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여기 인용된 내용은 《등대로》 중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1927년에 출판된 《등대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서전적 작품으로 어린시절 여름휴가지로 사용되었던 세인트 아이브즈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쓴 작품이다.
소설 속 램지 가족은 울프 자신의 가족처럼 대가족이고 지적인 아버지와 다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등장한다. 철학자이자 대학교수인 램지 씨는 저명한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울프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 경을 연상시킨다. 가족과 친지들을 돌보고, 어려운 이웃을 감싸안는 램지 부인은 종종 울프가 13세 때 세상을 떠난 울프의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과 유사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울프의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했던 것 같다. 빅토리아 시대는 이상적 여인상인 “집안의 천사”를 내세웠는데, 순결하고 자기 희생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일컫는 용어였다. 줄리아 스티븐은 “집안의 천사”의 아주 훌륭한 본보기였다. 소설 속 램지 부인은 헌신적인 가정 주부로 다른 모든 여자들도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움으로서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름 별장에 손님으로 와 있는 두 젊은 여성 민타와 릴리를 마침 램지가를 방문하고 있는 다른 두 남성들과 각기 짝지워주려 한다. 램지부인의 계획대로 민터는 폴이라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약혼한다. 반면 릴리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화가가 되어 그림을 통해 자기 성장을 이루는데 더 관심이 있다. 램지 부인은 릴리가 예쁘지 않은 노처녀지만 그림보다는 결혼해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이많고 까다롭지만 지적인 뱅크스 씨와 맺어 주려한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세월이 지나 램지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십년만에 다시 별장에 돌아온 릴리는 오래 전 완성하지 못한 채 남겨둔 그림을 찾아 다시 다듬으면서, 램지부인을 다시 떠올린다.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램지부인은 가고, 릴리는 결혼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리고, 폴과 민터의 결혼생활은 램지 부인의 기대와 달리 행복하지 않았다.
고전본문
[램지 부인은] 더 다정하게 몸을 반쯤 돌리면서, 그래도 항상 웃으면서 릴리도 , 민타도, 모두들 꼭 결혼해야만 한다고, 이 세상에서 어떤 영광을 누릴지라도 (하지만 부인은 릴리의 그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무리 많은 승리를 거둘지라도, (어쩌면 부인은 나름의 승리를 얻었을 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부인은 슬프고 우울해져서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모두들 결혼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반박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가볍게 릴리의 손을 잠시 잡으며) 인생 최고의 것을 놓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오, 하지만 릴리는 돌봐드려야 할 아버지가 있고, 챙겨야할 가족들이 있고, 그리고 용기만 있다면 그림 그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1부 9장)
[…]
그들은 완벽하게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민터와 폴 라일리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인생이 좀 음산하다고 느꼈다. 그녀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누구나 겪을 필요는 없는 어떤 걸(일일이 거론하지는 않지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스스로에게도 하나의 도피라도 되는듯이 사람들은 반드시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빨리 알아차렸다.
지난 일 이주일 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스물네 살 밖에 안된 민터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데 정말 어떤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잘못한 것이 없는가 자문해 보았다.(1부 10장)
[…]
아아 그런데 저건 윌리엄 벵크스와 산책하고 있는 릴리 브리스코가 아닌가? 그녀[램지부인]는 근시인 눈으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맞아, 정말 그들이었다. 그럼 그들이 결혼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맞아, 틀림없어. 너무나 좋은 생각이야. 그들은 반드시 결혼해야 해 (12장)
[…]
그들이 잔디밭 끄트머리에 이르렀고, 그[뱅크스씨]가 그녀[릴리]에게 런던에서 그림 소재 찾기가 힘들지 않냐고 묻고 있을 때, 그들은 몸을 돌려 램지 부부를 보았다. 남자와 여자가 공놀이 하는 딸을 바라보는 것, 그래 저게 바로 결혼이구나라고 릴리는 생각했다. 지난 밤 부인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게 바로 저거였구나하고. 부인은 초록색 숄을 둘렀고, 그들 부부는 가까이 서서 프루와 재스퍼가 공놀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마치 지하철에서 걸어 나오거나, 초인종을 누를 때, 느닷없이 나타나 그들을 상징으로 만들고, 그들을 대표적인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의미가 그들에게 내려와, 지금 어스름한 저녁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결혼의 상징인 남편과 아내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실제 인물들을 초월했던 상징적 윤곽이 가라앉고, 그들이 만났을 때는, 다시 공놀이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현실의 램지 부부가 되어 있었다. (1부 13장)
[…]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애정 어린 웃음을 지으며 이것, 이것, 이것들을 생각했다. 층계참에 있는 소파(그녀의 어머니 것). 흔들의자(그녀의 아바지 것). 헤브리디즈의 지도를. 이 모든 것이 폴과 민터의 삶에서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 “라일리 부부”라는 새 단어를 그녀는 되풀이 해서 불러보았다. 아이들 방 문에 손을 얹은 채 구획을 나누는 벽들이 점점 얇아져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됨을 느꼈다. 사실상 모든 것이 온통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의자 테이블, 지도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고 또 그들의 것이라고 느꼈다. 사실 누구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뜨고 나면 폴과 민터가 이것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1부 18장)
[…]
릴리 브리스코는 초록색 물감을 짜면서 라일리 부부를 생각했다. 그녀는 라일리 부부에 대한 인상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들의 삶은 그녀에게는 일련의 장면들로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가 새벽녘 계단 위 장면이었다. 폴은 집에 와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민터는 그날 집에 늦게 왔다. 새벽 세 시쯤 민터가 한껏 멋 부린 차림으로 계단 위에 나타났다. 폴은 도둑이 든 것 같다며 부지깽이를 들고 잠옷 바람으로 나왔다. 민터는 차가운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계단을 반쯤 올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는데, 카펫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했더라? 릴리는 마치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처럼 자문했다. 민터는 신경에 거슬리게 계속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고 폴은 두 아들들을 깨우지 않으려 낮은 소리로 그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지쳤고, 야윈 반면에 그녀는 화려하고 천박했다. 결혼하고 한 두해가 지나자 모든 것이 느슨해졌고, 한마디로 이 결혼은 실패였다. (3부 5장)
– <등대로> 3부 중에서
토론하기
(1) 램지 부인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폴과 민터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릴리는 독신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과연 릴리가 폴과 민타보다 행복할까?
(2)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 또한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무엇이 이런 선택을 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자.
(3)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싶은지, 아니면 자유롭게 독신으로 살고 싶은지 이야기해 보자
해설읽기
작품 속 램지부인은 세계 제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살았던 세대로 버지니아 울프의 부모세대이다. 이 시절 여성들은 정규교육을 받거나 전문직을 가질 수 없었고, 재산권도 참정권도 없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여성이 재산권과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대략 1920년대에 들어서이다.) 과거 동양권 여성들처럼 결혼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고 가정 밖으로 나가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집 허드렛일을 하거나 거리의 창녀가 되는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따라서 결혼은 여성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남편의 성공을 돕는 것이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였다. 여기 등장하는 민터나 릴리는 작가 울프와 비슷한 세대에 속하는 여성들이다. 울프는 저서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하나씩 짚어 나가며,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고 예술적 성취를 이룰 능력이 없다는 세간의 믿음이 사실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교육받고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릴리는 과감하게 결혼보다 일을 선택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당시로선 결혼한 여자가 전문적인 일을 병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결혼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작품 속 릴리는 병든 아버지와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였고,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고집스러운 성격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결혼하기 쉽지 않았고, 힘들지만 꾿꾿하게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등대로》 속 릴리는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울프와 닮았지만, 한편 전혀 다르다. 울프는 유복한 집에 태어나 비록 집에서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지만, 당시 최고의 지성들에게서 배웠고,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않았고, 울프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남편 레너드 울프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집안 살림이나 자녀 양육 때문에 창작을 할 수 없다거나, 자기만의 방, 즉 자신만의 공간이 없어 불편을 겪지도 않았다. 울프는 심지어 정원에 따로 작은 오두막을 지어 글을 쓰는 작업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이 일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과 가사로 인해 제대로 일에 매진하기 어려웠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재능과 환경, 거기에 노력까지 모든 것을 갖춘 울프는 비록 정신병에 시달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받은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프는 전반적인 여성들이 놓인 힘겨운 상황에 대해 예리하게 통찰했고, 그것을 작품에 잘 담아냈다. 울프가 일기에 썼듯이, 글쓰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그녀의 가장 큰 무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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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결혼, 버지니아 울프, 여성, 여성 예술가, 페미니즘
전후맥락
여기 인용된 내용은 《등대로》 중에서 결혼에 대한 이야기들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1927년에 출판된 《등대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서전적 작품으로 어린시절 여름휴가지로 사용되었던 세인트 아이브즈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쓴 작품이다.
소설 속 램지 가족은 울프 자신의 가족처럼 대가족이고 지적인 아버지와 다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가 등장한다. 철학자이자 대학교수인 램지 씨는 저명한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울프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 경을 연상시킨다. 가족과 친지들을 돌보고, 어려운 이웃을 감싸안는 램지 부인은 종종 울프가 13세 때 세상을 떠난 울프의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과 유사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울프의 어머니 줄리아 스티븐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했던 것 같다. 빅토리아 시대는 이상적 여인상인 “집안의 천사”를 내세웠는데, 순결하고 자기 희생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일컫는 용어였다. 줄리아 스티븐은 “집안의 천사”의 아주 훌륭한 본보기였다. 소설 속 램지 부인은 헌신적인 가정 주부로 다른 모든 여자들도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움으로서 지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그녀는 여름 별장에 손님으로 와 있는 두 젊은 여성 민타와 릴리를 마침 램지가를 방문하고 있는 다른 두 남성들과 각기 짝지워주려 한다. 램지부인의 계획대로 민터는 폴이라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지고, 둘은 약혼한다. 반면 릴리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화가가 되어 그림을 통해 자기 성장을 이루는데 더 관심이 있다. 램지 부인은 릴리가 예쁘지 않은 노처녀지만 그림보다는 결혼해 행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이많고 까다롭지만 지적인 뱅크스 씨와 맺어 주려한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세월이 지나 램지부인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십년만에 다시 별장에 돌아온 릴리는 오래 전 완성하지 못한 채 남겨둔 그림을 찾아 다시 다듬으면서, 램지부인을 다시 떠올린다.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램지부인은 가고, 릴리는 결혼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리고, 폴과 민터의 결혼생활은 램지 부인의 기대와 달리 행복하지 않았다.
고전본문
[램지 부인은] 더 다정하게 몸을 반쯤 돌리면서, 그래도 항상 웃으면서 릴리도 , 민타도, 모두들 꼭 결혼해야만 한다고, 이 세상에서 어떤 영광을 누릴지라도 (하지만 부인은 릴리의 그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무리 많은 승리를 거둘지라도, (어쩌면 부인은 나름의 승리를 얻었을 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부인은 슬프고 우울해져서 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모두들 결혼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반박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가볍게 릴리의 손을 잠시 잡으며) 인생 최고의 것을 놓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오, 하지만 릴리는 돌봐드려야 할 아버지가 있고, 챙겨야할 가족들이 있고, 그리고 용기만 있다면 그림 그리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1부 9장)
[…]
그들은 완벽하게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민터와 폴 라일리의 결혼을 주선하면서 인생이 좀 음산하다고 느꼈다. 그녀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누구나 겪을 필요는 없는 어떤 걸(일일이 거론하지는 않지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치 스스로에게도 하나의 도피라도 되는듯이 사람들은 반드시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빨리 알아차렸다.
지난 일 이주일 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며, 스물네 살 밖에 안된 민터가 결혼하기로 결정하는 데 정말 어떤 압력을 행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잘못한 것이 없는가 자문해 보았다.(1부 10장)
[…]
아아 그런데 저건 윌리엄 벵크스와 산책하고 있는 릴리 브리스코가 아닌가? 그녀[램지부인]는 근시인 눈으로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맞아, 정말 그들이었다. 그럼 그들이 결혼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맞아, 틀림없어. 너무나 좋은 생각이야. 그들은 반드시 결혼해야 해 (12장)
[…]
그들이 잔디밭 끄트머리에 이르렀고, 그[뱅크스씨]가 그녀[릴리]에게 런던에서 그림 소재 찾기가 힘들지 않냐고 묻고 있을 때, 그들은 몸을 돌려 램지 부부를 보았다. 남자와 여자가 공놀이 하는 딸을 바라보는 것, 그래 저게 바로 결혼이구나라고 릴리는 생각했다. 지난 밤 부인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게 바로 저거였구나하고. 부인은 초록색 숄을 둘렀고, 그들 부부는 가까이 서서 프루와 재스퍼가 공놀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아무 이유없이, 마치 지하철에서 걸어 나오거나, 초인종을 누를 때, 느닷없이 나타나 그들을 상징으로 만들고, 그들을 대표적인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의미가 그들에게 내려와, 지금 어스름한 저녁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결혼의 상징인 남편과 아내로 만들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실제 인물들을 초월했던 상징적 윤곽이 가라앉고, 그들이 만났을 때는, 다시 공놀이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현실의 램지 부부가 되어 있었다. (1부 13장)
[…]
그녀는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애정 어린 웃음을 지으며 이것, 이것, 이것들을 생각했다. 층계참에 있는 소파(그녀의 어머니 것). 흔들의자(그녀의 아바지 것). 헤브리디즈의 지도를. 이 모든 것이 폴과 민터의 삶에서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 “라일리 부부”라는 새 단어를 그녀는 되풀이 해서 불러보았다. 아이들 방 문에 손을 얹은 채 구획을 나누는 벽들이 점점 얇아져서 다른 사람들과 하나됨을 느꼈다. 사실상 모든 것이 온통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의자 테이블, 지도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고 또 그들의 것이라고 느꼈다. 사실 누구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을 뜨고 나면 폴과 민터가 이것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1부 18장)
[…]
릴리 브리스코는 초록색 물감을 짜면서 라일리 부부를 생각했다. 그녀는 라일리 부부에 대한 인상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들의 삶은 그녀에게는 일련의 장면들로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가 새벽녘 계단 위 장면이었다. 폴은 집에 와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민터는 그날 집에 늦게 왔다. 새벽 세 시쯤 민터가 한껏 멋 부린 차림으로 계단 위에 나타났다. 폴은 도둑이 든 것 같다며 부지깽이를 들고 잠옷 바람으로 나왔다. 민터는 차가운 아침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계단을 반쯤 올라와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는데, 카펫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했더라? 릴리는 마치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처럼 자문했다. 민터는 신경에 거슬리게 계속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고 폴은 두 아들들을 깨우지 않으려 낮은 소리로 그녀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지쳤고, 야윈 반면에 그녀는 화려하고 천박했다. 결혼하고 한 두해가 지나자 모든 것이 느슨해졌고, 한마디로 이 결혼은 실패였다. (3부 5장)
– <등대로> 3부 중에서
토론하기
(1) 램지 부인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것이 행복해 지는 길이라 믿었다. 하지만 폴과 민터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고, 릴리는 독신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과연 릴리가 폴과 민타보다 행복할까?
(2) 오늘날 점점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다. 또한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무엇이 이런 선택을 하게 하는지 생각해 보자.
(3)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싶은지, 아니면 자유롭게 독신으로 살고 싶은지 이야기해 보자
해설읽기
작품 속 램지부인은 세계 제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살았던 세대로 버지니아 울프의 부모세대이다. 이 시절 여성들은 정규교육을 받거나 전문직을 가질 수 없었고, 재산권도 참정권도 없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여성이 재산권과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대략 1920년대에 들어서이다.) 과거 동양권 여성들처럼 결혼이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고 가정 밖으로 나가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의집 허드렛일을 하거나 거리의 창녀가 되는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따라서 결혼은 여성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남편의 성공을 돕는 것이 인생에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였다. 여기 등장하는 민터나 릴리는 작가 울프와 비슷한 세대에 속하는 여성들이다. 울프는 저서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들이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하나씩 짚어 나가며,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고 예술적 성취를 이룰 능력이 없다는 세간의 믿음이 사실은 여성이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교육받고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릴리는 과감하게 결혼보다 일을 선택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당시로선 결혼한 여자가 전문적인 일을 병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결혼과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작품 속 릴리는 병든 아버지와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처지였고, 뛰어난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고집스러운 성격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결혼하기 쉽지 않았고, 힘들지만 꾿꾿하게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등대로》 속 릴리는 예술가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서 울프와 닮았지만, 한편 전혀 다르다. 울프는 유복한 집에 태어나 비록 집에서 아버지와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지만, 당시 최고의 지성들에게서 배웠고,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않았고, 울프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남편 레너드 울프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집안 살림이나 자녀 양육 때문에 창작을 할 수 없다거나, 자기만의 방, 즉 자신만의 공간이 없어 불편을 겪지도 않았다. 울프는 심지어 정원에 따로 작은 오두막을 지어 글을 쓰는 작업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많은 여성들이 일을 위해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과 가사로 인해 제대로 일에 매진하기 어려웠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재능과 환경, 거기에 노력까지 모든 것을 갖춘 울프는 비록 정신병에 시달렸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받은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프는 전반적인 여성들이 놓인 힘겨운 상황에 대해 예리하게 통찰했고, 그것을 작품에 잘 담아냈다. 울프가 일기에 썼듯이, 글쓰기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그녀의 가장 큰 무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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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결혼, 버지니아 울프, 여성, 여성 예술가, 페미니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