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아래의 대목은 『죄와 벌』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로,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요한복음의 11장인 ‘라자로의 부활(11:32~44)’을 읽어주는 부분이다. ‘극악무도한 인간은 신을 대리하여 처단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취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백치 동생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라스콜니코프는 엄청난 죄책감과 심적 고통에 시달린다. 라스콜니코프는 평소 자신이 동정했던 소냐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된 불쌍한 소냐는 오히려 라스콜니코프를 진정한 구원으로 이끈다. ‘라자로의 부활’은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로, “라자로야 나오라”라는 그리스도의 한 마디에 이미 죽은 지 4일이나 된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라비 라자로가 부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바로 이 대목을 소냐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소냐는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경의와 신앙을 가득 담아 이 대목을 그에게 읽어준다.
[고전본문]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이제 알았다.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았다. 지금 성서를 읽기 시작하는 소냐가 몹시 괴로워하며,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지만, 고통스러울 정도의 온갖 번민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가 들을 수 있도록 ‘지금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어!’ …그는 이러한 표정을 그녀의 시선과 감정의 동요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1절 첫머리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끊었던 목 경련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요한의 복음서 11장을 읽어 나갔다.
(…)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다라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쳤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라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에 유대인들은 ‘저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가 봅니다.’라고 말했으나, 그들 중에서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말인가?’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역시 그랬다! 그녀는 정말로 오한이라도 난 듯 벌써부터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대미문의 가장 위대한 기적에 대한 말에 다가가고 있었고, 엄청난 승리감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속과 같이 낭랑했고, 승리감과 기쁨이 그 속에서 울리는 듯 목소리를 힘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읽고 있던 글자 모양이 그녀 앞에서 흔들렸지만, 그녀는 자기가 읽고 있는 부분을 완전히 외우고 있었다.
『죄와 벌』, 4부 4장 중에서
토론하기
(1) 라스콜니코프는 왜 소냐에게 ‘부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 것일까? 회개와 부활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2) 라스콜니코프는 『죄와 벌』의 주인공이자 초점 화자로, 이 대목에서 그는 소냐가 부활의 대목에 다가감으로써 ‘승리감’에 도취된다고 느낀다. 과연 소냐는 예수가 일으킨 기적을 읽기 전에 그것에 도취된 것일까? 이 대목에서의 소냐의 감정을 라스콜니코프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죄와 벌』은 주인공 청년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백치 동생을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라스콜니코프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살인자’ 하면 떠오르는 흉악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수려한 외모와 약자에 대한 연민을 가진 똑똑한 대학생이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는 전당포 노파를 ‘악’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세상을 좀먹는 악을 신은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이에 라스콜니코프는 신을 대리하여 이 수전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죄와 벌』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평생에 걸쳐 경계했던 것은 이렇듯 인간이 신을 대리할 수 있다는 오만, 즉 ‘인신(人神=적그리스도)’의 사상이었다.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은 원래부터 그릇된 것은 아니었다. 약자를 돕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사상과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굳은 신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과 신념은 오만과 만나면 반성을 모르는 무서운 악으로 변모할 위험을 지니게 된다. 오만은 구원받아야 할 타인을 수동적이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시키며, 이 과정에서 연민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을 물건처럼 대상화 하는 비틀린 이성만이 남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라스콜니코프의 계산과 논리는 이러한 오만에서 비롯된다. 당연하게도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은 어떤 인간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을까. 답은 인용된 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오만과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과 같은 위치로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자기비움’ 또는 ‘자기낮춤’을 ‘케노시스(Kenosis)’라고 부른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가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친우를 죽인 끔찍한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무라는 대신 땅에 엎드린 라스콜니코프를 따라 함께 엎드려 울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구원의 가능성이라고 믿었던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준다.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요한복음의 구절 ‘라자로의 부활’를 읽어주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주체로서 죄를 지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라자로가 그러했듯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는 ‘기적’을 바라고 소냐에게 그 대목을 읽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단 한 마디로 라자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기적을 일으키기에 앞서 마리아와 함께 울어준다. 기적의 권능보다 위대한 것은 ‘타자’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공감과 연민이다.
따라서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에게서 고양된 ‘승리감’을 느끼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소냐가 이 대목을 읽으며 경도된 것은 그리스도가 이후에 베풀 기적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라자로를 부활시키기 전, 그들과 함께 울어줌으로써 이미 마르타와 마리아를 구원했다. 소냐를 포함한 누구도 라스콜니코프의 끔찍한 죄를 용서할 자격은 없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그가 죄를 짓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줄 수는 없다. 다만 그리스도가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마르파와 마리아에게 와서 함께 있어주었듯이, 소냐도 라스콜니코프와 함께 있어주면서 그를 위해 울어줄 수는 있다. 소냐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진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이 라스콜니코프의 그리스도가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경도된 것은 아닐까? 구원에 있어 주체의 부활보다 중요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주체 곁에 타자가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앞뒤 맥락]
아래의 대목은 『죄와 벌』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로,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요한복음의 11장인 ‘라자로의 부활(11:32~44)’을 읽어주는 부분이다. ‘극악무도한 인간은 신을 대리하여 처단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취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백치 동생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라스콜니코프는 엄청난 죄책감과 심적 고통에 시달린다. 라스콜니코프는 평소 자신이 동정했던 소냐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된 불쌍한 소냐는 오히려 라스콜니코프를 진정한 구원으로 이끈다. ‘라자로의 부활’은 신약에 나오는 이야기로, “라자로야 나오라”라는 그리스도의 한 마디에 이미 죽은 지 4일이나 된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라비 라자로가 부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바로 이 대목을 소냐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소냐는 라스콜니코프가 살인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경의와 신앙을 가득 담아 이 대목을 그에게 읽어준다.
[고전본문]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이제 알았다.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았다. 지금 성서를 읽기 시작하는 소냐가 몹시 괴로워하며,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지만, 고통스러울 정도의 온갖 번민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그가 들을 수 있도록 ‘지금 그에게’ 성서를 읽어주려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어!’ …그는 이러한 표정을 그녀의 시선과 감정의 동요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1절 첫머리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끊었던 목 경련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요한의 복음서 11장을 읽어 나갔다.
(…)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다라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쳤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라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이에 유대인들은 ‘저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가 봅니다.’라고 말했으나, 그들 중에서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말인가?’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 역시 그랬다! 그녀는 정말로 오한이라도 난 듯 벌써부터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전대미문의 가장 위대한 기적에 대한 말에 다가가고 있었고, 엄청난 승리감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속과 같이 낭랑했고, 승리감과 기쁨이 그 속에서 울리는 듯 목소리를 힘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읽고 있던 글자 모양이 그녀 앞에서 흔들렸지만, 그녀는 자기가 읽고 있는 부분을 완전히 외우고 있었다.
『죄와 벌』, 4부 4장 중에서
토론하기
(1) 라스콜니코프는 왜 소냐에게 ‘부활’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 것일까? 회개와 부활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2) 라스콜니코프는 『죄와 벌』의 주인공이자 초점 화자로, 이 대목에서 그는 소냐가 부활의 대목에 다가감으로써 ‘승리감’에 도취된다고 느낀다. 과연 소냐는 예수가 일으킨 기적을 읽기 전에 그것에 도취된 것일까? 이 대목에서의 소냐의 감정을 라스콜니코프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해설읽기
『죄와 벌』은 주인공 청년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백치 동생을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하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라스콜니코프라는 이름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살인자’ 하면 떠오르는 흉악한 이미지와 달리, 그는 수려한 외모와 약자에 대한 연민을 가진 똑똑한 대학생이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게 된 이유는 전당포 노파를 ‘악’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 세상을 좀먹는 악을 신은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 이에 라스콜니코프는 신을 대리하여 이 수전노를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죄와 벌』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평생에 걸쳐 경계했던 것은 이렇듯 인간이 신을 대리할 수 있다는 오만, 즉 ‘인신(人神=적그리스도)’의 사상이었다. 라스콜니코프의 사상은 원래부터 그릇된 것은 아니었다. 약자를 돕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사상과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굳은 신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과 신념은 오만과 만나면 반성을 모르는 무서운 악으로 변모할 위험을 지니게 된다. 오만은 구원받아야 할 타인을 수동적이고 비천한 존재로 인식시키며, 이 과정에서 연민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을 물건처럼 대상화 하는 비틀린 이성만이 남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라스콜니코프의 계산과 논리는 이러한 오만에서 비롯된다. 당연하게도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은 어떤 인간도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방식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을까. 답은 인용된 부분에 제시되어 있다. 오만과는 반대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과 같은 위치로 낮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러한 ‘자기비움’ 또는 ‘자기낮춤’을 ‘케노시스(Kenosis)’라고 부른다. 소냐는 라스콜니코프가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친우를 죽인 끔찍한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무라는 대신 땅에 엎드린 라스콜니코프를 따라 함께 엎드려 울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구원의 가능성이라고 믿었던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준다.
소냐가 라스콜니코프에게 요한복음의 구절 ‘라자로의 부활’를 읽어주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주체로서 죄를 지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라자로가 그러했듯 새로운 존재로 부활하는 ‘기적’을 바라고 소냐에게 그 대목을 읽어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핵심은 기적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단 한 마디로 라자로를 부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기적을 일으키기에 앞서 마리아와 함께 울어준다. 기적의 권능보다 위대한 것은 ‘타자’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공감과 연민이다.
따라서 라스콜니코프가 소냐에게서 고양된 ‘승리감’을 느끼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소냐가 이 대목을 읽으며 경도된 것은 그리스도가 이후에 베풀 기적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라자로를 부활시키기 전, 그들과 함께 울어줌으로써 이미 마르타와 마리아를 구원했다. 소냐를 포함한 누구도 라스콜니코프의 끔찍한 죄를 용서할 자격은 없다.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그가 죄를 짓기 전의 상태로 되돌려줄 수는 없다. 다만 그리스도가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마르파와 마리아에게 와서 함께 있어주었듯이, 소냐도 라스콜니코프와 함께 있어주면서 그를 위해 울어줄 수는 있다. 소냐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진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이 라스콜니코프의 그리스도가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에 경도된 것은 아닐까? 구원에 있어 주체의 부활보다 중요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주체 곁에 타자가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