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뒤 맥락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1권에서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출발점으로 자연철학자들을 소개한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앎을 사랑한다는 말로 서술을 시작한 뒤, 지식의 발전이 감각에서 기억, 경험, 기술, 궁극적으로는 원인에 대한 앎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철학적 앎의 최고 형태는 존재와 본질을 다루는 학문, 즉 형이상학이며, 그 기원을 밝히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초기 철학자들의 사유를 검토한다.
그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의 자연철학자들이 존재의 ‘원리’(ἀρχή)를 찾으려 했으며, 그들이 물, 공기, 무한자와 같은 질료적 요소를 근원으로 제시했다고 소개한다. 이들은 세계의 다양성과 변화를 하나의 근본 원리로 설명하려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이 오직 ‘질료인’에만 집중했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들의 탐구가 철학의 본질인 원인과 원리의 탐색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통을 세운 것이라 평가한다. 이 맥락에서 자연철학자들은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기원을 연 인물들로 제시된다.
고전본문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찾고 있는 학문은 결국 같은 하나의 학문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첫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탐구여야 하기 때문이다. ‘선한 것’과 ‘무엇을 위한 것’도 원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학문이 단순한 제작이나 생산과 관련된 것이 아님은, 최초로 철학을 시작한 이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분명하다.
사람들은 놀라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했다. 지금도 그러하고, 옛날에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낯설고 기이한 것들에 놀랐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점점 더 큰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예컨대 달에서 벌어지는 현상들, 태양과 별들에 관한 일, 그리고 우주 전체의 생성 같은 문제들이 그것이다. 놀라며 의문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신화란 놀라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철학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지를 피하고자 함이었다면, 분명 그들은 알기 위해, 곧 앎 그 자체를 위해 철학을 추구한 것이며, 어떤 실용적인 목적 때문은 아니었다.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이다. 거의 모든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갖추어진 이후에야, 삶의 여유와 관조를 위한 이러한 종류의 지혜가 비로소 탐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처음으로 철학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물질의 어떤 형상 안에 있는 것들이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그로부터 생겨나고, 맨 처음 그것에서 만들어지며, 마지막에는 그것으로 되돌아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본질은 유지되면서, 그 위에 성질들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그들은 만물의 스토이케이온원소 그리고 아르케근본 원리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존재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생성되거나 소멸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본성을 가진 것이 언제나 보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로 철학하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물질의 형태를 가진 것들만이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생겨나고, 생성의 처음도 그것에서 비롯되며, 소멸할 때도 마지막에는 그로 되돌아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성질이나 상태만 변화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것을 만물의 스토이케이온원소이자 근본 아르케원리라고 불렀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실제로 어떤 것이 완전히 새로 생겨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자연적 바탕은 언제나 보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두고, 그가 단순히 새로 생겨났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아름다워지거나 음악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그가 새로 생겨났다고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런 성질들을 잃었다고 해서 그가 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도 ‘소크라테스’라는 실체의 바탕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모든 존재들 역시 본질적인 바탕이 남아 있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Α 2, 982b–983a.
토론하기
(1) 최초의 철학자들이 단순한 물질을 근원으로 생각한 이유를 찾아보고, 오늘날 과학의 설명과 비교해보자.
(2) 직접 ‘나만의 아르케’를 생각해 보고, 고대 철학자들과 요즘 과학자들이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지 이야기해보자.
(3)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철학적인 질문이 우리 공동체의 공부나 토론 문화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왜 자연철학자들은 하나의 원리를 찾으려 했을까?
자연철학자들이 세계의 근원으로 단 하나의 원리, 곧 아르케archē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자연 현상 속에서 반복되는 어떤 공통된 질서를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를 보자. 잎을 모두 제거하면 기둥과 가지가 드러나는데, 그 구조는 다시 개별 가지의 형태에서, 심지어 한 잎의 잎맥 구조에서도 반복된다. 이와 같은 모양은 나무라는 한 생명체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개가 갈라져 내리는 방식, 혈관이 뻗어나가는 방식, 강줄기가 퍼지는 방식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전체 안에서 부분이 반복되고, 부분이 다시 전체와 닮아 있는 자연의 패턴은 마치 하나의 ‘틀’이 다양한 사물 속에서 재현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 속에서 세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신화적 설명과는 다른 성격을 띤다. 천둥은 제우스의 분노가 아니라 어떤 반복되는 원리에 따라 발생하는 자연 현상일 수 있다는 생각, 즉 자연을 자연 그 자체의 원인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각이 태동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1권(983b~984a)에서 이러한 자연철학자들이 존재의 원리를 찾으려 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들이 오직 ‘질료인’만을 탐색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여전히 철학적 사유의 첫 출발점이자, 인간 이성이 세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의 증거였다. 철학은 그렇게, 반복되는 자연의 모습에서 단일한 질서를 읽어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과학과 자연철학자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자연철학자들의 탐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가설 설정과 검증의 체계성이다. 현대 과학은 실험과 측정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하거나 반증함으로써 이론을 발전시킨다. 반면 자연철학자들의 사유는 실험보다는 관찰과 직관에 의존했고, 논증보다는 설명적 주장을 펼쳤다. 그들의 주장에는 체계적인 실험 설계나 수학적 모델이 부재했다.
그러나 둘째로 주목할 점은, 그들의 철학이 관찰 경험에 기반한 접근이었다는 점이다. 탈레스는 강과 비에 주목해 ‘물’을 아르케로 제시했고, 아낙시메네스는 호흡과 증발, 응결 같은 자연 현상을 보고 ‘공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이들의 이론은 비록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검증되지 않았거나 과학적으로 부정확할 수 있지만, 여전히 직접적인 자연의 관찰에서 출발한 시도였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번개가 제우스의 무기가 아니라 구름과 대기의 작용이라고 상상하고, 계절 변화가 여신의 기분 변화 때문이 아니라 자연 안의 순환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이 발상은 인류가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설명하려는 위대한 첫 걸음이었다. 신의 의지가 아닌, 자연의 원리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는 이후 과학적 탐구의 밑바탕을 형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 첫걸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기원을 공부하는 것이 공동체에 어떤 도움이 될까?
자연철학자들이 던진 질문—“세상의 시작은 무엇인가?”—는 단지 오래전 과거의 호기심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은 공동체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게 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단지 하나의 물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는지, 또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 토론 속에서 이러한 ‘기원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생각의 출발점을 만드는 힘이 있다. 자연철학자들의 질문은 주어진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의심하고 다시 물으며 자신만의 사고를 형성하는 훈련이었다. “왜 그런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은 지적 자율성과 비판적 사고의 기초가 된다. 이는 오늘날 민주적인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핵심 역량이기도 하다.
둘째, 철학의 기원을 배우는 일은 우리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과학 개념, 논리 구조, 심지어 ‘합리성’이라는 단어조차도 이런 초기 사유의 전통에서 자라났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공동체 속 구성원으로서 이러한 지적 유산을 공유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적 소속감을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생각에 도달했는가?”라는 물음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교육의 가장 깊은 가치 중 하나다.
요컨대, 자연철학자들의 질문은 오래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미래를 설계하고 지혜롭게 토론하며, 다양한 사고를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까지 뻗어 있다. 기원을 묻는 철학은 바로 공동체의 지성적 기반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질문이다.
키워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자연철학자, 아르케, 스토이케이온.
앞뒤 맥락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1권에서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출발점으로 자연철학자들을 소개한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앎을 사랑한다는 말로 서술을 시작한 뒤, 지식의 발전이 감각에서 기억, 경험, 기술, 궁극적으로는 원인에 대한 앎으로 나아간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철학적 앎의 최고 형태는 존재와 본질을 다루는 학문, 즉 형이상학이며, 그 기원을 밝히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초기 철학자들의 사유를 검토한다.
그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의 자연철학자들이 존재의 ‘원리’(ἀρχή)를 찾으려 했으며, 그들이 물, 공기, 무한자와 같은 질료적 요소를 근원으로 제시했다고 소개한다. 이들은 세계의 다양성과 변화를 하나의 근본 원리로 설명하려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이 오직 ‘질료인’에만 집중했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들의 탐구가 철학의 본질인 원인과 원리의 탐색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통을 세운 것이라 평가한다. 이 맥락에서 자연철학자들은 단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의 기원을 연 인물들로 제시된다.
고전본문
...그러므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찾고 있는 학문은 결국 같은 하나의 학문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첫 원리들과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탐구여야 하기 때문이다. ‘선한 것’과 ‘무엇을 위한 것’도 원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학문이 단순한 제작이나 생산과 관련된 것이 아님은, 최초로 철학을 시작한 이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분명하다.
사람들은 놀라움 때문에 철학을 시작했다. 지금도 그러하고, 옛날에도 그러했다. 처음에는 눈앞에 펼쳐진 낯설고 기이한 것들에 놀랐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점점 더 큰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예컨대 달에서 벌어지는 현상들, 태양과 별들에 관한 일, 그리고 우주 전체의 생성 같은 문제들이 그것이다. 놀라며 의문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신화란 놀라운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철학하기 시작한 이유가 무지를 피하고자 함이었다면, 분명 그들은 알기 위해, 곧 앎 그 자체를 위해 철학을 추구한 것이며, 어떤 실용적인 목적 때문은 아니었다.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그 사실이다. 거의 모든 생존에 필요한 것들이 갖추어진 이후에야, 삶의 여유와 관조를 위한 이러한 종류의 지혜가 비로소 탐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처음으로 철학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물질의 어떤 형상 안에 있는 것들이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그로부터 생겨나고, 맨 처음 그것에서 만들어지며, 마지막에는 그것으로 되돌아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본질은 유지되면서, 그 위에 성질들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그들은 만물의 스토이케이온원소 그리고 아르케근본 원리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들은 존재하는 것들이 실제로는 생성되거나 소멸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본성을 가진 것이 언제나 보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초로 철학하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은, 물질의 형태를 가진 것들만이 만물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생겨나고, 생성의 처음도 그것에서 비롯되며, 소멸할 때도 마지막에는 그로 되돌아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본질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성질이나 상태만 변화한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것을 만물의 스토이케이온원소이자 근본 아르케원리라고 불렀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실제로 어떤 것이 완전히 새로 생겨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자연적 바탕은 언제나 보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두고, 그가 단순히 새로 생겨났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아름다워지거나 음악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그가 새로 생겨났다고 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런 성질들을 잃었다고 해서 그가 사라졌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변화들 속에서도 ‘소크라테스’라는 실체의 바탕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자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른 모든 존재들 역시 본질적인 바탕이 남아 있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Α 2, 982b–983a.
토론하기
(1) 최초의 철학자들이 단순한 물질을 근원으로 생각한 이유를 찾아보고, 오늘날 과학의 설명과 비교해보자.
(2) 직접 ‘나만의 아르케’를 생각해 보고, 고대 철학자들과 요즘 과학자들이 어떤 점이 비슷하고 다른지 이야기해보자.
(3)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철학적인 질문이 우리 공동체의 공부나 토론 문화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함께 생각해보자.
해설읽기
왜 자연철학자들은 하나의 원리를 찾으려 했을까?
자연철학자들이 세계의 근원으로 단 하나의 원리, 곧 아르케archē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자연 현상 속에서 반복되는 어떤 공통된 질서를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를 보자. 잎을 모두 제거하면 기둥과 가지가 드러나는데, 그 구조는 다시 개별 가지의 형태에서, 심지어 한 잎의 잎맥 구조에서도 반복된다. 이와 같은 모양은 나무라는 한 생명체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개가 갈라져 내리는 방식, 혈관이 뻗어나가는 방식, 강줄기가 퍼지는 방식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전체 안에서 부분이 반복되고, 부분이 다시 전체와 닮아 있는 자연의 패턴은 마치 하나의 ‘틀’이 다양한 사물 속에서 재현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옛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 속에서 세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가 존재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신화적 설명과는 다른 성격을 띤다. 천둥은 제우스의 분노가 아니라 어떤 반복되는 원리에 따라 발생하는 자연 현상일 수 있다는 생각, 즉 자연을 자연 그 자체의 원인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각이 태동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1권(983b~984a)에서 이러한 자연철학자들이 존재의 원리를 찾으려 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이들이 오직 ‘질료인’만을 탐색했다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여전히 철학적 사유의 첫 출발점이자, 인간 이성이 세계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의 증거였다. 철학은 그렇게, 반복되는 자연의 모습에서 단일한 질서를 읽어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과학과 자연철학자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자연철학자들의 탐구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두 가지 점을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가설 설정과 검증의 체계성이다. 현대 과학은 실험과 측정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을 검증하거나 반증함으로써 이론을 발전시킨다. 반면 자연철학자들의 사유는 실험보다는 관찰과 직관에 의존했고, 논증보다는 설명적 주장을 펼쳤다. 그들의 주장에는 체계적인 실험 설계나 수학적 모델이 부재했다.
그러나 둘째로 주목할 점은, 그들의 철학이 관찰 경험에 기반한 접근이었다는 점이다. 탈레스는 강과 비에 주목해 ‘물’을 아르케로 제시했고, 아낙시메네스는 호흡과 증발, 응결 같은 자연 현상을 보고 ‘공기’를 만물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이들의 이론은 비록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검증되지 않았거나 과학적으로 부정확할 수 있지만, 여전히 직접적인 자연의 관찰에서 출발한 시도였다.
더 나아가 이것은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번개가 제우스의 무기가 아니라 구름과 대기의 작용이라고 상상하고, 계절 변화가 여신의 기분 변화 때문이 아니라 자연 안의 순환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 이 발상은 인류가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설명하려는 위대한 첫 걸음이었다. 신의 의지가 아닌, 자연의 원리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시도는 이후 과학적 탐구의 밑바탕을 형성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법칙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 첫걸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기원을 공부하는 것이 공동체에 어떤 도움이 될까?
자연철학자들이 던진 질문—“세상의 시작은 무엇인가?”—는 단지 오래전 과거의 호기심이 아니다. 이러한 질문은 공동체가 스스로를 성찰하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게 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단지 하나의 물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는지, 또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나 사회적 토론 속에서 이러한 ‘기원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생각의 출발점을 만드는 힘이 있다. 자연철학자들의 질문은 주어진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의심하고 다시 물으며 자신만의 사고를 형성하는 훈련이었다. “왜 그런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은 지적 자율성과 비판적 사고의 기초가 된다. 이는 오늘날 민주적인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핵심 역량이기도 하다.
둘째, 철학의 기원을 배우는 일은 우리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과학 개념, 논리 구조, 심지어 ‘합리성’이라는 단어조차도 이런 초기 사유의 전통에서 자라났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공동체 속 구성원으로서 이러한 지적 유산을 공유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문화적 소속감을 풍요롭게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의 생각에 도달했는가?”라는 물음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교육의 가장 깊은 가치 중 하나다.
요컨대, 자연철학자들의 질문은 오래된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미래를 설계하고 지혜롭게 토론하며, 다양한 사고를 존중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까지 뻗어 있다. 기원을 묻는 철학은 바로 공동체의 지성적 기반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질문이다.
키워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자연철학자, 아르케, 스토이케이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