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르기아스』는 말과 권력, 정의와 행복의 관계를 다룬 플라톤의 대표적인 수사학 비판 대화편이다. 초반부에서는 고르기아스, 폴로스 등과의 대화를 통해 수사술의 성격과 그 도덕적 정당성을 문제 삼은 소크라테스는, 후반부에서 보다 강력한 상대자인 칼리클레스를 마주한다. 칼리클레스는 앞선 논자들이 도덕과 규범의 이름으로 현실 권력을 비판하는 데 그쳤다면, 그와는 반대로 자연에 의한 강자의 지배와 욕망 충족의 정당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한다. 그는 통상적인 도덕과 정의가 다수의 약자들이 강자를 억제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 억제장치에 불과하다고 보고, 강자에게는 본래 더 많이 지배하고 더 많이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는 곧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절제와 자제보다는 무제한적 욕망의 충족이 진정한 덕과 행복이라고 보며, 소크라테스가 옹호하는 전통적 덕윤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고대 윤리사상 안에서 자연주의적 윤리와 현실주의적 정치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후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적 삶을 옹호하고 수사술을 반박하는 종국적 서사의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
고전본문
...실상 당신께서는, 소크라테스 선생.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씀해놓고 천박하고 대중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선생이 끌고 가는 것들은 본성(자연)상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관습(법)상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러한 것들, 곧 본성과 관습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누군가 부끄러워 말하려던 것을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모순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선생님 교묘히 간파하고 속임수를 쓰시는 겁니다. 누군가 관습에 따라 말하면, 그대는 본성에 따라 되묻고, 누군가 본성에 따라 말하면, 그대는 관습에 따라 되묻고 계시지요. 방금 전에도 그랬듯이, 불의한 것과 불의를 당하는 것에 관하여, 폴로스가 관습의 측면에서 불의를 행하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고 말하였을 때, 선생께서는 논변을 본성의 측면으로 끌고 가셨죠. 본성의 측면에서는 더 수치스럽고 더 나쁜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이고, 관습의 측면에서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더 나쁜 것이니까요.
실상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남자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을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랍니다. 그는 불의를 당하고 모욕을 겪으면서도 스스로를 도울 수도 없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없는 자니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법과 관습을 제정한 자들은 대다수의 약자들이라고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비난할 것은 비난합니다.
약자들은 강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많이 갖지 못하도록 겁을 주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을 수치스럽고 부정하다고 말하고, 그것을 불의라 부르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을 곧 불의라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열등하니까, 평등하게 갖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법적으로는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부정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불리며, 그것을 불의라 일컫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연 자체가 더 나은 자가 더 못한 자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정의이고 더 유능한 자가 더 무능한 자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정의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여러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나, 인간 사회의 모든 도시와 부족들 사이에서 보더라도, 정의는 이와 같이 판단되고 있습니다. 즉,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더 많이 갖는 것이 정의라고 말입니다...
플라톤, 『고르기아스』, 483a-d.
토론하기
(1) 칼리클레스는 왜 ‘욕망의 충족’을 ‘덕’이라고 주장하는가? 그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이 만든 도덕’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말해보자.
(2)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가? 반대로 절제나 자제가 더 중요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돌아보자.
(3) 현대 사회에서도 ‘힘 있는 자’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욕망을 실현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한 경향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말해보자.
해설읽기
칼리클레스는 왜 욕망의 충족을 덕이라고 말했을까?
칼리클레스는 진정한 덕은 욕망을 억제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마음껏 충족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절제나 자제를 미덕이라 보는 전통적 윤리관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인간은 본래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억누르는 삶은 비자연적이고 비참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듯, 욕망이 생기면 그것을 채우는 것이 곧 자연스럽고 건강한 삶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기존의 그리스 도덕 전통과 철저히 충돌한다. 그리스 윤리에서 덕은 일반적으로 ‘자기 통제’와 ‘영혼의 질서’로 설명된다. 하지만 칼리클레스는 그런 자기 통제가 약자의 덕목일 뿐이라며, 진짜 강자는 오히려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좋은 삶’은 욕망의 해방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과 지성은 곧 자연이 부여한 우월성이다.
욕망을 제한하지 않는 삶이 정말로 자유롭고 행복할까?
욕망을 제한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겉으로는 마음껏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없는 욕망에 따라 살다 보면 오히려 욕망의 노예가 되기 쉽다. 갈망은 계속해서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되고, 만족은 금세 사라진다. 그런 삶은 일시적으로 강해 보일 수 있지만, 안정되거나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긴 어렵다.
고대 철학자들은 자유를 단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욕망을 통제할 수 없으면 결국 외부 상황이나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 절제와 자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따라서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매혹적이지만, 진정한 자유와는 멀어질 위험이 크다.
오늘날에도 강자가 더 많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할까?
현대 사회에도 힘 있는 자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많은 자원에 접근하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현실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경쟁에서 이긴 대가이자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단지 힘센 사람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구조가 아니다. 모두가 공정하게 기회를 누리고, 어떤 이의 욕망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의 조건이다. 따라서 칼리클레스가 말한 ‘강자의 권리’는 오늘날 공동체 윤리와 자주 충돌한다. 사회는 개인의 욕망 실현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질서의 구축을 중심에 두고 움직인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를 어떻게 반박했을까?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주장 속에 암묵적으로 깔린 쾌락주의적 전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칼리클레스는 불의한 사람이 더 강하고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쾌락과 이익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인간 영혼을 세 부분, 곧 이성logistikon, 기개thymoeides, 욕구epithymētikon으로 나누고, 이들 가운데 어느 부분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구분한다. 이성적 인간은 진리 탐구와 이성의 통치를 통해 삶의 가치를 실현하며, 기개적 인간은 명예를 추구하고, 욕구적 인간은 물질적 이익과 감각적 쾌락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가 추구하는 불의한 자의 행복이 욕구적 인간의 쾌락주의적 삶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는 이때 세 유형의 삶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탁월한지를 판단하기 위해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경험의 폭이다. 철학자는 세 삶 모두를 경험해 본 유일한 자로서, 감각적 쾌락, 명예, 진리탐구 모두를 이해하고 판단할 자격이 있다. 둘째, 판단 주체의 성격이다.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쾌락만 알고 다른 삶의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지만, 철학자는 이성에 기반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셋째, 쾌락의 질 그 자체다. 단순한 욕구 충족은 순간적이고 피상적이지만, 이성적 활동에서 오는 기쁨은 지속적이고 더 깊은 만족을 준다.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철학자가 가진 경험과 이성의 우월성, 그리고 더 고귀한 쾌락의 성격을 근거로, 이성적 삶이 다른 두 삶보다 본질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행복이란 단순히 쾌락의 총합이 아니라, 영혼의 세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 곧 정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따라서 칼리클레스가 말한 불의한 자의 쾌락은 참된 행복이 될 수 없으며, 그 삶은 외견상 강하고 자유로워 보일지언정 실제로는 영혼이 내적 분열을 겪는 가장 불행한 삶이다. 이 논증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쾌락주의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철학적으로 드러내고, 진정한 행복과 정의의 연관성을 설득력 있게 변호한다.
키워드
플라톤, 국가, 정의, 소크라테스, 칼리클레스
전후맥락
『고르기아스』는 말과 권력, 정의와 행복의 관계를 다룬 플라톤의 대표적인 수사학 비판 대화편이다. 초반부에서는 고르기아스, 폴로스 등과의 대화를 통해 수사술의 성격과 그 도덕적 정당성을 문제 삼은 소크라테스는, 후반부에서 보다 강력한 상대자인 칼리클레스를 마주한다. 칼리클레스는 앞선 논자들이 도덕과 규범의 이름으로 현실 권력을 비판하는 데 그쳤다면, 그와는 반대로 자연에 의한 강자의 지배와 욕망 충족의 정당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한다. 그는 통상적인 도덕과 정의가 다수의 약자들이 강자를 억제하기 위해 만든 인위적 억제장치에 불과하다고 보고, 강자에게는 본래 더 많이 지배하고 더 많이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는 곧 자연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절제와 자제보다는 무제한적 욕망의 충족이 진정한 덕과 행복이라고 보며, 소크라테스가 옹호하는 전통적 덕윤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한다.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고대 윤리사상 안에서 자연주의적 윤리와 현실주의적 정치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며, 이후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적 삶을 옹호하고 수사술을 반박하는 종국적 서사의 중요한 배경을 이룬다.
고전본문
...실상 당신께서는, 소크라테스 선생. 진리를 추구한다고 말씀해놓고 천박하고 대중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선생이 끌고 가는 것들은 본성(자연)상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관습(법)상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러한 것들, 곧 본성과 관습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누군가 부끄러워 말하려던 것을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모순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선생님 교묘히 간파하고 속임수를 쓰시는 겁니다. 누군가 관습에 따라 말하면, 그대는 본성에 따라 되묻고, 누군가 본성에 따라 말하면, 그대는 관습에 따라 되묻고 계시지요. 방금 전에도 그랬듯이, 불의한 것과 불의를 당하는 것에 관하여, 폴로스가 관습의 측면에서 불의를 행하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고 말하였을 때, 선생께서는 논변을 본성의 측면으로 끌고 가셨죠. 본성의 측면에서는 더 수치스럽고 더 나쁜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이고, 관습의 측면에서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더 나쁜 것이니까요.
실상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남자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을 노예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랍니다. 그는 불의를 당하고 모욕을 겪으면서도 스스로를 도울 수도 없고,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없는 자니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법과 관습을 제정한 자들은 대다수의 약자들이라고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들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비난할 것은 비난합니다.
약자들은 강자들이 자기들보다 더 많이 갖지 못하도록 겁을 주기 위해,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을 수치스럽고 부정하다고 말하고, 그것을 불의라 부르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을 곧 불의라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열등하니까, 평등하게 갖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법적으로는 더 많이 가지려는 것이 부정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불리며, 그것을 불의라 일컫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연 자체가 더 나은 자가 더 못한 자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정의이고 더 유능한 자가 더 무능한 자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이 정의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여러 부분에서 드러납니다. 다른 동물들 사이에서나, 인간 사회의 모든 도시와 부족들 사이에서 보더라도, 정의는 이와 같이 판단되고 있습니다. 즉,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더 많이 갖는 것이 정의라고 말입니다...
플라톤, 『고르기아스』, 483a-d.
토론하기
(1) 칼리클레스는 왜 ‘욕망의 충족’을 ‘덕’이라고 주장하는가? 그가 말하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이 만든 도덕’은 어떻게 구분되는지 말해보자.
(2) 자신의 욕망을 제한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가? 반대로 절제나 자제가 더 중요한 순간은 언제였는지 돌아보자.
(3) 현대 사회에서도 ‘힘 있는 자’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욕망을 실현할 권리가 있다고 보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러한 경향은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말해보자.
해설읽기
칼리클레스는 왜 욕망의 충족을 덕이라고 말했을까?
칼리클레스는 진정한 덕은 욕망을 억제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강력한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마음껏 충족시키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절제나 자제를 미덕이라 보는 전통적 윤리관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인간은 본래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억누르는 삶은 비자연적이고 비참하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듯, 욕망이 생기면 그것을 채우는 것이 곧 자연스럽고 건강한 삶이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기존의 그리스 도덕 전통과 철저히 충돌한다. 그리스 윤리에서 덕은 일반적으로 ‘자기 통제’와 ‘영혼의 질서’로 설명된다. 하지만 칼리클레스는 그런 자기 통제가 약자의 덕목일 뿐이라며, 진짜 강자는 오히려 자기 욕망을 숨기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좋은 삶’은 욕망의 해방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과 지성은 곧 자연이 부여한 우월성이다.
욕망을 제한하지 않는 삶이 정말로 자유롭고 행복할까?
욕망을 제한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유는 아니다. 겉으로는 마음껏 원하는 것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없는 욕망에 따라 살다 보면 오히려 욕망의 노예가 되기 쉽다. 갈망은 계속해서 더 큰 자극을 요구하게 되고, 만족은 금세 사라진다. 그런 삶은 일시적으로 강해 보일 수 있지만, 안정되거나 조화로운 상태에 도달하긴 어렵다.
고대 철학자들은 자유를 단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았다. 욕망을 통제할 수 없으면 결국 외부 상황이나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 절제와 자제는 인간의 자유를 제약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따라서 칼리클레스의 주장은 매혹적이지만, 진정한 자유와는 멀어질 위험이 크다.
오늘날에도 강자가 더 많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 존재할까?
현대 사회에도 힘 있는 자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다 많은 자원에 접근하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현실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경쟁에서 이긴 대가이자 당연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단지 힘센 사람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움직이는 구조가 아니다. 모두가 공정하게 기회를 누리고, 어떤 이의 욕망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의 조건이다. 따라서 칼리클레스가 말한 ‘강자의 권리’는 오늘날 공동체 윤리와 자주 충돌한다. 사회는 개인의 욕망 실현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질서의 구축을 중심에 두고 움직인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를 어떻게 반박했을까?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의 주장 속에 암묵적으로 깔린 쾌락주의적 전제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칼리클레스는 불의한 사람이 더 강하고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쾌락과 이익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인간 영혼을 세 부분, 곧 이성logistikon, 기개thymoeides, 욕구epithymētikon으로 나누고, 이들 가운데 어느 부분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구분한다. 이성적 인간은 진리 탐구와 이성의 통치를 통해 삶의 가치를 실현하며, 기개적 인간은 명예를 추구하고, 욕구적 인간은 물질적 이익과 감각적 쾌락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가 추구하는 불의한 자의 행복이 욕구적 인간의 쾌락주의적 삶에 해당한다고 본다. 그는 이때 세 유형의 삶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탁월한지를 판단하기 위해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 경험의 폭이다. 철학자는 세 삶 모두를 경험해 본 유일한 자로서, 감각적 쾌락, 명예, 진리탐구 모두를 이해하고 판단할 자격이 있다. 둘째, 판단 주체의 성격이다. 감각적 쾌락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 쾌락만 알고 다른 삶의 가치를 판단하지 못하지만, 철학자는 이성에 기반한 평가를 할 수 있다. 셋째, 쾌락의 질 그 자체다. 단순한 욕구 충족은 순간적이고 피상적이지만, 이성적 활동에서 오는 기쁨은 지속적이고 더 깊은 만족을 준다.
소크라테스는 이처럼 철학자가 가진 경험과 이성의 우월성, 그리고 더 고귀한 쾌락의 성격을 근거로, 이성적 삶이 다른 두 삶보다 본질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행복이란 단순히 쾌락의 총합이 아니라, 영혼의 세 부분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 곧 정의로운 상태라고 말한다. 따라서 칼리클레스가 말한 불의한 자의 쾌락은 참된 행복이 될 수 없으며, 그 삶은 외견상 강하고 자유로워 보일지언정 실제로는 영혼이 내적 분열을 겪는 가장 불행한 삶이다. 이 논증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쾌락주의를 삶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철학적으로 드러내고, 진정한 행복과 정의의 연관성을 설득력 있게 변호한다.
키워드
플라톤, 국가, 정의, 소크라테스, 칼리클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