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통받은 한 사람이 다른 지혜로운 친구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왜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이 더 번성하는지 묻는다. 고통받는 이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 신세로 살아가며, 누구도 자신을 위로해주지 않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반면 강도나 다름없는 이들은 날로 번성하고 부를 획득한다. 고통받는 이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신은 왜 자신에게 이런 비참한 삶을 주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에 친구는 표면적으로 악한 이들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 같지만 우주에는 신적 질서가 있어서 인간사를 지도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런 신적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전본문
[고통받는 자]
당신의 마음은 북풍과 같아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미풍이오
선택받은 친구여, 그대의 충고는 훌륭하오
당신에게 한 마디만 묻겠소
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번영의 길을 가고 있소
여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난해지고 가진 것을 빼앗긴다오
젊어서 나는 신의 뜻을 구했소
엎드려서 기도하며 나의 여신을 따랐소
하지만 나는 소득 없는 부역의 족쇄를 차고 있소
나의 신은 부요함 대신에 궁핍함을 나에게 정해 주었소
나의 윗사람은 절음발이고, 미친 자들이 나보다 낫소
강도들이 승승장구하고, 나는 비천해졌소
[친구]
나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지식의 소유자여,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소
그대는 의로움을 저버리고 불경하게 신의 계획에 반하고 있소
마음 속으로 당신은 신이 정해 놓은 것들을 무시하는 마음을 강하게 품고 있소
(….)
신의 마음은 하늘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소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소
토론하기
(1) 고통받는 이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한탄하고 있습니까?
(2)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해 괴로워한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3)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노력에 따른 보상을 받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해설읽기
윗글은 『바빌로니아 신정론』(Babylonian Theodicy)이라는 중근동 문학 작품에서 나오는 한 대목이다. 신정론(神正論)이란 신적 정의와 이 세상의 불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신을 변호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론이라는 말은 고대부터 존재한 용어가 아니라 라이프니츠(Leibniz)가 자신의 저서 『신정론』에서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라이프니츠 이전에서 이집트, 바빌론과 같은 중근동 세계, 그리스 로마, 고대 인도, 고대 중국에서도 신정론과 관련한 사고들이 존재했다.
『바빌로니아 신정론』은 구약 성서의 『욥기』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어서 『바빌로니아 욥기』로 불리기도 한다. 바빌로니아 시대에 한 사람이 지혜로운 친구에게 찾아가 자신이 품고 있는 모순된 감정에 대해서 토로한다. 그는 몸은 쇠약했고, 자신의 성취가 사라지고, 삶의 안정은 흔들렸다. 탄식과 슬픔이 자신을 짖누르고 있다.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고통받는 이는 지혜로운 자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 하소연한다. 여기서 지혜로운 친구는 신전 사제로 추정할 수 있다.
고통받는 이의 가장 절실한 질문은 악한 자들이 오히려 번성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고된 노동으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고, 부는 자신에게서 멀리 있다. 이러한 대조는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여기서 그는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자신은 신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신의 뜻을 물으면서 그것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였다. 종교 의례에 참여하면서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라고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의 질문에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어떠한 형태의 노력이든 간에 노력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만, 인간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목숨을 걸고 노력해도 실패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적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혜로운 친구는 사제의 입장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자로서 고통받는 이에게 답한다. 그는 고통받는 이에게 현실에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버려서는 안 되고 신에게 드리는 의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악한 자들이 불의하게 쌓은 부는 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그들이 받은 부은 그들에게 축복이 아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받는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신적인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자녀들이나 학생들은 부모나 교사의 꾸지람과 처벌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항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아이들과 학생들이 성인이 되면 부모와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지혜라고 친구는 말하고 있다.
덧붙여서, 우리는 세상사에서 겪는 부당한 경험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나 법을 어기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세상은 강하고, 불의한 자들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나만 원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지혜로운 친구가 말하는 대로 그것이 꼭 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원칙과 규범을 소중히 여길 때 궁극적으로 그 삶이 더 가치 있고, 그 자체로 보상이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키워드
고통, 불의, 신정론, 악
전후맥락
고통받은 한 사람이 다른 지혜로운 친구에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왜 나쁜 짓을 하는 자들이 더 번성하는지 묻는다. 고통받는 이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 신세로 살아가며, 누구도 자신을 위로해주지 않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반면 강도나 다름없는 이들은 날로 번성하고 부를 획득한다. 고통받는 이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신은 왜 자신에게 이런 비참한 삶을 주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이에 친구는 표면적으로 악한 이들이 세상에서 번성하는 것 같지만 우주에는 신적 질서가 있어서 인간사를 지도하고 있으며, 인간은 그런 신적 섭리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에게 기도와 제사를 드리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전본문
[고통받는 자]
당신의 마음은 북풍과 같아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미풍이오
선택받은 친구여, 그대의 충고는 훌륭하오
당신에게 한 마디만 묻겠소
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번영의 길을 가고 있소
여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난해지고 가진 것을 빼앗긴다오
젊어서 나는 신의 뜻을 구했소
엎드려서 기도하며 나의 여신을 따랐소
하지만 나는 소득 없는 부역의 족쇄를 차고 있소
나의 신은 부요함 대신에 궁핍함을 나에게 정해 주었소
나의 윗사람은 절음발이고, 미친 자들이 나보다 낫소
강도들이 승승장구하고, 나는 비천해졌소
[친구]
나의 믿음직스러운 친구, 지식의 소유자여, 당신의 생각은 잘못되었소
그대는 의로움을 저버리고 불경하게 신의 계획에 반하고 있소
마음 속으로 당신은 신이 정해 놓은 것들을 무시하는 마음을 강하게 품고 있소
(….)
신의 마음은 하늘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소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소
토론하기
(1) 고통받는 이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한탄하고 있습니까?
(2)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에 따른 보상을 받지 못해 괴로워한 경험을 나누어봅시다.
(3)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노력에 따른 보상을 받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보다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해설읽기
윗글은 『바빌로니아 신정론』(Babylonian Theodicy)이라는 중근동 문학 작품에서 나오는 한 대목이다. 신정론(神正論)이란 신적 정의와 이 세상의 불의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 세상의 악에 대해서 신을 변호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신정론이라는 말은 고대부터 존재한 용어가 아니라 라이프니츠(Leibniz)가 자신의 저서 『신정론』에서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라이프니츠 이전에서 이집트, 바빌론과 같은 중근동 세계, 그리스 로마, 고대 인도, 고대 중국에서도 신정론과 관련한 사고들이 존재했다.
『바빌로니아 신정론』은 구약 성서의 『욥기』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어서 『바빌로니아 욥기』로 불리기도 한다. 바빌로니아 시대에 한 사람이 지혜로운 친구에게 찾아가 자신이 품고 있는 모순된 감정에 대해서 토로한다. 그는 몸은 쇠약했고, 자신의 성취가 사라지고, 삶의 안정은 흔들렸다. 탄식과 슬픔이 자신을 짖누르고 있다. 어떤 위로도 통하지 않는 이 상황에서 고통받는 이는 지혜로운 자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해 하소연한다. 여기서 지혜로운 친구는 신전 사제로 추정할 수 있다.
고통받는 이의 가장 절실한 질문은 악한 자들이 오히려 번성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고된 노동으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고, 부는 자신에게서 멀리 있다. 이러한 대조는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한다. 여기서 그는 억울함을 토로하는데, 자신은 신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는 신의 뜻을 물으면서 그것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였다. 종교 의례에 참여하면서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내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라고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고통받는 이의 질문에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어떠한 형태의 노력이든 간에 노력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만, 인간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목숨을 걸고 노력해도 실패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적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혜로운 친구는 사제의 입장에서 지혜를 추구하는 자로서 고통받는 이에게 답한다. 그는 고통받는 이에게 현실에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버려서는 안 되고 신에게 드리는 의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악한 자들이 불의하게 쌓은 부는 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에 기반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그들이 받은 부은 그들에게 축복이 아니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받는 부당한 일에 대해서는 신적인 섭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자녀들이나 학생들은 부모나 교사의 꾸지람과 처벌에 대해서 부당하다고 항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아이들과 학생들이 성인이 되면 부모와 선생님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어떻게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는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지혜라고 친구는 말하고 있다.
덧붙여서, 우리는 세상사에서 겪는 부당한 경험 때문에 우리의 양심이나 법을 어기는 경우가 있다. 어차피 세상은 강하고, 불의한 자들이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나만 원칙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지혜로운 친구가 말하는 대로 그것이 꼭 신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원칙과 규범을 소중히 여길 때 궁극적으로 그 삶이 더 가치 있고, 그 자체로 보상이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키워드
고통, 불의, 신정론,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