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예술가는 감각을 통해 작업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감각은 단순히 가시적 영역에 머물러있지 않다. 예술가들에게 감각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드러난 감각적인 것 너머의 깊이의 차원과 관계하고, 이러한 깊이로부터 빛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예술가가 일차적으로 감각적인 것들, 이른바 ‘껍데기들’ 너머 깊이와 관계할 때, 다시 말해 예술이 모종의 반성의 산물이라 할 때, 예술은 철학과 운명을 공유한다.
고전본문
공간은 『굴절광학』에서 말하듯 대상들 사이의 관계망과 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공간은 나의 시각을 가진 어떤 제3자가 보게 될, 혹은 나의 시각을 재구성하고 상공에서 관망하는 기하학자가 보게 될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공간은 공간성의 0점으로서의 나로부터 측정된다. 나는 공간을 외부의 껍데기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공간 안으로부터 공간을 살고, 나는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요컨대 세계는 나를 둘러싸고 있지 내 앞에 높여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은 사물을 드러내 보이는 근본적인 힘을, 다시 말해 그 자신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힘을 떠맡는다. 숲과 폭풍을 보게 하는 데에는 약간의 잉크로도 충분하다는 말들을 하듯, 시각은 시각 자체의 상상력을 갖는 것이 분명하다. 시각의 초월성을, 시각을 해독하는 정신에게 맡길 수는 없다. […] 깊이란 무엇이고, 빛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몸으로부터 분리된 정신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몸에 충만해 있다고 말한 정신에 대하여 그것들은 무엇인가? 결국 단지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관통하고 우리를 둘러싸는 깊이 그 자체에게 깊이는 무엇인가?
[…] 세잔이 깊이를 추구했을 때, 그가 추구한 것은 ‘존재의 폭발’이다. […] 외적인 형태, 즉 덮개는 이차적이며 파생적이라는 것, […] 이러한 공간의 껍데기는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메를로 퐁티 『눈과 정신』 중에서
# 『굴절광학』: 인간의 시각에 대한 데카르트의 연구서. 이 저서는 인간의 신체 전체를 일종의 정교한 기계로 간주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통해 기술되고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자연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본 중세적 자연관을 넘어서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확립한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속에서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의 절대적 축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측정 가능한 기하학적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 만물을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온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경험되는가? 위 글에서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실제 감각이 이러한 기계론적 메커니즘을 넘어선 곳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 공간성의 0점: 공간은 나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체를 가진 주체에게 반드시 공간은 나의 신체가 위치한 자리를 0점으로 하여 전개된다.
토론하기
(1) 윗글에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공간 개념이 제시된다. 각각의 특징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서술해보시오.
2) 세잔은 평생 ‘깊이’를 추구해왔다고 한다. 윗글에서 메를로-퐁티는 세잔이 깊이를 추구했을 때 그가 ‘존재의 폭발’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같은 존재의 폭발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 서술해 보시오.
해설읽기
우리에게 사물의 깊이감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우리는 수학적 기하학적 공간 개념에 익숙하다. 이러한 수학적 공간 개념은 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의 축을 하나 더 얹어서 입체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깊이는 이러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 개념으로 경험되는가? 예를 들어 내가 아는 사람이 멀리서 손짓할 때, 그의 몸은 손톱만큼 작아 보이지만 우리는 그를 손톱만큼 작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사람의 몸의 크기를 수학적으로 분석해서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그의 몸의 크기를 알게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메를로-퐁티는 깊이가 공간의 삼차원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감싸고 있는, 다시 말해 서로를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측면이라 말한다. 사물들이 서로를 감싸고 있다는 것은 사물들이 각각 서로의 외부에 상관없이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상호 관계 속에 있으며, 그만큼 이미 상호 침투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사물들이 서로를 감싸고 있음으로써 저마다 고유한 위치를 확보한다는 사실은 사물들 각각의 고유성이 사실상 상호긴밀한 관계성을 함축한 채 나타나는 것임을,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드러난 가시적 외관 그 자체는 깊이로서의 존재를 뒤덮는 껍데기에 불과할 것임을 의미한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깊이가 사물들의 입체성보다 한층 더 근본적인 차원, 곧 사물들 발생의 근본적 메커니즘이 된다고 한다. 우리에게 사물들 각각의 고유성은 사실상 상호 긴밀한 관계성 위에 성립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물이 밝은 빛 속에 드러나는 것은 그것 주위로 다른 사물들이 어둠에 싸여있기 때문이고, 강렬한 붉은색은 그러한 붉은색을 받쳐주는 주위 사물의 덜 강렬하고 덜 호소하는 색들 속에서만 그러한 붉은색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드러난 가시적 외관이 사실상 서로를 함축하는 깊이로서의 존재 위에서만 발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러한 깊이를 놓치고 일차적 가시적 외관에만 집중하는 것은 단지 시각의 껍데기에 머무는 것임을 의미한다.
화가는 이러한 가시성을 뒷받침하는 비가시성의 현존에 맞닥뜨리게 될 때 존재의 껍데기를 벗기고 존재 발생을 가시화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세잔이 추구했다는 ‘존재의 폭발’은 곧 일차적인 가시성의 외관을 부수고 존재 발생의 역동적 장을 가시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화는 가시성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 깊이로서의 존재의 어둠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둠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물들이 그처럼 존재하도록 하는 근원적 힘이라 할 때, 회화는 이러한 어둠을 드러내는 형이상학적 과제 앞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회화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을 세우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 이제 회화는 일차적인 가시성의 이면의 깊이와 어둠을 구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색채’가 새로운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전통철학이 이른바 ‘2차 성질’이라 명명했던 그러한 주관적, 상대적 성질들로서 사물의 객관적 속성을 가리고 왜곡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색채에 대한 고전적 관념을 극복하게 되면, 우리는 색채 속에서 오히려 구체적인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선’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다. 선은 더 이상 대상의 확실한 속성을 전하는 것이기는커녕 대상의 잠재적인 힘과 역동성을 가시화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회화는 차갑게 정지한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표현함으로써 사물의 내밀한 움직임을 가시화시키는 과업을 떠맡게 된다(ex. 로댕의 조각은 정지된 하나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순간과 순간을 연결시켜 움직임이 살아나도록 만든다).
키워드
공간, 깊이, 데카르트, 비가시성, 시각(vision)
전후맥락
예술가는 감각을 통해 작업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감각은 단순히 가시적 영역에 머물러있지 않다. 예술가들에게 감각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드러난 감각적인 것 너머의 깊이의 차원과 관계하고, 이러한 깊이로부터 빛을 이끌어낸다. 이처럼 예술가가 일차적으로 감각적인 것들, 이른바 ‘껍데기들’ 너머 깊이와 관계할 때, 다시 말해 예술이 모종의 반성의 산물이라 할 때, 예술은 철학과 운명을 공유한다.
고전본문
공간은 『굴절광학』에서 말하듯 대상들 사이의 관계망과 같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공간은 나의 시각을 가진 어떤 제3자가 보게 될, 혹은 나의 시각을 재구성하고 상공에서 관망하는 기하학자가 보게 될 그러한 것이 아니다. 공간은 공간성의 0점으로서의 나로부터 측정된다. 나는 공간을 외부의 껍데기에 따라 보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공간 안으로부터 공간을 살고, 나는 공간에 둘러싸여 있다. 요컨대 세계는 나를 둘러싸고 있지 내 앞에 높여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은 사물을 드러내 보이는 근본적인 힘을, 다시 말해 그 자신 이상의 것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힘을 떠맡는다. 숲과 폭풍을 보게 하는 데에는 약간의 잉크로도 충분하다는 말들을 하듯, 시각은 시각 자체의 상상력을 갖는 것이 분명하다. 시각의 초월성을, 시각을 해독하는 정신에게 맡길 수는 없다. […] 깊이란 무엇이고, 빛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몸으로부터 분리된 정신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몸에 충만해 있다고 말한 정신에 대하여 그것들은 무엇인가? 결국 단지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관통하고 우리를 둘러싸는 깊이 그 자체에게 깊이는 무엇인가?
[…] 세잔이 깊이를 추구했을 때, 그가 추구한 것은 ‘존재의 폭발’이다. […] 외적인 형태, 즉 덮개는 이차적이며 파생적이라는 것, […] 이러한 공간의 껍데기는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메를로 퐁티 『눈과 정신』 중에서
# 『굴절광학』: 인간의 시각에 대한 데카르트의 연구서. 이 저서는 인간의 신체 전체를 일종의 정교한 기계로 간주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통해 기술되고 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자연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본 중세적 자연관을 넘어서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확립한다.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속에서 공간은 가로, 세로, 높이의 절대적 축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측정 가능한 기하학적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 만물을 물체의 ‘위치’와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온전히 기계적인 것으로 경험되는가? 위 글에서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실제 감각이 이러한 기계론적 메커니즘을 넘어선 곳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 공간성의 0점: 공간은 나와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체를 가진 주체에게 반드시 공간은 나의 신체가 위치한 자리를 0점으로 하여 전개된다.
토론하기
(1) 윗글에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공간 개념이 제시된다. 각각의 특징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서술해보시오.
2) 세잔은 평생 ‘깊이’를 추구해왔다고 한다. 윗글에서 메를로-퐁티는 세잔이 깊이를 추구했을 때 그가 ‘존재의 폭발’을 추구했다고 말한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이 같은 존재의 폭발을 경험해본 적이 있다면 이에 대해서 서술해 보시오.
해설읽기
우리에게 사물의 깊이감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우리는 수학적 기하학적 공간 개념에 익숙하다. 이러한 수학적 공간 개념은 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의 축을 하나 더 얹어서 입체를 구성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깊이는 이러한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인 공간 개념으로 경험되는가? 예를 들어 내가 아는 사람이 멀리서 손짓할 때, 그의 몸은 손톱만큼 작아 보이지만 우리는 그를 손톱만큼 작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사람의 몸의 크기를 수학적으로 분석해서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그의 몸의 크기를 알게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는 것일까?
메를로-퐁티는 깊이가 공간의 삼차원과 같은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서로 감싸고 있는, 다시 말해 서로를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측면이라 말한다. 사물들이 서로를 감싸고 있다는 것은 사물들이 각각 서로의 외부에 상관없이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한 상호 관계 속에 있으며, 그만큼 이미 상호 침투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사물들이 서로를 감싸고 있음으로써 저마다 고유한 위치를 확보한다는 사실은 사물들 각각의 고유성이 사실상 상호긴밀한 관계성을 함축한 채 나타나는 것임을,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드러난 가시적 외관 그 자체는 깊이로서의 존재를 뒤덮는 껍데기에 불과할 것임을 의미한다.
메를로-퐁티는 이러한 깊이가 사물들의 입체성보다 한층 더 근본적인 차원, 곧 사물들 발생의 근본적 메커니즘이 된다고 한다. 우리에게 사물들 각각의 고유성은 사실상 상호 긴밀한 관계성 위에 성립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물이 밝은 빛 속에 드러나는 것은 그것 주위로 다른 사물들이 어둠에 싸여있기 때문이고, 강렬한 붉은색은 그러한 붉은색을 받쳐주는 주위 사물의 덜 강렬하고 덜 호소하는 색들 속에서만 그러한 붉은색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드러난 가시적 외관이 사실상 서로를 함축하는 깊이로서의 존재 위에서만 발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러한 깊이를 놓치고 일차적 가시적 외관에만 집중하는 것은 단지 시각의 껍데기에 머무는 것임을 의미한다.
화가는 이러한 가시성을 뒷받침하는 비가시성의 현존에 맞닥뜨리게 될 때 존재의 껍데기를 벗기고 존재 발생을 가시화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세잔이 추구했다는 ‘존재의 폭발’은 곧 일차적인 가시성의 외관을 부수고 존재 발생의 역동적 장을 가시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회화는 가시성에 머물러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 깊이로서의 존재의 어둠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여기서 어둠이,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물들이 그처럼 존재하도록 하는 근원적 힘이라 할 때, 회화는 이러한 어둠을 드러내는 형이상학적 과제 앞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회화는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환영을 세우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 이제 회화는 일차적인 가시성의 이면의 깊이와 어둠을 구현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색채’가 새로운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전통철학이 이른바 ‘2차 성질’이라 명명했던 그러한 주관적, 상대적 성질들로서 사물의 객관적 속성을 가리고 왜곡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색채에 대한 고전적 관념을 극복하게 되면, 우리는 색채 속에서 오히려 구체적인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선’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다. 선은 더 이상 대상의 확실한 속성을 전하는 것이기는커녕 대상의 잠재적인 힘과 역동성을 가시화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회화는 차갑게 정지한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표현함으로써 사물의 내밀한 움직임을 가시화시키는 과업을 떠맡게 된다(ex. 로댕의 조각은 정지된 하나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 아니라 순간과 순간을 연결시켜 움직임이 살아나도록 만든다).
키워드
공간, 깊이, 데카르트, 비가시성, 시각(vi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