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유령에게서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에 얽힌 내막을 듣게 된 햄릿은 고민에 빠진다. 지금 왕위를 차지한 클로디우스가 햄릿의 아버지이자 선대 왕을 죽이고, 햄릿의 어머니이자 왕비였던 거트루드와 결혼한 상황에서 자신이 과연 어떻게 복수를 실행할 지에 대해 숙고한다. 햄릿의 고뇌와 갈등의 핵심에는 합리적 지성과 자기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적 사고방식을 따랐다면 유령의 말의 진위를 확인한 후, 바로 계책을 세우거나 영웅적인 용맹함을 과시하며 복수에 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햄릿은 근대적 지성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괴테의 파우스트로 유명한 곳이다. 햄릿의 지성은 분석적이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세계는 유령과 미신, 중세적 기독교 신앙이 팽배해 있다. 햄릿의 고뇌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선 인간의 실존적 고뇌이기도 하다. 그는 주어진 교리와 사상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햄릿』 3막 1장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긴 독백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대인의 논리적 추론과 의심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본문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생각컨데 어떤 것이 더 고결할까?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으며 참고 견디는 것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맞서 싸우며
그것들을 끝장내 버리는 것.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이겠지. 잠들어 마음의 괴로움과
육신이 겪는 수 천가지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순간이지 않겠나.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꾸겠지. 그런데 말야, 이게 문제야.
우리는 생의 굴레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죽음의 잠 속으로 빠져 들었을 때 무슨 꿈을 꿀지 몰라서 망설이게 된다 말이지.
이것이 바로 불행한 삶을 오래도록 견디는 이유라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채찍과 조롱을 대체 누가 견디겠는가?
압제자의 횡포와 권력자의 멸시
버림받은 사랑의 고통과 질질 끄는 법집행
관리들의 오만, 덕성스러운 사람이
하찮은 자들로부터 모욕 당하는 것을.
단 한자루의 단도로 다 잠재울 수 있는데?
누가 이 지겨운 인생의 짐을 지고
투덜거리며 땀을 흘리겠냐고.
헌데 한번 가면 다시 돌아도지 못하는
저 미지의 나라, 죽음의 나라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두렵지 않다면 말이야.
알지도 못하는 고생에 무작정 뛰어드느니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견디게 한단 말이지.
이리저리 재다보니 우린 다 겁쟁이가 되어 버렸어.
그래서 굳은 결심이 가졌던 원래의 색조가
생각의 창백한 색조에 스려져 병색을띠게 되고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담대한 계획들은
이런 점 때문에 다 빗나가서
결국은 행동의 이름을 잃고 만다네.
– 『햄릿』 3막 1장 중에서
토론하기
(1) 햄릿의 이 독백을 읽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햄릿은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데, 잠과 죽음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 봅시다.
(3) 햄릿은 인생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는데, 과연 삶에는 고통만 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해설읽기
To be or not to be로 시작하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은 보통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의미로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한국말의 어감을 살려 ‘죽느냐 사느냐”로 번역했다. 하지만 영어에서 ‘to be’는 ‘사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또는 지금 그대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이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바꿀 것인가”의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햄릿의 고뇌는 눈 앞의 현실을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행동을 해 변화를 꾀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것은 삶과 죽음의 선택만큼이나 어렵고 무거운 문제이다. 그럼 햄릿이 고뇌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햄릿의 독백은 동생이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고, 덕성스럽게 아버지를 사랑했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죽은지 한 달도 안되어 시동생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맺는 기막힌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싶지만, 죽음 너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하는 자신을 자조하는 내용이다. 사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전반적으로 어울하고 어두우며, 광기와 죽음이 난무하는 처절한 세계다. 햄릿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고, 친구라 믿었던 로젠클란츠와 길덴스턴이 클로디우스 왕의 사주를 받아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가차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연인이었던 오필리어는 햄릿의 손에 아버지가 죽자 미쳐버렸고, 결국 강물에 빠져 익사한다. 햄릿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미치광이 흉내를 내며 부왕 암살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복수의 얼개를 짠다.
주인공 햄릿은 문학사에 유래가 없는 독특한 인물로 아주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며 언제 행동할 세심하게 가늠한다.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냉소적이고 때론 인간미가 없기도 하다. 문제는 그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는 데 있다. 햄릿의 이러한 특징은 ‘햄릿형 인간’이라는 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러시아의 문호 트루게네프가 햄릿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비교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생각만 많고 행동하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을 햄릿형 인간으로, 반대로 생각없이 행동하는 유형을 돈키호테형 인간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에 인용한 독백은 햄릿형 인간, 즉 생각이 많아 선택이 어려운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세심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햄릿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아직 완전히 중세적인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령이 출몰하고, 죽은 다음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피의 복수가 정당화되는 기독교와 비기독교적 미신이 혼재하는 곳이다. 거기서 햄릿은 고뇌한다. 분석적 지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그가 놓여진 부조리한 세게와 자기자신의 내면을 의심하고 분석하려 한다. 햄릿은 중세의 세계관을 깨고 나오려는 근대인의 원형이기도 하다.
키워드
독백, 비극,셰익스피어, 죽음, 햄릿
전후맥락
유령에게서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에 얽힌 내막을 듣게 된 햄릿은 고민에 빠진다. 지금 왕위를 차지한 클로디우스가 햄릿의 아버지이자 선대 왕을 죽이고, 햄릿의 어머니이자 왕비였던 거트루드와 결혼한 상황에서 자신이 과연 어떻게 복수를 실행할 지에 대해 숙고한다. 햄릿의 고뇌와 갈등의 핵심에는 합리적 지성과 자기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적 사고방식을 따랐다면 유령의 말의 진위를 확인한 후, 바로 계책을 세우거나 영웅적인 용맹함을 과시하며 복수에 임했을 것이다. 하지만 햄릿은 근대적 지성을 갖춘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괴테의 파우스트로 유명한 곳이다. 햄릿의 지성은 분석적이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세계는 유령과 미신, 중세적 기독교 신앙이 팽배해 있다. 햄릿의 고뇌는 부조리한 세상에 맞선 인간의 실존적 고뇌이기도 하다. 그는 주어진 교리와 사상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햄릿』 3막 1장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긴 독백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대인의 논리적 추론과 의심을 발견할 수 있다,
고전본문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생각컨데 어떤 것이 더 고결할까?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으며 참고 견디는 것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맞서 싸우며
그것들을 끝장내 버리는 것.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이겠지. 잠들어 마음의 괴로움과
육신이 겪는 수 천가지 고통을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순간이지 않겠나.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꾸겠지. 그런데 말야, 이게 문제야.
우리는 생의 굴레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죽음의 잠 속으로 빠져 들었을 때 무슨 꿈을 꿀지 몰라서 망설이게 된다 말이지.
이것이 바로 불행한 삶을 오래도록 견디는 이유라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채찍과 조롱을 대체 누가 견디겠는가?
압제자의 횡포와 권력자의 멸시
버림받은 사랑의 고통과 질질 끄는 법집행
관리들의 오만, 덕성스러운 사람이
하찮은 자들로부터 모욕 당하는 것을.
단 한자루의 단도로 다 잠재울 수 있는데?
누가 이 지겨운 인생의 짐을 지고
투덜거리며 땀을 흘리겠냐고.
헌데 한번 가면 다시 돌아도지 못하는
저 미지의 나라, 죽음의 나라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두렵지 않다면 말이야.
알지도 못하는 고생에 무작정 뛰어드느니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견디게 한단 말이지.
이리저리 재다보니 우린 다 겁쟁이가 되어 버렸어.
그래서 굳은 결심이 가졌던 원래의 색조가
생각의 창백한 색조에 스려져 병색을띠게 되고
중대한 의미를 지녔던 담대한 계획들은
이런 점 때문에 다 빗나가서
결국은 행동의 이름을 잃고 만다네.
– 『햄릿』 3막 1장 중에서
토론하기
(1) 햄릿의 이 독백을 읽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2) 햄릿은 죽음을 ‘잠’에 비유하는데, 잠과 죽음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비교해 봅시다.
(3) 햄릿은 인생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는데, 과연 삶에는 고통만 있을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해설읽기
To be or not to be로 시작하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은 보통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의미로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한국말의 어감을 살려 ‘죽느냐 사느냐”로 번역했다. 하지만 영어에서 ‘to be’는 ‘사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또는 지금 그대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면 “지금 이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바꿀 것인가”의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햄릿의 고뇌는 눈 앞의 현실을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행동을 해 변화를 꾀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것은 삶과 죽음의 선택만큼이나 어렵고 무거운 문제이다. 그럼 햄릿이 고뇌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햄릿의 독백은 동생이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하고, 덕성스럽게 아버지를 사랑했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죽은지 한 달도 안되어 시동생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맺는 기막힌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싶지만, 죽음 너머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하는 자신을 자조하는 내용이다. 사실 세익스피어의 『햄릿』은 전반적으로 어울하고 어두우며, 광기와 죽음이 난무하는 처절한 세계다. 햄릿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고, 친구라 믿었던 로젠클란츠와 길덴스턴이 클로디우스 왕의 사주를 받아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가차없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연인이었던 오필리어는 햄릿의 손에 아버지가 죽자 미쳐버렸고, 결국 강물에 빠져 익사한다. 햄릿자신도 살아남기 위해 미치광이 흉내를 내며 부왕 암살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 복수의 얼개를 짠다.
주인공 햄릿은 문학사에 유래가 없는 독특한 인물로 아주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며 언제 행동할 세심하게 가늠한다. 모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냉소적이고 때론 인간미가 없기도 하다. 문제는 그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는 데 있다. 햄릿의 이러한 특징은 ‘햄릿형 인간’이라는 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러시아의 문호 트루게네프가 햄릿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비교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생각만 많고 행동하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을 햄릿형 인간으로, 반대로 생각없이 행동하는 유형을 돈키호테형 인간이라 부르기도 한다. 위에 인용한 독백은 햄릿형 인간, 즉 생각이 많아 선택이 어려운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세심하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햄릿이 몸담고 있는 세계는 아직 완전히 중세적인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령이 출몰하고, 죽은 다음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피의 복수가 정당화되는 기독교와 비기독교적 미신이 혼재하는 곳이다. 거기서 햄릿은 고뇌한다. 분석적 지성과 논리를 바탕으로 그가 놓여진 부조리한 세게와 자기자신의 내면을 의심하고 분석하려 한다. 햄릿은 중세의 세계관을 깨고 나오려는 근대인의 원형이기도 하다.
키워드
독백, 비극,셰익스피어, 죽음, 햄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