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탄생한 이래 우리를 가장 괴롭혀온 문제들 중 하나는 '무엇이 정의(正義)인가'하는 것이다. 학문이 발달하고 기술과 과학이 발전을 거듭한 결과 과거에는 풀어낼 수 없었던 수많은 문제들을 해소한 오늘날에도 이 물음은 여전히 우리들을 머뭇거리고 곤란하게 만든다. 그것은 아마도 정의의 문제가 '1+1=2다'와 같은 수학적 계산처럼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결론이 도출되는 영역에서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으며 같은 원인이 주어진다고 동일한 결과가 보장되지도 않는 현실 속에서, 그것도 저마다 나름대로 정당화할 수 있는 각자의 삶의 교차지대라는 개연적인 영역에서도 문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정의를 꿈꾸고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런데 이것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상태로는 이루기 힘든 꿈이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국가』1권에서 시도한다. 『국가』1권의 주된 논적은 정의가 '강자의 이익'임을 주장하는 트라시마코스지만, 소크라테스는 그에 앞서 케팔로스와 폴레마르코스 부자와 나눈 대화 속에서 정의에 대한 검토를 시작한다.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은 별도의 셀묶음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본 셀묶음에서는 『국가』 1권에서 등장하는 케팔로스와 폴레마르코스 부자의 정의에 관한 주장과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논박을 살펴본다.
케팔로스의 자택을 방문한 소크라테스는 그와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노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케팔로스가 좋은 생활 습관과 함께 한다면, 노년이야말로 오히려 온갖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시기라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은 케팔로스가 노년을 수월하게 보낼 수 있는 이유는 재산이 많은 점에 있다고 생각할 거라며 재산이 많아 덕을 본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자 케팔로스는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데, 그 희망이란 생전에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른 까닭에 벌을 받을 염려 없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고, 많은 재산은 곤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를 빌렸다가 갚지 못하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그러한 희망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답한다.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그처럼 단지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사는 것과 빚을 지지 않는 것만으로는 정의로운 삶의 본질이 충족될 수 없다는 점을 꼬집는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빚도 지지 않지만, 결코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사례를 반례로 제시한다. 이를 계기로 대화의 주제는 노년에서 정의로 전환되고, 이후의 대화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이어받는다.
고전본문
…폴레마르코스가 끼어들면서 말했네. “아니, 소크라테스 선생님! 정의란 전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든 시모니데스에게 수긍을 한다면 그래야만 합니다.” …<중략>… 내가 말했네. “그대, 논의의 상속자여, 시모니데스가 정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했기에 그대는 그가 올바르게 이야기했다는 것이오?” 그가 말했네.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훌륭하게 보입니다.”
“시모니데스께서 하신 말씀이니 믿지 않기도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도대체 그가 무슨 뜻으로 한 이야기인지, 폴레마르코스, 당신은 아마 아시는 것 같으나, 나는 모르겠소. 그는 방금 우리가 이야기한 것, 그러니까 누구든 무엇을 빌려준 자가 미쳐버린 상태가 되어 빌려준 것을 돌려달라고 할 때 돌려주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오. 물론 누군가 뭔가를 빌려주었다면 빌려 준 사람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오. 그렇지 않소?” 내가 말했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미쳐버린 상태에서 돌려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돌려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시모니데스가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고 한 말의 뜻은 이것과 다른 것 같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시모니데스의 취지는 친구 사이에는 뭔가 좋은 것을 해야지, 나쁜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요. 그것은 누군가가 황금을 맡긴 사람에게 그걸 되돌려 준다고 할 경우에, 만약 그 돌려받음과 돌려줌이 해악을 낳는다면, 특히 돌려받는 자와 돌려주는 자가 서로 친구일 경우에는, 그는 갚아야 할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닐 테니까요. 당신은 시모니데스가 이런 뜻으로 말한 걸로 보지 않으시겠죠?” 내가 말했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떤가요? 적에게는 그것이 무엇이든 갚는 것이 합당한 것이 있으면 돌려줘야 하나요?
“적에게는 합당한 것을 꼭 되돌려 줘야만 하지요. 그렇지만 최소한 적으로서 적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면, 이 또한 적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것, 다시 말해서 어떤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시모니데스는 정의롭고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마치 시인처럼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소. 그는 각자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 정의요 올바름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고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니까요.“
“그밖에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가 말했네.
“누군가 그 사람에게 질문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시모니데스, 무엇에게 무엇을 마땅하고 합당한 것으로 돌려주는 기술이 의술이라고 불립니까?’ 자네는 그가 뭐라고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내가 말했네.
“분명, 그는 육체에 대해서 약물과 음식을 돌려주는 기술이라고 하겠죠.” 그가 말했네.
“그리고 무엇에게 무엇을 마땅하고 합당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을 요리술이라고 부를까요?”
“음식에 풍미를 주는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무엇에게 무엇을 마땅하고 합당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이 정의라고 불릴까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만약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을 따라야 한다면, 친구들과 적들에게 이익과 해악을 주는 기술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니까 그는 친구들은 잘 되도록 해주지만, 적들은 잘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는 건가요?”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토론하기
(1)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어떻게 활용하여 아버지 케팔로스의 정의관을 옹호하였나?
(2) 자기가 기울인 노력이나 기여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서 부당하다고 느낀 경험을 떠올려보고, 당시 어떠한 보상이 주어지면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았을지 말해보자.
(3)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기술 혹은 숙련의 일종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설읽기
케팔로스의 정의관을 물려받는 상속자 폴레마르코스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케팔로스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정의관 또한 함께 물려받는 사람이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와 노년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많은 재산의 덕을 보았던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해서 재산은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게 살지 않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좋다는 취지의 답을 한다. 돈이 궁해서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뭔가를 빌려놓고 갚지도 못하는 염치없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케팔로스의 생각은 아테네의 부유층이자 기성세대로서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볼 때, 정의란 곧 정직과 채무의 이행이다. 이를 조금 삐딱한 각도로 본다면, 부유한 자들만이 비로소 정의로울 수 있지, 가난한 자들은 결코 그럴 수 없거나 어려울 거라는 편견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성숙한 어른이자 시종 겸손한 케팔로스의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다른 부유층이나 특권층이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오만한 생각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얼른 반례를 들며 정직함과 채무의 이행을 정의의 본질로 여길 수는 없음을 지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빌린 것이라도 돌려주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근거로 아버지 케팔로스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선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에 이어 가치관까지도 물려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시모니데스의 시구 해석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란 곧 정직과 채무의 이행에 있다는 케팔로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거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케오스 섬 출신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의 시구다. 당시 시인들의 시는 공교육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시민들에게 교양 교육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기도 했다. 희랍 사람들은 시인이 들려주는 시를 통해서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공유해야 할 가치와 삶의 태도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시인들은 모종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교육자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시모니데스는 상당히 저명한 시인이어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프로타고라스』에서도 소크라테스가 그의 시를 거의 완전하게 암송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국가』에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다.
폴레마르코스가 인용하고 있는 시구는 다음과 같다.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다’
to ta opheilomena hekastō apodidonai dikaion esti
폴레마르코스는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는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자기 주장의 논거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이 빌린 것을 단순하게 되갚는 것을 의미할 리는 없다.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인 케팔로스와 나누었던 직전의 논의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친구의 정신이 멀쩡할 때 무기처럼 위험한 물건을 빌려놓고는, 그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에 빠졌다거나 격분해 있을 때 돌려주는 것은 올바른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저 빌린 것을 친구에게 돌려주기만 한다고 해서 정의롭고 올바른 것이 되지는 못한다. 둘은 이것을 시모니데스의 시구가 비유적 표현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숨은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우선, 정의란 친구에게 갚을 것을 단순히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다. 친구에게는 돌려주는 것이 좋은 것일 때 돌려줘야 올바른 일이다. 친구의 반대인 적의 경우는 정반대다. 적에게는 돌려주는 것이 그들에게 나쁜 것일 때 돌려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요컨대, 정의는 무엇1에게 무엇2을 주는가에 따라 성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과연 무엇1과 무엇2에 어떤 말이 들어가야 정의가 성립할까?
정의에 관한 폴레마르코스의 새로운 규정 : 친구에게는 좋음을, 적에게는 해악을 주는 기술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정의를 일종의 기술(technē) 혹은 숙련을 통해 얻은 기능으로 취급한다. 이는 정의가 올바름에 대한 참된 앎에 입각해 수행되는 어떤 체계적 활동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케팔로스처럼 정의를 ‘정직하게 살면서 빚을 지지 않는 것’ 정도의 일상적인 수준의 활동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정의로워지기 위해서 특별히 어떤 앎을 가질 필요는 없다. 반면,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정의를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만약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특별한 앎과 숙련을 필요로 한다. 그는 무엇이 그 사람에게 ‘합당한 것’으로 주어져야 마땅한가에 대한 판단을 일상적인 활동이 아니라 전문적인 활동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일종의 기술이라면, 그것은 어떤 기술인가?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입장을 한결 쉽게 정리할 수 있도록 그는 다른 기술의 사례에서 시작한다. 의술은 무엇1에게 무엇2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기술인가? 몸에게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이다. 요리술은 무엇1에게 무엇2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기술인가? 음식에 풍미를 주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방식으로 말해서 정의는 무엇1에게 무엇2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기술일까? 이제 폴레마르코스는 한결 쉽게 대답한다. 정의는 친구에게는 이익(좋음)을 주고 적에게는 해악(나쁨)을 주는 기술이라고. 그리고 둘은 이것을 시모니데스 시구의 진짜 의미로 가정한다.
키워드
국가, 디카이오쉬네, 소크라테스, 시모니데스, 올바름, 정의, 폴레마르코스, 플라톤
전후맥락
케팔로스의 자택을 방문한 소크라테스는 그와 만나 인사를 나누면서 노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케팔로스가 좋은 생활 습관과 함께 한다면, 노년이야말로 오히려 온갖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시기라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은 케팔로스가 노년을 수월하게 보낼 수 있는 이유는 재산이 많은 점에 있다고 생각할 거라며 재산이 많아 덕을 본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자 케팔로스는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는데, 그 희망이란 생전에 올바르지 못한 일을 저지른 까닭에 벌을 받을 염려 없이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고, 많은 재산은 곤궁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뭔가를 빌렸다가 갚지 못하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그러한 희망에 크게 이바지한다고 답한다. 이 말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그처럼 단지 거짓 없이 정직하게 사는 것과 빚을 지지 않는 것만으로는 정의로운 삶의 본질이 충족될 수 없다는 점을 꼬집는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빚도 지지 않지만, 결코 정의롭고 올바르다고 할 수 없는 사례를 반례로 제시한다. 이를 계기로 대화의 주제는 노년에서 정의로 전환되고, 이후의 대화는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이어받는다.
고전본문
…폴레마르코스가 끼어들면서 말했네. “아니, 소크라테스 선생님! 정의란 전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든 시모니데스에게 수긍을 한다면 그래야만 합니다.” …<중략>… 내가 말했네. “그대, 논의의 상속자여, 시모니데스가 정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했기에 그대는 그가 올바르게 이야기했다는 것이오?” 그가 말했네.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말은 훌륭하게 보입니다.”
“시모니데스께서 하신 말씀이니 믿지 않기도 쉽지 않겠지요. 하지만 도대체 그가 무슨 뜻으로 한 이야기인지, 폴레마르코스, 당신은 아마 아시는 것 같으나, 나는 모르겠소. 그는 방금 우리가 이야기한 것, 그러니까 누구든 무엇을 빌려준 자가 미쳐버린 상태가 되어 빌려준 것을 돌려달라고 할 때 돌려주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오. 물론 누군가 뭔가를 빌려주었다면 빌려 준 사람에게 돌려줘야 마땅하오. 그렇지 않소?” 내가 말했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미쳐버린 상태에서 돌려달라고 요청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돌려주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시모니데스가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고 한 말의 뜻은 이것과 다른 것 같습니다.”
“그건 전적으로 그렇습니다. 시모니데스의 취지는 친구 사이에는 뭔가 좋은 것을 해야지, 나쁜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일 테니까요.”
“그래요. 그것은 누군가가 황금을 맡긴 사람에게 그걸 되돌려 준다고 할 경우에, 만약 그 돌려받음과 돌려줌이 해악을 낳는다면, 특히 돌려받는 자와 돌려주는 자가 서로 친구일 경우에는, 그는 갚아야 할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닐 테니까요. 당신은 시모니데스가 이런 뜻으로 말한 걸로 보지 않으시겠죠?” 내가 말했네.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떤가요? 적에게는 그것이 무엇이든 갚는 것이 합당한 것이 있으면 돌려줘야 하나요?
“적에게는 합당한 것을 꼭 되돌려 줘야만 하지요. 그렇지만 최소한 적으로서 적에게 돌려주는 것이라면, 이 또한 적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것, 다시 말해서 어떤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시모니데스는 정의롭고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함에 있어 마치 시인처럼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소. 그는 각자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 정의요 올바름이라는 점을 마음에 두고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이니까요.“
“그밖에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가 말했네.
“누군가 그 사람에게 질문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시모니데스, 무엇에게 무엇을 마땅하고 합당한 것으로 돌려주는 기술이 의술이라고 불립니까?’ 자네는 그가 뭐라고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내가 말했네.
“분명, 그는 육체에 대해서 약물과 음식을 돌려주는 기술이라고 하겠죠.” 그가 말했네.
“그리고 무엇에게 무엇을 마땅하고 합당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을 요리술이라고 부를까요?”
“음식에 풍미를 주는 것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무엇에게 무엇을 마땅하고 합당한 것으로서 주는 기술이 정의라고 불릴까요.”
“소크라테스 선생님, 만약 앞에서 이야기된 것들을 따라야 한다면, 친구들과 적들에게 이익과 해악을 주는 기술입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니까 그는 친구들은 잘 되도록 해주지만, 적들은 잘되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는 건가요?”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토론하기
(1)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어떻게 활용하여 아버지 케팔로스의 정의관을 옹호하였나?
(2) 자기가 기울인 노력이나 기여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서 부당하다고 느낀 경험을 떠올려보고, 당시 어떠한 보상이 주어지면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았을지 말해보자.
(3) 소크라테스가 정의를 기술 혹은 숙련의 일종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해설읽기
케팔로스의 정의관을 물려받는 상속자 폴레마르코스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케팔로스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정의관 또한 함께 물려받는 사람이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와 노년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많은 재산의 덕을 보았던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이 어떤 것인지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해서 재산은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게 살지 않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좋다는 취지의 답을 한다. 돈이 궁해서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뭔가를 빌려놓고 갚지도 못하는 염치없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케팔로스의 생각은 아테네의 부유층이자 기성세대로서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함축하고 있다. 전통적인 시각에서 볼 때, 정의란 곧 정직과 채무의 이행이다. 이를 조금 삐딱한 각도로 본다면, 부유한 자들만이 비로소 정의로울 수 있지, 가난한 자들은 결코 그럴 수 없거나 어려울 거라는 편견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성숙한 어른이자 시종 겸손한 케팔로스의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다른 부유층이나 특권층이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오만한 생각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얼른 반례를 들며 정직함과 채무의 이행을 정의의 본질로 여길 수는 없음을 지적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아무리 빌린 것이라도 돌려주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자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근거로 아버지 케팔로스의 입장을 옹호하고 나선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에 이어 가치관까지도 물려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시모니데스의 시구 해석
폴레마르코스가 정의란 곧 정직과 채무의 이행에 있다는 케팔로스의 입장을 옹호하는 논거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것은 케오스 섬 출신의 서정시인 시모니데스의 시구다. 당시 시인들의 시는 공교육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시민들에게 교양 교육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기도 했다. 희랍 사람들은 시인이 들려주는 시를 통해서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공유해야 할 가치와 삶의 태도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시인들은 모종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여겨졌고 교육자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시모니데스는 상당히 저명한 시인이어서 플라톤의 다른 대화편인 『프로타고라스』에서도 소크라테스가 그의 시를 거의 완전하게 암송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국가』에서도 다시 언급되고 있다.
폴레마르코스가 인용하고 있는 시구는 다음과 같다.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다’
to ta opheilomena hekastō apodidonai dikaion esti
폴레마르코스는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는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자기 주장의 논거로 삼았다. 그러나 그것이 빌린 것을 단순하게 되갚는 것을 의미할 리는 없다.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인 케팔로스와 나누었던 직전의 논의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친구의 정신이 멀쩡할 때 무기처럼 위험한 물건을 빌려놓고는, 그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 상태에 빠졌다거나 격분해 있을 때 돌려주는 것은 올바른 것일 리가 없지 않은가! 모든 것을 제쳐두고 그저 빌린 것을 친구에게 돌려주기만 한다고 해서 정의롭고 올바른 것이 되지는 못한다. 둘은 이것을 시모니데스의 시구가 비유적 표현이라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숨은 의미를 찾아보려 한다.
우선, 정의란 친구에게 갚을 것을 단순히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다. 친구에게는 돌려주는 것이 좋은 것일 때 돌려줘야 올바른 일이다. 친구의 반대인 적의 경우는 정반대다. 적에게는 돌려주는 것이 그들에게 나쁜 것일 때 돌려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요컨대, 정의는 무엇1에게 무엇2을 주는가에 따라 성립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과연 무엇1과 무엇2에 어떤 말이 들어가야 정의가 성립할까?
정의에 관한 폴레마르코스의 새로운 규정 : 친구에게는 좋음을, 적에게는 해악을 주는 기술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정의를 일종의 기술(technē) 혹은 숙련을 통해 얻은 기능으로 취급한다. 이는 정의가 올바름에 대한 참된 앎에 입각해 수행되는 어떤 체계적 활동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케팔로스처럼 정의를 ‘정직하게 살면서 빚을 지지 않는 것’ 정도의 일상적인 수준의 활동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정의로워지기 위해서 특별히 어떤 앎을 가질 필요는 없다. 반면, 폴레마르코스는 시모니데스의 시구를 인용하면서 정의를 ‘합당한 것을 각자에게 돌려주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만약 정의가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특별한 앎과 숙련을 필요로 한다. 그는 무엇이 그 사람에게 ‘합당한 것’으로 주어져야 마땅한가에 대한 판단을 일상적인 활동이 아니라 전문적인 활동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의가 일종의 기술이라면, 그것은 어떤 기술인가?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가 입장을 한결 쉽게 정리할 수 있도록 그는 다른 기술의 사례에서 시작한다. 의술은 무엇1에게 무엇2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기술인가? 몸에게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이다. 요리술은 무엇1에게 무엇2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기술인가? 음식에 풍미를 주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 방식으로 말해서 정의는 무엇1에게 무엇2을 마땅한 것으로 주는 기술일까? 이제 폴레마르코스는 한결 쉽게 대답한다. 정의는 친구에게는 이익(좋음)을 주고 적에게는 해악(나쁨)을 주는 기술이라고. 그리고 둘은 이것을 시모니데스 시구의 진짜 의미로 가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