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쉬는 수메르 문명의 대표적 도시 국가 우루크의 폭군이었으나 신들이 그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대항마로 보낸 엔키두와 싸우게 된다. 싸움의 승부는 가리기 어려웠고 그들은 오히려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금새 신들은 신들의 뜻을 거스른 앤키두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쉬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궁극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랑을 떠나, 세상 끝에서 씨두리를 만난다. 씨두리는 영생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님을 길가메쉬에게 조언한다.
고전본문
씨두리: 만일 당신이 하늘의 황소를 잡아 죽이고, 백향목 숲의 수호자 훔바바를 죽인 길가메쉬라면, 왜 당신의 얼굴은 수척하고, 낙담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 속에 왜 절망이 있으며, 당신의 얼굴은 오랜 여행을 한 자의 얼굴 같습니까? 당신은 왜 바람을 좇아 정처없이 초원을 가로질러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까?
길가메쉬: 왜 나의 모습이 초췌하고 얼굴은 고통에 찌들려 있으면 안 되나요? 절망이 내 마음에 있고, 내 얼굴은 오랜 여행을 한 자의 얼굴이오. 왜 나는 바람을 좇아 초원을 가로질러 방황하며 다니면 안 되나요? 나와 광야에서 사냥을 같이 다니고, 하늘의 황소를 때려잡고, 백향목 숲의 훔바바를 무찔렀던 나의 사랑하는 친구, 나의 곁에서 위험을 이겨낸 내 사랑하는 형제와도 같은 그에게 죽음이 닥쳤소. 나는 그의 시체에 벌레가 생길 때까지 칠일 밤낮으로 그를 위해 울었소. 내 친구 때문에 나는 죽음이 두렵소, 내 형제 때문에 나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쉼을 찾지 못하고 있소. 내가 죽음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해 주시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얼굴을.
씨두리: 길가메쉬, 어디로 그렇게 서둘러 가시려 하나요. 당신은 찾고 있는 생명을 결코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부여했습니다. 영생은 그들의 몫이었죠. 당신, 길가메쉬, 당신의 배를 좋은 것들로 채우세요. 밤낮으로 춤을 추고 즐겁게 보내세요.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세요.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깨끗이 목욕을 하고, 당신 품에 어린 아이를 소중히 여기세요. 당신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것 역시 인간에게 부여된 몫입니다.
[출전] 길가메시 서사시
토론하기
(1) 길가메쉬에게 씨두리가 조언한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가?
(2) 길가메쉬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 때문에 처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에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된 경험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자.
(3) 종교, 생명공학, 의학 등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삶의 태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해설읽기
영웅 길가메쉬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4500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야기는 고대 세계에서 계속 전승되어 오다가 기원전 1700년경 바빌로니아 시대에 파편적으로 전해지던 이야기가 재구성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읽는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길가메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대표적 도시인 우루크의 왕으로서 실제로 수메르 문명의 왕 목록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역사와 신화가 뒤섞여 있는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서사시는 길가메쉬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자, 모든 것을 경험한 자, 모든 것에 능통한 자로 소개된다. 하지만 이런 칭송만으로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은 고전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서두에서 길가메쉬는 많은 여행을 통해 지친자, 고난을 당한자, 영생을 찾기 위해 세상 끝까지 탐험한 자로도 소개된다. 이런 양면적인 평가는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길가메쉬의 양면성에서 비롯된다. 그는 신과 같이 강력한 존재였다. 하지만 탁월한 힘 때문에 인간들을 괴롭히는 폭군이 되었다. 우루크 백성들은 신들에게 탄원했고, 신들은 이에 응하였다. 신들이 길가메쉬를 길들일 수 있는 묘책으로 생각해 낸 것은 그와 필적할 만한 엔키두라는 존재를 창조하여 그의 힘을 상쇄시키는 것이었다. 엔키두는 결국 우루크에서 정의감에 불타 길가메쉬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둘은 신들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삼나무 숲의 괴물 훔바바를 함께 물리치면서 전우애를 다지게 된다. 예상치 못한 이들의 행동에 신들은 노했고, 그들은 엔키두를 죽이는 것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 신들의 결정대로 엔키두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여기부터 길가메쉬 서사시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 번도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길가메쉬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깊은 비통함과 무의미함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 세상에서 왕이라는 자리도 가치가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시를 떠나 방황한다. 그는 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하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고 싶어 세상 끝까지 여행한다. 여행 중에에 만난 씨두리라는 여인은 길가메쉬에게 영원한 삶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영원한 삶을 꿈꾸지 말고,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누릴 것들에 만족하라는 말을 한다. 씨두리의 말에도 길가메쉬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녀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길가메쉬는 처음으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하였다. 그리고 유한성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났지만 결국 영원한 삶을 얻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길가메쉬의 방황은 신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길가메쉬의 이중적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신적이기 때문에 영원한 삶을 동경한다. 이 이중성은 영웅 길가메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동물과 신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길가메쉬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동물은 영원한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영원한 삶은 꿈꾼다. 인간의 비극적 상황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길가메쉬의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인간이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체념과 비탄에 빠져서 살아야 한다는 염세주의를 가르치는 것일까? 이야기는 정확히 반대 교훈을 주고 있다. 죽는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반드시 허무적인 인생관을 낳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길가메쉬는 영원한 삶을 얻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오히려 그는 왕으로서 도시를 다스리는 역할에 충실했고, 그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삶만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각자의 삶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라는 뜻일지 모른다. 그리고 죽음 이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는 죽음의 성격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길가메쉬가 이기적인 폭군으로 인생을 마무리한다면, 그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키워드
가족, 목적, 수단, 예술, 욕망
전후맥락
길가메쉬는 수메르 문명의 대표적 도시 국가 우루크의 폭군이었으나 신들이 그의 힘을 누르기 위해서 대항마로 보낸 엔키두와 싸우게 된다. 싸움의 승부는 가리기 어려웠고 그들은 오히려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금새 신들은 신들의 뜻을 거스른 앤키두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엔키두가 죽자 길가메쉬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궁극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랑을 떠나, 세상 끝에서 씨두리를 만난다. 씨두리는 영생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님을 길가메쉬에게 조언한다.
고전본문
씨두리: 만일 당신이 하늘의 황소를 잡아 죽이고, 백향목 숲의 수호자 훔바바를 죽인 길가메쉬라면, 왜 당신의 얼굴은 수척하고, 낙담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 속에 왜 절망이 있으며, 당신의 얼굴은 오랜 여행을 한 자의 얼굴 같습니까? 당신은 왜 바람을 좇아 정처없이 초원을 가로질러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까?
길가메쉬: 왜 나의 모습이 초췌하고 얼굴은 고통에 찌들려 있으면 안 되나요? 절망이 내 마음에 있고, 내 얼굴은 오랜 여행을 한 자의 얼굴이오. 왜 나는 바람을 좇아 초원을 가로질러 방황하며 다니면 안 되나요? 나와 광야에서 사냥을 같이 다니고, 하늘의 황소를 때려잡고, 백향목 숲의 훔바바를 무찔렀던 나의 사랑하는 친구, 나의 곁에서 위험을 이겨낸 내 사랑하는 형제와도 같은 그에게 죽음이 닥쳤소. 나는 그의 시체에 벌레가 생길 때까지 칠일 밤낮으로 그를 위해 울었소. 내 친구 때문에 나는 죽음이 두렵소, 내 형제 때문에 나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쉼을 찾지 못하고 있소. 내가 죽음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해 주시오.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의 얼굴을.
씨두리: 길가메쉬, 어디로 그렇게 서둘러 가시려 하나요. 당신은 찾고 있는 생명을 결코 얻지 못할 것입니다. 신들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인간에게 죽음을 부여했습니다. 영생은 그들의 몫이었죠. 당신, 길가메쉬, 당신의 배를 좋은 것들로 채우세요. 밤낮으로 춤을 추고 즐겁게 보내세요.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세요.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깨끗이 목욕을 하고, 당신 품에 어린 아이를 소중히 여기세요. 당신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이것 역시 인간에게 부여된 몫입니다.
[출전] 길가메시 서사시
토론하기
(1) 길가메쉬에게 씨두리가 조언한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가?
(2) 길가메쉬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 때문에 처음으로 죽음의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에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된 경험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자.
(3) 종교, 생명공학, 의학 등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것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삶의 태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해설읽기
영웅 길가메쉬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전 4500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이야기는 고대 세계에서 계속 전승되어 오다가 기원전 1700년경 바빌로니아 시대에 파편적으로 전해지던 이야기가 재구성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읽는 형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길가메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대표적 도시인 우루크의 왕으로서 실제로 수메르 문명의 왕 목록에도 등장한다. 따라서 길가메쉬의 이야기는 역사와 신화가 뒤섞여 있는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서사시는 길가메쉬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자, 모든 것을 경험한 자, 모든 것에 능통한 자로 소개된다. 하지만 이런 칭송만으로는 길가메쉬 서사시가 인류 보편의 가치를 담은 고전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서두에서 길가메쉬는 많은 여행을 통해 지친자, 고난을 당한자, 영생을 찾기 위해 세상 끝까지 탐험한 자로도 소개된다. 이런 양면적인 평가는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길가메쉬의 양면성에서 비롯된다. 그는 신과 같이 강력한 존재였다. 하지만 탁월한 힘 때문에 인간들을 괴롭히는 폭군이 되었다. 우루크 백성들은 신들에게 탄원했고, 신들은 이에 응하였다. 신들이 길가메쉬를 길들일 수 있는 묘책으로 생각해 낸 것은 그와 필적할 만한 엔키두라는 존재를 창조하여 그의 힘을 상쇄시키는 것이었다. 엔키두는 결국 우루크에서 정의감에 불타 길가메쉬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둘은 신들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삼나무 숲의 괴물 훔바바를 함께 물리치면서 전우애를 다지게 된다. 예상치 못한 이들의 행동에 신들은 노했고, 그들은 엔키두를 죽이는 것으로 결정을 하게 된다. 신들의 결정대로 엔키두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여기부터 길가메쉬 서사시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 번도 죽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길가메쉬는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깊은 비통함과 무의미함에 빠지게 되었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 세상에서 왕이라는 자리도 가치가 없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시를 떠나 방황한다. 그는 홍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하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나고 싶어 세상 끝까지 여행한다. 여행 중에에 만난 씨두리라는 여인은 길가메쉬에게 영원한 삶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영원한 삶을 꿈꾸지 말고,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누릴 것들에 만족하라는 말을 한다. 씨두리의 말에도 길가메쉬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녀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길가메쉬는 처음으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하였다. 그리고 유한성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을 만났지만 결국 영원한 삶을 얻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길가메쉬의 방황은 신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길가메쉬의 이중적 성격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신적이기 때문에 영원한 삶을 동경한다. 이 이중성은 영웅 길가메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동물과 신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길가메쉬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동물은 영원한 삶을 동경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영원한 삶은 꿈꾼다. 인간의 비극적 상황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에서 비롯된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길가메쉬의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서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인간이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체념과 비탄에 빠져서 살아야 한다는 염세주의를 가르치는 것일까? 이야기는 정확히 반대 교훈을 주고 있다. 죽는다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반드시 허무적인 인생관을 낳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길가메쉬는 영원한 삶을 얻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오히려 그는 왕으로서 도시를 다스리는 역할에 충실했고, 그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 단 한 번의 삶만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은 각자의 삶을 더욱 귀중하게 여기라는 뜻일지 모른다. 그리고 죽음 이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는 죽음의 성격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길가메쉬가 이기적인 폭군으로 인생을 마무리한다면, 그의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함으로써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