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벽지'(The Yellow Wallpaper)는 미국의 소설가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1860-1935)의 단편 소설이다. 일인칭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신경증을 앓고 있는 아내가 시골 저택에 휴양차 와서 겪는 일을 일인칭 일기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의사인 남편은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휴식이라 믿고 사람도 만나지 말고 아무 것도 못하게 한다. 겉보기에는 자상하고 아내를 위하는 것같지만, 막상 아내는 숨이 막힌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남편 몰래 숨어서 글을 쓴다. 글쓴이인 ‘나,’ 즉 아내에게 내려진 절대 안정과 휴식 처방은 당시 신경쇠약에 걸린 여성에게 흔히 쓰이던 치료법이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본인이 겪은 산후 우울증과 치료 경험을 토대로 이 소설을 썼다. 첫 번째 결혼과 출산 이후 길먼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당시 유명한 신경 정신과의사 미첼(S. Weir Mitchell)박사를 찾아간다. 그는 길먼에게 지적인 활동은 두 시간 이내로 제한하고 침대에 누워 절대적 안정을 취하는 ‘휴식치료'(rest cure)를 처방했는데 이 방법은 길먼의 증세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그는 이 휴식치료를 고문같은 고통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고전본문
남편 존은 의사이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더디 회복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끄적이다 버리는 종이에나 쓸 숭 있을 뿐. 남편은 내가 병들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잘 나가는 의사인 남편이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일시적인 신경증(약간의 히스테리 성향)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언한다면 당사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빠도 마찬가지로 잘 나가는 의사인데 같은 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인산염이든 아인산염이든 뭐든 간에 약을 먹고, 강장제를 복용하고 여행을 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운동을 한다, 내가 다시 건강하질 때까지 “일”하는 것은 완전히 금지다.
속으로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속마음은, 설레고 변화가 있는 애착이 가는 일이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글을 썼다. 하지만 아주 교활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심한 반대에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나를 너무나 지치게 한다.
이따금씩 내 상태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좀 줄이고 사교와 자극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존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 내 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 그런 말은 항상 날 기분 나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는 접어두고 집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 길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장소로, 마을에서 3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 아무튼 여러 해 비어 있던 곳이다. […] 이집에는 원가 이상한 점이 있다. 난 느낄 수 있다. 달빛이 비치는 어느 날 저녁에 존에게 그런 말도 했지만 그는 내가 느낀 것이 덧바람이라면서 창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때로 존에게 터무니없이 화가 난다. 내가 이렇게 민감한 적은 없었다고 믿는다. 이 불안한 신경증 때문이겠지. 그러나 존은 내 기분이 그러면 자제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남편 앞에서는 나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나를 매우 지쳐버린다.
난 우리가 쓰는 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미로 둘러져 있고, 구식 사라사천이 드리워진 창이 넓은 마당을 향해 나 있는 아래층 방이 맘에 들었는데. 존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방에는 창문이 하나뿐이고 침대 두 개를 놓을 공간이 없고 그가 쓸 수 있는 다른 방이 가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세심하고 애정이 가득하며 특별한 이유없이 나를 동요하게 만드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일정을 처방받았다. 그가 모든 일을 떠맡았기 때문에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난 정말이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가 완전한 휴식과 맑은 공기를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여보, 당신 기운이 있어야 운동을 하고, 입맛이 있어야 먹을 수 있어. 그래도 공기는 언제나 마실 수 있잖아”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맨 위층에 있는 아이방을 쓰기로 했다.
넓고 통풍이 잘되는 방으로 층 전체에 거의 모든 방향으로 창이 나 있고 환기가 잘되고 볕이 잘 든다. 처음에는 아이방이었다가 나중에는 놀이방과 운동실로 사용된 것 같다. 왜냐하면 창문에는 어린아이들이 닿지 못하게 창살이 둘러져 있고 벽에는 고리와 이런저런 것들이 붙어있으니까.
페인트와 벽지는 마치 남자학교에서 쓰던 것처럼 보였다. 벽지는 내 침대 머리맡을 둘러 손닿는 데까지, 방 반대편으로는 아래쪽으로 커다란 면이 벗겨져 있다. 이보다 더 심한 상태의 벽지는 본 적이 없다. 화려하게 벽을 타고 오르는 벽지 무늬는 예술적 금기란 금기는 다 범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눈이 어지러울 만큼 따분하고, 계속 짜증나게 해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조금 떨어져서 균형 잡히지 않고 불확실한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각도로 떨어져 들어본 적도 없는 대조를 이루며 스스로 파괴하고 갑자기 (선들이) 자살해 버린다.
색은 거부감이 들고 역겨울 지경이다. 강렬하고 지저분한 노란색으로 천천히 변화하는 햇볕에 이상하게 바랬다. 한쪽은 칙칙하지만 선명한 오렌지색이고 다른 쪽은 병든 유황색이다.
아이들이 싫어할 만도 하다! 이 방에서 오래 지내야 한다면 나라도 싫을 것이다.
존이 온다. 난 이것(쓰던 글)을 치워야 한다. 그는 내가 한 자라도 글을 쓰는 걸 싫어한다.
[출전] 샬럿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토론하기
(1) 주인공의 서술에 따르면 남편이 의사여서 오히려 병이 빨리 낫지 않고 있다는데, 주인공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노란 벽지는 주인공인 아내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3) 주인공은 왜 글을 쓰려고 하고 남편은 왜 아내가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가?
해설읽기
주인공의 남편은 의사이고 오빠 또한 의사이다. 이들은 주인공의 병에 대해 같은 의견을 말한다. 단지 신경증일 뿐이고 쉬면 된다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망있는 의사이며 남성인 이들은 여성인 주인공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녀의 의견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치부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쓰인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미국사회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이며, 또한 과학의 발달에 열광하며 새로운 의술과 처방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던 시대였다. 이성이 감성보다 우위에 서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회였다. 이러한 풍토에서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나’는 의사인 남편의 처방에 따라 하루의 일과를 보낸다. 그녀의 건강회복을 위해 남편이 선택한 시골 저택에서, 남편이 골라준 침실에서 지내며,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심지어 글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주인공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사람도 만나고 글도 쓰고 하고픈 일들을 하면 오히려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묵살되고 목소리는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남편 몰래 일기를 쓰고, 보호와 치료라는 명목하에 갇혀서 벽에 발라져 있는 흉물스런 노란 벽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결국 억눌린 인간의 상상력은 왜곡되어 노란 벽지에서 분출구를 찾는다. 벽지는 ‘나’의 상태처럼 병적인 노란 색이며, 이해할 수 없는 무늬가 선을 그리다 그 선들마저 ‘자살’하는 모양새다. 적어도 주인공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노란벽지는 주인공인 화자가 신경쇠약으로 인한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갇힌’ 방에 발라져 있는 벽지다. 벽지는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오레지 빛 노란색이다. 서양에서 노란색은 황달로 누렇게 뜬 병자의 색이기도 하다. 색도 문제지만 화자가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벽지의 무늬이다. “화려하게 벽을 타고 오르는 벽지 무늬는 예술적 금기란 금기는 다 범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눈이 어지러울 만큼 따분하고, 계속 짜증나게 해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고 묘사된 벽지 무늬는 화자의 병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극제다. 하필 왜 벽지 무늬일까? 화자는 건강상의 이유로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 남편의 처방을 받았다. 남편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아내의 의견이나 감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 사람을 만나서도 안되고 일도 할 수 없고, 유일한 흥밋거리인 글 쓰기조차 금지 당했다. 예술적 재능이 있는 화자의 억눌린 상상력은 벽지의 무늬에서 탈출구를 찾게 된 것 같다. 창조적 에너지가 억눌려 왜곡된 상태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페미니즘적인 측면에서 많은 비평적 관심을 받은 이유는 당시 사회에서 침묵을 강요당한는 여성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은 결혼과 더불어 남성에 종속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여성에게는 결혼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남자형제나 친척 집에 의탁해 가사일을 돌보고 육아를 돕는 등의 일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길먼의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겉보기에는 당시 여성들이 바라는 조건을 모두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명망있는 의사인 남편은 아내인 ‘나’를 무척이나 아낀다. 신경증으로 쇠약한 아내를 위해 조용한 시골 저택을 빌려 휴양하러 와서 아내의 일상을 세심하게 챙기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아기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즉,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생각을 하고 글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휴식””이라는 미명 하에 이 모든 것은 금지된다. 주인공은 가사 일도, 육아도, 글쓰기도 모두 하면 안되는 것이다. 19세기는 과학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병명을 발명했다. “히스테리”라고 불리는 병이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자궁은 뜻하는 “히스터‘에서 유래되었는데, 서양 의학의 근간을 이루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리스의 의학자 갈렌의 ”떠돌이 자궁“이라는 이론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궁은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기관이므로 히스테리는 여성 특유의 질병이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여성들의 정서적 불안이나 우울증, 또는 당시 의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증상들을 히스테리라고 진단하고 했다. 여성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고, 불안정하며,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과학적 의학적 정당화하는 담론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히스테리 증상에 시달리는 여성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은 남성의사였고, 치료라는 명목으로 여성환자를 감금하고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의사들은 선의를 가지고 여성환자를 대했겠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남편의 행동처럼 구조적으로 왜곡된 사회인식과 관습의 틀 안에서는 선의의 치료행위도 때론 여성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키워드
가부장제, 광기, 노란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억압, 여성, 자유, 페미니즘
전후맥락
‘노란 벽지'(The Yellow Wallpaper)는 미국의 소설가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1860-1935)의 단편 소설이다. 일인칭으로 쓰여진 이 작품은 신경증을 앓고 있는 아내가 시골 저택에 휴양차 와서 겪는 일을 일인칭 일기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의사인 남편은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휴식이라 믿고 사람도 만나지 말고 아무 것도 못하게 한다. 겉보기에는 자상하고 아내를 위하는 것같지만, 막상 아내는 숨이 막힌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남편 몰래 숨어서 글을 쓴다. 글쓴이인 ‘나,’ 즉 아내에게 내려진 절대 안정과 휴식 처방은 당시 신경쇠약에 걸린 여성에게 흔히 쓰이던 치료법이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본인이 겪은 산후 우울증과 치료 경험을 토대로 이 소설을 썼다. 첫 번째 결혼과 출산 이후 길먼은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당시 유명한 신경 정신과의사 미첼(S. Weir Mitchell)박사를 찾아간다. 그는 길먼에게 지적인 활동은 두 시간 이내로 제한하고 침대에 누워 절대적 안정을 취하는 ‘휴식치료'(rest cure)를 처방했는데 이 방법은 길먼의 증세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그는 이 휴식치료를 고문같은 고통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고전본문
남편 존은 의사이다. 그래서 아마도 내가 더디 회복하는 것 같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도 할 수 없다. 이렇게 끄적이다 버리는 종이에나 쓸 숭 있을 뿐. 남편은 내가 병들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잘 나가는 의사인 남편이 지인들과 친척들에게 일시적인 신경증(약간의 히스테리 성향)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확언한다면 당사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빠도 마찬가지로 잘 나가는 의사인데 같은 말을 한다.
그래서 나는 인산염이든 아인산염이든 뭐든 간에 약을 먹고, 강장제를 복용하고 여행을 하고, 좋은 공기를 마시고 운동을 한다, 내가 다시 건강하질 때까지 “일”하는 것은 완전히 금지다.
속으로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속마음은, 설레고 변화가 있는 애착이 가는 일이 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글을 썼다. 하지만 아주 교활하게 처신하지 않으면 심한 반대에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 나를 너무나 지치게 한다.
이따금씩 내 상태에서 하지 말라는 것을 좀 줄이고 사교와 자극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존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 내 상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 그런 말은 항상 날 기분 나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는 접어두고 집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 길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장소로, 마을에서 3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 아무튼 여러 해 비어 있던 곳이다. […] 이집에는 원가 이상한 점이 있다. 난 느낄 수 있다. 달빛이 비치는 어느 날 저녁에 존에게 그런 말도 했지만 그는 내가 느낀 것이 덧바람이라면서 창문을 닫아 버렸다.
나는 때로 존에게 터무니없이 화가 난다. 내가 이렇게 민감한 적은 없었다고 믿는다. 이 불안한 신경증 때문이겠지. 그러나 존은 내 기분이 그러면 자제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남편 앞에서는 나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보면 나를 매우 지쳐버린다.
난 우리가 쓰는 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미로 둘러져 있고, 구식 사라사천이 드리워진 창이 넓은 마당을 향해 나 있는 아래층 방이 맘에 들었는데. 존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방에는 창문이 하나뿐이고 침대 두 개를 놓을 공간이 없고 그가 쓸 수 있는 다른 방이 가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매우 세심하고 애정이 가득하며 특별한 이유없이 나를 동요하게 만드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일정을 처방받았다. 그가 모든 일을 떠맡았기 때문에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난 정말이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내가 완전한 휴식과 맑은 공기를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여보, 당신 기운이 있어야 운동을 하고, 입맛이 있어야 먹을 수 있어. 그래도 공기는 언제나 마실 수 있잖아”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맨 위층에 있는 아이방을 쓰기로 했다.
넓고 통풍이 잘되는 방으로 층 전체에 거의 모든 방향으로 창이 나 있고 환기가 잘되고 볕이 잘 든다. 처음에는 아이방이었다가 나중에는 놀이방과 운동실로 사용된 것 같다. 왜냐하면 창문에는 어린아이들이 닿지 못하게 창살이 둘러져 있고 벽에는 고리와 이런저런 것들이 붙어있으니까.
페인트와 벽지는 마치 남자학교에서 쓰던 것처럼 보였다. 벽지는 내 침대 머리맡을 둘러 손닿는 데까지, 방 반대편으로는 아래쪽으로 커다란 면이 벗겨져 있다. 이보다 더 심한 상태의 벽지는 본 적이 없다. 화려하게 벽을 타고 오르는 벽지 무늬는 예술적 금기란 금기는 다 범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눈이 어지러울 만큼 따분하고, 계속 짜증나게 해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조금 떨어져서 균형 잡히지 않고 불확실한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각도로 떨어져 들어본 적도 없는 대조를 이루며 스스로 파괴하고 갑자기 (선들이) 자살해 버린다.
색은 거부감이 들고 역겨울 지경이다. 강렬하고 지저분한 노란색으로 천천히 변화하는 햇볕에 이상하게 바랬다. 한쪽은 칙칙하지만 선명한 오렌지색이고 다른 쪽은 병든 유황색이다.
아이들이 싫어할 만도 하다! 이 방에서 오래 지내야 한다면 나라도 싫을 것이다.
존이 온다. 난 이것(쓰던 글)을 치워야 한다. 그는 내가 한 자라도 글을 쓰는 걸 싫어한다.
[출전] 샬럿 퍼킨스 길먼, <누런 벽지>
토론하기
(1) 주인공의 서술에 따르면 남편이 의사여서 오히려 병이 빨리 낫지 않고 있다는데, 주인공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노란 벽지는 주인공인 아내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가?
(3) 주인공은 왜 글을 쓰려고 하고 남편은 왜 아내가 글을 쓰는 것을 싫어하는가?
해설읽기
주인공의 남편은 의사이고 오빠 또한 의사이다. 이들은 주인공의 병에 대해 같은 의견을 말한다. 단지 신경증일 뿐이고 쉬면 된다고.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명망있는 의사이며 남성인 이들은 여성인 주인공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녀의 의견은 들을 가치가 없다고 치부하는 것이다. 이 작품이 쓰인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미국사회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이며, 또한 과학의 발달에 열광하며 새로운 의술과 처방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내던 시대였다. 이성이 감성보다 우위에 서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회였다. 이러한 풍토에서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나’는 의사인 남편의 처방에 따라 하루의 일과를 보낸다. 그녀의 건강회복을 위해 남편이 선택한 시골 저택에서, 남편이 골라준 침실에서 지내며,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심지어 글도 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주인공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사람도 만나고 글도 쓰고 하고픈 일들을 하면 오히려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의견은 묵살되고 목소리는 침묵을 강요받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남편 몰래 일기를 쓰고, 보호와 치료라는 명목하에 갇혀서 벽에 발라져 있는 흉물스런 노란 벽지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결국 억눌린 인간의 상상력은 왜곡되어 노란 벽지에서 분출구를 찾는다. 벽지는 ‘나’의 상태처럼 병적인 노란 색이며, 이해할 수 없는 무늬가 선을 그리다 그 선들마저 ‘자살’하는 모양새다. 적어도 주인공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노란벽지는 주인공인 화자가 신경쇠약으로 인한 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갇힌’ 방에 발라져 있는 벽지다. 벽지는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오레지 빛 노란색이다. 서양에서 노란색은 황달로 누렇게 뜬 병자의 색이기도 하다. 색도 문제지만 화자가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벽지의 무늬이다. “화려하게 벽을 타고 오르는 벽지 무늬는 예술적 금기란 금기는 다 범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눈이 어지러울 만큼 따분하고, 계속 짜증나게 해서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고 묘사된 벽지 무늬는 화자의 병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자극제다. 하필 왜 벽지 무늬일까? 화자는 건강상의 이유로 절대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 남편의 처방을 받았다. 남편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아내의 의견이나 감정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 사람을 만나서도 안되고 일도 할 수 없고, 유일한 흥밋거리인 글 쓰기조차 금지 당했다. 예술적 재능이 있는 화자의 억눌린 상상력은 벽지의 무늬에서 탈출구를 찾게 된 것 같다. 창조적 에너지가 억눌려 왜곡된 상태라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페미니즘적인 측면에서 많은 비평적 관심을 받은 이유는 당시 사회에서 침묵을 강요당한는 여성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은 결혼과 더불어 남성에 종속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여성에게는 결혼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남자형제나 친척 집에 의탁해 가사일을 돌보고 육아를 돕는 등의 일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길먼의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겉보기에는 당시 여성들이 바라는 조건을 모두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명망있는 의사인 남편은 아내인 ‘나’를 무척이나 아낀다. 신경증으로 쇠약한 아내를 위해 조용한 시골 저택을 빌려 휴양하러 와서 아내의 일상을 세심하게 챙기는 사람이다. ‘나’에게는 아기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나’는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싶어한다. 즉, 적극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생각을 하고 글로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휴식””이라는 미명 하에 이 모든 것은 금지된다. 주인공은 가사 일도, 육아도, 글쓰기도 모두 하면 안되는 것이다. 19세기는 과학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기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병명을 발명했다. “히스테리”라고 불리는 병이다. 히스테리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자궁은 뜻하는 “히스터‘에서 유래되었는데, 서양 의학의 근간을 이루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리스의 의학자 갈렌의 ”떠돌이 자궁“이라는 이론에서 파생된 것이다. 자궁은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기관이므로 히스테리는 여성 특유의 질병이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 여성들의 정서적 불안이나 우울증, 또는 당시 의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증상들을 히스테리라고 진단하고 했다. 여성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고, 불안정하며,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것을 과학적 의학적 정당화하는 담론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히스테리 증상에 시달리는 여성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은 남성의사였고, 치료라는 명목으로 여성환자를 감금하고 억압하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물론 대부분의 의사들은 선의를 가지고 여성환자를 대했겠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남편의 행동처럼 구조적으로 왜곡된 사회인식과 관습의 틀 안에서는 선의의 치료행위도 때론 여성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