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우신예찬』 서문에서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가면서 토머스 모어(Thomas More)를 떠올리며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모어라는 말이 그리스어에서 어리석음을 뜻하는 ‘모리아’라는 말과 비슷한 것에 착상하여, 모어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듯 어리석음의 신(愚神, 모리아)이 최고의 신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신은 연단에 서서 현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임을 역설한다. 우신은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 그리고 제우스와 헤라의 딸이자 젊음의 상징인 헤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행복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이 섬에서는 늙음이나 병이 없다. 그리고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가 그를 길렀다. 그에게는 그를 돕는 여러 신들이 있다. 자아도취, 아부, 망각, 태만, 쾌락, 경솔, 방탕, 광란, 깊은 잠이 그들이다. 이 시종들을 통하여 그는 세상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아래 본문에서 우신은 지성인들을 비웃고, 오히려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행복을 찬양하고 있다.
고전본문
사람들 중에서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두 배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주제를 모르고 신들의 삶을 흉내냅니다. 신들에게 대항한 거인족들을 본으로 삼아 허접한 학문을 가지고 자연을 상대로 전쟁을 벌입니다. 반면, 짐승들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더 비참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봅시다. 수사학자들의 논증이나 스토아학파의 삼단논법이 아니라, 명백하고 직설적이고 평범한 사례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바보들, 멍청이들, 눈치 없는 이들 그리고 얼간이라고 흔히 부르는 이들만큼 행복한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 이렇게 불러주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아마도 언뜻 제가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이것보다 더 큰 진실은 없습니다. 우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쥬피터를 두고 말하건데, 죽음은 결코 하찮은 악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쁜 행동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겪지 않습니다.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벌벌 떨지도, 영혼, 귀신, 마귀 때문에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여러 나쁜 일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미래의 좋은 일에 대한 희망 때문에 마음이 번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이생의 삶을 옭아매는 수많은 근심들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치심도 두려움도, 야망도 없으며, 남을 시기하거나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그들이 이성 없는 짐승에 더 가깝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현자님, 이제 나에게 말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많은 근심들 때문에 계속해서 쩔쩔매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당신 삶의 그 모든 괴로움들을 한데 모아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많은 고통에서 내가 나의 바보들을 구해주었는지를 알게 되실 겁니다. 이에 더해서, 그들은 명랑하고, 즐겁게 노래하고 마냥 웃을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이것은 신들이 그들에게 생의 근심에서 벗어나도록 부여한 특별한 특권입니다.
-『우신예찬』중에서
토론하기
(1) 윗글에서 저자는 어떤 점에서 바보들이 현자들보다 더 행복하고 말하는가?
(2) 에라스무스의 바보 예찬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해보고, 바보의 삶과 지성인의 삶 중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선호하는지 말해보자.
(3) 에라스무스의 바보 예찬은 오늘의 지식 사회를 비웃는 것 같다. 그의 지성에 대한 비판을 오늘의 시점에 적용해 보자.
해설읽기
우리는 가난한 사람보다 부유한 사람이, 병든든 사람보다는 건강한 사람이, 친구가 많은 사람이 친구가 없는 사람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배우지 못하거나 배울 능력이 없는 사람보다는 많이 배우고 배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음의 신을 통해서 많이 배운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꼬집고 있다.
우선, 지혜롭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삼아 자연과 싸우려 한다. 에라스무스가 활동한 때는 자연에 대한 연구가 싹트기 시작한 시기였다. 서양 고대에 자연은 지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자연의 운행이 조화롭고 규칙적인 것처럼 인간의 삶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며, 따라야 할 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사상이 중심이 된 중세기에 자연은 신의 영광을 비추는 거울처럼 여겨졌다. 에라스무스는 학자들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족에 대항한 거인족에 비유한다. 여기서 거인족은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데, 거인족이 자연을 통치하는 신족에 대항한 것처럼 학자들은 자연을 통하여 자신의 힘을 키우려고 하는 사람들로 기술된다.
에라스무스는 지성의 힘을 믿는 학자들보다, 무지하고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바보들을 예찬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에게 최고의 불행인 죽음에도 초연한 이들이다. 현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만, 바보들은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만큼 생각이 깊지 못하다. 또한 엄한 도덕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바보들은 유령과 사람을 분간할 지적인 능력이 없다. 어쩌면 그는 꿈의 세계 속에 사는 것인지 모른다. 그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후회를 하거나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지적인 사람들은 과거에 성취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미래에 계획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애를 태운다.
여기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왜 지성적인 사람들보다 바보를 더 칭찬하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당대에 가장 지적인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현명함보다는 어리석음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을까? 에라스무스가 우리 모두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과도한 지적인 힘이 오히려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복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에게 행복이란 자연스러운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스러운 기쁨이란 잘 먹고, 잘 자고, 가족 그리고 이웃들과 잘 어울리면서 얻는 즐거움이다. 지나치게 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저급하게 여길 수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극단적인 경우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지식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큰 꿈을 꾸는 사람들, 지식을 통해서 불의한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현명함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지식이 최고로 비대해진 오늘날을 미리 예견하고 지식인들을 풍자하고 있는 듯하다. 모든 분야에서 지식이 최고조에 달한 오늘날 우리들은 바보들이 누리는 행복을 과연 누리고 있는지 자문하게 하는 글이다.
키워드
지혜, 지식, 어리석음, 무지, 바보, 현자
전후맥락
『우신예찬』 서문에서 에라스무스는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가면서 토머스 모어(Thomas More)를 떠올리며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모어라는 말이 그리스어에서 어리석음을 뜻하는 ‘모리아’라는 말과 비슷한 것에 착상하여, 모어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듯 어리석음의 신(愚神, 모리아)이 최고의 신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신은 연단에 서서 현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임을 역설한다. 우신은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 그리고 제우스와 헤라의 딸이자 젊음의 상징인 헤베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행복의 섬’에서 태어났는데, 이 섬에서는 늙음이나 병이 없다. 그리고 바쿠스의 딸 ‘만취’와 판의 딸 ‘무지’가 그를 길렀다. 그에게는 그를 돕는 여러 신들이 있다. 자아도취, 아부, 망각, 태만, 쾌락, 경솔, 방탕, 광란, 깊은 잠이 그들이다. 이 시종들을 통하여 그는 세상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아래 본문에서 우신은 지성인들을 비웃고, 오히려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행복을 찬양하고 있다.
고전본문
사람들 중에서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두 배로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주제를 모르고 신들의 삶을 흉내냅니다. 신들에게 대항한 거인족들을 본으로 삼아 허접한 학문을 가지고 자연을 상대로 전쟁을 벌입니다. 반면, 짐승들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더 비참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이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봅시다. 수사학자들의 논증이나 스토아학파의 삼단논법이 아니라, 명백하고 직설적이고 평범한 사례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바보들, 멍청이들, 눈치 없는 이들 그리고 얼간이라고 흔히 부르는 이들만큼 행복한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에 이렇게 불러주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아마도 언뜻 제가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 불합리하게 보이지만, 이것보다 더 큰 진실은 없습니다. 우선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쥬피터를 두고 말하건데, 죽음은 결코 하찮은 악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쁜 행동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겪지 않습니다. 유령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벌벌 떨지도, 영혼, 귀신, 마귀 때문에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여러 나쁜 일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미래의 좋은 일에 대한 희망 때문에 마음이 번민에 빠지지 않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이생의 삶을 옭아매는 수많은 근심들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치심도 두려움도, 야망도 없으며, 남을 시기하거나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그들이 이성 없는 짐승에 더 가깝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현자님, 이제 나에게 말해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많은 근심들 때문에 계속해서 쩔쩔매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당신 삶의 그 모든 괴로움들을 한데 모아보십시오. 그러면 얼마나 많은 고통에서 내가 나의 바보들을 구해주었는지를 알게 되실 겁니다. 이에 더해서, 그들은 명랑하고, 즐겁게 노래하고 마냥 웃을 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줍니다. 이것은 신들이 그들에게 생의 근심에서 벗어나도록 부여한 특별한 특권입니다.
-『우신예찬』중에서
토론하기
(1) 윗글에서 저자는 어떤 점에서 바보들이 현자들보다 더 행복하고 말하는가?
(2) 에라스무스의 바보 예찬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해보고, 바보의 삶과 지성인의 삶 중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선호하는지 말해보자.
(3) 에라스무스의 바보 예찬은 오늘의 지식 사회를 비웃는 것 같다. 그의 지성에 대한 비판을 오늘의 시점에 적용해 보자.
해설읽기
우리는 가난한 사람보다 부유한 사람이, 병든든 사람보다는 건강한 사람이, 친구가 많은 사람이 친구가 없는 사람보다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배우지 못하거나 배울 능력이 없는 사람보다는 많이 배우고 배우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음의 신을 통해서 많이 배운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꼬집고 있다.
우선, 지혜롭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삼아 자연과 싸우려 한다. 에라스무스가 활동한 때는 자연에 대한 연구가 싹트기 시작한 시기였다. 서양 고대에 자연은 지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자연의 운행이 조화롭고 규칙적인 것처럼 인간의 삶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며, 따라야 할 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사상이 중심이 된 중세기에 자연은 신의 영광을 비추는 거울처럼 여겨졌다. 에라스무스는 학자들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족에 대항한 거인족에 비유한다. 여기서 거인족은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데, 거인족이 자연을 통치하는 신족에 대항한 것처럼 학자들은 자연을 통하여 자신의 힘을 키우려고 하는 사람들로 기술된다.
에라스무스는 지성의 힘을 믿는 학자들보다, 무지하고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바보들을 예찬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에게 최고의 불행인 죽음에도 초연한 이들이다. 현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지만, 바보들은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할 만큼 생각이 깊지 못하다. 또한 엄한 도덕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바보들은 유령과 사람을 분간할 지적인 능력이 없다. 어쩌면 그는 꿈의 세계 속에 사는 것인지 모른다. 그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후회를 하거나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지적인 사람들은 과거에 성취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미래에 계획한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애를 태운다.
여기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왜 지성적인 사람들보다 바보를 더 칭찬하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당대에 가장 지적인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왜 현명함보다는 어리석음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을까? 에라스무스가 우리 모두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의 과도한 지적인 힘이 오히려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복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에게 행복이란 자연스러운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스러운 기쁨이란 잘 먹고, 잘 자고, 가족 그리고 이웃들과 잘 어울리면서 얻는 즐거움이다. 지나치게 지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저급하게 여길 수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극단적인 경우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지식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큰 꿈을 꾸는 사람들, 지식을 통해서 불의한 세상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현명함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지식이 최고로 비대해진 오늘날을 미리 예견하고 지식인들을 풍자하고 있는 듯하다. 모든 분야에서 지식이 최고조에 달한 오늘날 우리들은 바보들이 누리는 행복을 과연 누리고 있는지 자문하게 하는 글이다.
키워드
지혜, 지식, 어리석음, 무지, 바보, 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