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칼리아스의 집에 모인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의 대화가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를 대신하여 그가 프로타고라스에게 무엇을 배워서 어떠한 면에서 더 나은 자가 되는 것인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의 답변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가르친다고 공언하는 것이 ‘시민적 기술’ 또는 ‘사람들을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임을 지적하며 그것들은 모두 인간적 훌륭함, 다시 말해 미덕들인데 자신은 그것을 교육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자신과 히포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흠모해서 그에게 배움을 청하고자 찾아왔으니 자신이 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해 온 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마땅하겠다며 크게 두 가지 논거를 제시한다. 첫째는 공적인 차원에서 제기하는 논거다. 그것은 아테네인들은 분명 현명한 사람들인데, 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라 모두의 의견을 모아 도시의 안건을 처리하는 그들의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곰곰이 살펴보면 미덕을 교육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첫째 논거와 짝을 이루어 사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는 논거다. 아테네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민인 페리클레스조차도 자신이 가장 뛰어난 인간적 혹은 시민적 훌륭함에 대해서는 자기 자식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치자 프로타고라스는 지혜로운 자의 면모로 자신을 연출하며 운치 있는 옛날이야기와 치밀한 논증 가운데 어떤 방법으로 답변을 해줄지 묻고 먼저 옛날이야기를 통해서 어쩌다 모든 인간들이 덕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답변을 들려주기로 한다.
고전본문
동물들이 빛을 보도록 하려던 참에 신들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적절한 능력을 그것들 각각에 대해서 분배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에피메테우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능력들을 전부 나누어 주었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인간 종족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었고 에피메테우스는 곤란해 했지요. 그가 곤경에 처한 그 때, 프로메테우스가 분배 상황을 점검하러 왔고 인간들에게 어떤 구원책을 줄지 곤란해진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나로부터 기술적 지혜와 불을 같이 훔쳐 인간에게 주지요. 이렇게 하여 인간은 생존하는 지혜를 갖게 되었지만 시민적 지혜는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처음에는 이곳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보다 약한 인간들은 그것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전문 기술은 그들에게 양식에 대해서는 유용했지만 다른 동물들과의 전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민적 기술이 아직 없었는데, 전쟁술은 그것의 일부분이니까요… 그래서 인간 종족이 모두 전멸하지 않도록 제우스는 헤르메스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염치와 정의를 주었습니다… 제우스가 말했어요, ‘모두에게 분배해서 모두가 나누어 갖게 하시오. 다른 기술들처럼 일부만 염치와 정의를 갖게 되면 나라가 생길 수 없기 때문이오. 그리고 염치와 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나라의 질병으로 간주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나의 이름을 걸고 법으로 정하시오.’ 소크라테스, 이러한 이유로 아테네인들이 어떤 전문 기술에 관해 논의할 때는 일부 전문가들만 조언하도록 하고 그 외 사람들이 조언하려고 하면 당신 말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시민적 지혜에 동참하는데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는 점에 당신이 기만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것들도 증거로서 생각해보세요. 다른 종류의 훌륭함에 있어서는 예컨대, 누군가 실제로는 그것에 대해 문외한이면서 스스로 뛰어난 아울로스 연주자나 다른 어떤 기술에 대해 전문가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비웃거나 화내거나 친척들조차 실성했느냐고 나무랄 겁니다. 반면, 정의나 시민적 지혜의 경우에는 누군가 정의로움이나 시민으로서의 훌륭함에 대해 문외한이고 주변 사람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사실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겁니다.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모두 자신이 정의롭다고 말해야 하고 정의로운 척이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겁니다… 누구라도 그것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할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까요… 덕이 천성적이지도 않고 저절로 생기지도 않으며 교육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사람들은 그 덕이 적절한 보살핌을 통해서 갖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드리죠. 다른 이가 태생적으로 또는 운에 의해서 갖게 되는 좋음에 대해서, 누군가 이것을 결핍하고 있을 경우, 누구도 그 사람더러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화를 내거나 주의를 주거나 가르치거나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보살핌과 연습 및 교육에 의해 생기는 좋음에 대해서는, 이것을 갖지 못한 자에게 분노가 주어지고 주의와 징계가 있게 되는데, 이런 것들 중 하나가 부정과 불경이고 시민적 지혜에 반하는 모든 것입니다. 이에 있어서는 모두가 화를 내고 주의를 주는데 그 이유는 시민적 지혜가 보살핌과 배움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프로타고라스』, 320c-323a.
토론하기
(1)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시민적 지혜의 교육 불가능성 논변에 맞서, 옛날이야기로 시작하는 긴 답변을 통해 시민적 지혜 역시 교육 가능하다는 입장을 표한다. 프로타고라스의 답변은 논리적으로 구속력이 없는 옛날이야기를 중심하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프로타고라스의 답변이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어떤 방식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며 또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 프로타고라스의 연설을 함께 분석하고 평가해보자.
(2) 아래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프로타고라스가 무신론자 혹은 신에 대한 불가지론자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앞세워 자신의 논지를 펼친 프로타고라스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나는 신들에 대해서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앎을 방해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항은 불명확한데 인생마저 짧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VIII, 8
해설읽기
‘옛날이야기’여도 괜찮아. 충분히 논리적이었어 : 프로타고라스의 연설 분석
인용한 본문은 프로타고라스의 연설 가운데 앞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프로타고라스의 해당 연설은 일명 ‘위대한 연설’이라고 불린다. 철학자와 대비되어 주로 악역을 맡아 온 소피스트의 연설에 붙은 이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별명이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크라테스의 최대 논적이라고 할 만큼 치밀하게 계산된 연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대한 연설’이라는 별칭이 결코 허투루 붙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프로타고라스의 위대한 연설 중 앞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덕의 교육 불가능성 논변’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공적 영역에 기반을 둔 논증을 집중 공격하는 부분이다. 덕의 교육 불가능성 논변 중 공적 영역에 기반을 둔 논증이란, 아테네 민회의 관행을 가지고 덕이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것임을 보이려는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말한다. 다른 셀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 간단히 그 논변의 주장과 근거를 분석해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전제 1 : (아테네인들이 지혜롭고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다) - 전제 2 : 아테네인들은 지혜롭고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전제 ㉠ : 아테네인들은 지혜롭다
- 전제 ㉡ : 아테네인들은 시민적 지혜가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전제 ⓐ : 교육 가능한 것은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하지 않는다
- 전제 ⓑ : 시민적 지혜는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한다
- 결 론 :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다
|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끝난 다음, 아주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옛날이야기로 답변할지 아니면 논증으로 치밀하게 증명할지에 대해 청중들에게 묻고 먼저 운치있는 신화 이야기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한다.
신화로 포문을 여는 프로타고라스의 긴 답변 가운데 인용 본문에서 소개한 전반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신화에 의지한 옛날이야기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논증을 통한 보조적 논증들의 부분이다. 그리고 보조 논증 부분은 다시금 두 개의 논증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신화이야기―논증 I―논증 II’의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도 있겠다. 프로타고라스는 이 세 부분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있을까?
먼저 신화이야기 부분을 보자. 이 이야기는 프로타고라스가 여유롭고 편안한 태도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고 긴장감이 없는 듯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이 신화이야기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방금 제시한 논증에서 자명한 것으로 여겨 생략되었으나 사실은 중요한 논리적 비약일 수 있는 어떤 중요한 문제를 폭로하고 있다. 그게 뭘까? 소크라테스는 전제ⓐ(교육 가능한 것은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하지 않는다)와 전제 ⓑ(시민적 지혜는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한다)로부터 아테네인들은 시민적 지혜가 교육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생략되었지만, 만약 승인되지 않는다면 논증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아테네인들은 시민적 지혜가 필요한 일에 대해서 왜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테네 사람들이 시민적 지혜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달리 말해서,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에 대해서는 전문가일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전제는 논증의 성립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왜 참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뒷받침되지 않았다. 노련한 프로타고라스는 바로 이 점을 눈치채고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다’는 명제가 거짓일 수 있는 세계관 하나를 신화를 통해서 모델로 툭 제시함으로써 위 명제가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고 그냥 승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이것이 위대한 연설 전반부의 첫째 부분인 신화이야기의 주요 기능이다.
첫째 부분이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다’라는 명제가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을 신화를 가지고 가상적으로 제시했다면, 이어지는 논증 I은 시민적 지혜와 기술적 지혜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태도 차이를 바탕으로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시민적 지혜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 아테네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지적해서 보여준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인들이 현명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아테네인들을 상대로 고액의 수업료를 받고 수업을 제공함으로써 훌륭한 사람을 더욱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테네인들의 훌륭함을 인정함으로써 잠재적 고객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영업 전략 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인들이 만약 누군가 민회에서 어떤 기술적 지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모른다고 하면 비난이 주어지지 않지만, 시민적 지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사실대로 모른다고 하면 비난이 주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 시민적 지혜에 대해서는 이런 비난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테네인들이 시민적 지혜에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서, 아테네인들은 모든 인간이 시민적 지혜에 참여한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첫 단락에서 단지 가능성으로만 제시한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다’는 명제가 단지 거짓일 가능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인들의 생각이고 현실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부분인 논증 II는 마지막으로 덕의 교육 가능성 문제를 언급한다. 앞서의 두 부분이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공격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이번 단락은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확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프로타고라스가 여기서 보여주는 논리는 복잡하지 않다. 징계와 처벌이 주어지는 경우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좋음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인데, 시민적 지혜는 그것이 결핍되거나 위배되었을 때 징계와 처벌이 주어지기 때문에 분명 가르침이 가능한 영역에 놓인다는 것이 현명한 아테네인들의 생각이니 사실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리해보면, 인용된 본문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은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무력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첫째 부분은 신화를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어물쩍 넘어가고 있는 논리적 비약을 지적하고 생략된 문제의 전제가 거짓일 수 있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고, 이어서 둘째 부분은 단순히 해당 전제가 거짓일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아테네인들의 통념에 위배되는 것임을 밝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부분은 비로소 시민적 지혜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논변은 그가 제시한 논거들에서 성립하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대화 속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논리로 구성된 답변이라면 ‘위대한 연설’이라는 별칭이 공연하게 붙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키워드
덕, 미덕, 소크라테스, 수치, 시민적 지혜, 염치, 인간적 훌륭함, 정의, 제우스, 탁월성, 프로타고라스, 헤르메스, 훌륭함
전후맥락
칼리아스의 집에 모인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의 대화가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소크라테스는 히포크라테스를 대신하여 그가 프로타고라스에게 무엇을 배워서 어떠한 면에서 더 나은 자가 되는 것인지 묻는다. 프로타고라스의 답변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가르친다고 공언하는 것이 ‘시민적 기술’ 또는 ‘사람들을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것’임을 지적하며 그것들은 모두 인간적 훌륭함, 다시 말해 미덕들인데 자신은 그것을 교육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자신과 히포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를 흠모해서 그에게 배움을 청하고자 찾아왔으니 자신이 덕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해 온 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마땅하겠다며 크게 두 가지 논거를 제시한다. 첫째는 공적인 차원에서 제기하는 논거다. 그것은 아테네인들은 분명 현명한 사람들인데, 소수의 전문가가 아니라 모두의 의견을 모아 도시의 안건을 처리하는 그들의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을 곰곰이 살펴보면 미덕을 교육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첫째 논거와 짝을 이루어 사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는 논거다. 아테네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민인 페리클레스조차도 자신이 가장 뛰어난 인간적 혹은 시민적 훌륭함에 대해서는 자기 자식들을 올바르게 교육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치자 프로타고라스는 지혜로운 자의 면모로 자신을 연출하며 운치 있는 옛날이야기와 치밀한 논증 가운데 어떤 방법으로 답변을 해줄지 묻고 먼저 옛날이야기를 통해서 어쩌다 모든 인간들이 덕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답변을 들려주기로 한다.
고전본문
동물들이 빛을 보도록 하려던 참에 신들은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에게 적절한 능력을 그것들 각각에 대해서 분배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에피메테우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능력들을 전부 나누어 주었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인간 종족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었고 에피메테우스는 곤란해 했지요. 그가 곤경에 처한 그 때, 프로메테우스가 분배 상황을 점검하러 왔고 인간들에게 어떤 구원책을 줄지 곤란해진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와 아테나로부터 기술적 지혜와 불을 같이 훔쳐 인간에게 주지요. 이렇게 하여 인간은 생존하는 지혜를 갖게 되었지만 시민적 지혜는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처음에는 이곳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고,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보다 약한 인간들은 그것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전문 기술은 그들에게 양식에 대해서는 유용했지만 다른 동물들과의 전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시민적 기술이 아직 없었는데, 전쟁술은 그것의 일부분이니까요… 그래서 인간 종족이 모두 전멸하지 않도록 제우스는 헤르메스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염치와 정의를 주었습니다… 제우스가 말했어요, ‘모두에게 분배해서 모두가 나누어 갖게 하시오. 다른 기술들처럼 일부만 염치와 정의를 갖게 되면 나라가 생길 수 없기 때문이오. 그리고 염치와 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나라의 질병으로 간주하여 사형에 처할 것을 나의 이름을 걸고 법으로 정하시오.’ 소크라테스, 이러한 이유로 아테네인들이 어떤 전문 기술에 관해 논의할 때는 일부 전문가들만 조언하도록 하고 그 외 사람들이 조언하려고 하면 당신 말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시민적 지혜에 동참하는데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는 점에 당신이 기만을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것들도 증거로서 생각해보세요. 다른 종류의 훌륭함에 있어서는 예컨대, 누군가 실제로는 그것에 대해 문외한이면서 스스로 뛰어난 아울로스 연주자나 다른 어떤 기술에 대해 전문가라고 주장한다면, 사람들은 비웃거나 화내거나 친척들조차 실성했느냐고 나무랄 겁니다. 반면, 정의나 시민적 지혜의 경우에는 누군가 정의로움이나 시민으로서의 훌륭함에 대해 문외한이고 주변 사람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가 직접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사실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겁니다. 정의롭든 그렇지 않든 모두 자신이 정의롭다고 말해야 하고 정의로운 척이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겁니다… 누구라도 그것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할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까요… 덕이 천성적이지도 않고 저절로 생기지도 않으며 교육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그리고 사람들은 그 덕이 적절한 보살핌을 통해서 갖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드리죠. 다른 이가 태생적으로 또는 운에 의해서 갖게 되는 좋음에 대해서, 누군가 이것을 결핍하고 있을 경우, 누구도 그 사람더러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화를 내거나 주의를 주거나 가르치거나 징계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반대로 보살핌과 연습 및 교육에 의해 생기는 좋음에 대해서는, 이것을 갖지 못한 자에게 분노가 주어지고 주의와 징계가 있게 되는데, 이런 것들 중 하나가 부정과 불경이고 시민적 지혜에 반하는 모든 것입니다. 이에 있어서는 모두가 화를 내고 주의를 주는데 그 이유는 시민적 지혜가 보살핌과 배움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프로타고라스』, 320c-323a.
토론하기
(1)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시민적 지혜의 교육 불가능성 논변에 맞서, 옛날이야기로 시작하는 긴 답변을 통해 시민적 지혜 역시 교육 가능하다는 입장을 표한다. 프로타고라스의 답변은 논리적으로 구속력이 없는 옛날이야기를 중심하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프로타고라스의 답변이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어떤 방식으로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며 또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 프로타고라스의 연설을 함께 분석하고 평가해보자.
(2) 아래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프로타고라스가 무신론자 혹은 신에 대한 불가지론자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앞세워 자신의 논지를 펼친 프로타고라스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나는 신들에 대해서 그러한 것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앎을 방해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항은 불명확한데 인생마저 짧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VIII, 8
해설읽기
‘옛날이야기’여도 괜찮아. 충분히 논리적이었어 : 프로타고라스의 연설 분석
인용한 본문은 프로타고라스의 연설 가운데 앞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프로타고라스의 해당 연설은 일명 ‘위대한 연설’이라고 불린다. 철학자와 대비되어 주로 악역을 맡아 온 소피스트의 연설에 붙은 이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별명이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크라테스의 최대 논적이라고 할 만큼 치밀하게 계산된 연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대한 연설’이라는 별칭이 결코 허투루 붙은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프로타고라스의 위대한 연설 중 앞부분은 소크라테스가 제기한 ‘덕의 교육 불가능성 논변’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공적 영역에 기반을 둔 논증을 집중 공격하는 부분이다. 덕의 교육 불가능성 논변 중 공적 영역에 기반을 둔 논증이란, 아테네 민회의 관행을 가지고 덕이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것임을 보이려는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말한다. 다른 셀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이곳에서 간단히 그 논변의 주장과 근거를 분석해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 전제 1 : (아테네인들이 지혜롭고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다) - 전제 2 : 아테네인들은 지혜롭고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전제 ㉠ : 아테네인들은 지혜롭다
- 전제 ㉡ : 아테네인들은 시민적 지혜가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전제 ⓐ : 교육 가능한 것은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하지 않는다
- 전제 ⓑ : 시민적 지혜는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한다
- 결 론 : 시민적 지혜는 교육 가능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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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끝난 다음, 아주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옛날이야기로 답변할지 아니면 논증으로 치밀하게 증명할지에 대해 청중들에게 묻고 먼저 운치있는 신화 이야기로 자신의 연설을 시작한다.
신화로 포문을 여는 프로타고라스의 긴 답변 가운데 인용 본문에서 소개한 전반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신화에 의지한 옛날이야기 부분이요, 다른 하나는 논증을 통한 보조적 논증들의 부분이다. 그리고 보조 논증 부분은 다시금 두 개의 논증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보면 ‘신화이야기―논증 I―논증 II’의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도 있겠다. 프로타고라스는 이 세 부분을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있을까?
먼저 신화이야기 부분을 보자. 이 이야기는 프로타고라스가 여유롭고 편안한 태도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같고 긴장감이 없는 듯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이 신화이야기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방금 제시한 논증에서 자명한 것으로 여겨 생략되었으나 사실은 중요한 논리적 비약일 수 있는 어떤 중요한 문제를 폭로하고 있다. 그게 뭘까? 소크라테스는 전제ⓐ(교육 가능한 것은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하지 않는다)와 전제 ⓑ(시민적 지혜는 그것이 필요할 때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한다)로부터 아테네인들은 시민적 지혜가 교육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연하게 여겨져 생략되었지만, 만약 승인되지 않는다면 논증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아테네인들은 시민적 지혜가 필요한 일에 대해서 왜 아무에게나 발언권을 허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테네 사람들이 시민적 지혜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특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달리 말해서,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에 대해서는 전문가일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전제는 논증의 성립을 위해서는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왜 참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뒷받침되지 않았다. 노련한 프로타고라스는 바로 이 점을 눈치채고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다’는 명제가 거짓일 수 있는 세계관 하나를 신화를 통해서 모델로 툭 제시함으로써 위 명제가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고 그냥 승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이것이 위대한 연설 전반부의 첫째 부분인 신화이야기의 주요 기능이다.
첫째 부분이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다’라는 명제가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을 신화를 가지고 가상적으로 제시했다면, 이어지는 논증 I은 시민적 지혜와 기술적 지혜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태도 차이를 바탕으로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시민적 지혜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 아테네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지적해서 보여준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인들이 현명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아테네인들을 상대로 고액의 수업료를 받고 수업을 제공함으로써 훌륭한 사람을 더욱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테네인들의 훌륭함을 인정함으로써 잠재적 고객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영업 전략 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아테네인들이 만약 누군가 민회에서 어떤 기술적 지혜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모른다고 하면 비난이 주어지지 않지만, 시민적 지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사실대로 모른다고 하면 비난이 주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왜 시민적 지혜에 대해서는 이런 비난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테네인들이 시민적 지혜에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해서, 아테네인들은 모든 인간이 시민적 지혜에 참여한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첫 단락에서 단지 가능성으로만 제시한 ‘그 누구도 시민적 지혜의 전문가일 수 없다’는 명제가 단지 거짓일 가능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아테네인들의 생각이고 현실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부분인 논증 II는 마지막으로 덕의 교육 가능성 문제를 언급한다. 앞서의 두 부분이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부당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공격하는데 목적을 두었다면, 이번 단락은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확증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프로타고라스가 여기서 보여주는 논리는 복잡하지 않다. 징계와 처벌이 주어지는 경우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좋음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인데, 시민적 지혜는 그것이 결핍되거나 위배되었을 때 징계와 처벌이 주어지기 때문에 분명 가르침이 가능한 영역에 놓인다는 것이 현명한 아테네인들의 생각이니 사실에 있어서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리해보면, 인용된 본문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은 소크라테스의 논변을 무력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첫째 부분은 신화를 통해서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어물쩍 넘어가고 있는 논리적 비약을 지적하고 생략된 문제의 전제가 거짓일 수 있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고, 이어서 둘째 부분은 단순히 해당 전제가 거짓일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아테네인들의 통념에 위배되는 것임을 밝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부분은 비로소 시민적 지혜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논변은 그가 제시한 논거들에서 성립하지 않을 수 있을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대화 속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논리로 구성된 답변이라면 ‘위대한 연설’이라는 별칭이 공연하게 붙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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