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아듀 레비나스』에 실려 있는 「아듀」는 데리다가 1995년 12월 27일 판탱 묘지에서 낭독한 레비나스에 대한 조사(弔詞)이다. 이 조사에서 데리다는 먼저 레비나스가 이룩한 ‘윤리적 전회’를 기리고,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과 ‘타자의 죽음’이 주체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기리는 조사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왜 불가능한지를 발견해낸다.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자기 철학을 완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레비나스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윤리학의 이러한 ‘열림’은 오히려 ‘주체’를 ‘타자’에 대한 더 심오한 사고로 이끌며, 이것이야말로 데리다의 ‘탈구축’의 관점에서 레비나스가 위대한 이유이다.
[고전본문]
죽음은 무화(無化)나 비-존재 또는 무이기 이전에 일종의 경험, 살아남은 자가 겪는 ‘응답-없음’의 경험입니다. 이미 『전체성과 무한』은 죽음을 ‘무로의 이행’으로 보거나 ‘다른 실존으로의 이행’으로 보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전통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죽음을 무와 동일시하는 것은 카인과 같은 살인자가 바랄 법한 일입니다.
(…)
타자의 죽음이 제기하는 문제는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양자택일보다 더 근원적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최초의 문제나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지요.
(…)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이 없고 빚이 없는 죄의식입니다. 사실 그것은 ‘맡겨진 책임’이지요. 죽음이 절대적 예외로 남아 있는 순간, 견줄 바 없는 감정의 순간 속에서 맡겨진 책임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공유하며 느끼는 이 전례 없는 감정, 부끄러움 때문에 내보일 수 없는 이 감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개인적인 속내를 털어놓거나 내보이지 않고 이 독특한 감정이 맡겨진 책임, 유산으로서의 맡겨진 책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여기서 다시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는 것을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는 레비나스가 ‘첫 번째 죽음’인 ‘타자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고 싶습니다. ‘나는 타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요.
(…)
(레비나스의 글을 인용하며) “미지의”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미지의”는 인식의 부정적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지식은 낯선 이의 초월에 대한, 타자의 무한한 거리에 대한 환대 또는 우애의 요소입니다. 모리스 블랑쇼는 「미지의 것에 대한 인식」이라는 에세이의 제목에 이 “미지의”라는 단어를 사용햇습니다. 그는 이 글을 1923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난 이후로 줄곧 친구로 지냈던 레비나스에게, 그와의 우정에 헌정했습니다.
『아듀 레비나스』, 「아듀」 중에서
토론하기
(1) 레비나스는 어떤 의미에서 타자의 죽음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여기에 더해 타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주체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레비나스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2) 데리다가 발견한 것처럼, 레비나스가 강조한 ‘미지’라는 말은 타자를 환대함에 있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해설읽기
레비나스는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타자 혹은 타자성을 상정함으로써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 중심적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과 완전히 작별했으며, 동시에 주체와 타자의 대립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언제나 주체에 앞서 있는 타자의 얼굴은 주체에게 절대적인 ‘올곧음(droiture)’을 강요한다. 타자의 ‘죽음’은 결코 ‘무’나 ‘부활’이 아니라 ‘절대적 예외’로서 주체에게 ‘무한한 책임’을 떠맡기는 경험이며, 이 경험으로 인해 정립되는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이 아닌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레비나스는 정의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하고, 또한 환대할 수밖에 없으며, 타자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윤리학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 ‘무조건적 환대(unconditional hospitality)’의 지점, 확고한 동일성의 ‘닫힌 주체’에 ‘틈’을 내고 그것이 영원히 완성될 수 없도록 가차 없이 열어젖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기존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틈을 만들었던 것처럼, 데리다 역시 레비나스의 사유를 실패시킴으로써 그것을 ‘끝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게 만드는 틈을 발견한다. 레비나스가 남겨놓고, 블랑쇼 역시 주목했으며, 데리다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미지의’라는 말이 바로 레비나스 윤리학의 틈이다. 이 타자에 대한 ‘미지’, 즉 ‘비-지식은 낯선이의 초월에 대한, 타자의 무한한 거리에 대한 환대 또는 우애의 요소’로서 환대의 조건임을 밝히는 동시에, 무조건적 환대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지는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시킴으로써 주체에 대한 타자의 초월성을 확보하고 환대의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주체는 미지의 타자를 결코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수 없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문밖에 있는 자가 천사인지 도둑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의 방문은 ‘기회’인 동시에 ‘위협’이기 때문에, 기회는 취하고 위협은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미지(예측불가능성)가 만들어내는 환대의 이중구속이며 ‘열림’이다.
데리다의 타자성도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와 달라진다. 데리다에게 있어 타자성이란,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항상 주체/존재 내부에 들어와 있음으로써, 어떠한 주체/존재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주체/존재의 열림이다. 레비나스는 절대적인 타자에게 긍정적인 무한성을 부여함으로써 전체성의 철학들을 비판하고자 했다. 또한 타자를 통해 초월적 선(善)을 상상함으로써, 모든 폭력을 배제한 이상적인 윤리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절대적인 타자라는 말은 ‘절대적인 동일자’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따라서 긍정적 무한성의 관념은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무한한), 결과적으로는 타자성을 없애버리는 ‘전체성’의 관념일 뿐이다.
일관되게 초월성과 절대성 그리고 전체성과 무한성의 모든 기획을 탈구축했던 데리다에게 있어, 레비나스의 기획은 지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대에서부터 타자에 이르는 레비나스의 모든 기획을 탈구축한 뒤에도, 데리다는 여전히 타자를 (무)조건적 환대의 대상이라고 말하며 타자에 대한 윤리와 의무를 상기시킨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라는 이유에서건, 누구도 면제될 수 없는 자기면역이라는 이유에서건 타자는 주체라는 존재를 이미/항상 열고 있으며, 이 타자에 의한 윤리 역시 의미가 아닌 존재의 단위에서 주체 안에 이미/항상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를 넘어선 존재적 타자에 대한 고민. 이것이 데리다 혹은 모든 주체가 레비나스로부터 받은 ‘행복한 외상’이며, 윤리에 대한 ‘의무를 지우는 너무나 온화한 힘’이다.
[앞뒤 맥락]
『아듀 레비나스』에 실려 있는 「아듀」는 데리다가 1995년 12월 27일 판탱 묘지에서 낭독한 레비나스에 대한 조사(弔詞)이다. 이 조사에서 데리다는 먼저 레비나스가 이룩한 ‘윤리적 전회’를 기리고,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과 ‘타자의 죽음’이 주체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데리다는 레비나스를 기리는 조사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이 왜 불가능한지를 발견해낸다.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자기 철학을 완성했기 때문이 아니라, 결국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레비나스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윤리학의 이러한 ‘열림’은 오히려 ‘주체’를 ‘타자’에 대한 더 심오한 사고로 이끌며, 이것이야말로 데리다의 ‘탈구축’의 관점에서 레비나스가 위대한 이유이다.
[고전본문]
죽음은 무화(無化)나 비-존재 또는 무이기 이전에 일종의 경험, 살아남은 자가 겪는 ‘응답-없음’의 경험입니다. 이미 『전체성과 무한』은 죽음을 ‘무로의 이행’으로 보거나 ‘다른 실존으로의 이행’으로 보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전통적 해석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죽음을 무와 동일시하는 것은 카인과 같은 살인자가 바랄 법한 일입니다.
(…)
타자의 죽음이 제기하는 문제는 ‘존재하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양자택일보다 더 근원적입니다. 다시 말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최초의 문제나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지요.
(…)
레비나스는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이 없고 빚이 없는 죄의식입니다. 사실 그것은 ‘맡겨진 책임’이지요. 죽음이 절대적 예외로 남아 있는 순간, 견줄 바 없는 감정의 순간 속에서 맡겨진 책임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공유하며 느끼는 이 전례 없는 감정, 부끄러움 때문에 내보일 수 없는 이 감정을 이야기하기 위해, 개인적인 속내를 털어놓거나 내보이지 않고 이 독특한 감정이 맡겨진 책임, 유산으로서의 맡겨진 책임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여기서 다시 레비나스의 말을 빌리는 것을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나는 레비나스가 ‘첫 번째 죽음’인 ‘타자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고 싶습니다. ‘나는 타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요.
(…)
(레비나스의 글을 인용하며) “미지의”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미지의”는 인식의 부정적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비-지식은 낯선 이의 초월에 대한, 타자의 무한한 거리에 대한 환대 또는 우애의 요소입니다. 모리스 블랑쇼는 「미지의 것에 대한 인식」이라는 에세이의 제목에 이 “미지의”라는 단어를 사용햇습니다. 그는 이 글을 1923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만난 이후로 줄곧 친구로 지냈던 레비나스에게, 그와의 우정에 헌정했습니다.
『아듀 레비나스』, 「아듀」 중에서
토론하기
(1) 레비나스는 어떤 의미에서 타자의 죽음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 여기에 더해 타자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 주체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레비나스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2) 데리다가 발견한 것처럼, 레비나스가 강조한 ‘미지’라는 말은 타자를 환대함에 있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해설읽기
레비나스는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타자 혹은 타자성을 상정함으로써 데카르트 이후의 주체 중심적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과 완전히 작별했으며, 동시에 주체와 타자의 대립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언제나 주체에 앞서 있는 타자의 얼굴은 주체에게 절대적인 ‘올곧음(droiture)’을 강요한다. 타자의 ‘죽음’은 결코 ‘무’나 ‘부활’이 아니라 ‘절대적 예외’로서 주체에게 ‘무한한 책임’을 떠맡기는 경험이며, 이 경험으로 인해 정립되는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이 아닌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레비나스는 정의라고 부른다. 따라서 주체는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 하고, 또한 환대할 수밖에 없으며, 타자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레비나스의 윤리학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 ‘무조건적 환대(unconditional hospitality)’의 지점, 확고한 동일성의 ‘닫힌 주체’에 ‘틈’을 내고 그것이 영원히 완성될 수 없도록 가차 없이 열어젖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기존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틈을 만들었던 것처럼, 데리다 역시 레비나스의 사유를 실패시킴으로써 그것을 ‘끝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게 만드는 틈을 발견한다. 레비나스가 남겨놓고, 블랑쇼 역시 주목했으며, 데리다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미지의’라는 말이 바로 레비나스 윤리학의 틈이다. 이 타자에 대한 ‘미지’, 즉 ‘비-지식은 낯선이의 초월에 대한, 타자의 무한한 거리에 대한 환대 또는 우애의 요소’로서 환대의 조건임을 밝히는 동시에, 무조건적 환대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지는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시킴으로써 주체에 대한 타자의 초월성을 확보하고 환대의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나 주체는 미지의 타자를 결코 무조건적으로 환대할 수 없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문밖에 있는 자가 천사인지 도둑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타자의 방문은 ‘기회’인 동시에 ‘위협’이기 때문에, 기회는 취하고 위협은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미지(예측불가능성)가 만들어내는 환대의 이중구속이며 ‘열림’이다.
데리다의 타자성도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와 달라진다. 데리다에게 있어 타자성이란,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항상 주체/존재 내부에 들어와 있음으로써, 어떠한 주체/존재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주체/존재의 열림이다. 레비나스는 절대적인 타자에게 긍정적인 무한성을 부여함으로써 전체성의 철학들을 비판하고자 했다. 또한 타자를 통해 초월적 선(善)을 상상함으로써, 모든 폭력을 배제한 이상적인 윤리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절대적인 타자라는 말은 ‘절대적인 동일자’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따라서 긍정적 무한성의 관념은 자신이 아닌 어떤 것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무한한), 결과적으로는 타자성을 없애버리는 ‘전체성’의 관념일 뿐이다.
일관되게 초월성과 절대성 그리고 전체성과 무한성의 모든 기획을 탈구축했던 데리다에게 있어, 레비나스의 기획은 지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환대에서부터 타자에 이르는 레비나스의 모든 기획을 탈구축한 뒤에도, 데리다는 여전히 타자를 (무)조건적 환대의 대상이라고 말하며 타자에 대한 윤리와 의무를 상기시킨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이라는 이유에서건, 누구도 면제될 수 없는 자기면역이라는 이유에서건 타자는 주체라는 존재를 이미/항상 열고 있으며, 이 타자에 의한 윤리 역시 의미가 아닌 존재의 단위에서 주체 안에 이미/항상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의미를 넘어선 존재적 타자에 대한 고민. 이것이 데리다 혹은 모든 주체가 레비나스로부터 받은 ‘행복한 외상’이며, 윤리에 대한 ‘의무를 지우는 너무나 온화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