가 많겠는가? 최고도로 발달된 지능과 신체 조직은 어느 쪽이 획득하겠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많은 사람들은 상호부조 집단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상호부조야말로 상호투쟁과 맞먹을 정도로 동물계를 지배하는 법칙”이며, “아니, 진화의 한 요인인 상호부조는 어떤 개체가 최소한의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최대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다. 게다가 종이 유지되고 더 발전하도록 보증해주면서 그러한 습성과 성격을 발전하게 해주기 때문에 어쩌면 상호투쟁보다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개미 등 초사회성 동물들이 고도의 사회조직을 이루며 다수의 개체군을 자랑하는 것도 이로부터 설명하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을 것이다.
키워드
낙관론, 비관론, 상호부조, 상호투쟁, 생존경재, 이익, 자연법칙, 적자 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