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루소는 에밀이라는 아이를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라는 긴 과정에 걸쳐서 교육하고 있다. 아래 본문은 청년기에 속해 있는 내용이다. 청년기에는 도덕 교육과 종교 교육을 하는 단계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이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루소의 자연 종교론이 잘 제시되어 있다. 자연종교란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에 대한 느낌을 기반으로 한 종교이다. 이는 계몽주의자들의 종교관을 대표하는 이신론과는 대비된다. 이신론은 합리적인 신에 대한 관념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감정적 경험이 중시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루소는 인간의 종교적 본질은 감정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고전본문
존재한다는 것은 곧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느낌은 분명히 우리의 지성보다 앞서 존재한다. 우리는 관념들을 가지기 전에 느낌들을 가지고 있었다. (주-어떤 점에서 관념들은 느낌들이고, 느낌들은 관념들이다. 두 용어 모두 우리가 관계하는 어떠한 지각에도 적합하다. 그 지각의 대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에 영향을 받는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 안에서 영향을 받고, 적절한 용어를 결정하는 것을 그 질서를 통해서다. 우리가 그 대상에 주로 관계하고 성찰에 통해서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관념이고, 반대로 수용된 인상이 우리의 주요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차적으로 그 대상을 생각할 경우 그것은 감정이다.)
우리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감정들을 줌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보존해 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타고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감정들은, 개인과 관련되는 한에서, 자기애, 두려움,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 위로에 대한 갈망이다.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이다. 또는 적어도 사회적이 될 수 있도록 자질을 부여받았다면, 그는 이것과 관련한 다른 타고난 감정들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오직 육체적 안녕만 고려된다면, 인간은 함께하기보다는 분명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이 부여하는 동기는 자기 자신과 자기 동료와의 이중적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 도덕적 체계로부터 비롯된다. 선을 아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지식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성이 그것을 인지하도록 이끄는 순간, 그의 의식은 그가 그것을 사랑하도록 추동한다. 타고난 것은 바로 이 감정이다.
[출전] 루소, 『에밀』
토론하기
(1) 존재한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라는 루소의 말은 어떤 의미인지 말해 보자.
(2) 관념은 일반적으로 이성의 산물로 이해된다, 하지만 루소는 관념도 일종의 느낌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감정을 중시하는 루소의 사상이 가지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은 ‘존재한다는 것은 곧 느낀다는 것이다’라는 루소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이성에 있고, 이 이성의 활동인 사고활동을 통해서 인간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루소는 생각하는 능력이 하니라, 느끼는 능력이 인간 존재의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생각도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관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사실, 인간은 태어 나서 사고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이미 세계, 다른 인간과 감정적 관계에 들어간다. 어린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울음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고 활동을 배우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는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잘 관찰해 보면 사고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세상과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 교류하면서 감정적 경험을 주로 한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소망하고, 절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근본적 특성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에게서 비교적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고 활동을 인간의 본질로 승격시켰다. 그러다보니 희노애락을 가진 인간을 이성이 만들어 놓은 많은 틀로 억압을 하기가 쉽다. 루소 당시에서 합리주의가 이미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루소는 이미 이러한 인간 이해의 편향성에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사고하는 것도 일종의 느낌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루소는 인간을 보존해 주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사랑과 미움, 고통과 번민이 없다면, 과연 우리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 자문해 볼 수 있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죽은 기계와 같은 인간이다. 인간을 진정 움직이는 것은 바로 감정이다. 루소가 잘 말하고 있듯이, 선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을 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선에 대한 감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키워드
감정, 사회, 육체, 이성
전후맥락
루소는 에밀이라는 아이를 유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라는 긴 과정에 걸쳐서 교육하고 있다. 아래 본문은 청년기에 속해 있는 내용이다. 청년기에는 도덕 교육과 종교 교육을 하는 단계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이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루소의 자연 종교론이 잘 제시되어 있다. 자연종교란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신성에 대한 느낌을 기반으로 한 종교이다. 이는 계몽주의자들의 종교관을 대표하는 이신론과는 대비된다. 이신론은 합리적인 신에 대한 관념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감정적 경험이 중시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루소는 인간의 종교적 본질은 감정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고전본문
존재한다는 것은 곧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의 느낌은 분명히 우리의 지성보다 앞서 존재한다. 우리는 관념들을 가지기 전에 느낌들을 가지고 있었다. (주-어떤 점에서 관념들은 느낌들이고, 느낌들은 관념들이다. 두 용어 모두 우리가 관계하는 어떠한 지각에도 적합하다. 그 지각의 대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에 영향을 받는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 안에서 영향을 받고, 적절한 용어를 결정하는 것을 그 질서를 통해서다. 우리가 그 대상에 주로 관계하고 성찰에 통해서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발생하는 것이 바로 관념이고, 반대로 수용된 인상이 우리의 주요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이차적으로 그 대상을 생각할 경우 그것은 감정이다.)
우리 존재의 원인이 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감정들을 줌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보존해 준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타고난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감정들은, 개인과 관련되는 한에서, 자기애, 두려움,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 위로에 대한 갈망이다.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이다. 또는 적어도 사회적이 될 수 있도록 자질을 부여받았다면, 그는 이것과 관련한 다른 타고난 감정들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오직 육체적 안녕만 고려된다면, 인간은 함께하기보다는 분명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이 부여하는 동기는 자기 자신과 자기 동료와의 이중적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 도덕적 체계로부터 비롯된다. 선을 아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지식은 인간이 타고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성이 그것을 인지하도록 이끄는 순간, 그의 의식은 그가 그것을 사랑하도록 추동한다. 타고난 것은 바로 이 감정이다.
[출전] 루소, 『에밀』
토론하기
(1) 존재한다는 것은 느끼는 것이라는 루소의 말은 어떤 의미인지 말해 보자.
(2) 관념은 일반적으로 이성의 산물로 이해된다, 하지만 루소는 관념도 일종의 느낌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3) 감정을 중시하는 루소의 사상이 가지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해설읽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은 ‘존재한다는 것은 곧 느낀다는 것이다’라는 루소의 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이성에 있고, 이 이성의 활동인 사고활동을 통해서 인간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루소는 생각하는 능력이 하니라, 느끼는 능력이 인간 존재의 근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생각도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관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사실, 인간은 태어 나서 사고하는 법을 배우기 전에 이미 세계, 다른 인간과 감정적 관계에 들어간다. 어린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울음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고 활동을 배우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이는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을 잘 관찰해 보면 사고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세상과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 교류하면서 감정적 경험을 주로 한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소망하고, 절망하고, 기뻐하고, 슬퍼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근본적 특성이다. 그런데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주의자들은 인간에게서 비교적 적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고 활동을 인간의 본질로 승격시켰다. 그러다보니 희노애락을 가진 인간을 이성이 만들어 놓은 많은 틀로 억압을 하기가 쉽다. 루소 당시에서 합리주의가 이미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루소는 이미 이러한 인간 이해의 편향성에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사고하는 것도 일종의 느낌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루소는 인간을 보존해 주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사랑과 미움, 고통과 번민이 없다면, 과연 우리 사회가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 자문해 볼 수 있다. 감정이 없는 인간은 죽은 기계와 같은 인간이다. 인간을 진정 움직이는 것은 바로 감정이다. 루소가 잘 말하고 있듯이, 선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을 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선에 대한 감정이 있어야 가능하다.
키워드
감정, 사회, 육체, 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