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페르시아의 귀족 우스벡은 개인적 정치적 위기 때문에 페르시아에서 부인들을 남겨두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터키와 이탈리아를 지나 파리에 머물면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경험한 것들을 편지 남기고 있다. 그는 여러 친구들에게 철학적인 문제들을 진지하게 쓰고 있는데, 리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정의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전본문
우스벡이 레디에게, 베니스에서
나의 소중한 레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 이유는 그가 정의롭지 않다면, 그는 모든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나쁘고 가장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두 사물들 사이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적합한 관계이다. 이 관계는 신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그 누가 고려하든지 간에 마찬가지이다. 인간들은 늘 이 관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매우 빈번하게 인간이 그 관계를 볼 때조차도, 그는 그것에 무관심하지. 그의 눈은 그의 이익을 가장 잘 보지. 정의는 그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욕심들의 격동 속에서 정의가 들려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는 이유는, 그들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이지. 인간이 행동을 하는 동기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이지. 이유 없이 악한 사람은 없지. 결정의 근거가 되는 이유가 존재하지. 그리고 이 이유는 늘 자기 이익이지. 그러나 신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불가능하네. 우리가 그가 정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즉시, 그는 정의를 반드시 따라야 하네. 왜냐하면 그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존재들 가운데 가장 악독한 존재일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이익 없이 악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지. 이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의를 사랑해야 할 것이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가장 아름다운 관념을 가지고 있는 그 존재 그리고 존재한다면 반드시 정의로울 존재를 닮으려고 노력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종교의 족쇄에서 자유워질 수는 있어도, 우리는 정의의 족쇄에서는 자유로워져서는 안 되네. 레디!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나는 정의란 영원한 것이고 인간의 관습에 의존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네네. 정의가 인간의 관습에 따르게 된다면, 이것은 끔찍한 진실이 될 것이다.
[출전] 몽테스키외, 『페르시아인의 편지』
토론하기
(1) 정의에 대한 개념은 다양하게 역사 속에서 제시되어 왔다. 위에서 우스벡이 이해하는 정의는 무엇인지 말해보자
(2) 자신이 정의에 대한 관념이 있지만, 그 관념대로 행하지 못한 경우를 들어 말해보자. 저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정의를 행하지 못했던 이유를 말해보자.
(3) 저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례가 있으면 말해보자.
해설읽기
우스벡은 친구 리카에게 자신의 정의에 대한 관념을 편지에 적고 있다. 그는 정의의 문제를 신의 존재와 성격과 관련지어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 몽테스키외의 전형적인 계몽주의의 신관과 정의관을 반영하고 있다. 계몽주의 철학에서 신은 유일신이기는 하지만,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신, 다시 말해 사람처럼 감정을 가진 존재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 철학에서는 신은 기하학자나 시계공에 비유되는데, 신은 완벽한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세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 개입을 하지 않는다. 신은 물리적 세계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세계도 만들었다. 그런데 기하학자나 시계공이 수학이나 공학의 원리에 종속되어 있듯이, 신도 도덕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본문에서 정의를 두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적합한 관계로 정의하고 이 적합한 관계에서 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방금 말한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정의롭지 않다면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고, 완벽한 신이라면 반드시 정의로우야 한다. 그렇다면 정의의 관념이 신보다 우위 있다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는 정의보다 불의가 편만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심, 다시 말해 자기 만족과 자기 이익을 우선적으로 좇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보다는 자기 이익을 위하는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인간이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저자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에서 벗어나더라도, 정의의 이념으로부터는 자유로워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대의 종교가 정의롭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에서 정의를 보증해줄 수 없다면, 인간의 이성의 원리가 보증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몽테스키외만의 생각이 아니라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키워드
이기심, 자기 만족, 정의 , 신, 종교
전후맥락
페르시아의 귀족 우스벡은 개인적 정치적 위기 때문에 페르시아에서 부인들을 남겨두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 터키와 이탈리아를 지나 파리에 머물면서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경험한 것들을 편지 남기고 있다. 그는 여러 친구들에게 철학적인 문제들을 진지하게 쓰고 있는데, 리카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정의의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고전본문
우스벡이 레디에게, 베니스에서
나의 소중한 레디,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 이유는 그가 정의롭지 않다면, 그는 모든 존재들 가운데서 가장 나쁘고 가장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란 두 사물들 사이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적합한 관계이다. 이 관계는 신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그 누가 고려하든지 간에 마찬가지이다. 인간들은 늘 이 관계를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매우 빈번하게 인간이 그 관계를 볼 때조차도, 그는 그것에 무관심하지. 그의 눈은 그의 이익을 가장 잘 보지. 정의는 그의 목소리를 높이지만, 욕심들의 격동 속에서 정의가 들려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는 이유는, 그들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이지. 인간이 행동을 하는 동기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때문이지. 이유 없이 악한 사람은 없지. 결정의 근거가 되는 이유가 존재하지. 그리고 이 이유는 늘 자기 이익이지. 그러나 신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불가능하네. 우리가 그가 정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즉시, 그는 정의를 반드시 따라야 하네. 왜냐하면 그는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존재들 가운데 가장 악독한 존재일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이익 없이 악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지. 이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의를 사랑해야 할 것이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가장 아름다운 관념을 가지고 있는 그 존재 그리고 존재한다면 반드시 정의로울 존재를 닮으려고 노력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종교의 족쇄에서 자유워질 수는 있어도, 우리는 정의의 족쇄에서는 자유로워져서는 안 되네. 레디!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나는 정의란 영원한 것이고 인간의 관습에 의존해 있지 않다고 생각하네네. 정의가 인간의 관습에 따르게 된다면, 이것은 끔찍한 진실이 될 것이다.
[출전] 몽테스키외, 『페르시아인의 편지』
토론하기
(1) 정의에 대한 개념은 다양하게 역사 속에서 제시되어 왔다. 위에서 우스벡이 이해하는 정의는 무엇인지 말해보자
(2) 자신이 정의에 대한 관념이 있지만, 그 관념대로 행하지 못한 경우를 들어 말해보자. 저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정의를 행하지 못했던 이유를 말해보자.
(3) 저자의 생각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례가 있으면 말해보자.
해설읽기
우스벡은 친구 리카에게 자신의 정의에 대한 관념을 편지에 적고 있다. 그는 정의의 문제를 신의 존재와 성격과 관련지어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저자 몽테스키외의 전형적인 계몽주의의 신관과 정의관을 반영하고 있다. 계몽주의 철학에서 신은 유일신이기는 하지만,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신, 다시 말해 사람처럼 감정을 가진 존재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 철학에서는 신은 기하학자나 시계공에 비유되는데, 신은 완벽한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움직이는 세계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 개입을 하지 않는다. 신은 물리적 세계만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세계도 만들었다. 그런데 기하학자나 시계공이 수학이나 공학의 원리에 종속되어 있듯이, 신도 도덕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본문에서 정의를 두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적합한 관계로 정의하고 이 적합한 관계에서 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방금 말한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정의롭지 않다면 그는 더 이상 신이 아니고, 완벽한 신이라면 반드시 정의로우야 한다. 그렇다면 정의의 관념이 신보다 우위 있다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는 정의보다 불의가 편만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심, 다시 말해 자기 만족과 자기 이익을 우선적으로 좇는 마음 때문이다. 사람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보다는 자기 이익을 위하는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인간이 정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저자는 종교에서 말하는 신에서 벗어나더라도, 정의의 이념으로부터는 자유로워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대의 종교가 정의롭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에서 정의를 보증해줄 수 없다면, 인간의 이성의 원리가 보증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몽테스키외만의 생각이 아니라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키워드
이기심, 자기 만족, 정의 , 신, 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