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희랍에서는 '에로스'로 불리는 사랑과 '필리아'로 불리는 사랑이 서로 달랐다. 에로스가 성적인 의미의 사랑이라면, 필리아는 좀 더 순수한 의미의 애정이다. 이 필리아적 애정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필두로 해서 친구들 간의 사랑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형성될 수 있다. 그래서 필리아는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애정'으로 불리며 그 외에도 '친애'나 '우정' 등의 의미로도 읽힌다. 『뤼시스』의 소크라테스는 필리아의 본질이 무엇인지 뤼시스와 메넥세노스를 상대로 대화를 나눈다. 그는 '필리아란 무엇인가'하는 추상적인 문제에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되는가'라는 구체적인 질문을 통해 접근한다. 이 셀묶음은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친구의 후보로 검토하는 대상들 중 일부를 곱씹어본다.
소크라테스는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메넥세노스를 상대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친구의 후보로 검토한 다음, 그들 모두를 기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필리아가 두 개의 관계항을 필요로 한다는 점까지 폐기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비슷한 자’와 ‘비슷하지 않은 자’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뒤를 이어 친구의 후보로서의 가능성을 검증받게 된다. 즉,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거나 ‘비슷하지 않은 자가 비슷하지 않은 자에게 친구’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들을 차례로 검증함으로써 무엇이 사실인지 밝히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호메로스의 시구를 인용하며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는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 살펴본다. 그러나 그는 곧 이 가설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고 곧장 반박한다.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면, 나쁜 자는 나쁜 자에게 친구가 되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점이 비판의 핵심이다. 하지만 나쁜 자와 나쁜 자만 서로 비슷한 것은 아니다. 훌륭한 자와 훌륭한 자 역시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일 가능성이 나쁜 자들의 경우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나쁜 자들의 쌍을 지나 훌륭한 자들의 쌍을 도입하여 유유상종설을 한결 심층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다.
고전본문
“내 생각에 시인들은 훌륭한 이들이 서로 비슷하고 친구라고 말하는 것 같네. 반면에 나쁜 사람들은 비슷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비슷하지 않으며 도리어 갈등하고 불안정하다고 이야기하는 듯하고 말일세.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비슷하지 않고 다른 자는 다른 사람과 자주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래서 그 말은, 친구여, 내게는 이 점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네. 비슷한 자들이 비슷한 자들에게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직 훌륭한 자들이 오직 훌륭한 자들에 대해서만 친구가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말일세. 반대로, 나쁜 이들은 훌륭한 자에게도 나쁜 자에게도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하지만 말이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친구들이란 누구인지 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먼. 왜냐하면 이 논의가 친구란 훌륭한 자들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일세.“
“저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내게도 그렇게 보인다네.” 내가 말했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뭔가 찜찜함을 느끼고 있어. 그러니, 자, 제우스의 앞에서, 내가 미심쩍어 하는 것을 함께 살펴 보세나.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 친구이고, 그러한 자는 그러한 자에게 유익한가? 더 나아가 말하자면, 비슷한 그 무엇이든 비슷한 그 무엇에게, 자기 스스로에게는 끼칠 수 없는 어떤 유익함이나 해로움을 줄 수 있나? 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겪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자기와 비슷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겪을 수는 있나?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어떻게 서로 좋아할 수 있지? 서로 상호작용을 전혀 할 수 없는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이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전혀요.”
“그렇다면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인 것이 아니라 훌륭한 것이 훌륭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이 아니라 훌륭한 것인 한 ‘친구’인 것인가?”
“그럴 것 같습니다.”
“뭐? 훌륭한 것은 훌륭한 만큼 훌륭한 한 스스로 충분할 텐데?”
“맞습니다.”
“충분한 것은 충분함에 의해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을 걸세.“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을 걸세.”
“그럴 겁니다.”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친구일 수는 없네.”
“그럴 수 없죠.”
“그러면 우리에게 훌륭한 자들이 훌륭한 자들에게 친구라는 근거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립지 않고 ―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 스스로 충분하니까 ― 곁에 있을 때에도 서로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그러한 자들이 서로에 대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 있겠는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말했네.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가 훌륭한 자들끼리 친구가 된다는 주장을 논박하는 핵심 근거가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비판해보자.
(2) 훌륭한 사람들끼리의 우정이 항상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예외적인 상황이 있었는지 역사 속에서 사례를 찾아 공유해보자.
(3) 공동체에서 훌륭한 사람들끼리의 친구 관계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것이 과연 사회에서 어떤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보자.
해설읽기
필리아(우정·애정)가 무엇인지를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친구(필로스)가 되는가’하는 구체적 질문 속에서 해명하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후보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 속에서 찾아보려 했지만 두 선택지 모두 기각된다. 그러나 친구관계가 두 개의 관계항을 필요로 한다는 점까지 기각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비슷한 자’와 ‘비슷하지 않은 자’가 친구의 후보로서 검토되었고 이것들 중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는 일종의 유유상종설이 먼저 다루어진다. 이 주장을 비판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비슷한 자’를 ‘훌륭한 자’의 쌍과 ‘나쁜 자’의 쌍 그리고 ‘중간적인 자’의 쌍으로 분류하고, 나쁜 자와 나쁜 자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나쁜 자들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여서 누구도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없고, 변덕이 심하고 불안정한 나머지 자기 자신과도 비슷할 수 없기 때문에 나쁜 자와 나쁜 자가 서로 비슷한 자로서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유유상종설은 본래부터 훌륭한 자들의 쌍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되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사람들 혹은 훌륭한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보이지 않나? 그렇다면 여태까지의 논박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자의 쌍으로 시선을 옮겨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라는 가설의 정합성을 따져보기로 한다.
훌륭한 자는 훌륭한 자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훌륭한 자들이 서로 ‘비슷한homoios 자’라는 점이다. 우리말에서 형용사 ‘비슷한’은 어떤 것들이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은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희랍어 ‘호모이오스’는 ‘닮은’, ‘유사한’ 등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갖지만, ‘같은’, ‘동등한’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에 따라 우리는 ‘비슷한 자’를 두 층위로 강도를 달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것을 약한 의미로 받아들여,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의미로 해석해 ‘둘이 서로 같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작품 속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층위가 어느 것인가 하는 점인데, 그는 여기서 명백히 ‘강한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비슷한 자’로 읽기는 하지만 ‘같은 자’나 ‘동일한 자’라는 의미를 겹쳐 읽을 필요도 있다는 뜻이겠다. 이것을 전제로 소크라테스의 논의를 요약·정리하면 이러하다.
소크라테스는 궁극적으로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려 한다. 이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그는 먼저 ‘훌륭한 자는 훌륭한 자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점을 확립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비슷한 자’에 대한 강한 해석이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뭔가 미심쩍다며 비슷한 것들은 서로 유익하고 해로울 수 있냐고 묻는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 친구이고, 그러한 자는 그러한 자에게 유익한가? 더 나아가 말하자면, 비슷한 그 무엇이든 비슷한 그 무엇에게, 자기 스스로에게는 끼칠 수 없는 어떤 유익함이나 해로움을 줄 수 있나? 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겪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자기와 비슷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겪을 수는 있나?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어떻게 서로 좋아할 수 있지? 서로 상호작용을 전혀 할 수 없는데 말이야.”
‘비슷한 것’에 대한 강한 해석을 바탕으로 위 구절을 바라보자.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 친구이고 … 자기 스스로에게는 끼칠 수 없는 어떤 유익함이나 해로움을 줄 수 있나? 또는 … 자기와 비슷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겪을 수 있나?’ 같은 것이 같은 것에게 친구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친구가 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이익도 해악도 서로 끼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보자. A와 B는 서로 ‘비슷한(같은)‘ 자다. 그런데 A는 영어를 매우 잘한다. 하지만 A가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영어에 대한 지식을 자기 자신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지식 격차가 없어서다. 애초에 자기 자신과 어떤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 이때, A는 ‘비슷한(같은)‘ B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자기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이익은 자신과 ‘비슷한(같은)‘ 자에게도 줄 수 없으니까. 이번에는, A가 콜레라균에 감염되어 콜레라에 걸리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A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콜레라에 걸릴 수 없다. 콜레라균은 오염된 음식이나 물에 의해 외부로부터 감염되어야지 체내에서 자연히 생성될 리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A는 자신과 ‘비슷한(같은)‘ B에 의해서도 콜레라를 경험할 수 없다. B 역시 A와 ‘비슷한(같은)‘ 자인 한 콜레라균을 갖고 있지 않을 테니까. 이처럼, ‘비슷한 것’에 대한 강한 해석 위에서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그러므로 ‘훌륭한 자도 훌륭한 자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고지는 멀지 않다. 이처럼 훌륭한 자들끼리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그들 사이에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며, 좋아하는 것 또한 가능할 리가 없다. 좋아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영향이고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데도 친구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하다.
훌륭한 자들은 이미 충분한hikanos 자들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라는 가설이 불합리한 까닭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앞서 ‘비슷한 자’에 대해 ‘약한 해석’과 ‘강한 해석’을 구분했던 것처럼, ‘훌륭한 자’에 대해서도 ‘약한 해석’과 ‘강한 해석’을 구분할 수 있다. ‘훌륭한 자’에 대한 약한 해석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처럼 ‘매우 뛰어나고 칭찬할 만하다’고 새기는 것이다. 반면에 강한 해석은 좀 별난 쪽이다. 약한 해석이 훌륭함의 정도를 인간적 수준에 맞추고 있다면, 강한 해석은 거의 신의 수준이나 못해도 신선의 경지에 맞춘다고 보면 되겠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자에 대해 이번에도 강한 해석을 취한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훌륭한 자’란 적어도 자신이 훌륭하다고 이야기되는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완벽한 존재여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존재다. 따라서 그는 이미 그 자신만으로 충분한 자다. 충분한 자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자족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존재는 욕구를 갖지 않는다. 욕구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느끼는 것인데 훌륭한 자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떤 것도 특별하지 않고 좋아할 것도 없다. 뭔가 좋아하는 대상은 자기에게 뭔가 특별한 것인데 그런 것은 없으니까. 이처럼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뭔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마치 서울시민은 아닌데 관악구민이기는 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친구라는 것은 역시 불합리하다.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가 된다’는 유유상종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모든 친구 관계가 오로지 어떤 공통 속성만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단순히 지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대화편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주어지는 보람있는 과제이다. 분명히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관심사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공감과 이해를 깊게 하고 우정과 친밀감을 두텁게 할 수 있다. 비슷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한결 편안하게 표현할 수도 있고, 서로에게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몰랐을 리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삶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참된 앎을 향한 끊임없는 지향이었다. 사실 『뤼시스』에서 온전한 필리아를 위한 조건으로 꼽는 것도 다름 아닌 앎이었다. 그의 논박을 통해 우리가 항상 생각이 비슷한 사람에게서만 뭔가를 배우지는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본다.
키워드
뤼시스, 사랑, 소크라테스, 애정, 에로스, 우정, 친애, 플라톤, 필리아
전후맥락
소크라테스는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메넥세노스를 상대로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를 친구의 후보로 검토한 다음, 그들 모두를 기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필리아가 두 개의 관계항을 필요로 한다는 점까지 폐기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비슷한 자’와 ‘비슷하지 않은 자’가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뒤를 이어 친구의 후보로서의 가능성을 검증받게 된다. 즉,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거나 ‘비슷하지 않은 자가 비슷하지 않은 자에게 친구’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들을 차례로 검증함으로써 무엇이 사실인지 밝히자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선 호메로스의 시구를 인용하며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는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 살펴본다. 그러나 그는 곧 이 가설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고 곧장 반박한다.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면, 나쁜 자는 나쁜 자에게 친구가 되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점이 비판의 핵심이다. 하지만 나쁜 자와 나쁜 자만 서로 비슷한 것은 아니다. 훌륭한 자와 훌륭한 자 역시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일 가능성이 나쁜 자들의 경우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나쁜 자들의 쌍을 지나 훌륭한 자들의 쌍을 도입하여 유유상종설을 한결 심층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다.
고전본문
“내 생각에 시인들은 훌륭한 이들이 서로 비슷하고 친구라고 말하는 것 같네. 반면에 나쁜 사람들은 비슷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비슷하지 않으며 도리어 갈등하고 불안정하다고 이야기하는 듯하고 말일세.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비슷하지 않고 다른 자는 다른 사람과 자주 시간을 보내거나 친구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래서 그 말은, 친구여, 내게는 이 점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네. 비슷한 자들이 비슷한 자들에게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오직 훌륭한 자들이 오직 훌륭한 자들에 대해서만 친구가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말일세. 반대로, 나쁜 이들은 훌륭한 자에게도 나쁜 자에게도 결코 친구가 되지 못하지만 말이야.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친구들이란 누구인지 답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구먼. 왜냐하면 이 논의가 친구란 훌륭한 자들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일세.“
“저도 정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내게도 그렇게 보인다네.” 내가 말했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뭔가 찜찜함을 느끼고 있어. 그러니, 자, 제우스의 앞에서, 내가 미심쩍어 하는 것을 함께 살펴 보세나.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 친구이고, 그러한 자는 그러한 자에게 유익한가? 더 나아가 말하자면, 비슷한 그 무엇이든 비슷한 그 무엇에게, 자기 스스로에게는 끼칠 수 없는 어떤 유익함이나 해로움을 줄 수 있나? 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겪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자기와 비슷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겪을 수는 있나?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어떻게 서로 좋아할 수 있지? 서로 상호작용을 전혀 할 수 없는데 말이야.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누구에 의해서도 좋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이 친구가 될 수 있는가?”
“전혀요.”
“그렇다면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친구인 것이 아니라 훌륭한 것이 훌륭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이 아니라 훌륭한 것인 한 ‘친구’인 것인가?”
“그럴 것 같습니다.”
“뭐? 훌륭한 것은 훌륭한 만큼 훌륭한 한 스스로 충분할 텐데?”
“맞습니다.”
“충분한 것은 충분함에 의해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을 걸세.“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을 걸세.”
“그럴 겁니다.”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친구일 수는 없네.”
“그럴 수 없죠.”
“그러면 우리에게 훌륭한 자들이 훌륭한 자들에게 친구라는 근거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립지 않고 ―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들 스스로 충분하니까 ― 곁에 있을 때에도 서로 필요가 없는데 말이야. 그러한 자들이 서로에 대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 있겠는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말했네.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가 훌륭한 자들끼리 친구가 된다는 주장을 논박하는 핵심 근거가 무엇인지 찾고 그것을 비판해보자.
(2) 훌륭한 사람들끼리의 우정이 항상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떤 예외적인 상황이 있었는지 역사 속에서 사례를 찾아 공유해보자.
(3) 공동체에서 훌륭한 사람들끼리의 친구 관계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것이 과연 사회에서 어떤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해보자.
해설읽기
필리아(우정·애정)가 무엇인지를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친구(필로스)가 되는가’하는 구체적 질문 속에서 해명하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친구의 후보를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관계 속에서 찾아보려 했지만 두 선택지 모두 기각된다. 그러나 친구관계가 두 개의 관계항을 필요로 한다는 점까지 기각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다음으로 ‘비슷한 자’와 ‘비슷하지 않은 자’가 친구의 후보로서 검토되었고 이것들 중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라는 일종의 유유상종설이 먼저 다루어진다. 이 주장을 비판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비슷한 자’를 ‘훌륭한 자’의 쌍과 ‘나쁜 자’의 쌍 그리고 ‘중간적인 자’의 쌍으로 분류하고, 나쁜 자와 나쁜 자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나쁜 자들은 해악을 끼치는 존재여서 누구도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없고, 변덕이 심하고 불안정한 나머지 자기 자신과도 비슷할 수 없기 때문에 나쁜 자와 나쁜 자가 서로 비슷한 자로서 친구가 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유유상종설은 본래부터 훌륭한 자들의 쌍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되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사람들 혹은 훌륭한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보이지 않나? 그렇다면 여태까지의 논박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자의 쌍으로 시선을 옮겨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라는 가설의 정합성을 따져보기로 한다.
훌륭한 자는 훌륭한 자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훌륭한 자들이 서로 ‘비슷한homoios 자’라는 점이다. 우리말에서 형용사 ‘비슷한’은 어떤 것들이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은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희랍어 ‘호모이오스’는 ‘닮은’, ‘유사한’ 등의 의미를 우선적으로 갖지만, ‘같은’, ‘동등한’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에 따라 우리는 ‘비슷한 자’를 두 층위로 강도를 달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데, 하나는 그것을 약한 의미로 받아들여, ‘닮기는 했지만 똑같지는 않은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한 의미로 해석해 ‘둘이 서로 같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작품 속 소크라테스가 사용하는 층위가 어느 것인가 하는 점인데, 그는 여기서 명백히 ‘강한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비슷한 자’로 읽기는 하지만 ‘같은 자’나 ‘동일한 자’라는 의미를 겹쳐 읽을 필요도 있다는 뜻이겠다. 이것을 전제로 소크라테스의 논의를 요약·정리하면 이러하다.
소크라테스는 궁극적으로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려 한다. 이를 위한 사전작업으로 그는 먼저 ‘훌륭한 자는 훌륭한 자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점을 확립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비슷한 자’에 대한 강한 해석이 필요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뭔가 미심쩍다며 비슷한 것들은 서로 유익하고 해로울 수 있냐고 묻는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 친구이고, 그러한 자는 그러한 자에게 유익한가? 더 나아가 말하자면, 비슷한 그 무엇이든 비슷한 그 무엇에게, 자기 스스로에게는 끼칠 수 없는 어떤 유익함이나 해로움을 줄 수 있나? 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겪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자기와 비슷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겪을 수는 있나?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 어떻게 서로 좋아할 수 있지? 서로 상호작용을 전혀 할 수 없는데 말이야.”
‘비슷한 것’에 대한 강한 해석을 바탕으로 위 구절을 바라보자.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에게 비슷한 것인 한 친구이고 … 자기 스스로에게는 끼칠 수 없는 어떤 유익함이나 해로움을 줄 수 있나? 또는 … 자기와 비슷한 그 무엇에 의해서는 겪을 수 있나?’ 같은 것이 같은 것에게 친구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친구가 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이익도 해악도 서로 끼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예를 들어보자. A와 B는 서로 ‘비슷한(같은)‘ 자다. 그런데 A는 영어를 매우 잘한다. 하지만 A가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영어에 대한 지식을 자기 자신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지식 격차가 없어서다. 애초에 자기 자신과 어떤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 이때, A는 ‘비슷한(같은)‘ B에게 영어를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자기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이익은 자신과 ‘비슷한(같은)‘ 자에게도 줄 수 없으니까. 이번에는, A가 콜레라균에 감염되어 콜레라에 걸리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A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콜레라에 걸릴 수 없다. 콜레라균은 오염된 음식이나 물에 의해 외부로부터 감염되어야지 체내에서 자연히 생성될 리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A는 자신과 ‘비슷한(같은)‘ B에 의해서도 콜레라를 경험할 수 없다. B 역시 A와 ‘비슷한(같은)‘ 자인 한 콜레라균을 갖고 있지 않을 테니까. 이처럼, ‘비슷한 것’에 대한 강한 해석 위에서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그러므로 ‘훌륭한 자도 훌륭한 자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고지는 멀지 않다. 이처럼 훌륭한 자들끼리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그들 사이에 상호작용은 불가능하며, 좋아하는 것 또한 가능할 리가 없다. 좋아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영향이고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좋아하지 않는데도 친구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불합리하다.
훌륭한 자들은 이미 충분한hikanos 자들이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자가 훌륭한 자에게 친구라는 가설이 불합리한 까닭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한다. 앞서 ‘비슷한 자’에 대해 ‘약한 해석’과 ‘강한 해석’을 구분했던 것처럼, ‘훌륭한 자’에 대해서도 ‘약한 해석’과 ‘강한 해석’을 구분할 수 있다. ‘훌륭한 자’에 대한 약한 해석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처럼 ‘매우 뛰어나고 칭찬할 만하다’고 새기는 것이다. 반면에 강한 해석은 좀 별난 쪽이다. 약한 해석이 훌륭함의 정도를 인간적 수준에 맞추고 있다면, 강한 해석은 거의 신의 수준이나 못해도 신선의 경지에 맞춘다고 보면 되겠다. 소크라테스는 훌륭한 자에 대해 이번에도 강한 해석을 취한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는 ‘훌륭한 자’란 적어도 자신이 훌륭하다고 이야기되는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완벽한 존재여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존재다. 따라서 그는 이미 그 자신만으로 충분한 자다. 충분한 자이기 때문에 그는 자기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자족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존재는 욕구를 갖지 않는다. 욕구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느끼는 것인데 훌륭한 자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떤 것도 특별하지 않고 좋아할 것도 없다. 뭔가 좋아하는 대상은 자기에게 뭔가 특별한 것인데 그런 것은 없으니까. 이처럼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뭔가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건 마치 서울시민은 아닌데 관악구민이기는 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친구라는 것은 역시 불합리하다.
‘비슷한 자가 비슷한 자에게 친구가 된다’는 유유상종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모든 친구 관계가 오로지 어떤 공통 속성만을 기반으로 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단순히 지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대화편을 읽는 모든 독자들에게 주어지는 보람있는 과제이다. 분명히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관심사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는다.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공감과 이해를 깊게 하고 우정과 친밀감을 두텁게 할 수 있다. 비슷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한결 편안하게 표현할 수도 있고, 서로에게서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도 이 점을 몰랐을 리는 없다. 소크라테스의 삶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참된 앎을 향한 끊임없는 지향이었다. 사실 『뤼시스』에서 온전한 필리아를 위한 조건으로 꼽는 것도 다름 아닌 앎이었다. 그의 논박을 통해 우리가 항상 생각이 비슷한 사람에게서만 뭔가를 배우지는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