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계몽의 변증법』의 앞부분에 실린 「계몽의 개념」과 그에 덧붙여진 두 개의 글을 통해 저자들은 그리스로마신화 속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일화를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함축적인 알레고리로 제시한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기둥에 몸이 묶여 있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오디세우스(지배자)와 운신이 자유롭지만 귀를 밀랍으로 막아두어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선원들(피지배자)은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체계(system)가 되어 그녀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저자들의 신화 분석이다. 즉 신화적 세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계몽주의적 목표는 세이렌이라는 자연과 감각적 경험에서 멀어질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때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간이자 근대적 주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감성을 억압하는 한편 부하들을 지배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저자들은 이를 ‘인간에 의한 외적 자연의 지배가 인간의 내적 자연지배로 전이되고 이것이 다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적 지배로 확장’하는 과정으로 읽는다.
그런데 재밌게도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수록 인간은 ‘체계(system)’의 폭력에 굴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게다가 자기 내부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감정을 억지로 억누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그 분노를 떠넘기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순응하고 또 그것들을 모방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자연과 달리, 문명 속의 인간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공격하고 배척하게 된다. 이러한 원인불명의 혐오감과 공격성에 대해 저자들은, 이것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향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며, 파시즘이 가지는 반(反)유대주의적 정서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고전본문]
유대인에 대한 거부 반응은 본래부터 존재했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습적 충동 요소가 정치 티켓에 의해 정확한 목표물을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 ‘반유대주의적인 요소들’은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티켓적 사고에서 보여지는 경험의 상실에 의해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러한 테마도 다시 한번 티켓에 의해 동원될 수 있다. ‘반유대주의적인 요소들’은 이미 해체된 요소들이지만 새로운 반유대주의자들의 비틀린 양심을 건드려 그들을 굶주린 이리떼로 돌변하게 할지도 모른다. 개인의 심리학 자체나 그 내용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종합적 유형화를 통해 들추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의 반유대주의는 존재를 확인할 수도 투시할 수도 없는 안개 같은 존재다. 유대인 중개인은 경제적으로는 도대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악마의 상(像)이 된다. 이것이 승리를 쉽게 만들며 반유대주의적 가장(家長)을 멈출 수 없는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한 목격자로 만든다. 그는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나 느낄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서 다만 요구받은 대로 당 관료나 가스실에 쓸 가스 결정체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을 뿐인 것이다.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부류를 근절시키려 드는 전체주의적 행정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떨어진 판결을 집행하는 것뿐이다. 분업 체계의 다른 부분에 소속된 노동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어제의 재앙 현장에 대한 청소 소식을 읽는 신문 독자처럼 덤덤하게 그러한 정화 작업을 지켜볼 것이다. 희생자를 죽게 만든 특별한 성격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공포스러운 법의 처분에 속절없이 내맡겨진 인간은 우선 꼬리를 무는 의문 부호 속을 헤매고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후기 산업 사회가 요구하는 평준화의 압박 밑에서 적대적인 종교란 예전에 언젠가는 차별성을 지녔을지 모르지만 성공적인 동화를 통해 이미 죽은 문화 유산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유대인 대중들 자신도 적대적인 청년 단체들만큼이나 티켓적인 사유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파시즘의 반유대주의도 처음에는 자신의 제물이 될 객체를 어느 정도는 새삼스럽게 머리에서 짜내야 했다. 편집증은 더 이상 단순하게 박해자의 개인적 병력에 근거해서 목표를 좇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실존이 된 편집증은 전쟁이나 경기 흐름 자체가 만드는 ‘현혹 연관’ 안에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렇게 먼저 공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 심리적으로 비슷한 소질을 지닌 ‘우리라는 집단’은 환자의 처지에 떨어져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 중에서
토론하기
(1)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한 하나의 정치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 나치즘을 지지한 대중들의 반유대주의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3) 타인을 향한 혐오가 사실은 그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해설읽기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계몽의 변증법은 서구의 계몽주의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합리적 이성’이 파시즘이라는 재앙 앞에서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 원인을 찾고자 한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재앙으로까지 이어진 파시즘이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트린 이유는, 이러한 참혹한 악행이 이른바 ‘악마적 개인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평생을 이웃해서 살아온 사람들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공격하고 살해하게 만든 파시즘이라는 현상은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깊은 고민과 사유, 탐색으로 이어졌다. 일군의 학자들은 파시즘을 이해불가능한 영역으로 치부해버리거나 예외적인 야만 상태로 보기도 했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파시즘을 현대사회의 불가피한 귀결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은 결코 아닌데, 왜냐하면 일종의 원한처럼 자리 잡은 ‘차이에 대한 분노’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사회적 소수자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이미 최초의 내용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일종의 사회적 제도로서 살아남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동참하지 않는 자에 대한 증오만은 여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상대적 소수자인 유대인이 그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분석이다. 이들에 따르면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실상 아무런 내용도 담고 있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의 절망과 공포에 의해 유지될 뿐이다. 즉 유대인에 대한 거부 반응은 본래부터 존재했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습적 충동 요소”가 정치적으로 정확한 목표물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며, 희생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특별한 성격’은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편, 개인들이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적인 심리, 즉 이유를 알 수 없는 혐오감과 공포가 파시즘이라는 표면적으로나마 합리성을 가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변환되는 것은 개인들의 판단과 결정의 영역에서 벗어나 이뤄진다. 개인들이 가진 반유대주의적 심리는 파시즘을 옹호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유도되며, 각 개인이 어떤 이유에서 파시즘 정당에 투표를 했든 이들은 노동조합의 분쇄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쟁, 유대인의 몰살을 자동적으로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분노라는,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내적 연관성이 없는 각각의 사안들이 모두 파시즘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무매개적 동일화에 기반을 둔 사유가 파시즘을 창궐하게 만드는 환경을 형성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보기에, 고도로 발달한 산업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유(思惟)’조차 노동 분업의 한 분야로 전락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인 사고 활동을 타인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사회가 생각하는 대로 똑같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쉽고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집단적 광기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그래서인지 계몽의 변증법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인간의 이성과 현대 문명을 비판적 시선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이 책은 스스로 생각하는 삶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끝없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글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개별 사람들이 각자만의 사유를 통해 집단적 광기에서 벗어나기를 요청하고 있다.
[앞뒤 맥락]
『계몽의 변증법』의 앞부분에 실린 「계몽의 개념」과 그에 덧붙여진 두 개의 글을 통해 저자들은 그리스로마신화 속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일화를 ‘계몽의 변증법’에 대한 함축적인 알레고리로 제시한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있지만 기둥에 몸이 묶여 있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오디세우스(지배자)와 운신이 자유롭지만 귀를 밀랍으로 막아두어 세이렌의 노래를 들을 수 없는 선원들(피지배자)은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체계(system)가 되어 그녀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저자들의 신화 분석이다. 즉 신화적 세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계몽주의적 목표는 세이렌이라는 자연과 감각적 경험에서 멀어질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때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간이자 근대적 주체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감성을 억압하는 한편 부하들을 지배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저자들은 이를 ‘인간에 의한 외적 자연의 지배가 인간의 내적 자연지배로 전이되고 이것이 다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적 지배로 확장’하는 과정으로 읽는다.
그런데 재밌게도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수록 인간은 ‘체계(system)’의 폭력에 굴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게다가 자기 내부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감정을 억지로 억누른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그 분노를 떠넘기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순응하고 또 그것들을 모방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자연과 달리, 문명 속의 인간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공격하고 배척하게 된다. 이러한 원인불명의 혐오감과 공격성에 대해 저자들은, 이것이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향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며, 파시즘이 가지는 반(反)유대주의적 정서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고전본문]
유대인에 대한 거부 반응은 본래부터 존재했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습적 충동 요소가 정치 티켓에 의해 정확한 목표물을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 ‘반유대주의적인 요소들’은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티켓적 사고에서 보여지는 경험의 상실에 의해 아무 힘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러한 테마도 다시 한번 티켓에 의해 동원될 수 있다. ‘반유대주의적인 요소들’은 이미 해체된 요소들이지만 새로운 반유대주의자들의 비틀린 양심을 건드려 그들을 굶주린 이리떼로 돌변하게 할지도 모른다. 개인의 심리학 자체나 그 내용은 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종합적 유형화를 통해 들추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의 반유대주의는 존재를 확인할 수도 투시할 수도 없는 안개 같은 존재다. 유대인 중개인은 경제적으로는 도대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악마의 상(像)이 된다. 이것이 승리를 쉽게 만들며 반유대주의적 가장(家長)을 멈출 수 없는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한 목격자로 만든다. 그는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나 느낄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서 다만 요구받은 대로 당 관료나 가스실에 쓸 가스 결정체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을 뿐인 것이다.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부류를 근절시키려 드는 전체주의적 행정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떨어진 판결을 집행하는 것뿐이다. 분업 체계의 다른 부분에 소속된 노동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어제의 재앙 현장에 대한 청소 소식을 읽는 신문 독자처럼 덤덤하게 그러한 정화 작업을 지켜볼 것이다. 희생자를 죽게 만든 특별한 성격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공포스러운 법의 처분에 속절없이 내맡겨진 인간은 우선 꼬리를 무는 의문 부호 속을 헤매고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후기 산업 사회가 요구하는 평준화의 압박 밑에서 적대적인 종교란 예전에 언젠가는 차별성을 지녔을지 모르지만 성공적인 동화를 통해 이미 죽은 문화 유산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유대인 대중들 자신도 적대적인 청년 단체들만큼이나 티켓적인 사유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파시즘의 반유대주의도 처음에는 자신의 제물이 될 객체를 어느 정도는 새삼스럽게 머리에서 짜내야 했다. 편집증은 더 이상 단순하게 박해자의 개인적 병력에 근거해서 목표를 좇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실존이 된 편집증은 전쟁이나 경기 흐름 자체가 만드는 ‘현혹 연관’ 안에서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렇게 먼저 공세를 취하지 않을 경우 심리적으로 비슷한 소질을 지닌 ‘우리라는 집단’은 환자의 처지에 떨어져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곤두박질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몽의 변증법] 중에서
토론하기
(1) 나치즘이나 파시즘 또한 하나의 정치 이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2) 나치즘을 지지한 대중들의 반유대주의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3) 타인을 향한 혐오가 사실은 그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해설읽기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계몽의 변증법은 서구의 계몽주의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합리적 이성’이 파시즘이라는 재앙 앞에서 그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 원인을 찾고자 한다.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재앙으로까지 이어진 파시즘이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트린 이유는, 이러한 참혹한 악행이 이른바 ‘악마적 개인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평생을 이웃해서 살아온 사람들을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공격하고 살해하게 만든 파시즘이라는 현상은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깊은 고민과 사유, 탐색으로 이어졌다. 일군의 학자들은 파시즘을 이해불가능한 영역으로 치부해버리거나 예외적인 야만 상태로 보기도 했지만, 이 책의 저자들은 파시즘을 현대사회의 불가피한 귀결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은 결코 아닌데, 왜냐하면 일종의 원한처럼 자리 잡은 ‘차이에 대한 분노’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사회적 소수자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이미 최초의 내용을 대부분 잃어버리고 일종의 사회적 제도로서 살아남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동참하지 않는 자에 대한 증오만은 여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상대적 소수자인 유대인이 그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들의 분석이다. 이들에 따르면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실상 아무런 내용도 담고 있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의 절망과 공포에 의해 유지될 뿐이다. 즉 유대인에 대한 거부 반응은 본래부터 존재했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파괴적·인습적 충동 요소”가 정치적으로 정확한 목표물을 발견한 것에 불과하며, 희생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특별한 성격’은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한편, 개인들이 가지고 있던 반유대주의적인 심리, 즉 이유를 알 수 없는 혐오감과 공포가 파시즘이라는 표면적으로나마 합리성을 가장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변환되는 것은 개인들의 판단과 결정의 영역에서 벗어나 이뤄진다. 개인들이 가진 반유대주의적 심리는 파시즘을 옹호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유도되며, 각 개인이 어떤 이유에서 파시즘 정당에 투표를 했든 이들은 노동조합의 분쇄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전쟁, 유대인의 몰살을 자동적으로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분노라는,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내적 연관성이 없는 각각의 사안들이 모두 파시즘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포함되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무매개적 동일화에 기반을 둔 사유가 파시즘을 창궐하게 만드는 환경을 형성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보기에, 고도로 발달한 산업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유(思惟)’조차 노동 분업의 한 분야로 전락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인 사고 활동을 타인에게 일임하는 것이다. 사회가 생각하는 대로 똑같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쉽고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집단적 광기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그래서인지 계몽의 변증법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인간의 이성과 현대 문명을 비판적 시선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이 책은 스스로 생각하는 삶의 가능성을 부정하며 끝없는 절망을 이야기하는 글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개별 사람들이 각자만의 사유를 통해 집단적 광기에서 벗어나기를 요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