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이 대목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와 비앙키(Angelo Bianchi)의 대담 중 타자의 얼굴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레비나스가 설명하는 부분이다. 비앙키는 레비나스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명제, “타자의 얼굴이 무한의 흔적 속에 머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는다. 이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신(神)과 같이 주체의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초월성의 방식으로 주체에게 의미작용을 한다고 설명한다. 타자는 신과 같은 위치에서 주체로부터 초월해있기 때문에 무한하며, 타자의 얼굴은 신과 같이 특정한 신체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흔적인 것이다. 비앙키는 레비나스의 설명을 듣고, 그렇다면 왜 우리가 현실적인 일상에서 만나는 타자의 얼굴은 주체에게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묻는다. 아래 부분은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대답이다.
[고전본문]
레비나스: 나는 항상 이웃의 얼굴을 어떤 명령의 담지자라고 설명하는데, 그 명령은 타인과 관련하여 무상(無償)의 책임을 나에게 부과합니다. 이 책임은 양도 불가능하죠. 자아는 선출된 자고 유일한 자인 셈이에요. 여기서 타인은 절대적인 타자입니다. 다시 말해, 비교 불가능하고 그래서 유일한 자죠. 그러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은 다수예요.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요? 이것은 정의(正義)의 불가피한 질문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자들을 비교하고 사람들을 식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시적 모습의 조형적 형태로서, 말하자면 ‘얼굴을 벗어난’ 채로 나타납니다. 얼굴의 유일성을 잃은 집단으로 나타나죠. ‘나’가 다른 인간들에 대해 가지는 의무의 원천을 잃은 셈이에요. 그러나 이 의무의 원천은 정의의 추구 자체가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입니다. 이것을 망각할 경우 정의의 숭고하고 어려운 작업이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으로, 심지어는 전체주의적 남용으로까지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타자성과 초월』, 「대담-얼굴의 폭력」 중에서
토론하기
(1) 타자가 ‘나’인 주체에게 무상의 책임을 부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자아(=주체)가 유일하다는 것과 타자가 유일하다는 것에서 각각의 ‘유일성’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서로 다른가?
(3) 타자를 비교하고 식별함으로써 생기는 문제가 어떻게 전체주의적인 남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역사적 예시를 들어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근대 사상의 핵심은 주체에 의한 세계의 이해를 모든 것의 근원으로 삼는 ‘주체-이성중심주의’라는 데카르트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주체-이성중심주의의 근대는 주체와 비(非)주체를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참사를 낳았고, 현대 철학은 이러한 주체-이성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레비나스는 주체가 타자와 맺는 관계를 중시하는 철학인 윤리학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이성중심주의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러한 레비나스의 철학을 근거 삼아 수많은 사람들이 타자와 윤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 속에 갇혀 있는 주체를 다시 해방시키기 위해 레비나스가 제시한 것은 타자의 초월성이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주체의 닫힌 사고, 즉 내재성으로 결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주체의 외부에 위치해 있기에 근본적으로 초월적이며 무한하다. 또한 타자의 ‘얼굴’은 주체와 관계 맺는 신의 초월성이 표현된 형태이며, 신이 특정한 신체를 필요로 하지 않듯이 타자 또한 신체를 필요로 하는 ‘가시적 존재자’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체는 타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그 실체를 확정할 수 없으며, 당연히 이해할 수 도 없다. 레비나스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는 주체와 이해당하는 객체의 위치가 완전히 전도돼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인용문에서와 같이, 타자(이웃)의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 언제나 주체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다. 타자는 미지의 초월적 존재이기에, 주체는 언제나 그것을 ‘환대’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라는 명령. 그리고 주체는 이러한 의무(책임)는 또 다른 타자에게 양도할 수 없다. ‘나’ 이외의 모든 타자는 다른 모든 타자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같은 의무를 지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 이외의 모든 타자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선택된 자고, 그렇기에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듯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타자는 필연적으로 ‘절대적’이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상대적이라는 말의 반의어이다. 타자는 다른 무언가와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교도 주체의 인식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타자는 주체와는 다른 의미로 유일한 존재이다.
문제는 주체를 둘러 싼 타자가 다수라는 데에 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도대체 누가 나의 타자(이웃)인가? 법은 타자와의 관계적 올바름을 묻는 ‘정의’에 대한 고민에 근거한다. 법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타자를 원고와 피고로 혹은 갑과 을로 나눌 수밖에 없다. 이는 주체로 하여금 비교할 수 없는 타자를 비교하게 만들고, 식별할 수 없는 타자를 식별하게끔 강요한다. 비교하고 식별하기 위해서 타자의 얼굴은 ‘가시적 모습의 조형적 형태’를 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절대적 유일성을 벗어난 얼굴이므로, 오히려 ‘얼굴을 벗어난(dé-visagés)’ 얼굴이다. 이러한 서로 다르게 비교-식별 가능한 얼굴들이 많아질수록 타자의 유일성은 은폐되며, 주체는 타자의 절대적 명령과 그것이 부여한 의무를 서서히 잊는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듯,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타자의 얼굴은 그 자체로서 정의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법이 타자의 얼굴을 비교하고 식별한다면, 그것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될 것이다. 물론 정의를 실현할 수단의 문제를 방기할 수는 없으니, 이는 ‘숭고하고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오로지 타자를 향해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수단을 정초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뿐 아니라, 오히려 또 다시 주체-이성중심주의가 저질렀던 인류의 끔찍한 과오를 반복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앞뒤 맥락]
이 대목은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와 비앙키(Angelo Bianchi)의 대담 중 타자의 얼굴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레비나스가 설명하는 부분이다. 비앙키는 레비나스 사상의 핵심을 담고 있는 명제, “타자의 얼굴이 무한의 흔적 속에 머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는다. 이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신(神)과 같이 주체의 내재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초월성의 방식으로 주체에게 의미작용을 한다고 설명한다. 타자는 신과 같은 위치에서 주체로부터 초월해있기 때문에 무한하며, 타자의 얼굴은 신과 같이 특정한 신체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흔적인 것이다. 비앙키는 레비나스의 설명을 듣고, 그렇다면 왜 우리가 현실적인 일상에서 만나는 타자의 얼굴은 주체에게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묻는다. 아래 부분은 이에 대한 레비나스의 대답이다.
[고전본문]
레비나스: 나는 항상 이웃의 얼굴을 어떤 명령의 담지자라고 설명하는데, 그 명령은 타인과 관련하여 무상(無償)의 책임을 나에게 부과합니다. 이 책임은 양도 불가능하죠. 자아는 선출된 자고 유일한 자인 셈이에요. 여기서 타인은 절대적인 타자입니다. 다시 말해, 비교 불가능하고 그래서 유일한 자죠. 그러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은 다수예요.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요? 이것은 정의(正義)의 불가피한 질문입니다. 비교할 수 없는 자들을 비교하고 사람들을 식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시적 모습의 조형적 형태로서, 말하자면 ‘얼굴을 벗어난’ 채로 나타납니다. 얼굴의 유일성을 잃은 집단으로 나타나죠. ‘나’가 다른 인간들에 대해 가지는 의무의 원천을 잃은 셈이에요. 그러나 이 의무의 원천은 정의의 추구 자체가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입니다. 이것을 망각할 경우 정의의 숭고하고 어려운 작업이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으로, 심지어는 전체주의적 남용으로까지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타자성과 초월』, 「대담-얼굴의 폭력」 중에서
토론하기
(1) 타자가 ‘나’인 주체에게 무상의 책임을 부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2) 자아(=주체)가 유일하다는 것과 타자가 유일하다는 것에서 각각의 ‘유일성’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서로 다른가?
(3) 타자를 비교하고 식별함으로써 생기는 문제가 어떻게 전체주의적인 남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역사적 예시를 들어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근대 사상의 핵심은 주체에 의한 세계의 이해를 모든 것의 근원으로 삼는 ‘주체-이성중심주의’라는 데카르트적 발상이었다. 그러나 주체-이성중심주의의 근대는 주체와 비(非)주체를 철저히 분리함으로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참사를 낳았고, 현대 철학은 이러한 주체-이성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레비나스는 주체가 타자와 맺는 관계를 중시하는 철학인 윤리학을 강조함으로써 주체-이성중심주의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러한 레비나스의 철학을 근거 삼아 수많은 사람들이 타자와 윤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 속에 갇혀 있는 주체를 다시 해방시키기 위해 레비나스가 제시한 것은 타자의 초월성이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주체의 닫힌 사고, 즉 내재성으로 결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는 주체의 외부에 위치해 있기에 근본적으로 초월적이며 무한하다. 또한 타자의 ‘얼굴’은 주체와 관계 맺는 신의 초월성이 표현된 형태이며, 신이 특정한 신체를 필요로 하지 않듯이 타자 또한 신체를 필요로 하는 ‘가시적 존재자’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체는 타자의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그 실체를 확정할 수 없으며, 당연히 이해할 수 도 없다. 레비나스에 의해 세계를 이해하는 주체와 이해당하는 객체의 위치가 완전히 전도돼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인용문에서와 같이, 타자(이웃)의 얼굴은 그 자체만으로 언제나 주체에게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린다. 타자는 미지의 초월적 존재이기에, 주체는 언제나 그것을 ‘환대’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라는 명령. 그리고 주체는 이러한 의무(책임)는 또 다른 타자에게 양도할 수 없다. ‘나’ 이외의 모든 타자는 다른 모든 타자와 마찬가지로 ‘나’에게 같은 의무를 지우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나’ 이외의 모든 타자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선택된 자고, 그렇기에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자이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듯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타자는 필연적으로 ‘절대적’이다. 절대적이라는 말은 상대적이라는 말의 반의어이다. 타자는 다른 무언가와의 비교를 통해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교도 주체의 인식도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렇기에 타자는 주체와는 다른 의미로 유일한 존재이다.
문제는 주체를 둘러 싼 타자가 다수라는 데에 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도대체 누가 나의 타자(이웃)인가? 법은 타자와의 관계적 올바름을 묻는 ‘정의’에 대한 고민에 근거한다. 법이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타자를 원고와 피고로 혹은 갑과 을로 나눌 수밖에 없다. 이는 주체로 하여금 비교할 수 없는 타자를 비교하게 만들고, 식별할 수 없는 타자를 식별하게끔 강요한다. 비교하고 식별하기 위해서 타자의 얼굴은 ‘가시적 모습의 조형적 형태’를 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절대적 유일성을 벗어난 얼굴이므로, 오히려 ‘얼굴을 벗어난(dé-visagés)’ 얼굴이다. 이러한 서로 다르게 비교-식별 가능한 얼굴들이 많아질수록 타자의 유일성은 은폐되며, 주체는 타자의 절대적 명령과 그것이 부여한 의무를 서서히 잊는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하고 있듯,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타자의 얼굴은 그 자체로서 정의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법이 타자의 얼굴을 비교하고 식별한다면, 그것은 수단과 목적의 전도가 될 것이다. 물론 정의를 실현할 수단의 문제를 방기할 수는 없으니, 이는 ‘숭고하고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의의 궁극적인 목적이 오로지 타자를 향해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수단을 정초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허사로 돌아갈 뿐 아니라, 오히려 또 다시 주체-이성중심주의가 저질렀던 인류의 끔찍한 과오를 반복하게 만들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