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이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최우등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전쟁 중이던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격대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붙잡혔다. 포로가 된 그가 이송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해가면서 레비는 하루하루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스닉이라는 신입이 들어와서 레비와 침상에 함께 사용하게 된다.
고전본문
나는 곧 레스닉이 겉보기와는 달리 나쁜 동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공손했다. 깔끔했고 코를 골지 않았으며 밤에도 두세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 그래서 조금 뒤 점호 마당에서 그가 나와 같은 코만도*에 배정되는 것을 보자 살짝 반가운 마음이 스쳤다.
(…)
나는 레스닉과 함께 멀리 있는 침목 더미까지 가서 되도록 가벼운 침목을 고르려고 애를 쓰며 두세 번 더 운반을 한다. 하지만 좋은 침목들은 이미 모두 운반이 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모서리가 뾰족하고 진흙과 얼음 덩어리가 달라붙은 데다 철로에 고정시킬 때 썼던 쇳조각들이 박혀 무거운, 형편없는 것들뿐이다.
(…)
이제 오전은 거의 다 지나갔다. 오후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노역으로 돌아간다.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하늘을 가르는 별똥별처럼, 신이 보내는 계시처럼, 정오의 사이렌이 초인간적이고 비인간적으로 크게 울려 퍼진다. 익명의 우리들이 만장일치로 느끼는 피로와 허기를 잠깐이나마 달래주려는 소리다. 다시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모두 막사로 달려가 반합을 든 채 줄을 선다. 따뜻한 그 혼합물로 내장을 채우려는 생각에 모두 동물적으로 서두른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배급을 타려고 하지 않는다. 첫 번째 사람의 죽이 가장 묽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카포*가 우리의 식탐을 비웃고 경멸한다. 그리고 통을 휘젓지 못하도록 예의주시한다. 밑바닥의 것은 알다시피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뒤 은총이 내려(이번 것은 배에 내려진 실질적인 은총) 배가 든든하고 따뜻해지고, 소란스럽게 타오르는 난로 주변의 오두막이 따뜻해진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탐욕스러우면서도 경건한 동작으로 가느다란 담배를 만다. 난롯불 때문에 진흙과 눈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옷에서 김이 나면서 개나 가축 우리에서 나는 냄새가 풍긴다.
모두 말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조약이 있다. 모두들 눈 깜짝할 사이에 팔을 괴고 잠이 들어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등을 세우곤 한다. 아직 감겨 있는 눈꺼풀 뒤로 꿈들이 사납게 등장한다. 늘 꾸는 꿈들이다. 우리 집에서 따뜻한 물로 너무나 기분 좋게 목욕을 한다. 우리 집의 식탁에 앉는다. 집에서 우리들의 이 희망 없는 노동을 이야기한다. 언제나 배가 고프고 노예처럼 잠을 잔다고.
그러다가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죽 내용물 가운데 하나의 핵이 고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점점 농밀해지면서 우리를 찌르고 점점 더 커져서 곧 의식의 문지방을 넘게 만든다. 수면의 기쁨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것이다. ‘Es wird bald ein Uhr sein.’ 거의 1시다. 이것은 빠르게 파괴적으로 번져가는 암세포처럼 우리의 잠을 압살하고 예정된 고통을 일깨워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는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에, 유리창에 눈들이 부딪혀 흩날리는 가벼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Es wird schnell lein Uhr sein.”(곧 1시가 된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모두 잠에 매달려 있다. 모든 감각들은 다가오고 있는 신호에 대한 공포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그것은 이제 문 밖에 있다. 그리고 안으로…….
바로 이것이다. 둔탁하게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 마이스터 노갈라가 눈덩이를 창문으로 던진다. 지금 그는 밖에 똑바로 서 있다. 시곗바늘이 우리 쪽에서 보이도록 시계를 들고 있다. 카포가 일어난 몸을 쭉 편다. 그가 복종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답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Alles heraus.” 모두 밖으로.
*코만도: 작업반
*카포: 반장
『이것이 인간인가』 ‘노동’ 중에서
토론하기
(1) 저자가 식사시간을 두고 굳이 ‘은총’이라는 종교적인 표현을 쓴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소화되지 않은 죽이 수감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책 제목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것’이 해당할 수 있는 대상들을 나열하고 각각의 이유를 설명해보세요.
해설읽기
레스닉이 오기 전에 레비는 폴란드인과 같이 잤다. 레비는 폴란드의 이름을 몰랐고 그 또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레비는 그의 정강이뼈에 오래된 상처 자국이 두 개가 있으며 밤이면 그곳에서 상처 썩는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안다. 또한 그의 방광이 좋지 않아서 밤마다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 잠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도 안다. 그때마다 자신도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레비가 신입의 등장에 긴장했던 까닭은 이처럼 침상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의 사소한 특성조차도 수용소에서는 주변 사람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침대 동료의 키가 크다는 것은 불운이고 잠자는 시간을 뺏긴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레스닉은 잠을 잘 때도 노동을 할 때도 괜찮은 파트너에 속한다.
레비의 수용소에는 200여 개의 작업반(코만도)이 있었다. 각 작업반에는 반장(카포)가 있다. 수용소에서의 노동은 힘들고 식량의 배급도 적어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이곳에서는 배급받는 빵이 곧 돈이었다. 담배 한 가치는 빵 하나, 담요는 빵 두 개 하는 식이었다. 옆 사람의 빵은 커 보이고 자기 손에 들린 빵은 작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서로의 빵을 바꿔 보기도 하지만 똑같은 착각이 다시 일어난다.
오전의 노동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도 오후라는 시간까지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감자들이 내다볼 수 있는 시간의 폭은 점심식사 시간까지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고민이라고는 오늘 나올 죽은 어느 정도의 묽기일지, 그 맛은 어떨지, 우리 차지가 될 것이 죽통의 윗부분일지 아랫부분일지 하는 정도의 것들이다. 프레모 레비는 다른 수감자들의 이런 모습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 자신만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의 코는 그의 의지와 상관 없이 부엌에서 실려오는 음식냄새를 향해서 킁킁거리고 있다.
통상 은총은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즉 은총은 물질적인 가치를 초월한 성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반면 저자가 가리키는 은총은 반대이다. 그는 가장 물질적인 것, 음식을 향해 달려드는 수감자들의 동물적인 행동을 가리키기 위해 은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의 일종의 아이러니다. 작가는 수용소를 ‘포로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라고 말한다. 기존의 인간을 둘러싸고 있던 가치가 전도된다. 수용소 생활은 생존 이상의 것들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에 음식이야말로 가장 찬란해진다.
모두가 내장을 채우려는 생각에 모두 동물적으로 서두르지만 아무도 먼저 배급을 타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문명세상에서의 양보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다. 첫 번째 사람의 죽은 윗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가장 묽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장은 일반 수감자들의 이런 모습을 비웃지만 권력을 지닌 카포라고 해서 예외라고 볼 수 없다. 사실 그 또한 통의 바닥부터 죽을 뜨지 않는 방식으로 배식하도록 노골적인 감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건더기를 그의 몫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일차적으로 그곳에서 노동하는 레비를 비롯한 수감자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이 책의 제목은 탄식과 비참의 어조로 읽힌다. 만약 ‘이것’이 카포라면? 그렇다면 수감자들의 동물로 격하된 삶을 비웃는 카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카포 역시 수감자의 일원이기도 하고 그의 비웃음은 그를 다른 수감자보다 우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인간성의 지표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일반 수감자들의 비참함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비인간성을 드러내는 표지에 가깝다. ‘이것’에 나치친위대에 대입해본다면 어떨까? 카포보다 많은 권력을 지닌 나치친위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주변 환경은 보다 풍족하다는 의미에서 동물성으로부터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은 어느 카포보다 더 ‘악’에 근접해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것’에 여러 인물들을 대입시켜보면서 과연 인간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켜 볼 수 있다.
키워드
수용소, 아우슈비츠, 인간성, 폭력, 학살
전후맥락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유대인이다. 토리노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으며 최우등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전쟁 중이던 파시즘에 저항하는 유격대를 조직해서 활동했다 붙잡혔다. 포로가 된 그가 이송된 곳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해가면서 레비는 하루하루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져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스닉이라는 신입이 들어와서 레비와 침상에 함께 사용하게 된다.
고전본문
나는 곧 레스닉이 겉보기와는 달리 나쁜 동료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고 공손했다. 깔끔했고 코를 골지 않았으며 밤에도 두세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도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 그래서 조금 뒤 점호 마당에서 그가 나와 같은 코만도*에 배정되는 것을 보자 살짝 반가운 마음이 스쳤다.
(…)
나는 레스닉과 함께 멀리 있는 침목 더미까지 가서 되도록 가벼운 침목을 고르려고 애를 쓰며 두세 번 더 운반을 한다. 하지만 좋은 침목들은 이미 모두 운반이 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모서리가 뾰족하고 진흙과 얼음 덩어리가 달라붙은 데다 철로에 고정시킬 때 썼던 쇳조각들이 박혀 무거운, 형편없는 것들뿐이다.
(…)
이제 오전은 거의 다 지나갔다. 오후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노역으로 돌아간다. 11시 30분에 오늘 죽은 어느 정도일지, 맛은 어떨지, 죽통의 윗부분 혹은 아랫부분 중 어느 것이 우리 차지가 될지 하는 판에 박은 질문들이 시작된다. 난 이런 질문들을 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래도 그 대답에 탐욕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부엌에서 실려오는 연기에 코를 킁킁거리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하늘을 가르는 별똥별처럼, 신이 보내는 계시처럼, 정오의 사이렌이 초인간적이고 비인간적으로 크게 울려 퍼진다. 익명의 우리들이 만장일치로 느끼는 피로와 허기를 잠깐이나마 달래주려는 소리다. 다시 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모두 막사로 달려가 반합을 든 채 줄을 선다. 따뜻한 그 혼합물로 내장을 채우려는 생각에 모두 동물적으로 서두른다. 하지만 아무도 먼저 배급을 타려고 하지 않는다. 첫 번째 사람의 죽이 가장 묽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카포*가 우리의 식탐을 비웃고 경멸한다. 그리고 통을 휘젓지 못하도록 예의주시한다. 밑바닥의 것은 알다시피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뒤 은총이 내려(이번 것은 배에 내려진 실질적인 은총) 배가 든든하고 따뜻해지고, 소란스럽게 타오르는 난로 주변의 오두막이 따뜻해진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탐욕스러우면서도 경건한 동작으로 가느다란 담배를 만다. 난롯불 때문에 진흙과 눈에 흠뻑 젖은 사람들의 옷에서 김이 나면서 개나 가축 우리에서 나는 냄새가 풍긴다.
모두 말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조약이 있다. 모두들 눈 깜짝할 사이에 팔을 괴고 잠이 들어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가 다시 등을 세우곤 한다. 아직 감겨 있는 눈꺼풀 뒤로 꿈들이 사납게 등장한다. 늘 꾸는 꿈들이다. 우리 집에서 따뜻한 물로 너무나 기분 좋게 목욕을 한다. 우리 집의 식탁에 앉는다. 집에서 우리들의 이 희망 없는 노동을 이야기한다. 언제나 배가 고프고 노예처럼 잠을 잔다고.
그러다가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죽 내용물 가운데 하나의 핵이 고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점점 농밀해지면서 우리를 찌르고 점점 더 커져서 곧 의식의 문지방을 넘게 만든다. 수면의 기쁨을 우리에게서 앗아가는 것이다. ‘Es wird bald ein Uhr sein.’ 거의 1시다. 이것은 빠르게 파괴적으로 번져가는 암세포처럼 우리의 잠을 압살하고 예정된 고통을 일깨워 우리를 짓누른다. 우리는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에, 유리창에 눈들이 부딪혀 흩날리는 가벼운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Es wird schnell lein Uhr sein.”(곧 1시가 된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모두 잠에 매달려 있다. 모든 감각들은 다가오고 있는 신호에 대한 공포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그것은 이제 문 밖에 있다. 그리고 안으로…….
바로 이것이다. 둔탁하게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 마이스터 노갈라가 눈덩이를 창문으로 던진다. 지금 그는 밖에 똑바로 서 있다. 시곗바늘이 우리 쪽에서 보이도록 시계를 들고 있다. 카포가 일어난 몸을 쭉 편다. 그가 복종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답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Alles heraus.” 모두 밖으로.
*코만도: 작업반
*카포: 반장
『이것이 인간인가』 ‘노동’ 중에서
토론하기
(1) 저자가 식사시간을 두고 굳이 ‘은총’이라는 종교적인 표현을 쓴 까닭은 무엇입니까?
(2) 소화되지 않은 죽이 수감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책 제목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것’이 해당할 수 있는 대상들을 나열하고 각각의 이유를 설명해보세요.
해설읽기
레스닉이 오기 전에 레비는 폴란드인과 같이 잤다. 레비는 폴란드의 이름을 몰랐고 그 또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레비는 그의 정강이뼈에 오래된 상처 자국이 두 개가 있으며 밤이면 그곳에서 상처 썩는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안다. 또한 그의 방광이 좋지 않아서 밤마다 여덟 번에서 열 번 정도 잠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사실도 안다. 그때마다 자신도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레비가 신입의 등장에 긴장했던 까닭은 이처럼 침상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의 사소한 특성조차도 수용소에서는 주변 사람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침대 동료의 키가 크다는 것은 불운이고 잠자는 시간을 뺏긴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레스닉은 잠을 잘 때도 노동을 할 때도 괜찮은 파트너에 속한다.
레비의 수용소에는 200여 개의 작업반(코만도)이 있었다. 각 작업반에는 반장(카포)가 있다. 수용소에서의 노동은 힘들고 식량의 배급도 적어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이곳에서는 배급받는 빵이 곧 돈이었다. 담배 한 가치는 빵 하나, 담요는 빵 두 개 하는 식이었다. 옆 사람의 빵은 커 보이고 자기 손에 들린 빵은 작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서로의 빵을 바꿔 보기도 하지만 똑같은 착각이 다시 일어난다.
오전의 노동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도 오후라는 시간까지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감자들이 내다볼 수 있는 시간의 폭은 점심식사 시간까지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고민이라고는 오늘 나올 죽은 어느 정도의 묽기일지, 그 맛은 어떨지, 우리 차지가 될 것이 죽통의 윗부분일지 아랫부분일지 하는 정도의 것들이다. 프레모 레비는 다른 수감자들의 이런 모습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면서 자신만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의 코는 그의 의지와 상관 없이 부엌에서 실려오는 음식냄새를 향해서 킁킁거리고 있다.
통상 은총은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즉 은총은 물질적인 가치를 초월한 성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반면 저자가 가리키는 은총은 반대이다. 그는 가장 물질적인 것, 음식을 향해 달려드는 수감자들의 동물적인 행동을 가리키기 위해 은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의 일종의 아이러니다. 작가는 수용소를 ‘포로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라고 말한다. 기존의 인간을 둘러싸고 있던 가치가 전도된다. 수용소 생활은 생존 이상의 것들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에 음식이야말로 가장 찬란해진다.
모두가 내장을 채우려는 생각에 모두 동물적으로 서두르지만 아무도 먼저 배급을 타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문명세상에서의 양보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행동이다. 첫 번째 사람의 죽은 윗부분에서 뜨기 때문에 가장 묽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반장은 일반 수감자들의 이런 모습을 비웃지만 권력을 지닌 카포라고 해서 예외라고 볼 수 없다. 사실 그 또한 통의 바닥부터 죽을 뜨지 않는 방식으로 배식하도록 노골적인 감시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건더기를 그의 몫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일차적으로 그곳에서 노동하는 레비를 비롯한 수감자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때 이 책의 제목은 탄식과 비참의 어조로 읽힌다. 만약 ‘이것’이 카포라면? 그렇다면 수감자들의 동물로 격하된 삶을 비웃는 카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카포 역시 수감자의 일원이기도 하고 그의 비웃음은 그를 다른 수감자보다 우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그것을 인간성의 지표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일반 수감자들의 비참함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비인간성을 드러내는 표지에 가깝다. ‘이것’에 나치친위대에 대입해본다면 어떨까? 카포보다 많은 권력을 지닌 나치친위대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주변 환경은 보다 풍족하다는 의미에서 동물성으로부터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삶은 어느 카포보다 더 ‘악’에 근접해있다. 이처럼 우리는 ‘이것’에 여러 인물들을 대입시켜보면서 과연 인간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켜 볼 수 있다.
키워드
수용소, 아우슈비츠, 인간성, 폭력,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