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희랍에서는 '에로스'로 불리는 사랑과 '필리아'로 불리는 사랑이 서로 달랐다. 에로스가 성적인 의미의 사랑이라면, 필리아는 좀 더 순수한 의미의 애정이다. 이 필리아적 애정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필두로 해서 친구들 간의 사랑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 그래서 필리아는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애정'으로 불리며 그 외에도 '친애'나 '우정' 등의 의미로도 읽힌다. 『뤼시스』의 소크라테스는 필리아의 본질이 무엇인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를 상대로 대화를 나눈다. 그는 '필리아란 무엇인가'하는 추상적인 문제에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되는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접근한다. 이 셀묶음은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친구의 후보로 검토하는 대상들 중 일부를 곱씹어본다.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가 새로 생긴 체육 도장 앞을 지날 때, 히포탈레스와 마주치는데,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함께 도장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한다. 히포탈레스는 한창 뤼시스라는 소년을 좋아하는 중이었고, 자신의 소년 애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연애박사’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우려는 속셈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히포탈레스가 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뤼시스와 그의 사촌이자 친구인 메넥세노스가 입장한다. 이윽고 소크라테스는 온전한 사랑의 조건이 앎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로 뤼시스와의 대화를 이끌어간다. 이것은 소년 애인을 낚아채는 방법을 히포탈레스에게 보여주는 소크라테스의 시범이다. 히포탈레스의 에로스에서 비롯되어 출발한 이 대화는 뤼시스와 메넥세노스 같은 친구들 사이에 싹 트는 사랑인 필리아를 향해 나아가고 그것의 본성과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구체화된다. 소크라테스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를 상대로 수행하는 필리아에 대한 검토 주제와 순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필리아의 상호성 여부와 친구필리아의 대상의 두 후보
1-1. 상호적 필리아의 조건과 여부 (둘 중 하나의 사랑 ∨ 양자 모두의 사랑)
1-2. 일방적 필리아의 가능성 (사랑하는 자가 친구일 가능성 ∧ 사랑받는 자가 친구일 가능성)
2. 비슷한 자 혹은 비슷하지 않은 자가 친구일 가능성
3.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좋은 것의 친구일 가능성
4. 본성 상 가까운 것이 가까운 것에게 친구일 가능성
다음의 인용문은 소크라테스가 필리아란 당사자들 모두의 애정을 필요로 하는지 혹은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애정에 의해서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검토하는 장면이다.
고전본문
“자, 그러니 내게 말해주게.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두 사람 중 누가 누구의 친구가 되는가?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친구가 되는가, 아니면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가 되는가? 아니면 별반 차이가 없는가?” 내가 말했네.
“제가 보기엔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네.
“무슨 말인가? 아니, 그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기만 하면,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친구가 되는건가?” 내가 말했네.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가 말했네.
“뭐라고? 사랑하는 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서 사랑을 되받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건 어떤가? 사랑하는 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자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 자네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한 사람은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을 받는 것이지?” 내가 말했네.
“네.”
“그럼 그들 가운데 누가 누구의 친구인가?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친구인가? 아니면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인가? 또는 이런 경우,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둘 중 누구도 상대방의 친구가 되지 않는 것인가?”
“둘 중 누구도 상대방의 친구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좀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네. 그때는 둘 중 한 사람만 사랑하면 둘 다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둘 다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 모든 것은 친구가 아니겠구먼.”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말들이 사랑을 돌려주지 않으면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메추라기를 사랑하는 자들도, 개를 사랑하는 자들도 그리고 포도주와 체육을 사랑하는 자들도 그렇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도 그들이 사랑하는 것의 친구가 아닌 셈이군. 지혜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말이야. 아니면 그들은 각기 이것들을 사랑하지만 이것들은 그들에게 친구가 아니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한 시인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건가?
행복한 자다. 그에게 친구인 아이들과 통 발굽을 가진 말들과
사냥개들과 타지에 사는 이방인 친구가 있는 자는. (솔론, 단편 23)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게 아니라 저 시구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는 필리아를 일방적 관계와 상호적 관계 가운데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보자.
(2) 자신이 먼저 사랑함으로써 형성된 인간관계와 사랑을 받음으로써 형성된 인간관계를 구분하고 예시를 찾아 설명해보자.
해설읽기
두 사람이 서로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
필리아란 내가 아닌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친구들 사이의 우정 또한 필리아에 속한다. 이러한 필리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성립하거나 일방적으로 성립할 것이다. 필리아를 애정으로 부르든, 우정이나 사랑 또는 친애로 부르든, 그것은 당사자들 모두의 상호적인 관계라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에 가깝다. 그런데 『뤼시스』의 소크라테스는 의외로 필리아의 상호성을 간단하게 기각한다. 그는 누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두 사람 중 누가 누구의 친구가 되는지 묻고서 세 가지 가능한 경우를 제시한다.
첫째,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에게 친구다.
둘째,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에게 친구다.
셋째, 별 차이 없다.
세 경우들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해도 둘이 서로 친구가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다만 첫 번째 경우는 능동적으로 사랑을 하는 쪽이 사랑을 받는 쪽에게 친구가 된다는 입장인 반면, 두 번째 경우는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는 쪽이 사랑을 하는 쪽에게 친구가 된다는 입장이다.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하면 둘은 서로 친구가 된다는 생각이다. 메넥세노스가 세 번째 것을 자신의 입장으로 선택하자, 소크라테스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해도 사랑받은 그 하나가 사랑하는 다른 하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례를 제시함으로써 곧바로 물리친다. 즉, A가 다른 B를 사랑하는 상황 가운데는 둘이 서로 친구가 되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A가 B를 사랑하지만 B는 A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혐오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A와 B가 서로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와 메넥세노스는 둘 중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양자 모두 서로를 사랑해야 비로소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쪽으로 입장을 수정한다. 상식적으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생각인데, 어째서인지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변덕을 부린다. 그는 이제 필리아의 상호성을 검토해볼 작정이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반드시 서로가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일상적인 말습관을 가지고 필리아의 상호성을 논박한다. 필리아가 상호적 관계라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을 경우, 그 두 사람은 친구일 수 없다. 따라서 A는 B를 사랑하는 반면, B는 A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A는 B와 친구일 수 없다. B가 A의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대상이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A가 B의 친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반례를 지적한다. 포도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주는 친구친애의 대상지만 포도주도 그 포도주 애호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친구지만 지혜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는 최초의 가정은 모순에 봉착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추론이다. 이어지는 솔론의 시는 조금 전에 소크라테스와 메넥세노스가 수정한 결론과는 달리, 양자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둘 중 어느 한쪽만 사랑을 해도 필리아의 대상, 즉 친구로 인정되는 것처럼 노래한다. 말이나 사냥개들이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을 리 없는데도 친구로 인정한다. 여기에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도 서로의 친구가 아니라는 상호적 필리아의 입장을 약화시킨 뒤 메넥세노스 앞에서 솔론의 권위를 이용해 그것을 굳히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들어있다.
필리아는 정말로 상호 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닌 걸까?
우리는 ‘사랑’을 일반적으로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성욕을 의미하든, 친애를 의미하든 사랑은 대상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관계는 둘 이상의 관계항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누군가와 또다른 누군가의 사이에서 이해해야 할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작품의 초반에 사랑의 상호성을 너무나 쉽게 논의에서 배제한다.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지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일부러 시작 단계에서 제쳐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그런데 필리아의 상호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뤼시스』가 필리아에 관한 최초의 철학적 논고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데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대작이 동일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영향도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시스』를 저술한 플라톤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에서 스승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필리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필리아의 본질에 대한 그의 분석에 상호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그 귀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의 세 본질로 순수성과 상호성 그리고 인지성을 꼽았다. 이 세 가지는 참된 친구의 조건과도 같은 것인데, 순수성이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그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도록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상호성은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마음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지성은 참된 친애의 대상들, 즉 친구들이라면 서로 상대방의 순수성과 상호성을 모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마음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의 마음이 상호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뤼시스』 초반의 논의와 선을 긋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의 본질 중 하나로 상호성을 제시함으로써 플라톤이 『뤼시스』에서 필리아의 대상으로 언급한 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더 이상 필리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먼저, 일방적인 사랑이 필리아에서 제외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필리아가 아니라 그저 선의에 불과하다. 필리아라는 의미에서는 짝사랑조차 사랑이 아니다. 스토킹은 말할 것도 없다. 또, 무생물에 대한 사랑도 필리아의 범주에서 빠져야 한다. 플라톤은 포도주나 지혜에 대한 사랑을 필리아의 사례에 포함시키고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개념은 무생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무생물을 대상으로는 상대방을 위해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각상을 향한 퓌그말리온의 저 유명한 사랑 이야기도 에로스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필리아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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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맥락
어느 날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가 새로 생긴 체육 도장 앞을 지날 때, 히포탈레스와 마주치는데,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함께 도장 안으로 들어가자고 권한다. 히포탈레스는 한창 뤼시스라는 소년을 좋아하는 중이었고, 자신의 소년 애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연애박사’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우려는 속셈이었다. 소크라테스와 히포탈레스가 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뤼시스와 그의 사촌이자 친구인 메넥세노스가 입장한다. 이윽고 소크라테스는 온전한 사랑의 조건이 앎과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로 뤼시스와의 대화를 이끌어간다. 이것은 소년 애인을 낚아채는 방법을 히포탈레스에게 보여주는 소크라테스의 시범이다. 히포탈레스의 에로스에서 비롯되어 출발한 이 대화는 뤼시스와 메넥세노스 같은 친구들 사이에 싹 트는 사랑인 필리아를 향해 나아가고 그것의 본성과 대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구체화된다. 소크라테스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를 상대로 수행하는 필리아에 대한 검토 주제와 순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필리아의 상호성 여부와 친구필리아의 대상의 두 후보
1-1. 상호적 필리아의 조건과 여부 (둘 중 하나의 사랑 ∨ 양자 모두의 사랑)
1-2. 일방적 필리아의 가능성 (사랑하는 자가 친구일 가능성 ∧ 사랑받는 자가 친구일 가능성)
2. 비슷한 자 혹은 비슷하지 않은 자가 친구일 가능성
3.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좋은 것의 친구일 가능성
4. 본성 상 가까운 것이 가까운 것에게 친구일 가능성
다음의 인용문은 소크라테스가 필리아란 당사자들 모두의 애정을 필요로 하는지 혹은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애정에 의해서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검토하는 장면이다.
고전본문
“자, 그러니 내게 말해주게.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두 사람 중 누가 누구의 친구가 되는가?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친구가 되는가, 아니면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가 되는가? 아니면 별반 차이가 없는가?” 내가 말했네.
“제가 보기엔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네.
“무슨 말인가? 아니, 그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기만 하면,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친구가 되는건가?” 내가 말했네.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가 말했네.
“뭐라고? 사랑하는 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자에게서 사랑을 되받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건 어떤가? 사랑하는 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자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 자네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한 사람은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을 받는 것이지?” 내가 말했네.
“네.”
“그럼 그들 가운데 누가 누구의 친구인가?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의 친구인가? 아니면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의 친구인가? 또는 이런 경우,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둘 중 누구도 상대방의 친구가 되지 않는 것인가?”
“둘 중 누구도 상대방의 친구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좀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네. 그때는 둘 중 한 사람만 사랑하면 둘 다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둘 다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도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 모든 것은 친구가 아니겠구먼.”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말들이 사랑을 돌려주지 않으면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메추라기를 사랑하는 자들도, 개를 사랑하는 자들도 그리고 포도주와 체육을 사랑하는 자들도 그렇고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도 그들이 사랑하는 것의 친구가 아닌 셈이군. 지혜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말이야. 아니면 그들은 각기 이것들을 사랑하지만 이것들은 그들에게 친구가 아니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한 시인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건가?
행복한 자다. 그에게 친구인 아이들과 통 발굽을 가진 말들과
사냥개들과 타지에 사는 이방인 친구가 있는 자는. (솔론, 단편 23)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게 아니라 저 시구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는 필리아를 일방적 관계와 상호적 관계 가운데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지 이야기하고 자신의 생각과 비교해보자.
(2) 자신이 먼저 사랑함으로써 형성된 인간관계와 사랑을 받음으로써 형성된 인간관계를 구분하고 예시를 찾아 설명해보자.
해설읽기
두 사람이 서로 친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
필리아란 내가 아닌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애정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친구들 사이의 우정 또한 필리아에 속한다. 이러한 필리아는 두 사람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성립하거나 일방적으로 성립할 것이다. 필리아를 애정으로 부르든, 우정이나 사랑 또는 친애로 부르든, 그것은 당사자들 모두의 상호적인 관계라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에 가깝다. 그런데 『뤼시스』의 소크라테스는 의외로 필리아의 상호성을 간단하게 기각한다. 그는 누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두 사람 중 누가 누구의 친구가 되는지 묻고서 세 가지 가능한 경우를 제시한다.
첫째,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에게 친구다.
둘째, 사랑받는 자가 사랑하는 자에게 친구다.
셋째, 별 차이 없다.
세 경우들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해도 둘이 서로 친구가 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다만 첫 번째 경우는 능동적으로 사랑을 하는 쪽이 사랑을 받는 쪽에게 친구가 된다는 입장인 반면, 두 번째 경우는 수동적으로 사랑을 받는 쪽이 사랑을 하는 쪽에게 친구가 된다는 입장이다.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하면 둘은 서로 친구가 된다는 생각이다. 메넥세노스가 세 번째 것을 자신의 입장으로 선택하자, 소크라테스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해도 사랑받은 그 하나가 사랑하는 다른 하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반례를 제시함으로써 곧바로 물리친다. 즉, A가 다른 B를 사랑하는 상황 가운데는 둘이 서로 친구가 되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A가 B를 사랑하지만 B는 A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심지어 혐오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A와 B가 서로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와 메넥세노스는 둘 중 어느 한 쪽이 아니라 양자 모두 서로를 사랑해야 비로소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쪽으로 입장을 수정한다. 상식적으로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생각인데, 어째서인지 소크라테스는 곧바로 변덕을 부린다. 그는 이제 필리아의 상호성을 검토해볼 작정이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반드시 서로가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일상적인 말습관을 가지고 필리아의 상호성을 논박한다. 필리아가 상호적 관계라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을 경우, 그 두 사람은 친구일 수 없다. 따라서 A는 B를 사랑하는 반면, B는 A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A는 B와 친구일 수 없다. B가 A의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대상이 사랑을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A가 B의 친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반례를 지적한다. 포도주를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주는 친구친애의 대상지만 포도주도 그 포도주 애호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친구지만 지혜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들은 친구가 아니라는 최초의 가정은 모순에 봉착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추론이다. 이어지는 솔론의 시는 조금 전에 소크라테스와 메넥세노스가 수정한 결론과는 달리, 양자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둘 중 어느 한쪽만 사랑을 해도 필리아의 대상, 즉 친구로 인정되는 것처럼 노래한다. 말이나 사냥개들이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사랑을 되돌려줄 수 있을 리 없는데도 친구로 인정한다. 여기에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도 서로의 친구가 아니라는 상호적 필리아의 입장을 약화시킨 뒤 메넥세노스 앞에서 솔론의 권위를 이용해 그것을 굳히려는 소크라테스의 의도가 들어있다.
필리아는 정말로 상호 간에 성립하는 것이 아닌 걸까?
우리는 ‘사랑’을 일반적으로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성욕을 의미하든, 친애를 의미하든 사랑은 대상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관계는 둘 이상의 관계항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누군가와 또다른 누군가의 사이에서 이해해야 할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플라톤은 작품의 초반에 사랑의 상호성을 너무나 쉽게 논의에서 배제한다.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지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일부러 시작 단계에서 제쳐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든다. 그런데 필리아의 상호성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뤼시스』가 필리아에 관한 최초의 철학적 논고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데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라는 대작이 동일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영향도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시스』를 저술한 플라톤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에서 스승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필리아에 대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필리아의 본질에 대한 그의 분석에 상호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그 귀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의 세 본질로 순수성과 상호성 그리고 인지성을 꼽았다. 이 세 가지는 참된 친구의 조건과도 같은 것인데, 순수성이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그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기도록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상호성은 상대방에게 좋은 일이 생기는 마음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지성은 참된 친애의 대상들, 즉 친구들이라면 서로 상대방의 순수성과 상호성을 모르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마음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의 마음이 상호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뤼시스』 초반의 논의와 선을 긋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필리아의 본질 중 하나로 상호성을 제시함으로써 플라톤이 『뤼시스』에서 필리아의 대상으로 언급한 것들 가운데 상당수가 더 이상 필리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먼저, 일방적인 사랑이 필리아에서 제외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필리아가 아니라 그저 선의에 불과하다. 필리아라는 의미에서는 짝사랑조차 사랑이 아니다. 스토킹은 말할 것도 없다. 또, 무생물에 대한 사랑도 필리아의 범주에서 빠져야 한다. 플라톤은 포도주나 지혜에 대한 사랑을 필리아의 사례에 포함시키고 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개념은 무생물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무생물을 대상으로는 상대방을 위해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각상을 향한 퓌그말리온의 저 유명한 사랑 이야기도 에로스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필리아일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