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일리아스』 제9권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된 그리스 진영이 트로이군의 공세에 밀리며 위기에 빠진 시점에서 시작된다. 아가멤논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사절단을 보낸다. 오뒷세우스와 포이닉스의 연설이 실패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아이아스가 아킬레우스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수사적 기교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연설은 짧고 담백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주는 무게와 도덕적 신뢰가 설득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그는 아킬레우스를 '동료 전사'로, '공동체의 일부'로서 부르고, 그와 함께한 전장의 연대를 상기시키며 설득의 마지막 끈을 당긴다. 이 장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설득의 세 수단 중 에토스가 말 그 자체보다 앞설 수 있는 경우를 보여주는 고대 문학의 진귀한 사례다.
고전본문
“...아킬레우스여,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그 누구도 당신이 전장에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우리 역시 아가멤논의 처사가 옳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전쟁의 운명이 그대의 손에 달려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기에, 이렇게 찾아왔다. 연설은 길게 하지 않겠다. 우리는 당신을 설득하러 온 자들이고, 그대는 우리 동료 전사이자 형제 같은 이다. 당신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 우리의 말이 가닿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우 슬플 것이다. 우리도 사람이고, 그리스 군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전장은 불길 속에 휩싸였고, 헥토르는 담대하게 그리스 진영을 몰아붙이고 있다. 파트로클로스는 살아 있고, 모든 전우들은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만일 그대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무너질 것이다.
전리품이 무슨 소용인가? 여인의 문제로 전장을 버리고, 동료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명예인가? 그대는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렇게 요청할 수밖에 없다. 말이 아니라, 전장에서의 행동으로 그대는 진정한 명예를 다시 세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면, 그리스 진영은 희망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가 전한 이 모든 말이 그대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 아이아스는 무거운 방패를 들고 그대와 함께 전장을 지켰던 자로서, 오늘 이 마지막 말만을 남긴다. 동료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9권 624–642
(요약·및 의역을 포함함)
토론하기
(1) 아이아스는 길지 않은 연설 속에서 아킬레우스를 어떻게 설득하려 했는가? 그의 발언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설득의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2) 당신은 일상 속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신뢰나 인격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설득당한 경험이 있는가? 그 상황에서 어떤 요소가 작용했는지 설명해보자.
(3) 학교, 공동체, 또는 사회적 지도자들의 발언 속에서 인격이나 평판이 설득력의 기반이 된 사례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효과는 무엇이었는지 함께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아이아스의 연설은 『일리아스』 제9권에서 수사학적으로 가장 짧고 단순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장황한 논리도, 감정적 서사도 동원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아스는 자신의 인격, 명예, 그리고 그동안 공동체 안에서 쌓아온 신뢰를 통해 설득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제1권에서 설득의 세 수단 중 하나인 에토스를 “연설 속에서 드러나는 화자의 인격”이라고 정의하면서, 그것이 설득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아이아스의 연설은 바로 그 에토스가 말 자체보다 앞서는 설득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보기 드문 장면이다.
그의 말은 짧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전장에서 함께 싸워온 전우로서의 연대감, 공동체를 향한 책임 의식, 아킬레우스를 향한 고요한 간청이 담겨 있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논박하지 않으며, 아가멤논의 보상안을 다시 강조하지도 않는다. 대신, 아킬레우스의 결정이 동료들에게 미칠 파장과, 그로 인해 전체 그리스 진영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담담히 상기시킨다. 이처럼 아이아스는 도덕적 압박 없이 윤리적 자각을 유도하는 설득 전략을 구사하고 있으며, 그 효과는 말의 길이보다 말의 무게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아이아스의 에토스는 그의 전사로서의 위상, 용맹, 침착함, 정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는 말의 수로 설득하지 않고, 말 이면의 신뢰 자본으로 설득하는 인물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설득의 성공이 “연설자의 성품이 청중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 그가 침묵하거나 간결하게 말하는 방식은 단지 말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수사적 절제rhētorikē enkrateia라는 실천적 선택이다. 아이아스는 설득에 실패하더라도 품격을 잃지 않으며, 연설이란 곧 ‘말로 청중을 움직이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침묵으로도 말하는 예술’임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현대의 수사학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오늘날 정치, 교육, 조직 등 여러 공동체에서 ‘많이 말하는 사람’보다 ‘신뢰받는 사람’이 더 설득력 있게 작용하는 사례는 흔하다. 말의 수보다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 그 말이 어떤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가가 설득력을 결정짓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아이아스의 연설은 설득이 단지 기술이 아니라, 축적된 윤리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고대 수사학의 본질을 압축해 보여준다.
키워드
호메로스, 일리아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아이아스, 에토스
전후맥락
『일리아스』 제9권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의 갈등으로 분열된 그리스 진영이 트로이군의 공세에 밀리며 위기에 빠진 시점에서 시작된다. 아가멤논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막대한 보상을 약속하고 사절단을 보낸다. 오뒷세우스와 포이닉스의 연설이 실패로 돌아가고, 마지막으로 아이아스가 아킬레우스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수사적 기교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연설은 짧고 담백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주는 무게와 도덕적 신뢰가 설득의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그는 아킬레우스를 '동료 전사'로, '공동체의 일부'로서 부르고, 그와 함께한 전장의 연대를 상기시키며 설득의 마지막 끈을 당긴다. 이 장면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설득의 세 수단 중 에토스가 말 그 자체보다 앞설 수 있는 경우를 보여주는 고대 문학의 진귀한 사례다.
고전본문
“...아킬레우스여,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히고 우리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그 누구도 당신이 전장에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우리 역시 아가멤논의 처사가 옳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전쟁의 운명이 그대의 손에 달려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우리는 당신을 진심으로 아끼기에, 이렇게 찾아왔다. 연설은 길게 하지 않겠다. 우리는 당신을 설득하러 온 자들이고, 그대는 우리 동료 전사이자 형제 같은 이다. 당신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지금, 우리의 말이 가닿지 못한다면 우리는 매우 슬플 것이다. 우리도 사람이고, 그리스 군의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전장은 불길 속에 휩싸였고, 헥토르는 담대하게 그리스 진영을 몰아붙이고 있다. 파트로클로스는 살아 있고, 모든 전우들은 그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만일 그대가 나서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음 앞에 무력하게 무너질 것이다.
전리품이 무슨 소용인가? 여인의 문제로 전장을 버리고, 동료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명예인가? 그대는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이렇게 요청할 수밖에 없다. 말이 아니라, 전장에서의 행동으로 그대는 진정한 명예를 다시 세울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면, 그리스 진영은 희망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가 전한 이 모든 말이 그대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 아이아스는 무거운 방패를 들고 그대와 함께 전장을 지켰던 자로서, 오늘 이 마지막 말만을 남긴다. 동료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9권 624–642
(요약·및 의역을 포함함)
토론하기
(1) 아이아스는 길지 않은 연설 속에서 아킬레우스를 어떻게 설득하려 했는가? 그의 발언과 태도에서 드러나는 설득의 핵심 요소는 무엇인가?
(2) 당신은 일상 속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신뢰나 인격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설득당한 경험이 있는가? 그 상황에서 어떤 요소가 작용했는지 설명해보자.
(3) 학교, 공동체, 또는 사회적 지도자들의 발언 속에서 인격이나 평판이 설득력의 기반이 된 사례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효과는 무엇이었는지 함께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아이아스의 연설은 『일리아스』 제9권에서 수사학적으로 가장 짧고 단순하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는 장황한 논리도, 감정적 서사도 동원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아스는 자신의 인격, 명예, 그리고 그동안 공동체 안에서 쌓아온 신뢰를 통해 설득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제1권에서 설득의 세 수단 중 하나인 에토스를 “연설 속에서 드러나는 화자의 인격”이라고 정의하면서, 그것이 설득에서 가장 강력한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아이아스의 연설은 바로 그 에토스가 말 자체보다 앞서는 설득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문학적으로 보여주는 보기 드문 장면이다.
그의 말은 짧고 절제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전장에서 함께 싸워온 전우로서의 연대감, 공동체를 향한 책임 의식, 아킬레우스를 향한 고요한 간청이 담겨 있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논박하지 않으며, 아가멤논의 보상안을 다시 강조하지도 않는다. 대신, 아킬레우스의 결정이 동료들에게 미칠 파장과, 그로 인해 전체 그리스 진영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담담히 상기시킨다. 이처럼 아이아스는 도덕적 압박 없이 윤리적 자각을 유도하는 설득 전략을 구사하고 있으며, 그 효과는 말의 길이보다 말의 무게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아이아스의 에토스는 그의 전사로서의 위상, 용맹, 침착함, 정직함에서 비롯된다. 그는 말의 수로 설득하지 않고, 말 이면의 신뢰 자본으로 설득하는 인물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와 같이, 설득의 성공이 “연설자의 성품이 청중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과 일치한다. 그가 침묵하거나 간결하게 말하는 방식은 단지 말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수사적 절제rhētorikē enkrateia라는 실천적 선택이다. 아이아스는 설득에 실패하더라도 품격을 잃지 않으며, 연설이란 곧 ‘말로 청중을 움직이는 예술’이면서 동시에 ‘침묵으로도 말하는 예술’임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현대의 수사학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 오늘날 정치, 교육, 조직 등 여러 공동체에서 ‘많이 말하는 사람’보다 ‘신뢰받는 사람’이 더 설득력 있게 작용하는 사례는 흔하다. 말의 수보다 말하는 이가 누구인가, 그 말이 어떤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어떤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가가 설득력을 결정짓는 핵심이 되는 것이다. 아이아스의 연설은 설득이 단지 기술이 아니라, 축적된 윤리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고대 수사학의 본질을 압축해 보여준다.
키워드
호메로스, 일리아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아이아스, 에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