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 ‘지하생활자’는 골방에 틀어박혀 자기만의 철학을 궁리한다. 그의 철학이란 인간의 고귀한 ‘자유의지’에 대한 것으로, 이는 당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물질주의적 결정론’에 반박하기 위한 이론이다. 기나긴 고뇌 끝에 자신의 철학을 완벽히 체계화한 지하생활자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자신을 멸시하는 옛 친구들에게 지하생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오히려 지하생활자의 분노는 아버지의 손에 팔려 매춘부가 된 불쌍한 소녀 ‘리자’에게 향한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리자에게 지하생활자는 그 부자유를 지적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퍼붓는다. 상처받은 리자는 크게 절망하고, 마지막으로 지하생활자에게 한 의대생이 자신에게 건넸던 편지를 보여준다.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말에 심취해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 하고 리자는 결국 그의 곁을 떠난다..
[고전본문]
나는 골방에서 키워 왔고, 소중히 간직했던 나의 보잘것없는 사상들을 설명하려는 욕구로 타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무엇인가 내 속에서 불이 붙었다. 목표 같은 것이 ‘나타났다.’
(…)
“나는 더럽고 지저분해도 어느 누구의 노예도 아니야. 나는 여기 있지만 언젠가는 나갈 거야, 그러면 이곳에 있지 않겠지. 나는 이것을 털어버리고 한 번 더 새로운 사람이 될 거야. 그렇지만 너는 무엇보다 네가 노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 그래, 노예 말이야! 너는 모든 것을 포기했어, 모든 너의 자유까지도. 그리고 나중에 이런 사슬들을 부수려고 해도 너는 할 수 없을 거야. 그것들은 너를 점점 더 강하게 옭아맬 거야, 그것이 바로 그 빌어먹을 사슬의 정체지!”
(…)
나는 그녀가 일부러 조소를 이용해 자기 감정을 감추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영혼이 거칠고 무례하게 침범당하고, 자존심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으며, 누구 앞에서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수줍어하고 순진한 사람들의 마지막 속임수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2부 6장 중에서
토론하기
(1) 자유의지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은 무엇인가?
(2) 지하생활자는 왜 리자의 ‘마지막 속임수’를 알지 못했을까?
해설읽기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얄팍한 사상들을 설파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리자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지하생활자는 먼저 그녀의 부자유를 지적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리자가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점점 그녀를 자극하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든다. 그는 리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조차 닿지 않는다고 조롱하면서, 그녀의 불행이 순전히 그녀가 자유를 추구하지 않은 탓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는 리자가 스스로 자유를 증명하지 않으면 끝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히고 죽어갈 것이라고 그녀는 저주를 퍼붓는다.
교만한 지하생활자는 리자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설교를 통해 그녀를 깔아뭉개며, 자유와 사랑을 설득하고 가르치려 든다. 때때로 그는 신의 언어까지도 훔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사랑과 구원은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케노시스(kenosis)’이다. 케노시스는 구원의 대상을 단순히 타자로 여기지 않고 자신도 함께 그 낮은 위치로 바짝 엎드리는 것에서 나오는 공감의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했던, 주체가 진정으로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 리자를 동정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녀의 우위에 서고, 그녀를 제압하며, 그녀에게 승리하고 싶어 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하생활자가 작중 딱 한 번 실현하는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가장 반(反)자유적인 자유’이다. 우리는 색욕에 빠진 사람이 난봉을 부리는 것이나 식욕에 빠진 사람이 폭식하는 것이 결코 자유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심풀이로 자기보다 ‘약한 타자’를 짓밟고 모욕하는 것은 단순히 자유가 아닌 것을 넘어 가장 자유와 거리가 먼 행위라는 것을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를 통해 보여준다.
이 때문에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인식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언정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사르트르를 비롯하여 많은 실존주의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를 실존주의 선구로서 찬양했지만, 그는 결코 일반적인 의미의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유의지는 단순히 그 존재가 증명된다고 해서 가치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실존한다고 해서 바로 삶의 이유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얻은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만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타인을 짓밟는 것은 진정한 자유에서 가장 먼 행위이다. 주체는 오로지 타자를 통해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앞뒤 맥락]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주인공 ‘지하생활자’는 골방에 틀어박혀 자기만의 철학을 궁리한다. 그의 철학이란 인간의 고귀한 ‘자유의지’에 대한 것으로, 이는 당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물질주의적 결정론’에 반박하기 위한 이론이다. 기나긴 고뇌 끝에 자신의 철학을 완벽히 체계화한 지하생활자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자신을 멸시하는 옛 친구들에게 지하생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한다. 오히려 지하생활자의 분노는 아버지의 손에 팔려 매춘부가 된 불쌍한 소녀 ‘리자’에게 향한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리자에게 지하생활자는 그 부자유를 지적하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퍼붓는다. 상처받은 리자는 크게 절망하고, 마지막으로 지하생활자에게 한 의대생이 자신에게 건넸던 편지를 보여준다.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말에 심취해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 하고 리자는 결국 그의 곁을 떠난다..
[고전본문]
나는 골방에서 키워 왔고, 소중히 간직했던 나의 보잘것없는 사상들을 설명하려는 욕구로 타오르고 있었다. 갑자기 무엇인가 내 속에서 불이 붙었다. 목표 같은 것이 ‘나타났다.’
(…)
“나는 더럽고 지저분해도 어느 누구의 노예도 아니야. 나는 여기 있지만 언젠가는 나갈 거야, 그러면 이곳에 있지 않겠지. 나는 이것을 털어버리고 한 번 더 새로운 사람이 될 거야. 그렇지만 너는 무엇보다 네가 노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 그래, 노예 말이야! 너는 모든 것을 포기했어, 모든 너의 자유까지도. 그리고 나중에 이런 사슬들을 부수려고 해도 너는 할 수 없을 거야. 그것들은 너를 점점 더 강하게 옭아맬 거야, 그것이 바로 그 빌어먹을 사슬의 정체지!”
(…)
나는 그녀가 일부러 조소를 이용해 자기 감정을 감추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자신의 영혼이 거칠고 무례하게 침범당하고, 자존심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으며, 누구 앞에서나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수줍어하고 순진한 사람들의 마지막 속임수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2부 6장 중에서
토론하기
(1) 자유의지에 대한 지하생활자의 말이 내포하고 있는 모순은 무엇인가?
(2) 지하생활자는 왜 리자의 ‘마지막 속임수’를 알지 못했을까?
해설읽기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고 얄팍한 사상들을 설파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리자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지하생활자는 먼저 그녀의 부자유를 지적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리자가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점점 그녀를 자극하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든다. 그는 리자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조차 닿지 않는다고 조롱하면서, 그녀의 불행이 순전히 그녀가 자유를 추구하지 않은 탓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는 리자가 스스로 자유를 증명하지 않으면 끝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으며, 이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히고 죽어갈 것이라고 그녀는 저주를 퍼붓는다.
교만한 지하생활자는 리자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설교를 통해 그녀를 깔아뭉개며, 자유와 사랑을 설득하고 가르치려 든다. 때때로 그는 신의 언어까지도 훔친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사랑과 구원은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케노시스(kenosis)’이다. 케노시스는 구원의 대상을 단순히 타자로 여기지 않고 자신도 함께 그 낮은 위치로 바짝 엎드리는 것에서 나오는 공감의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생각했던, 주체가 진정으로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지하생활자는 리자를 동정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녀의 우위에 서고, 그녀를 제압하며, 그녀에게 승리하고 싶어 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하생활자가 작중 딱 한 번 실현하는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 ‘가장 반(反)자유적인 자유’이다. 우리는 색욕에 빠진 사람이 난봉을 부리는 것이나 식욕에 빠진 사람이 폭식하는 것이 결코 자유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심풀이로 자기보다 ‘약한 타자’를 짓밟고 모욕하는 것은 단순히 자유가 아닌 것을 넘어 가장 자유와 거리가 먼 행위라는 것을 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를 통해 보여준다.
이 때문에 지하생활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인식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언정 윤리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사르트르를 비롯하여 많은 실존주의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생활자를 실존주의 선구로서 찬양했지만, 그는 결코 일반적인 의미의 실존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유의지는 단순히 그 존재가 증명된다고 해서 가치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실존한다고 해서 바로 삶의 이유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를 얻은 인간은,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만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가지고 타인을 짓밟는 것은 진정한 자유에서 가장 먼 행위이다. 주체는 오로지 타자를 통해서만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