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1951년, 평범한 농부였던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이하 슈호프)는 독소전 참전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결국 그는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와서 팔년째 수감 중이다. 유독 몸에서 오한이 나서 힘든 하루였지만, 여느 때처럼 슈호프는 바깥에 나가서 주어진 작업을 하고 무사히 일과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점호까지 마치면 오늘 하루는 끝이 난다.
고전본문
모두를 밖으로 쫓아낸 간수와 막사장은 또 한번 방 안을 살피고 돌아간다. 혹시 아직 남은 놈은 없는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자고 있는 놈은 없는가 살펴보는 것이다. 인원수가 모자라 다시 세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룻저녁에 점호를 세 번이나 하다가는 잠잘 틈이 없다. 한 바퀴 둘러보고는 문으로 돌아온다.
“하나! 둘! 셋!…….” 이번에는 한 사람씩 방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열여덟번째이다. 맨발로 침대로 재빨리 돌아와서 한쪽 발로 발판을 밟고는 훌쩍 상단으로 올라간다.
그래, 이젠 됐다. 덧옷 속에 얼른 발을 집어넣는다. 담요를 덮고 그 위에 겉옷도 덮는다. 이젠 이대로 잠들 수 있다. 이번에는 건넌방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이리로 들어올 차례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체자리도 돌아온다. 슈호프가 그에게 자루를 건넨다.
알료쉬카도 돌아온다. 저런 녀석은 착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에게 항상 친절을 베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슨 잔일로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녀석이니까 말이다.
“알료쉬카! 이거 받아!” 비스킷을 그에게 한 개 내민다.
알료쉬카가 빙긋 웃는다.
“고마워요, 당신이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어서 들어!”
나 같은 놈이야 없으면, 또 뭘 해서든 벌이를 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다음 슈호프는 소시지를 깨문다. 지근지근 씹어먹는다. 향긋한 고기 냄새가 난다. 고깃물! 진짜 고깃물이 입 안에 녹아든다. 아, 그리고 그것이 목구멍을 지나 뱃속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소시지를 다 먹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내일 아침 작업장에 나가기 전에 먹기로 결정한다.
그런 다음, 그는 때묻은 얇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어느새 침대 사이의 통로엔 점호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옆반 반원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토론하기
(1) 주인공 슈호프가 하루를 돌아보면서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격언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찬반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함께 나눠봅시다.
해설읽기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간첩행위을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들어왔지만 정작 그에게는 별다른 정치적 신념이 없다, 수용소 내에서도 부유한 계급인 체자리는 영화감독 출신으로 불온한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 수감사유였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부탁해도 거절할 줄 모르는 침례교도인 알료쉬카는 종교신봉자라는 이유로 들어왔다. 그밖에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 반장인 추린은 아버지가 부농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근무하던 군대에서 쫓겨나 수용소에 끌려왔다. 수용소의 간부들조차도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수용소 내부의 정치적 희생양에 가깝다.
스탈린 시대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부르주아 문화, 종교, 지주 등을 척결했다.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무고한 죄인의 대량양산이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채 형편 없는 식사로 끼니를 때우면서 땅을 파고 벽돌을 쌓는 노동을 하고 있다. 매일 반복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이라고는 먹는 것, 작업배당, 잔머리 굴리기가 전부다, 잔꾀, 뇌물, 눈가림, 속임수 같은 일정 정도의 도덕적 타락은 수감자들의 태도에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다.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암거래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활 상의 약간의 이득을 얻고자 한다.
저자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창작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실제로 솔제니친은 1945년 반소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이후 8년 동안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했다. 많은 사람들이 솔제니친이 자신이 보냈던 어두운 세월을 묘사하면서 수용소의 실상과 권력의 허상에 대해 폭로했다는 식으로 이 작품을 독해하고 있다. 작가는 슈호프라는 무고한 인물을 스탈린 공포시대의 대표적 상징이며 정치적 억압수단이었던 강제노동수용소에 배치시킴으로써, 지배권력이 약자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비극으로 몰아넣은 전형적인 사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간과되는 점은 솔제니친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을 끊임없이 노출시킨다는 사실이다. 슈호프는 알료쉬카에게 비스킷을 내미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슈호프에게 아직 동정심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료쉬카 또한 타인에 대한 친절함을 잃지 않으면서 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고 있다. 슈호프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수완은, 비록 수용소 생활이 그에게 많은 좌절을 안겨주지만 그가 여전히 지성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간임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소설 곳곳에서 이런 대목들이 꾸준히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인간 이하의 생활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는 동안에도 끔찍하거나 비관적인 감상에 젖기보다는 대부분 덤덤하고 때로는 유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수용소의 권력에도 불구하고 슈호프가 (매우 제한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사실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지탱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당시의 소련체제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넘어선다. 결론적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하루의 묘사를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의 비참한 삶과 실낱 같은 희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키워드
권력, 권위, 복종, 사회주의, 수용소, 인간성, 존엄성, 폭력
전후맥락
1951년, 평범한 농부였던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이하 슈호프)는 독소전 참전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결국 그는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목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끌려와서 팔년째 수감 중이다. 유독 몸에서 오한이 나서 힘든 하루였지만, 여느 때처럼 슈호프는 바깥에 나가서 주어진 작업을 하고 무사히 일과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온다. 마지막으로 점호까지 마치면 오늘 하루는 끝이 난다.
고전본문
모두를 밖으로 쫓아낸 간수와 막사장은 또 한번 방 안을 살피고 돌아간다. 혹시 아직 남은 놈은 없는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자고 있는 놈은 없는가 살펴보는 것이다. 인원수가 모자라 다시 세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룻저녁에 점호를 세 번이나 하다가는 잠잘 틈이 없다. 한 바퀴 둘러보고는 문으로 돌아온다.
“하나! 둘! 셋!…….” 이번에는 한 사람씩 방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열여덟번째이다. 맨발로 침대로 재빨리 돌아와서 한쪽 발로 발판을 밟고는 훌쩍 상단으로 올라간다.
그래, 이젠 됐다. 덧옷 속에 얼른 발을 집어넣는다. 담요를 덮고 그 위에 겉옷도 덮는다. 이젠 이대로 잠들 수 있다. 이번에는 건넌방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이리로 들어올 차례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체자리도 돌아온다. 슈호프가 그에게 자루를 건넨다.
알료쉬카도 돌아온다. 저런 녀석은 착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에게 항상 친절을 베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슨 잔일로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녀석이니까 말이다.
“알료쉬카! 이거 받아!” 비스킷을 그에게 한 개 내민다.
알료쉬카가 빙긋 웃는다.
“고마워요, 당신이 먹을 것도 부족할 텐데……”
“어서 들어!”
나 같은 놈이야 없으면, 또 뭘 해서든 벌이를 할 수 있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 다음 슈호프는 소시지를 깨문다. 지근지근 씹어먹는다. 향긋한 고기 냄새가 난다. 고깃물! 진짜 고깃물이 입 안에 녹아든다. 아, 그리고 그것이 목구멍을 지나 뱃속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소시지를 다 먹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내일 아침 작업장에 나가기 전에 먹기로 결정한다.
그런 다음, 그는 때묻은 얇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어느새 침대 사이의 통로엔 점호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옆반 반원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토론하기
(1) 주인공 슈호프가 하루를 돌아보면서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격언이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찬반의 의견을 밝히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함께 나눠봅시다.
해설읽기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간첩행위을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들어왔지만 정작 그에게는 별다른 정치적 신념이 없다, 수용소 내에서도 부유한 계급인 체자리는 영화감독 출신으로 불온한 영화를 찍었다는 것이 수감사유였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부탁해도 거절할 줄 모르는 침례교도인 알료쉬카는 종교신봉자라는 이유로 들어왔다. 그밖에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 반장인 추린은 아버지가 부농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근무하던 군대에서 쫓겨나 수용소에 끌려왔다. 수용소의 간부들조차도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기보다 수용소 내부의 정치적 희생양에 가깝다.
스탈린 시대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부르주아 문화, 종교, 지주 등을 척결했다. 그것이 초래한 결과는 무고한 죄인의 대량양산이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채 형편 없는 식사로 끼니를 때우면서 땅을 파고 벽돌을 쌓는 노동을 하고 있다. 매일 반복되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구성하는 요소이라고는 먹는 것, 작업배당, 잔머리 굴리기가 전부다, 잔꾀, 뇌물, 눈가림, 속임수 같은 일정 정도의 도덕적 타락은 수감자들의 태도에 깊숙하게 뿌리를 내렸다. 모든 사람들은 어느 정도 암거래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생활 상의 약간의 이득을 얻고자 한다.
저자 솔제니친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창작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실제로 솔제니친은 1945년 반소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이후 8년 동안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했다. 많은 사람들이 솔제니친이 자신이 보냈던 어두운 세월을 묘사하면서 수용소의 실상과 권력의 허상에 대해 폭로했다는 식으로 이 작품을 독해하고 있다. 작가는 슈호프라는 무고한 인물을 스탈린 공포시대의 대표적 상징이며 정치적 억압수단이었던 강제노동수용소에 배치시킴으로써, 지배권력이 약자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비극으로 몰아넣은 전형적인 사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쉽게 간과되는 점은 솔제니친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을 끊임없이 노출시킨다는 사실이다. 슈호프는 알료쉬카에게 비스킷을 내미는 장면을 통해 우리는 슈호프에게 아직 동정심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알료쉬카 또한 타인에 대한 친절함을 잃지 않으면서 종교인으로서의 양심을 지키고 있다. 슈호프가 자신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수완은, 비록 수용소 생활이 그에게 많은 좌절을 안겨주지만 그가 여전히 지성을 지니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간임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소설 곳곳에서 이런 대목들이 꾸준히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인간 이하의 생활에 대한 묘사를 읽고 있는 동안에도 끔찍하거나 비관적인 감상에 젖기보다는 대부분 덤덤하고 때로는 유쾌함까지 느끼게 된다. 수용소의 권력에도 불구하고 슈호프가 (매우 제한적인 의미이기는 하지만)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사실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소설을 지탱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당시의 소련체제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넘어선다. 결론적으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매일 똑같이 되풀이되는 하루의 묘사를 통해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인간의 비참한 삶과 실낱 같은 희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키워드
권력, 권위, 복종, 사회주의, 수용소, 인간성, 존엄성, 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