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시베리아로 이송되는 카튜샤의 뒤를 따른 네흘류도프는 수 달 동안의 여정 동안 죄수들과 함께 생활하며 감옥과 수용소 등에서 그들의 삶의 실상을 목격하고 고뇌에 빠지게 된다. 죄수들의 삶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도덕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 되어갔다. 징역형을 받은 이들은 자연이나, 가족, 건강한 노동으로부터 격리된 채 감금되어 생활하며, 족쇄, 삭발, 수의 등으로 인해 멸시를 받게 되어 타인에 대한 존중감과 수치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한다. 또한 이들은 불결하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며, 간수나 동료 죄수들에 의한 구타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뛰어난 젊은 수학자였으나 대학 친구들의 혁명 운동에 단순히 기부금을 냈다가 정치범으로 몰려 교도소로 보내진 크르일소프를 만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크르일소프가 15세의 어린 소년범이 탈주하려다 사형을 선고받는 잔혹함을 보고 혁명가로 변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 공감하던 중 크르일소프 역시 열악한 수감생활로 인해 결핵으로 죽는 모습을 보고 형벌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뜬다. 또한 네흘류도프는 폐쇄적인 징역 생활의 가장 큰 폐해가 이같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생활 속에서 죄수들이 수감 생활 동안 더 크고 심각한 범죄에 물들게 된다는 사실에 있음을 깨닫고, 감옥과 수용소가 과연 죄인들을 진정으로 참회와 개심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제도인지 의심하며 해결책에 관해 고심한다.
고전본문
감옥과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한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해마다 수십만의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도달해 완전히 타락해 버리면 그동안 완성한 타락을 온 민중에게 만연시키기 위해 석방되는 것이다. <중략> 지극히 평범하고 러시아적이고 농민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성을 가진 일반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생활 방침을 버리고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어떠한 비인간적인 모독과 구타, 곤욕도 허용된다는 감옥의 새로운 사고를 익히게 된다. 교도소 생활을 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자애심이니 하는 도덕성은 사실상 내던져 버렸으므로 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자기의 체험을 믿는다. 네흘류도프는 이 같은 사실을 주변의 죄수들을 통해 느꼈다. <중략>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책에도 적혀 있듯이 범죄 예방이나 위협 또는 선도, 이에 버금가는 법적인 처벌 등이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실행되고 있지 않았다. 범죄 예방은커녕 범죄가 만연되었고, 범죄자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기는커녕 범죄가 권장되었으며, 대부분의 범법자 스스로가 부랑자가 되어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선도는커녕 갖가지 악덕이 체계적으로 퍼졌고 법적인 처벌로 범죄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보복으로 해결할 뜻이 없던 일반 대중까지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저런 일을 하는 건가?’ 네흘류도프는 되풀이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으나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중략>
네흘류도프는 교도소며 수용소의 환경을 자세히 알게 되자 죄수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온갖 악덕–음주며 도박이며 폭력, 그 밖의 놀랄 만한 죄악, 그중에서도 인육을 먹는다는 사실까지도–은 인간이 인간에게 벌을 줄 수 있다는 착각에서 생긴 필연적인 결과이지 우발적으로 생긴 것도, 일부 학자들이 정부에 영합하여 말하는 천성적인 범죄형이라느니 하는 것 때문도 아님을 깨달았다. <중략> 네흘류도프는 오랫동안 방 안을 서성이며 좀처럼 자려 하지 않았다. <중략> 그가 요즈음 보고 들은 전율할 만한 악, 더욱이 오늘 저녁 저 감옥 속에서 본 무서운 악, 그리고 저 사랑스러운 크르일소프를 죽게 한 악은 승리가를 부르며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 그 가능성마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략>
네흘류도프는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악에서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길은,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자기가 남을 벌주고 선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또한 교도소와 구치소 안에서 자기 눈으로 목격했던 온갖 무서운 악과 이 악을 범하는 이들의 태연함은 모두가 악인이면서도 악을 다스리려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하고자 함으로써 싹트는 것임을 알았다. 악한 인간들이 다른 악한 인간들을 바로잡으려 하고 그것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욕심 사납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 헛된 처벌과 인간 교정을 직업으로 삼고, 그럼으로써 더 이상 빠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지면서, 동시에 자기가 괴롭히는 사람들까지 그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이제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던 무서운 일들이 어디서 발생했는지를, 또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한 말,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어서 인간을 처벌하고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몇 번이고 언제고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중략> 정반대의 논리에만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새로운 사고가 무척 낯설었으나 결국 그것이 이론만이 아닌 실제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악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벌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라는 늘 품고 있던 의문도 이젠 더 이상 그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 만일 벌을 줌으로써 죄악이 사라지고 그들을 완전히 개심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의 의문이 정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반대의 사실, 즉 인간은 인간을 다스릴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입증되어 가장 바람직한 최선책은, 이로울 것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하기만 한 방법을 포기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너희는 지난 수세기 동안 죄인이라고 판결된 사람들을 수천 수만 처벌했으나, 과연 죄인이 사라졌던가? 오히려 처벌에 의해 더욱 타락한 죄인과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판사, 검사, 예심판사, 교도관 등과 같은 죄인들로 하여 더욱 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법적인 공인을 받은 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임을 네흘류도프는 알게 되었다.
레프 톨스토이, [부활] 중에서
토론하기
(1) 작자 톨스토이는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눈을 통해 범죄자를 수용하는 감옥이 가진 문제점을 여럿 지적하고 있다. 약 백여 년 전인 19세기 후반의 상황에서 발견되는 이와 같은 문제점은 대부분 현대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보이지만, 폐쇄된 공간에 격리된 범죄자들이 서로에게 끼치는 악영향의 문제는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충분히 우려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 수형자들과의 접촉에 의해 감옥에서 오히려 더 심각한 범죄자가 되어 나올 수 있는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 톨스토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수형 제도 및 사법제도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판사, 검사, 예심판사, 교도관을 ‘공인된 죄인들’이라고까지 칭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타인에 대해 형벌권을 가진 이들이 어떤 인간적 자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3) 연민과 사랑이 범죄자에게 실제로 감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라.
해설읽기
감옥과 교도소에 의한 제도적 처벌에 대한 톨스토이의 급진적인 비판은 19세기 말 러시아의 형벌제도의 모순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눈을 통하여 정의롭지 못한 재판 과정, 가혹한 형벌 제도, 비인간적인 수형 환경 등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고 나아가 죄수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감옥과 수용소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감옥과 수용소는 죄수들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로 신체를 구속당하는 처벌을 받는 곳이지만 동시에 죄를 반성하고 이후 사회에 복귀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도록 감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네흘류도프는 감옥과 수용소에서 상상하기 힘든 비인간적인 모독과 구타, 곤욕이 발생하며 그로 인해 죄수들이 그간의 악덕을 교화받기는커녕 더한 폭력과 악행을 배우는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작은 잘못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온 비교적 평범한 인간에 가까운 죄수들이라 하더라도 처벌과 교화를 위해 들어간 감옥에서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자애심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범죄보다 더한 끔찍한 악덕을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드물지 않게 이야기되는 바 교도소가 오히려 범죄를 학습하는 학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바로 네흘류도프의 이와 같은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네흘류도프는 감옥과 수용소에서 발생하는 이와 같은 악(惡)은 결국 교정을 담당하는 이들의 오만함으로부터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모두가 악인이며 악으로 악을 다스리려는 일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네흘류도프의 생각은 교정자들이 죄수들을 대하면서 그들이 더 나은 존재로서 죄수들을 징벌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가질 때 폭력과 악덕이 발생하게 되고 반대로 신 앞에서 같은 인간임을 인정하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겸양을 가져야만이 죄수들을 교화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처벌은 죄수들 간에 폭력과 악덕을 퍼트리며 이들이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면 선한 삶을 살기는커녕 다시 이전의 범죄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악은 악을 낳을 뿐이다.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죄수를 교화하는 방법은 용서, 연민과 사랑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선(善)을 낳는 것은 선이기 때문에 죄수들의 교화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네흘류도프의 이러한 결론은 사회악에 대해 비폭력과 무저항을 주장하는 톨스토이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범죄자를 제도에 근거한 엄격한 형벌이 아니라 용서와 인간애로 교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국가 및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를 부정하는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루소의 자연 사상에 몰두하였고 공자, 노자 등의 사상을 접한 톨스토이는 인위적인 문명을 거부하고 위선과 허위를 벗어나 도덕적이고 단순한 자연적 삶을 지향하는 독창적인 삶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톨스토이는 1900년 「죽이지 말라」, 1908년 「세상에 죄인은 없다」 등의 글을 통해 위와 같은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다.
키워드
감옥, 교도소, 교정, 구치소, 범죄, 범죄예방, 사랑, 선도, 수용소, 악덕, 연민, 용서, 처벌, 타락
전후맥락
시베리아로 이송되는 카튜샤의 뒤를 따른 네흘류도프는 수 달 동안의 여정 동안 죄수들과 함께 생활하며 감옥과 수용소 등에서 그들의 삶의 실상을 목격하고 고뇌에 빠지게 된다. 죄수들의 삶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도덕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 되어갔다. 징역형을 받은 이들은 자연이나, 가족, 건강한 노동으로부터 격리된 채 감금되어 생활하며, 족쇄, 삭발, 수의 등으로 인해 멸시를 받게 되어 타인에 대한 존중감과 수치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한다. 또한 이들은 불결하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며, 간수나 동료 죄수들에 의한 구타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뛰어난 젊은 수학자였으나 대학 친구들의 혁명 운동에 단순히 기부금을 냈다가 정치범으로 몰려 교도소로 보내진 크르일소프를 만나게 된다. 네흘류도프는 크르일소프가 15세의 어린 소년범이 탈주하려다 사형을 선고받는 잔혹함을 보고 혁명가로 변신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 공감하던 중 크르일소프 역시 열악한 수감생활로 인해 결핵으로 죽는 모습을 보고 형벌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에 눈을 뜬다. 또한 네흘류도프는 폐쇄적인 징역 생활의 가장 큰 폐해가 이같은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 생활 속에서 죄수들이 수감 생활 동안 더 크고 심각한 범죄에 물들게 된다는 사실에 있음을 깨닫고, 감옥과 수용소가 과연 죄인들을 진정으로 참회와 개심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제도인지 의심하며 해결책에 관해 고심한다.
고전본문
감옥과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한 네흘류도프는 이렇게 생각했다. 해마다 수십만의 인간이 타락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도달해 완전히 타락해 버리면 그동안 완성한 타락을 온 민중에게 만연시키기 위해 석방되는 것이다. <중략> 지극히 평범하고 러시아적이고 농민적이고 기독교적인 도덕성을 가진 일반 사람들이 이제까지의 생활 방침을 버리고 자기에게 이익만 된다면 어떠한 비인간적인 모독과 구타, 곤욕도 허용된다는 감옥의 새로운 사고를 익히게 된다. 교도소 생활을 한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자애심이니 하는 도덕성은 사실상 내던져 버렸으므로 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자기의 체험을 믿는다. 네흘류도프는 이 같은 사실을 주변의 죄수들을 통해 느꼈다. <중략>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책에도 적혀 있듯이 범죄 예방이나 위협 또는 선도, 이에 버금가는 법적인 처벌 등이었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실행되고 있지 않았다. 범죄 예방은커녕 범죄가 만연되었고, 범죄자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기는커녕 범죄가 권장되었으며, 대부분의 범법자 스스로가 부랑자가 되어 감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선도는커녕 갖가지 악덕이 체계적으로 퍼졌고 법적인 처벌로 범죄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보복으로 해결할 뜻이 없던 일반 대중까지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저런 일을 하는 건가?’ 네흘류도프는 되풀이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으나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중략>
네흘류도프는 교도소며 수용소의 환경을 자세히 알게 되자 죄수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는 온갖 악덕–음주며 도박이며 폭력, 그 밖의 놀랄 만한 죄악, 그중에서도 인육을 먹는다는 사실까지도–은 인간이 인간에게 벌을 줄 수 있다는 착각에서 생긴 필연적인 결과이지 우발적으로 생긴 것도, 일부 학자들이 정부에 영합하여 말하는 천성적인 범죄형이라느니 하는 것 때문도 아님을 깨달았다. <중략> 네흘류도프는 오랫동안 방 안을 서성이며 좀처럼 자려 하지 않았다. <중략> 그가 요즈음 보고 들은 전율할 만한 악, 더욱이 오늘 저녁 저 감옥 속에서 본 무서운 악, 그리고 저 사랑스러운 크르일소프를 죽게 한 악은 승리가를 부르며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 그 가능성마저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략>
네흘류도프는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악에서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길은, 하느님 앞에서 언제나 자신을 죄인으로 알고 자기가 남을 벌주고 선도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또한 교도소와 구치소 안에서 자기 눈으로 목격했던 온갖 무서운 악과 이 악을 범하는 이들의 태연함은 모두가 악인이면서도 악을 다스리려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하고자 함으로써 싹트는 것임을 알았다. 악한 인간들이 다른 악한 인간들을 바로잡으려 하고 그것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욕심 사납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 헛된 처벌과 인간 교정을 직업으로 삼고, 그럼으로써 더 이상 빠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지면서, 동시에 자기가 괴롭히는 사람들까지 그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이제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던 무서운 일들이 어디서 발생했는지를, 또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은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한 말,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어서 인간을 처벌하고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몇 번이고 언제고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말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흘류도프는 <중략> 정반대의 논리에만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 새로운 사고가 무척 낯설었으나 결국 그것이 이론만이 아닌 실제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임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악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벌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라는 늘 품고 있던 의문도 이젠 더 이상 그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다. 만일 벌을 줌으로써 죄악이 사라지고 그들을 완전히 개심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의 의문이 정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전혀 반대의 사실, 즉 인간은 인간을 다스릴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이 입증되어 가장 바람직한 최선책은, 이로울 것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악하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하기만 한 방법을 포기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너희는 지난 수세기 동안 죄인이라고 판결된 사람들을 수천 수만 처벌했으나, 과연 죄인이 사라졌던가? 오히려 처벌에 의해 더욱 타락한 죄인과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판사, 검사, 예심판사, 교도관 등과 같은 죄인들로 하여 더욱 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법적인 공인을 받은 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임을 네흘류도프는 알게 되었다.
레프 톨스토이, [부활] 중에서
토론하기
(1) 작자 톨스토이는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눈을 통해 범죄자를 수용하는 감옥이 가진 문제점을 여럿 지적하고 있다. 약 백여 년 전인 19세기 후반의 상황에서 발견되는 이와 같은 문제점은 대부분 현대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보이지만, 폐쇄된 공간에 격리된 범죄자들이 서로에게 끼치는 악영향의 문제는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충분히 우려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 수형자들과의 접촉에 의해 감옥에서 오히려 더 심각한 범죄자가 되어 나올 수 있는 이러한 환경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 톨스토이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수형 제도 및 사법제도가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비판적 관점에서 판사, 검사, 예심판사, 교도관을 ‘공인된 죄인들’이라고까지 칭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타인에 대해 형벌권을 가진 이들이 어떤 인간적 자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3) 연민과 사랑이 범죄자에게 실제로 감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라.
해설읽기
감옥과 교도소에 의한 제도적 처벌에 대한 톨스토이의 급진적인 비판은 19세기 말 러시아의 형벌제도의 모순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의 눈을 통하여 정의롭지 못한 재판 과정, 가혹한 형벌 제도, 비인간적인 수형 환경 등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고 나아가 죄수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감옥과 수용소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감옥과 수용소는 죄수들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로 신체를 구속당하는 처벌을 받는 곳이지만 동시에 죄를 반성하고 이후 사회에 복귀하여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도록 감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네흘류도프는 감옥과 수용소에서 상상하기 힘든 비인간적인 모독과 구타, 곤욕이 발생하며 그로 인해 죄수들이 그간의 악덕을 교화받기는커녕 더한 폭력과 악행을 배우는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작은 잘못을 저지르고 감옥에 들어온 비교적 평범한 인간에 가까운 죄수들이라 하더라도 처벌과 교화를 위해 들어간 감옥에서 그들이 알게 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자애심과 같은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범죄보다 더한 끔찍한 악덕을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드물지 않게 이야기되는 바 교도소가 오히려 범죄를 학습하는 학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는 바로 네흘류도프의 이와 같은 지적과 일맥상통한다.
네흘류도프는 감옥과 수용소에서 발생하는 이와 같은 악(惡)은 결국 교정을 담당하는 이들의 오만함으로부터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모두가 악인이며 악으로 악을 다스리려는 일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네흘류도프의 생각은 교정자들이 죄수들을 대하면서 그들이 더 나은 존재로서 죄수들을 징벌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우월감을 가질 때 폭력과 악덕이 발생하게 되고 반대로 신 앞에서 같은 인간임을 인정하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겸양을 가져야만이 죄수들을 교화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담겨 있다.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처벌은 죄수들 간에 폭력과 악덕을 퍼트리며 이들이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나가면 선한 삶을 살기는커녕 다시 이전의 범죄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악은 악을 낳을 뿐이다.
여기서 네흘류도프는 죄수를 교화하는 방법은 용서, 연민과 사랑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선(善)을 낳는 것은 선이기 때문에 죄수들의 교화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네흘류도프의 이러한 결론은 사회악에 대해 비폭력과 무저항을 주장하는 톨스토이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범죄자를 제도에 근거한 엄격한 형벌이 아니라 용서와 인간애로 교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국가 및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를 부정하는 톨스토이의 무정부주의와도 관련이 있다. 루소의 자연 사상에 몰두하였고 공자, 노자 등의 사상을 접한 톨스토이는 인위적인 문명을 거부하고 위선과 허위를 벗어나 도덕적이고 단순한 자연적 삶을 지향하는 독창적인 삶의 철학을 발전시켰다. 톨스토이는 1900년 「죽이지 말라」, 1908년 「세상에 죄인은 없다」 등의 글을 통해 위와 같은 생각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다.
키워드
감옥, 교도소, 교정, 구치소, 범죄, 범죄예방, 사랑, 선도, 수용소, 악덕, 연민, 용서, 처벌, 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