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집정관을 역임한 보에티우스, 그는 훌륭한 아내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모두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 부러운 사람을 운명의 여신은 가혹하게 다룬다. 콘스탄티노플과 내통한 혐의를 받는 전 집정관을 옹호하다가 자신도 그 일에 연루된 의심을 받아 처형을 받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남자에게 철학의 여신이 찾아온다. 보에티우스는 처음에 이 여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 여신이 자신을 어려서부터 양육한 분임을 알게된다. 여신은 보에티우스의 마음의 질병을 치유하려 대화를 시작한다. 아래 본문은 무고하게 고소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신의 정의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항변하는 대목이다. 항변이 끝나면 여신은 보에티우스의 사고방식을 교정하려 하고, 참된 행복은 부와 권력에 있지 않으며 최고선인 신과의 연합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전본문
사악한 욕망들은 우리 본성을 지키지 못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신이 보고 있는데도 어떤 사악한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들이 순진무구함을 이긴다는 것은 저에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당신의 추종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악들 어디에서 오는가?’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원로원 전체와 모든 선량한 시민들의 피에 굶주인 불경한 사람이 원로원과 모든 선량한 시민들의 영웅들로 여기고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한 것은 그렇다고 합시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같은 미움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당신은 늘 내 말과 행실에서 나를 지도했기 때문에, 당신은 베로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한다고 생각합니다. 테오도리쿠스 왕이 원로원을 모두 파멸시키고자 하면서 알비누스에게 가해진 모반에 대한 죄를 전체 원로원으로 확대하려고 했을 때, 당신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나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원로원 전체의 무고함을 변호하려 얼마나 애썼는지를 말입니다. 당신은 내가 이것을 진실되게 말하고 있고 나 자신을 칭송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가진 은밀한 가치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 주고 그것이 행실로 드러남으로써 명성이라는 보상을 받을 때마다 감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무고함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아십니다. 정직한 덕성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커녕,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나쁜 행동에 대한 벌들을 받고 있습니다.
토론하기
(1) 보에티우스가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는 가운데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2)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이 오히려 평화롭고 번성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때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지적인 해결책을 찾아본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3) 일반적으로 소위 때가 뭍은 성인들보다 청소년들이 불의하게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은 이들에게 더욱더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 도덕적 분노가 생겨나는 것은 여전히 불의한 세상에서도 인간들은 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불의한 세상은 선한 사람들을 핍박한다. 이 경우 선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해설읽기
보에티우스는 로마 명문 가문의 자제로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냈고, 아버지 사후에는 로마의 유력자인 심마쿠스(Symmachus)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학식과 능력을 인정받아 황제 테오도리쿠스 아래서 집정관이 되었다. 덕성을 갖춘 여인과 결혼하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난 두 아들은 모두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를 최고의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로 떨어뜨렸다. 전 집정관인 알비누스(Albinus)가 동로마제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결국 황제에 의해서 처형되었는데, 그 와중에 보에티우스는 알비누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그도 역시 처형을 당하게 된다. 처형을 당하기 전 보에티우스는 차갑고 누추한 감속 속에서 지혜의 여신과 대화 형식을 통해 신의 섭리,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난, 운명, 인간의 자유의지와 같은 굵직한 주제를 놓고 사색한다.
위 본문은 보에티우스가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고 왜 자기와 같이 무고한 자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항변하는 대목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일은 보상을 받고, 악한 행동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간응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보에티우스가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초래한 인간성 자체에 대해서 놀라움을 드러낸다. 어떻게 신이 보는 앞에서 악한 일을 실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인용한다.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겠지만, 보에티우스에게는 설명이 필요한 절실한 질문이다.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 악이 편만할까? 만일 현실이 이렇다면 신이 없다고 말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신이 없다면 이 세상에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 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보에티우스의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보에티우스의 이런 사고에 대해서 인류의 지성사에서는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불리는 이론을 통해서 답하고 있다. 신정론의 영어 표현의 theodicy는 그리스어에서 신을 의미하는 떼오스(theos)와 올바른 심판, 정의를 의미하는 디케(dikē)가 조합되어 생겨난 말이다. 간단히 말해 신정론이란 악에 문제와 신적 정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불교의 업(karma)사상도 일종의 신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이 지난 생에 지은 악행에 대한 결과라고 설명함으로써 악과 정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을 받아들인 보에티우스에게 선한 신과 세상의 악을 설명하는 신정론이 필요했다. 하지만 보에티우스 이전에도 신의 섭리와 세상의 악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었고, 보에티우스는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조화시키려 한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악의 근원을 물질에서 찾는다. 순수한 지성의 세계는 선의 세계이지만 이 지성이 물질과 접촉하면서 세상의 도덕적, 물리적 악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지성과 물질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악은 정신의 세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에 대한 책임을 그 영역에 돌릴 수는 없다. 세계에는 악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우발적(contingent)인 것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는 선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정신적 영역을 신의 마음에 귀속시키는 그리스도교적 관점과 양립할 수 있었고, 바로 이 관점이 보에티우스의 신적 정의의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보에티우스는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세상사의 굴곡에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지혜의 여신과의 대화 속에서 깨닫게 된다. 행복은 변화무쌍한 물질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정신적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행복은 덧없이 지나가지만, 변화하지 않는 정신, 보에티우스가 믿는 신 안에 있는 행복은 영속적이다. 본문에서 보에티우스의 항변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그의 사고가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면, 위대한 서구의 지성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불합리함 속에서 더 큰 신적 섭리를 볼 수 있는 안목, 바로 이것이 그가 발견한 인간이 가야할 길이었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을 산문과 시를 혼용하며 집필했다. 그는 항변을 시작하면서 시 한 편을 썼는데 그 첫 대목을 인묭하며 해설을 마친다.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의연하게 임하는 사람은/ 오만한 운명을 자신의 발 아래 두고서/ 행운과 불운에 굴하지 않고/ 운명을 직시하며/ 태연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다네. ”
키워드
불의, 섭리, 신정론, 악, 운명
전후맥락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뛰어난 학식과 행정력을 인정받아 집정관을 역임한 보에티우스, 그는 훌륭한 아내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모두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 부러운 사람을 운명의 여신은 가혹하게 다룬다. 콘스탄티노플과 내통한 혐의를 받는 전 집정관을 옹호하다가 자신도 그 일에 연루된 의심을 받아 처형을 받게 되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 남자에게 철학의 여신이 찾아온다. 보에티우스는 처음에 이 여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 여신이 자신을 어려서부터 양육한 분임을 알게된다. 여신은 보에티우스의 마음의 질병을 치유하려 대화를 시작한다. 아래 본문은 무고하게 고소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며 신의 정의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결백을 항변하는 대목이다. 항변이 끝나면 여신은 보에티우스의 사고방식을 교정하려 하고, 참된 행복은 부와 권력에 있지 않으며 최고선인 신과의 연합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전본문
사악한 욕망들은 우리 본성을 지키지 못한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러나 신이 보고 있는데도 어떤 사악한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들이 순진무구함을 이긴다는 것은 저에게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당신의 추종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악들 어디에서 오는가?’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원로원 전체와 모든 선량한 시민들의 피에 굶주인 불경한 사람이 원로원과 모든 선량한 시민들의 영웅들로 여기고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한 것은 그렇다고 합시다. 하지만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같은 미움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당신은 늘 내 말과 행실에서 나를 지도했기 때문에, 당신은 베로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한다고 생각합니다. 테오도리쿠스 왕이 원로원을 모두 파멸시키고자 하면서 알비누스에게 가해진 모반에 대한 죄를 전체 원로원으로 확대하려고 했을 때, 당신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나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원로원 전체의 무고함을 변호하려 얼마나 애썼는지를 말입니다. 당신은 내가 이것을 진실되게 말하고 있고 나 자신을 칭송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가진 은밀한 가치는 자기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 주고 그것이 행실로 드러남으로써 명성이라는 보상을 받을 때마다 감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의 무고함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아십니다. 정직한 덕성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커녕,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나쁜 행동에 대한 벌들을 받고 있습니다.
토론하기
(1) 보에티우스가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는 가운데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한 생각은 무엇입니까?
(2)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이 오히려 평화롭고 번성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습니까? 이때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해서 지적인 해결책을 찾아본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3) 일반적으로 소위 때가 뭍은 성인들보다 청소년들이 불의하게 돈을 벌거나 권력을 잡은 이들에게 더욱더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 도덕적 분노가 생겨나는 것은 여전히 불의한 세상에서도 인간들은 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불의한 세상은 선한 사람들을 핍박한다. 이 경우 선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해설읽기
보에티우스는 로마 명문 가문의 자제로 아버지는 집정관을 지냈고, 아버지 사후에는 로마의 유력자인 심마쿠스(Symmachus)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에서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학식과 능력을 인정받아 황제 테오도리쿠스 아래서 집정관이 되었다. 덕성을 갖춘 여인과 결혼하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난 두 아들은 모두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를 최고의 자리에서 가장 비천한 자리로 떨어뜨렸다. 전 집정관인 알비누스(Albinus)가 동로마제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결국 황제에 의해서 처형되었는데, 그 와중에 보에티우스는 알비누스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 그도 역시 처형을 당하게 된다. 처형을 당하기 전 보에티우스는 차갑고 누추한 감속 속에서 지혜의 여신과 대화 형식을 통해 신의 섭리,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난, 운명, 인간의 자유의지와 같은 굵직한 주제를 놓고 사색한다.
위 본문은 보에티우스가 자신의 무고함을 항변하고 왜 자기와 같이 무고한 자가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항변하는 대목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한 일은 보상을 받고, 악한 행동에 대해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간응보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보에티우스가 자신이 처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서 항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이런 상황을 초래한 인간성 자체에 대해서 놀라움을 드러낸다. 어떻게 신이 보는 앞에서 악한 일을 실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신이 존재한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인용한다. 평범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겠지만, 보에티우스에게는 설명이 필요한 절실한 질문이다. 선하고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 악이 편만할까? 만일 현실이 이렇다면 신이 없다고 말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신이 없다면 이 세상에 부인할 수 없이 존재하는 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보에티우스의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보에티우스의 이런 사고에 대해서 인류의 지성사에서는 신정론(theodicy)이라고 불리는 이론을 통해서 답하고 있다. 신정론의 영어 표현의 theodicy는 그리스어에서 신을 의미하는 떼오스(theos)와 올바른 심판, 정의를 의미하는 디케(dikē)가 조합되어 생겨난 말이다. 간단히 말해 신정론이란 악에 문제와 신적 정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령, 불교의 업(karma)사상도 일종의 신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이 지난 생에 지은 악행에 대한 결과라고 설명함으로써 악과 정의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을 받아들인 보에티우스에게 선한 신과 세상의 악을 설명하는 신정론이 필요했다. 하지만 보에티우스 이전에도 신의 섭리와 세상의 악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이미 논의되고 있었고, 보에티우스는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조화시키려 한다. 플라톤주의에서는 악의 근원을 물질에서 찾는다. 순수한 지성의 세계는 선의 세계이지만 이 지성이 물질과 접촉하면서 세상의 도덕적, 물리적 악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는 지성과 물질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따라서 플라톤주의적 관점에서 악은 정신의 세계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에 대한 책임을 그 영역에 돌릴 수는 없다. 세계에는 악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우발적(contingent)인 것에 불과하고 궁극적으로는 선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정신적 영역을 신의 마음에 귀속시키는 그리스도교적 관점과 양립할 수 있었고, 바로 이 관점이 보에티우스의 신적 정의의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보에티우스는 무고하게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세상사의 굴곡에 의존하지 않고 있음을 지혜의 여신과의 대화 속에서 깨닫게 된다. 행복은 변화무쌍한 물질적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정신적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행복은 덧없이 지나가지만, 변화하지 않는 정신, 보에티우스가 믿는 신 안에 있는 행복은 영속적이다. 본문에서 보에티우스의 항변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당연한 반응이다. 하지만 그의 사고가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면, 위대한 서구의 지성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불합리함 속에서 더 큰 신적 섭리를 볼 수 있는 안목, 바로 이것이 그가 발견한 인간이 가야할 길이었다. 보에티우스는 『철학의 위안』을 산문과 시를 혼용하며 집필했다. 그는 항변을 시작하면서 시 한 편을 썼는데 그 첫 대목을 인묭하며 해설을 마친다.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의연하게 임하는 사람은/ 오만한 운명을 자신의 발 아래 두고서/ 행운과 불운에 굴하지 않고/ 운명을 직시하며/ 태연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다네. ”
키워드
불의, 섭리, 신정론, 악,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