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블로크는 이 글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당시 신예술유파로 등장한 상징주의 예술이 예술의 본질을 미(美)에 두고 미학성을 추구함으로써 예술에서 미학보다 사회성을, 즉 미적 형식보다 사회적 메시지를 우선시한 사실주의의 형식적인 투박함과 조악함을 극복하고 보다 완성되고 세련된 형식을 성취하였다고 평가한다. 수많은 이들이 상징주의 예술의 세련미와 미학성에 도취되어 상징주의 예술가를 흉내내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유행을 좇아 상징주의 시인을 자처하는 예술가들 대부분은 창작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신예술의 대표자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세련된 양식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다. 따라서 영감이 결핍된 진지하지 않은 예술작품들이 난무하였고, 이처럼 영혼 없이 만들어진 상징주의 아류의 창작물들이 예술계를 오염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상징주의 예술이 사실주의 예술의 형식적 조악성을 극복하기 위해 주창한 예술의 미학성에 거센 비난이 쏟아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비난은 예술의 필요성과 유용성에 대한 질문으로 표현된다. 상징주의를 자처하는 영혼이 결핍된 가짜 예술가들이 예술이 인간과 사회에 전달하는 메시지를 경시하게 됨에 따라 예술의 유용성에 관한 열띤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형식미를 추구하는 예술은 마치 미학을 위해 모든 것을 도외시하는 것처럼 오해받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는 상징주의의 미학적 예술이란 인간과 사회에 전달할 메시지를 결핍한 공허한 유희에 불과하므로 사회적으로 유용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블로크에 따르면 원래 사회비평이란 진정한 예술에 낯선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가는 예술의 공리성에 관해 고민해왔다. 상징주의 예술가 역시 응당 그러해야 한다. 여기서 블로크는 사실주의가 상징주의를 비판하며 주장하는 예술의 공리주의에 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상징주의 예술의 미학성 또한 분명한 성취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결국 내용과 형식의 조화와 결합에 있다. 따라서 블로크는 예술가가 어떻게 내용과 형식의 조화와 결합을 이루어야 할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고전본문
러시아 예술가는 다시 예술에서의 유용성에 관한 질문에 직면해 있다. 그 질문은 우리가 제기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사회적 의식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점차 모든 진영의 예술가들이 대열을 이루어 이러한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는 일에 합세하고 있다. 예술가는 영원히 형식과 내용에 관해 고민하지만, 이제 그러한 고민은 의무에 관한, 예술에서 마땅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합쳐진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 시대 예술가에게 시금석이다. (…) 그가 정말로 사칭자가 아니라 “부름받은” 사람이라면, 의무에 대한 의식의 길을 굳건히 따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두고 생사를 건 투쟁이 있을 것이고, 이 투쟁에서 미와 유용성이라는 불구대천의 원수들은 기적처럼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하기에 이러한 저주받은 질문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산의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
최근의 학자들은 민중의 창작에서 미와 유용성이 서로 부합했으며 그와 같은 민중적 창작의 초기 형태로 노동요(勞動謠)를 언급하며 노동요는 리듬에 의해 생산의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술과 노동, 미와 유용성 간의 연결 고리는 리듬이다. 우리 삶의 리듬은 무엇인가? 입센의 작품은 우리 삶의 리듬은 의무라고 말하고, 노래하며, 외친다. 의무에 대한 의식 속에서,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 속에서 예술가는 리듬에 의해 필요한 유일한 길을 따라갈 힘을 발견한다. 이것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좁지만, 가장 올바른 길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오직 이 길로만 간다. 선장의 경험이 가장 위험한 해협에서 시험을 받듯이, 여기서 예술가의 진정성이 시험대에 오른다. 오직 여기에서만이 예술가가 의무에 의해 인도되는지 알 수 있다. 의무에 대한 의식은 슬프고 고난에 찬 우리 시대에 인간 영혼의 리듬의 유일한 표현이며, 진짜와 가짜,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 성스러운 것과 신성 모독을 구별하게 한다.
(…) 그러나 소위 세련된 예술가는 여기서 우리가 더 이상 다만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관해서도 또한 이야기하는 것임을 아는가? 이러한 질문이 산문적이고 창백한 때 이른 질문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하다. 새로운 자유로운 필요성, 아름다운 의무에 대한 의식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아름다운 나비의 영혼과 유용한 낙타의 몸을 하나의 깊은 통에서 빻아낼 어떤 조물주의 개입이 필요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말은 다만 말로 남아 있고, 삶은 그냥 삶이며, 아름다움은 쓸모없고, 유용한 것은 추하게 된다. 예술가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사람은 살기 위해 예술을 거부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도 더 이상 이런 것을 원하지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
-알렉산드르 블로크, 「세 가지 질문」 중에서
토론하기
(1) 이 글에서 블로크는 예술의 문제를 내용과 형식의 대립 테제를 통해 이야기하며 궁극적으로 양자의 통합과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여기서 블로크가 내용과 형식을 통합하는 계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블로크의 생각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이야기해보라.
2) 블로크가 언급한바 예술가의 “의무에 대한 의식,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은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해보라.
3) 여러분은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의 관계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내용과 형식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4) 여기서 블로크는 진정한 예술가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된다’(요한복음1:14)는 성경 구절을 들어 예술가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블로크의 생각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이야기해 보라.
해설읽기
당시 신예술을 표방한 전기(前期) 상징주의 데카당스주의자들과 사실주의자들 간의 첨예한 논쟁의 화두가 되었던 예술과 사회 혹은 삶과의 관계, 예술의 사회성(앙가주망)에 관한 문제는 주로 예술의 내용과 형식 간의 대립을 통해 논의되기도 하였다. 즉, 미(美)를 예술의 본질로 선언한 신예술, 즉 데카당스와 상징주의 예술계는 주로 예술의 형식만을 옹호하고 예술의 내용, 즉 메시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상징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제기되자, 19세기 사실주의 문학과 함께 사회비평이 대세를 이루던 기존 문학계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사회적 가치보다 미학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상징주의 예술을 삶과 현실로부터 유리된 무용(無用)한 예술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처럼 당시 예술계에서 예술에서 미와 윤리 간의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블로크는 “유용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식한다. “동시대 예술가가 예술의 유용성(有用性)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블로크의 진술은 상징주의자들의 미학주의를 향한 사회비평의 비난을 언급한 것이다. 결국 미학과 윤리의 문제는 예술이 사회적으로, 혹은 현실 삶에서, 유용한가 아닌가의 문제일 수 있다. 사회비평은 사회악을 비판하고 선(善)을 전달하지 못하는 문학은 무용하다고 비판한다.
블로크는 당시 신예술을 표방한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자로 간주되었지만, 미(美)를 절대적 가치로 보는 데카당스 예술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둘 필요를 느꼈고, 내용이냐 형식이냐의 논쟁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예술가는 형식과 내용에 관해 고민하지만, 이제 그러한 고민은 의무에 관한, 예술에서 마땅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합쳐진다”는 블로크의 진술이 그것이다. 그는 예술에게 던져지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 질문 이외에 ‘의무’라는 제3의 질문을 제시함으로써 내용과 형식, 즉 예술의 사회적 유용성과 미학성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한다. 상징주의자들과 사회비평적 사실주의자들 간의 양보 없는 논쟁에서 보이듯이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립하는 듯한 내용과 형식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술가의 ‘의무’에 대한 의식을 통해 결합된다.
사실 예술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은 서로를 배제할 수 없다. 예술 창작이란 높은 이념을 아름다운 형식을 통해 담아내는 것이다. 블로크는 이처럼 내용과 형식이 결합된 예술의 예를 민속예술의 노동요(勞動謠)에서 찾는다. 인간이 일하며 부르는 노래는 삶 그 자체로부터 나왔기에 그 리듬이라는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곧 노동이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노동요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롭게 부합한다. 노동요에서 내용과 형식의 결합을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예술가에게는 의무, 즉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내용과 형식의 결합은 예술가가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에 관한 세 번째 질문에 대하여 사유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무’는 예술가에게 시금석이라고 말한다. 예술가의 진정성은 자신이 제시한 세 번째 질문, 즉 ‘의무’에 대한 예술가의 의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형식만을, 혹은 내용만을 중시하며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예술가란 가짜 예술가인 것이다. 신으로부터 “부름받은”,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라면 이와 같은 ‘의무’에 대한 의식을 통해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필연적으로 양자 간의 조화와 합일을 모색할 것이다.
블로크는 작금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논쟁,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논란은 결국 예술가의 실존의 문제에 있다고 본다. 그것은 예술가가 다만 “세련됨”, 즉 미학 속에 갇혀 인간과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관한 논의는 다만 예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에 관한 이야기도 되어야 한다. 여기서 블로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상적 예술 창작의 비유로 도입한다. 신의 “말씀”, 즉 높은 이상이 인간의 육체를 입은 그리스도의 실존은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와 결합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인간으로서의 실존 역시 담보하여야만이 ‘의무’,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을 의식하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키워드
내용, 노동요, 말씀, 미, 민중 창작, 사회적 의식, 삶, 예술, 예술가, 유용성, 육신, 의무, 인간, 필요성, 형식
전후맥락
블로크는 이 글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당시 신예술유파로 등장한 상징주의 예술이 예술의 본질을 미(美)에 두고 미학성을 추구함으로써 예술에서 미학보다 사회성을, 즉 미적 형식보다 사회적 메시지를 우선시한 사실주의의 형식적인 투박함과 조악함을 극복하고 보다 완성되고 세련된 형식을 성취하였다고 평가한다. 수많은 이들이 상징주의 예술의 세련미와 미학성에 도취되어 상징주의 예술가를 흉내내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유행을 좇아 상징주의 시인을 자처하는 예술가들 대부분은 창작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신예술의 대표자들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세련된 양식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다. 따라서 영감이 결핍된 진지하지 않은 예술작품들이 난무하였고, 이처럼 영혼 없이 만들어진 상징주의 아류의 창작물들이 예술계를 오염시키게 되었다.
그 결과 원래 상징주의 예술이 사실주의 예술의 형식적 조악성을 극복하기 위해 주창한 예술의 미학성에 거센 비난이 쏟아지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비난은 예술의 필요성과 유용성에 대한 질문으로 표현된다. 상징주의를 자처하는 영혼이 결핍된 가짜 예술가들이 예술이 인간과 사회에 전달하는 메시지를 경시하게 됨에 따라 예술의 유용성에 관한 열띤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형식미를 추구하는 예술은 마치 미학을 위해 모든 것을 도외시하는 것처럼 오해받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는 상징주의의 미학적 예술이란 인간과 사회에 전달할 메시지를 결핍한 공허한 유희에 불과하므로 사회적으로 유용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블로크에 따르면 원래 사회비평이란 진정한 예술에 낯선 것은 아니다. 모든 예술가는 예술의 공리성에 관해 고민해왔다. 상징주의 예술가 역시 응당 그러해야 한다. 여기서 블로크는 사실주의가 상징주의를 비판하며 주장하는 예술의 공리주의에 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상징주의 예술의 미학성 또한 분명한 성취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결국 내용과 형식의 조화와 결합에 있다. 따라서 블로크는 예술가가 어떻게 내용과 형식의 조화와 결합을 이루어야 할지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고전본문
러시아 예술가는 다시 예술에서의 유용성에 관한 질문에 직면해 있다. 그 질문은 우리가 제기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사회적 의식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점차 모든 진영의 예술가들이 대열을 이루어 이러한 사회적 의식을 공유하는 일에 합세하고 있다. 예술가는 영원히 형식과 내용에 관해 고민하지만, 이제 그러한 고민은 의무에 관한, 예술에서 마땅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합쳐진다. 이러한 질문은 우리 시대 예술가에게 시금석이다. (…) 그가 정말로 사칭자가 아니라 “부름받은” 사람이라면, 의무에 대한 의식의 길을 굳건히 따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을 두고 생사를 건 투쟁이 있을 것이고, 이 투쟁에서 미와 유용성이라는 불구대천의 원수들은 기적처럼 서로 손을 내밀어 악수하기에 이러한 저주받은 질문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산의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
최근의 학자들은 민중의 창작에서 미와 유용성이 서로 부합했으며 그와 같은 민중적 창작의 초기 형태로 노동요(勞動謠)를 언급하며 노동요는 리듬에 의해 생산의 노동과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예술과 노동, 미와 유용성 간의 연결 고리는 리듬이다. 우리 삶의 리듬은 무엇인가? 입센의 작품은 우리 삶의 리듬은 의무라고 말하고, 노래하며, 외친다. 의무에 대한 의식 속에서,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 속에서 예술가는 리듬에 의해 필요한 유일한 길을 따라갈 힘을 발견한다. 이것은 가장 위험하고 가장 좁지만, 가장 올바른 길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오직 이 길로만 간다. 선장의 경험이 가장 위험한 해협에서 시험을 받듯이, 여기서 예술가의 진정성이 시험대에 오른다. 오직 여기에서만이 예술가가 의무에 의해 인도되는지 알 수 있다. 의무에 대한 의식은 슬프고 고난에 찬 우리 시대에 인간 영혼의 리듬의 유일한 표현이며, 진짜와 가짜, 영원한 것과 덧없는 것, 성스러운 것과 신성 모독을 구별하게 한다.
(…) 그러나 소위 세련된 예술가는 여기서 우리가 더 이상 다만 예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관해서도 또한 이야기하는 것임을 아는가? 이러한 질문이 산문적이고 창백한 때 이른 질문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하다. 새로운 자유로운 필요성, 아름다운 의무에 대한 의식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아름다운 나비의 영혼과 유용한 낙타의 몸을 하나의 깊은 통에서 빻아낼 어떤 조물주의 개입이 필요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말은 다만 말로 남아 있고, 삶은 그냥 삶이며, 아름다움은 쓸모없고, 유용한 것은 추하게 된다. 예술가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사람은 살기 위해 예술을 거부한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도 더 이상 이런 것을 원하지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
-알렉산드르 블로크, 「세 가지 질문」 중에서
토론하기
(1) 이 글에서 블로크는 예술의 문제를 내용과 형식의 대립 테제를 통해 이야기하며 궁극적으로 양자의 통합과 조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여기서 블로크가 내용과 형식을 통합하는 계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블로크의 생각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이야기해보라.
2) 블로크가 언급한바 예술가의 “의무에 대한 의식,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은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을 말해보라.
3) 여러분은 예술에서 내용과 형식의 관계가 어떠하다고 생각하는가? 혹은 내용과 형식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4) 여기서 블로크는 진정한 예술가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된다’(요한복음1:14)는 성경 구절을 들어 예술가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블로크의 생각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를 이야기해 보라.
해설읽기
당시 신예술을 표방한 전기(前期) 상징주의 데카당스주의자들과 사실주의자들 간의 첨예한 논쟁의 화두가 되었던 예술과 사회 혹은 삶과의 관계, 예술의 사회성(앙가주망)에 관한 문제는 주로 예술의 내용과 형식 간의 대립을 통해 논의되기도 하였다. 즉, 미(美)를 예술의 본질로 선언한 신예술, 즉 데카당스와 상징주의 예술계는 주로 예술의 형식만을 옹호하고 예술의 내용, 즉 메시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상징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제기되자, 19세기 사실주의 문학과 함께 사회비평이 대세를 이루던 기존 문학계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사회적 가치보다 미학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상징주의 예술을 삶과 현실로부터 유리된 무용(無用)한 예술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처럼 당시 예술계에서 예술에서 미와 윤리 간의 대립과 갈등의 문제를 블로크는 “유용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식한다. “동시대 예술가가 예술의 유용성(有用性)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블로크의 진술은 상징주의자들의 미학주의를 향한 사회비평의 비난을 언급한 것이다. 결국 미학과 윤리의 문제는 예술이 사회적으로, 혹은 현실 삶에서, 유용한가 아닌가의 문제일 수 있다. 사회비평은 사회악을 비판하고 선(善)을 전달하지 못하는 문학은 무용하다고 비판한다.
블로크는 당시 신예술을 표방한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자로 간주되었지만, 미(美)를 절대적 가치로 보는 데카당스 예술로부터 일정 정도 거리를 둘 필요를 느꼈고, 내용이냐 형식이냐의 논쟁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예술가는 형식과 내용에 관해 고민하지만, 이제 그러한 고민은 의무에 관한, 예술에서 마땅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한 새로운 관심과 합쳐진다”는 블로크의 진술이 그것이다. 그는 예술에게 던져지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가지 질문 이외에 ‘의무’라는 제3의 질문을 제시함으로써 내용과 형식, 즉 예술의 사회적 유용성과 미학성 간의 대립을 해소하고자 한다. 상징주의자들과 사회비평적 사실주의자들 간의 양보 없는 논쟁에서 보이듯이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립하는 듯한 내용과 형식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예술가의 ‘의무’에 대한 의식을 통해 결합된다.
사실 예술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은 서로를 배제할 수 없다. 예술 창작이란 높은 이념을 아름다운 형식을 통해 담아내는 것이다. 블로크는 이처럼 내용과 형식이 결합된 예술의 예를 민속예술의 노동요(勞動謠)에서 찾는다. 인간이 일하며 부르는 노래는 삶 그 자체로부터 나왔기에 그 리듬이라는 형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곧 노동이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노동요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롭게 부합한다. 노동요에서 내용과 형식의 결합을 이루어내는 것이 바로 예술가에게는 의무, 즉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이다.
그러므로 내용과 형식의 결합은 예술가가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에 관한 세 번째 질문에 대하여 사유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의무’는 예술가에게 시금석이라고 말한다. 예술가의 진정성은 자신이 제시한 세 번째 질문, 즉 ‘의무’에 대한 예술가의 의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형식만을, 혹은 내용만을 중시하며 다른 하나를 배제하는 예술가란 가짜 예술가인 것이다. 신으로부터 “부름받은”,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라면 이와 같은 ‘의무’에 대한 의식을 통해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필연적으로 양자 간의 조화와 합일을 모색할 것이다.
블로크는 작금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논쟁,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논란은 결국 예술가의 실존의 문제에 있다고 본다. 그것은 예술가가 다만 “세련됨”, 즉 미학 속에 갇혀 인간과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에 관한 논의는 다만 예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에 관한 이야기도 되어야 한다. 여기서 블로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상적 예술 창작의 비유로 도입한다. 신의 “말씀”, 즉 높은 이상이 인간의 육체를 입은 그리스도의 실존은 내용과 형식의 완벽한 조화와 결합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인간으로서의 실존 역시 담보하여야만이 ‘의무’, “자신을 낳은 민중 및 사회와의 연관과 거대한 책임”을 의식하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키워드
내용, 노동요, 말씀, 미, 민중 창작, 사회적 의식, 삶, 예술, 예술가, 유용성, 육신, 의무, 인간, 필요성, 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