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본문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쓴 『학자들에 대하여』 7권, 즉 『논리학자들에 대한 반박』의 한 부분으로, 고르기아스라는 인물이 쓴 『자연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 내용을 소개한 부분이다. 섹스투스는 고르기아스를 “진리의 기준이 없다”고 본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프로타고라스처럼 “사람마다 진리가 다르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고르기아스는 세 가지 주장을 했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존재한다면 그것이 ‘하나’인지 ‘여럿’인지로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고 한다. 둘째,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존재하는 것만 안다고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설령 알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전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달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말인데, 말은 사물과 같지 않고, 눈으로 본 것을 귀로 들을 수 없듯이 말로 사물을 그대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앞뒤로 섹스투스는 프로타고라스나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과 비교하며 이런 주장이 회의주의 전통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 설명한다.
고전본문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는 진리의 기준을 없앤 사람들과 같은 무리에 속했지만,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방식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자연 혹은 비존재에 대해서』라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논점을 확립한다. [A]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B] 둘째,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 [C] 셋째, 사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
[A] 그런 다음, 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검토한다. […]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동시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존재하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이거나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도 여럿도 아니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하나라면, 그것은 어떤 양이거나 연속적인 것이거나 크기를 갖거나 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어떤 양이라면 분할될 수 있고 연속적인 것이라도 잘려 나뉠 수 있다. 또 그것이 연속적인 것이라면 나뉘지 않을 리 없고 몸을 가졌다면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의 세 부분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다. 게다가 존재하는 것은 여럿도 아니다.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면 여럿도 아니며, 여럿은 하나인 것들의 조합이기 때문에 하나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여럿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
[B] 다음으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 사유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들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되는 것에는 반대되는 속성이 덧붙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에 사유된다는 속성이 붙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반드시 사유되지 않는다는 속성이 붙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합리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서 사유되는 것은 아니다. […]
[C] 또 파악하더라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만약 존재하는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 일반적으로 말해 감각 가능한 것으로서 외부에 놓여있는데, 보이는 것은 봄으로써, 들리는 것은 들음으로써 파악되지만 그 반대로는 불가하다면 이를 어떻게 타인에게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말과 더불어 소통하는데, 말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변의 타인들에게 존재하는 것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말을 전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들과는 다르다. 보이는 것이 들리는 것이 될 수 없고 그 역도 성립하지 않듯이, 외부에 놓인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의 말과 같을 수 없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학자들에 대하여』 VII권(=논리학자들에 대한 반박』 I권), 65–84
토론하기
(1)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를 세 개의 명제로 정리해보자.
(2)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참과 거짓을 나눌 수 있을까? 진리의 기준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기준에 대해서 말해보자.
(3)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진리의 기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해설읽기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다음의 세 명제들로 잘 알려져 있다.
I.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II.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
III.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
고르기아스의 주장들은 우리의 상식과 직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정을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것들은 지나치게 생생하고 풍부하다. 누구나 어떤 대상에 강하게 매료되어 하루 종일 그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을 때 전혀 공감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경우도 드물다. 그럼에도 고르기아스는 왜 그런 주장을 내세웠을까?
안타깝게도 고르기아스의 저술은 전해지지 않으며, 우리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논리학자들에 대한 반박』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섹스투스의 해설에 따르면, 고르기아스는 허무주의를 세 단계에 걸쳐 정당화한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이거나 여럿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는 양이나 연속성, 크기, 몸을 갖기 마련인데, 이들 모두 분할 가능하므로 하나는 결국 하나가 아니다. 여럿 역시 ‘하나’가 모여야 가능한데, 앞에서 ‘하나’가 부정되었으므로 여럿도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존재는 하나로도, 여럿으로도 설명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될 수 없다. 사유의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라 가정하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이나 아이언맨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사유될 수 있으므로, ‘사유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거짓이다.
셋째, 존재하는 것을 사유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전달될 수 없다. 말은 존재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존재는 구체적 실체지만, 말은 그것을 나타내는 소리나 기호일 뿐이다. 태양은 동일한 대상이지만, 그것을 부르는 말은 언어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대상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사유를 드러내지 않으며, 결국 말은 존재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
진리의 기준에 대한 여러 입장들
논리학에서 진리기준론은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려는 이론이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며 여러 입장을 발전시켜 왔다. 그중 대표적인 네 가지 입장은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입장은 ‘대응설’이다. 명제가 현실과 일치할 때 참이라는 입장으로, “사람들이 테니스장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명제가 참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래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면 참”이라고 하여 이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고, 아퀴나스와 러셀이 이를 계승하였다. 다만 현실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적용이 어렵다는 한계를 갖는다. 정합설은 진리를 논리적 일관성과 비모순성으로 판단한다.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체계 내에서 모순이 없을 경우 참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브래들리와 헤겔은 이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일관된 체계가 현실과 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실용설은 진리를 실제 작용 효과에 따라 판단한다. 명제가 유용하게 작동하면 참이라는 입장이다. 퍼스와 듀이는 진리를 장기적 검증과 경험적 유용성에 두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진리의 절대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유용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합의설은 집단적 수용을 진리의 기준으로 본다. 사회적 합의가 진리 성립에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 하버마스는 왜곡 없는 담론 과정을 통해 도달한 합의를 기준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참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이처럼 진리기준론은 참과 거짓의 기준을 설정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담고 있으며, 각 이론은 고유한 강점과 한계를 지닌다. 진리의 본질을 하나의 틀로 설명하기는 어렵기에, 이 이론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진리의 근간을 흔들었던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진리 기준에 대해 지나치게 과격한 함의를 담고 있어,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했던 당시 철학자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고르기아스가 살았던 시대는 논리학이 아직 완전히 체계화되지 않았으나, 논리적 사고에 대한 중요한 아이디어들이 여러 텍스트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오늘날 논리학의 세 가지 기본 원리로 불리는 동일률(A는 A이다 : 한 사물은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원리), 모순률(A는 A가 아니면서 동시에 A일 수 없다 : 하나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원리), 배중률(A이거나 A가 아니다 : 어떤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 중 하나일 뿐, 중간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확인되며, 이 세 원리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자 철학적·이성적 사유의 근거로 기능했다. 그런데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이러한 원리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것이다.
고르기아스의 첫 번째 명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동일률에 대한 도전이다. 동일률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 한다. 존재하는 것(A)은 존재하는 것(A)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첫 번째 명제에 의하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동일률의 부정에 따라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도 부정되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명제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겨냥하는 바도 첫 번째 명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유가 바람직한 철학적 사유일 수 있으려면 사유의 대상으로서 굳건하고 온전한 실체를 가진 존재가 요구된다. 현실 속에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나 허깨비와 같은 것을 쫓는 사유를 진지한 학문적 사유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르기아스의 첫 번째 명제로부터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조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도출할 수 있었다. 결국 진지한 철학적 사유는 불가능하며 이것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리키는 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명제는 어떤가. 고르기아스의 세 번째 명제는 '어떤 것이 사유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서 이것은 말, 즉 언어와 대상의 본질적 차이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반영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이 철학과 학문의 사유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일까? 철학적 사유든 학문적 사유든 사유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를 매개로 작동한다. 그런데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전달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존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철학적·학문적 사유란 애당초 존재를 올바르게 반영할 수 없는 부질없는 시도였던 것일 수 있다.
끝내 고르기아스는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그것이 추구하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의심한 것이다. 고르기아스를 비롯해 소피스트들이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참과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란 불가능하다. 오직 가능한 것이 있다면 상대적 진리의 추구 혹은 각자의 의견을 참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그들은 참에 대한 추구없이 전방위적 설득을 추구했고 쟁론에서의 무조건적 승리를 지향했다. 결국, 고르기아스의 결론은 철학적 사유가 추구하는 보편적 진리, 즉 참은 존재하지 않으며, 참을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상대적 진리나 각자의 의견을 참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이 사유의 연장선에서 소피스트들은 참을 추구하기보다는 설득과 쟁론에서 승리를 목표로 했다.
키워드
고르기아스, 허무주의, 진리기준론, 소피스트,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전후맥락
본문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쓴 『학자들에 대하여』 7권, 즉 『논리학자들에 대한 반박』의 한 부분으로, 고르기아스라는 인물이 쓴 『자연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 내용을 소개한 부분이다. 섹스투스는 고르기아스를 “진리의 기준이 없다”고 본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프로타고라스처럼 “사람마다 진리가 다르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고르기아스는 세 가지 주장을 했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존재한다면 그것이 ‘하나’인지 ‘여럿’인지로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모순이 생긴다고 한다. 둘째,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존재하는 것만 안다고 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알 수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설령 알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전할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달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말인데, 말은 사물과 같지 않고, 눈으로 본 것을 귀로 들을 수 없듯이 말로 사물을 그대로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앞뒤로 섹스투스는 프로타고라스나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과 비교하며 이런 주장이 회의주의 전통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는지 설명한다.
고전본문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는 진리의 기준을 없앤 사람들과 같은 무리에 속했지만,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방식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자연 혹은 비존재에 대해서』라는 작품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논점을 확립한다. [A]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B] 둘째,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 [C] 셋째, 사유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
[A] 그런 다음, 그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검토한다. […]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동시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 게다가 존재하는 것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이거나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도 여럿도 아니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하나라면, 그것은 어떤 양이거나 연속적인 것이거나 크기를 갖거나 몸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이 어떤 양이라면 분할될 수 있고 연속적인 것이라도 잘려 나뉠 수 있다. 또 그것이 연속적인 것이라면 나뉘지 않을 리 없고 몸을 가졌다면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의 세 부분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다. 게다가 존재하는 것은 여럿도 아니다.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면 여럿도 아니며, 여럿은 하나인 것들의 조합이기 때문에 하나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여럿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
[B] 다음으로,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은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 사유되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들이라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은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반대되는 것에는 반대되는 속성이 덧붙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는 것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에 사유된다는 속성이 붙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반드시 사유되지 않는다는 속성이 붙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합리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서 사유되는 것은 아니다. […]
[C] 또 파악하더라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 만약 존재하는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 일반적으로 말해 감각 가능한 것으로서 외부에 놓여있는데, 보이는 것은 봄으로써, 들리는 것은 들음으로써 파악되지만 그 반대로는 불가하다면 이를 어떻게 타인에게 알려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말과 더불어 소통하는데, 말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변의 타인들에게 존재하는 것들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말을 전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기존의 존재하는 것들과는 다르다. 보이는 것이 들리는 것이 될 수 없고 그 역도 성립하지 않듯이, 외부에 놓인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외부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의 말과 같을 수 없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학자들에 대하여』 VII권(=논리학자들에 대한 반박』 I권), 65–84
토론하기
(1)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를 세 개의 명제로 정리해보자.
(2)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참과 거짓을 나눌 수 있을까? 진리의 기준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생각해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기준에 대해서 말해보자.
(3)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진리의 기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해설읽기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다음의 세 명제들로 잘 알려져 있다.
I.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II.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을 사유할 수 없다.
III. 그것을 사유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전달할 수 없다.
고르기아스의 주장들은 우리의 상식과 직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정을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는 것들은 지나치게 생생하고 풍부하다. 누구나 어떤 대상에 강하게 매료되어 하루 종일 그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했을 때 전혀 공감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경우도 드물다. 그럼에도 고르기아스는 왜 그런 주장을 내세웠을까?
안타깝게도 고르기아스의 저술은 전해지지 않으며, 우리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논리학자들에 대한 반박』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섹스투스의 해설에 따르면, 고르기아스는 허무주의를 세 단계에 걸쳐 정당화한다.
첫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이거나 여럿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는 양이나 연속성, 크기, 몸을 갖기 마련인데, 이들 모두 분할 가능하므로 하나는 결국 하나가 아니다. 여럿 역시 ‘하나’가 모여야 가능한데, 앞에서 ‘하나’가 부정되었으므로 여럿도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존재는 하나로도, 여럿으로도 설명되지 않으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될 수 없다. 사유의 대상은 존재하는 것이라 가정하지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유니콘이나 아이언맨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도 얼마든지 사유될 수 있으므로, ‘사유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거짓이다.
셋째, 존재하는 것을 사유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전달될 수 없다. 말은 존재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존재는 구체적 실체지만, 말은 그것을 나타내는 소리나 기호일 뿐이다. 태양은 동일한 대상이지만, 그것을 부르는 말은 언어와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대상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이름은 사유를 드러내지 않으며, 결국 말은 존재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
진리의 기준에 대한 여러 입장들
논리학에서 진리기준론은 어떤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려는 이론이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며 여러 입장을 발전시켜 왔다. 그중 대표적인 네 가지 입장은 다음과 같다.
가장 오래된 입장은 ‘대응설’이다. 명제가 현실과 일치할 때 참이라는 입장으로, “사람들이 테니스장에서 운동하고 있다”는 명제가 참이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래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면 참”이라고 하여 이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고, 아퀴나스와 러셀이 이를 계승하였다. 다만 현실을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적용이 어렵다는 한계를 갖는다. 정합설은 진리를 논리적 일관성과 비모순성으로 판단한다.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체계 내에서 모순이 없을 경우 참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브래들리와 헤겔은 이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일관된 체계가 현실과 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이 제기된다. 실용설은 진리를 실제 작용 효과에 따라 판단한다. 명제가 유용하게 작동하면 참이라는 입장이다. 퍼스와 듀이는 진리를 장기적 검증과 경험적 유용성에 두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진리의 절대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유용성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합의설은 집단적 수용을 진리의 기준으로 본다. 사회적 합의가 진리 성립에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 하버마스는 왜곡 없는 담론 과정을 통해 도달한 합의를 기준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다수의 의견이 언제나 참은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이처럼 진리기준론은 참과 거짓의 기준을 설정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담고 있으며, 각 이론은 고유한 강점과 한계를 지닌다. 진리의 본질을 하나의 틀로 설명하기는 어렵기에, 이 이론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진리의 근간을 흔들었던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진리 기준에 대해 지나치게 과격한 함의를 담고 있어,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했던 당시 철학자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고르기아스가 살았던 시대는 논리학이 아직 완전히 체계화되지 않았으나, 논리적 사고에 대한 중요한 아이디어들이 여러 텍스트에서 산발적으로 등장하던 시기였다. 오늘날 논리학의 세 가지 기본 원리로 불리는 동일률(A는 A이다 : 한 사물은 그 자체와 동일하다는 원리), 모순률(A는 A가 아니면서 동시에 A일 수 없다 : 하나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는 원리), 배중률(A이거나 A가 아니다 : 어떤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 중 하나일 뿐, 중간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확인되며, 이 세 원리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자 철학적·이성적 사유의 근거로 기능했다. 그런데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는 이러한 원리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것이다.
고르기아스의 첫 번째 명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동일률에 대한 도전이다. 동일률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 한다. 존재하는 것(A)은 존재하는 것(A)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기아스의 첫 번째 명제에 의하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존재하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동일률의 부정에 따라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도 부정되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명제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겨냥하는 바도 첫 번째 명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유가 바람직한 철학적 사유일 수 있으려면 사유의 대상으로서 굳건하고 온전한 실체를 가진 존재가 요구된다. 현실 속에 실재하지 않는 신기루나 허깨비와 같은 것을 쫓는 사유를 진지한 학문적 사유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르기아스의 첫 번째 명제로부터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조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도출할 수 있었다. 결국 진지한 철학적 사유는 불가능하며 이것이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유될 수 없다'는 명제가 가리키는 바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명제는 어떤가. 고르기아스의 세 번째 명제는 '어떤 것이 사유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서 이것은 말, 즉 언어와 대상의 본질적 차이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반영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그것이 철학과 학문의 사유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일까? 철학적 사유든 학문적 사유든 사유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어를 매개로 작동한다. 그런데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전달할 수 없었고 따라서 존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철학적·학문적 사유란 애당초 존재를 올바르게 반영할 수 없는 부질없는 시도였던 것일 수 있다.
끝내 고르기아스는 철학적 사유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그것이 추구하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의심한 것이다. 고르기아스를 비롯해 소피스트들이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참과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란 불가능하다. 오직 가능한 것이 있다면 상대적 진리의 추구 혹은 각자의 의견을 참으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에서 그들은 참에 대한 추구없이 전방위적 설득을 추구했고 쟁론에서의 무조건적 승리를 지향했다. 결국, 고르기아스의 결론은 철학적 사유가 추구하는 보편적 진리, 즉 참은 존재하지 않으며, 참을 추구하는 철학적 사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상대적 진리나 각자의 의견을 참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이 사유의 연장선에서 소피스트들은 참을 추구하기보다는 설득과 쟁론에서 승리를 목표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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