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의가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역사 속의 여러 문명 속에서 정의, 즉 올바름은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으며, 오늘날도 정의가 무엇인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정의를 정의 내리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은 인간 본성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정의에 대한 탐구는 계속될 것이다. 이 셀 묶음에서는 역사적으로 제시되어 온 여러 정의에 대한 관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우리 사회가 선택해야 할 정의관을 모색해 보도록 하자.
케팔로스의 집에 초대된 소크라테스는 정의라는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눈다. 케팔로스는 정의란 정직하게 살고 빚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정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빚을 갚는 것이 정의라면 무기를 미친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인가, 라고 물의면서 그의 정의관에 대해 문제를 지적한다. 이어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게 잘해주고 적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정의라는 입장, 즉 합당하게 갚는 것이 정의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훌륭함이기 때문에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정의관을 견지한 자들과의 논쟁 이후에 소크라테스는 경험주의적 정의관을 반박한다. 트라시마코스는 경험주의적 정의관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정의라고 선전하지만, 실제로 정의는 특정한 이들의 이익에 불과하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간결하게 ‘강자의 이익’이라고 정의한다. 강한 자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법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선전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강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을 반박한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말해 보게, 당신이 방금 말한 의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인가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사람인가요? 진정한 의미에서 의사를 말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오.
트라시마코스: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지요.
소크라테스: 그럼 배를 조종하는 선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선원들을 통솔하는 자인가요 일개 선원인가요?
트라시마코스: 선원들의 통솔자이지요.
소크라테스: 항해를 한다는 것만으로는 선장이라고 할 수 없고, 그를 선원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지요. 그 이유는 그가 선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의 항해하고 있는 사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항해술과 선원들을 통솔력과 관련되기 때문이지요.
트라시마코스: 맞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의사나 선장은 어떤 이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트라시마코스: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 기술이라는 것도 이익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오, 각자에게 이익을 찾아 가져다 주는 것이 기술의 목적이 아닌가?
트라시마코스: 그렇습니다. 그것을 위해서죠.
소크라테스: 기술은 자신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이득을 주는 것은 없는가?
트라시마코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물으시는 것인가요?
소크라테스: 만일 신체는 다른 도움이 필요 없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물론, 그것은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대답할 걸세. 바로 신체는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술이 발명된 것이네, 왜냐하면 몸이라는 것은 결함이 있는 것이고 그러한 결함은 몸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 바로 편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의술이 고안된 이유였네. 그것이 올바른 답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닌가?
트라시마코스: 맞습니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의술 자체는 눈과 귀가 잘못 볼 수 있기 때문에 결함이 있는 것처럼 결함이 있을 수 있는가요? 기술 자체에 어떤 결함이 존재하는가? 각 기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할까요? 어떤 기술에도 결함과 오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대상의 제외하고는 어떤 것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그 기술에 이익이 되지 않네. 기술 자체는 어떤 해로움에도 불완전함도 없네. 각 기술은 그 자체로 정확하게 있는 한 그것은 올바르네. 그런가 그렇지 않나?
트라시마코스: 그렇게 보입니다.
소크라테스: 의술은 의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몸의 이익을 위하지 않겠나?
트라시마코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말을 다루는 기술은 그 기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위해서 존재하지. 다른 어떤 기술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대상이 되는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트라시마코스: 그렇게 보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나 분면, 트라시마코스, 기술들은 기술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통제하고 더 강하네.
트라시마코스: 그렇죠(어렵게 인정한다)
소크라테스: 그럼 모든 기술은 강한 자의 이익이 아니라 약한 자의 이익을 위해서 위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플라톤, 『국가론』 1권 중에서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에게 이상적인 의사나 선장은 어떤 사람인가요?
(2) 올바름을 자신의 이익이 비추어 해석하는 경우를 예를 들어 말해 봅시다.
(3) 플라톤에게 법과 정의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할까? 위 본문의 논의를 근거로 말해 봅시다.
해설읽기
트라시마코스가 생각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구호에 불과하다. 강자들은 사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약자들은 사회에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사실 불의한 것이기 때문에, 불의하게 사는 것이 정의롭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경험적, 현실적 정의관에 맞서서 정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이 정의는 사회에 유익하다는 생각을 주장하려고 한다.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서 트라시마코스의 생각을 교정하려 한다. 플라톤은 트라시마코스에게 강한 자들이 법률을 잘못 제정하여 오히려 약자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트라시마코스는 강한 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응수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논의를 통치의 기술, 즉 법을 만드는 기술로 화제를 바꾼다. 모든 기술은 기술의 대상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가령, 의술은 환자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상적인 의사라면 돈이 아니라 환자의 유익을 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통치술도 통치자가 아니라 통치를 받는 이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법으로 표현되는 정의는 통치를 받는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논의에서 우리는 경험적 진리와 이성적 진리의 차이를 보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트라시마코스 생각하는 세상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은 경험을 넘어서는 이상을 생각할 수 있다. 현실은 강한 자의 이익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은 세상은 마땅히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인지 반드시 생각하기 마련이다.
키워드
강자, 기술, 법, 약자, 이상, 정의
전후맥락
케팔로스의 집에 초대된 소크라테스는 정의라는 주제를 놓고 대화를 나눈다. 케팔로스는 정의란 정직하게 살고 빚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정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빚을 갚는 것이 정의라면 무기를 미친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인가, 라고 물의면서 그의 정의관에 대해 문제를 지적한다. 이어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게 잘해주고 적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정의라는 입장, 즉 합당하게 갚는 것이 정의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훌륭함이기 때문에 남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정의관을 견지한 자들과의 논쟁 이후에 소크라테스는 경험주의적 정의관을 반박한다. 트라시마코스는 경험주의적 정의관을 대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정의라고 선전하지만, 실제로 정의는 특정한 이들의 이익에 불과하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간결하게 ‘강자의 이익’이라고 정의한다. 강한 자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법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선전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강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트라시마코스의 정의관을 반박한다.
고전본문
소크라테스: 말해 보게, 당신이 방금 말한 의사는 엄밀한 의미에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인가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사람인가요? 진정한 의미에서 의사를 말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오.
트라시마코스: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지요.
소크라테스: 그럼 배를 조종하는 선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선원들을 통솔하는 자인가요 일개 선원인가요?
트라시마코스: 선원들의 통솔자이지요.
소크라테스: 항해를 한다는 것만으로는 선장이라고 할 수 없고, 그를 선원이라고 불러서도 안 되지요. 그 이유는 그가 선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의 항해하고 있는 사실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항해술과 선원들을 통솔력과 관련되기 때문이지요.
트라시마코스: 맞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의사나 선장은 어떤 이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
트라시마코스: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 기술이라는 것도 이익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오, 각자에게 이익을 찾아 가져다 주는 것이 기술의 목적이 아닌가?
트라시마코스: 그렇습니다. 그것을 위해서죠.
소크라테스: 기술은 자신을 최대한 완벽하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에 이득을 주는 것은 없는가?
트라시마코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물으시는 것인가요?
소크라테스: 만일 신체는 다른 도움이 필요 없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을 필요로 하는지 묻는다면, 나는 물론, 그것은 다른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대답할 걸세. 바로 신체는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술이 발명된 것이네, 왜냐하면 몸이라는 것은 결함이 있는 것이고 그러한 결함은 몸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지. 바로 편익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의술이 고안된 이유였네. 그것이 올바른 답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닌가?
트라시마코스: 맞습니다.
소크라테스: 하지만 의술 자체는 눈과 귀가 잘못 볼 수 있기 때문에 결함이 있는 것처럼 결함이 있을 수 있는가요? 기술 자체에 어떤 결함이 존재하는가? 각 기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또 다른 기술을 필요로 할까요? 어떤 기술에도 결함과 오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의 대상의 제외하고는 어떤 것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그 기술에 이익이 되지 않네. 기술 자체는 어떤 해로움에도 불완전함도 없네. 각 기술은 그 자체로 정확하게 있는 한 그것은 올바르네. 그런가 그렇지 않나?
트라시마코스: 그렇게 보입니다.
소크라테스: 의술은 의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몸의 이익을 위하지 않겠나?
트라시마코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말을 다루는 기술은 그 기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위해서 존재하지. 다른 어떤 기술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대상이 되는 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트라시마코스: 그렇게 보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나 분면, 트라시마코스, 기술들은 기술의 대상이 되는 것들을 통제하고 더 강하네.
트라시마코스: 그렇죠(어렵게 인정한다)
소크라테스: 그럼 모든 기술은 강한 자의 이익이 아니라 약한 자의 이익을 위해서 위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플라톤, 『국가론』 1권 중에서
토론하기
(1) 소크라테스에게 이상적인 의사나 선장은 어떤 사람인가요?
(2) 올바름을 자신의 이익이 비추어 해석하는 경우를 예를 들어 말해 봅시다.
(3) 플라톤에게 법과 정의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해야 할까? 위 본문의 논의를 근거로 말해 봅시다.
해설읽기
트라시마코스가 생각하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구호에 불과하다. 강자들은 사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올바르다고 주장한다. 약자들은 사회에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사실 불의한 것이기 때문에, 불의하게 사는 것이 정의롭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러한 경험적, 현실적 정의관에 맞서서 정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이 정의는 사회에 유익하다는 생각을 주장하려고 한다.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서 트라시마코스의 생각을 교정하려 한다. 플라톤은 트라시마코스에게 강한 자들이 법률을 잘못 제정하여 오히려 약자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트라시마코스는 강한 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응수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논의를 통치의 기술, 즉 법을 만드는 기술로 화제를 바꾼다. 모든 기술은 기술의 대상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가령, 의술은 환자를 위해서 존재한다. 이상적인 의사라면 돈이 아니라 환자의 유익을 위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통치술도 통치자가 아니라 통치를 받는 이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법으로 표현되는 정의는 통치를 받는 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 논의에서 우리는 경험적 진리와 이성적 진리의 차이를 보게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트라시마코스 생각하는 세상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성을 가진 인간은 경험을 넘어서는 이상을 생각할 수 있다. 현실은 강한 자의 이익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은 세상은 마땅히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인지 반드시 생각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