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자유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잦다. 자유롭게 산다고 주장하는 개인들이 살아가는 면면을 살펴보면 그 실상이 유사한 경우도 빈번하다. 자발성이나 자유의지는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다음 글에서 에리히 프롬은 적극적인 자유 개념에 대해 탐구하면서 ‘자발성’, ‘창조성’, ‘예술’을 핵심 단서로 제시한다.
[고전본문]
자발적 활동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이나 무력함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박적인 활동이 아니다. 또한 외부로부터 제시된 유형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자동인형의 활동도 아니다.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이고, 심리적으로는 그 낱말의 라틴어 어원인 ‘sponte’가 문자 그대로 의미하는 것 – 자신의 자유의지로 – 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활동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지적·감각적 경험과 인간의 의지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의 성질을 뜻한다. 이 자발성에 대한 한 가지 전제는 인격을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고 인격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누르지 않아야만, 자신에게 투명해져야만,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근본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발성은 우리 문화에서는 비교적 드문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자발성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자발적은 혹은 전에 자발적이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자동인형의 표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가에 대한 정의라면 – 발자크는 그 자신을 그런 식으로 정의했다 – 일부 철학자와 과학자도 예술가라고 불러야 하고, 나머지는 구식 사진사가 창조적인 화가와 다르듯이 그들과는 다르다. 예술가처럼 객관적인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 – 또는 단순히 말해서 훈련 – 은 부족하지만, 그들과 같은 자발성을 가진 개인들도 있다. (266p)
*자동인형 : 기계 장치로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인형을 뜻하는 용어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
*발자크 :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 언론인으로 대표작은 『고리오 영감』
『자유로부터의 도피』, 제7장 자유와 민주주의 중에서
토론하기
(1) 인격의 어느 한쪽(이성 혹은 본성)에만 치우친 자발적 활동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 수 있을까요?
(2) 통상적인 의미에서 예술가라고 분류되지는 않지만, 저자의 설명에 따라서 ‘예술가’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례를 언급해보세요.
해설읽기
근대인은 신과 같은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로부터의 자유’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에 불과하다. 사실 이때의 자유는 막막한 것이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서 집을 비우게 되었을 때, 집에 홀로 남겨진 자녀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하루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을 떠올리게 되는 현상과도 같다. 근대인도 마찬가지다. 근대인은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갖고 투표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지 못한다.
자유의 실현은 경제적·정치적 관점에서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일상적인 활동과 일, 타인들과의 관계도 포함시켜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자유에는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 그가 말하는 적극적인 자유의 획득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때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점은 자아의 실현은 이성에 국한되는 사고 작용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대인이 저지른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인간의 자아가 갖는 특성을 이성적이라고 정의한 것이었다. 물론 인간을 이성을 통해 과학에 기반한 물질문명을 발달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대량살상무기나 환경오염 같은 문제점이 있었고, 오늘날 그 간과했던 문제점들이 인간의 삶은 물론이고 지구 전체를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개개인의 자아의 실현은 이성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자아 실현이라면 인간의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근대인의 자유와는 달리 자유로우면서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일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에리히 프롬은 예술가를 참고할만한 사례로 꼽지만, 프롬은 예술가 외에도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면 우리는 자발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들은 정말로 ‘자기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자발성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서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발성을 적어도 잠깐씩은 경험할 수 있고, 그때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어떤 풍경을 새롭게 감지할 때, 전형적이지 않은 감각적 쾌감을 느낄 때, 이런 순간에 우리는 자발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프롬은 자발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사랑을 꼽는다. 다만 이때의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사랑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즉 차이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사랑을 의미한다. 참고로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자신의 사랑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켜 훗날 『사랑의 기술』이라는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자아실현으로서의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독특성에 대한 긍정을 토대로 하며 자아의 진정한 성장은 항상 이 토대 위에서의 성장이다. 인간은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을 세계와 통합시킬 수 있다.
[앞뒤 맥락]
자유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잦다. 자유롭게 산다고 주장하는 개인들이 살아가는 면면을 살펴보면 그 실상이 유사한 경우도 빈번하다. 자발성이나 자유의지는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다음 글에서 에리히 프롬은 적극적인 자유 개념에 대해 탐구하면서 ‘자발성’, ‘창조성’, ‘예술’을 핵심 단서로 제시한다.
[고전본문]
자발적 활동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이나 무력함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는 강박적인 활동이 아니다. 또한 외부로부터 제시된 유형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는 자동인형의 활동도 아니다. 자발적 활동은 자아의 자유로운 활동이고, 심리적으로는 그 낱말의 라틴어 어원인 ‘sponte’가 문자 그대로 의미하는 것 – 자신의 자유의지로 – 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활동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적·지적·감각적 경험과 인간의 의지 속에서 작동할 수 있는 창조적 활동의 성질을 뜻한다. 이 자발성에 대한 한 가지 전제는 인격을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고 인격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의 본질적인 부분들을 억누르지 않아야만, 자신에게 투명해져야만,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근본적으로 통합되어야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자발성은 우리 문화에서는 비교적 드문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자발성을 볼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자발적은 혹은 전에 자발적이었던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은 자동인형의 표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가에 대한 정의라면 – 발자크는 그 자신을 그런 식으로 정의했다 – 일부 철학자와 과학자도 예술가라고 불러야 하고, 나머지는 구식 사진사가 창조적인 화가와 다르듯이 그들과는 다르다. 예술가처럼 객관적인 수단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능력 – 또는 단순히 말해서 훈련 – 은 부족하지만, 그들과 같은 자발성을 가진 개인들도 있다. (266p)
*자동인형 : 기계 장치로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든 인형을 뜻하는 용어로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
*발자크 :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 언론인으로 대표작은 『고리오 영감』
『자유로부터의 도피』, 제7장 자유와 민주주의 중에서
토론하기
(1) 인격의 어느 한쪽(이성 혹은 본성)에만 치우친 자발적 활동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 수 있을까요?
(2) 통상적인 의미에서 예술가라고 분류되지는 않지만, 저자의 설명에 따라서 ‘예술가’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례를 언급해보세요.
해설읽기
근대인은 신과 같은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로부터의 자유’는 소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에 불과하다. 사실 이때의 자유는 막막한 것이다. 부모님이 여행을 가서 집을 비우게 되었을 때, 집에 홀로 남겨진 자녀는 해방감을 느끼지만 하루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님을 떠올리게 되는 현상과도 같다. 근대인도 마찬가지다. 근대인은 자기 소유의 재산을 갖고 투표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 알지 못한다.
자유의 실현은 경제적·정치적 관점에서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개인의 일상적인 활동과 일, 타인들과의 관계도 포함시켜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자유에는 성장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 그가 말하는 적극적인 자유의 획득은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자신이 된다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이때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할 점은 자아의 실현은 이성에 국한되는 사고 작용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근대인이 저지른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인간의 자아가 갖는 특성을 이성적이라고 정의한 것이었다. 물론 인간을 이성을 통해 과학에 기반한 물질문명을 발달시켰지만 그 이면에는 대량살상무기나 환경오염 같은 문제점이 있었고, 오늘날 그 간과했던 문제점들이 인간의 삶은 물론이고 지구 전체를 위협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개개인의 자아의 실현은 이성만이 아니라 인격 전체의 실현을 통해, 즉 감정적 잠재력과 지적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의 자아 실현이라면 인간의 자유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근대인의 자유와는 달리 자유로우면서 외롭지 않을 수 있고, 비판적이지만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지 않을 수 있고, 독립적이지만 인류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일 수 있다.
본문에서 제시된 에리히 프롬은 예술가를 참고할만한 사례로 꼽지만, 프롬은 예술가 외에도 어린아이들을 지켜보면 우리는 자발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아이들은 정말로 ‘자기 것’을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자발성은 아이들의 말과 생각에서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발성을 적어도 잠깐씩은 경험할 수 있고, 그때야말로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어떤 풍경을 새롭게 감지할 때, 전형적이지 않은 감각적 쾌감을 느낄 때, 이런 순간에 우리는 자발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프롬은 자발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사랑을 꼽는다. 다만 이때의 사랑은 자신을 다른 사람 속에 용해시키는 사랑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사랑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즉 차이를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하여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결합시키는 사랑을 의미한다. 참고로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자신의 사랑에 관한 논의를 발전시켜 훗날 『사랑의 기술』이라는 저서를 내놓기도 했다. 자아실현으로서의 적극적인 자유는 개인의 독특성에 대한 긍정을 토대로 하며 자아의 진정한 성장은 항상 이 토대 위에서의 성장이다. 인간은 자아를 자발적으로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신을 세계와 통합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