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에서 정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정의는 능력이나 지식이 아니라 성품과 덕성이다. 정의는 정의로운 것을 행하고 바라는 상태, 즉 특정한 성품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품을 건강에 비유하한다. 그에 따르면, 건강한 사람은 건강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특정 성품을 가진 사람이 그 성품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는 정의로운 성품의 소유자는 법을 지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법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실정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내려온 규약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의라는 덕성에 대해서 고찰하는 아래 본문은 법과 정의를 연관시키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고전본문
법을 어기는 사람은 불의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은 정의롭다. 따라서 법에 따르는 모든 행동은 정의로운 행동이다. 입법 절차에 의해 제정된 것은 합법적이기 때문에 법에 따르는 개개의 행동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법은 어떤 사안들과 관련하든 모든 사람들의 이익, 귀족들의 이익 또는 통치자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과 행복을 이루는 요소들을 낳고 보전하는 것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법은 용감한 사람이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명령한다. 가령, 전열에서 이탈하거나, 탈영을 하거나 무기를 내던지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명한다. 또한, 간통이나 자신의 무분별한 욕망을 추구하지 않도록 절제 있는 삶을 명한다. 그리고 타인을 때리거나 악담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이 부드러운 태도를 취할 것을 명한다. 마찬가지로 덕과 악덕과 관련해서, 어떤 행동을 명령하고 다른 행동을 금지한다. 법이 올바로 제정된다면 이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지만, 조잡하게 만들어진 법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정의는 사실상 완전한 덕이지만,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종종 덕 중에서 최고로 여겨진다. 저녁별이나 새벽별도 이에 비하면 놀랍지 않다. ‘정의 안에 모든 덕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도 전해 내려온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는 완벽한 덕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덕을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도 그의 덕을 실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완벽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는 덕을 실천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지도자가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는 비아스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통치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리고 한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덕 중에서 정의만이 타인의 유익을 위한 덕으로 여겨진다. 정의는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어서, 정의로운 자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향해서 사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덕성을 자기 자신에게 발휘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발휘하는 자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덕의 일부분이 아니라 덕 전체이다. 또한 그 반대로, 부정의는 악덕의 일부가 아니라 악덕 전체이다.
[출전]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4권
토론하기
(1) 본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법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법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보자.
(2) 여러 덕성과 정의라는 덕성 사이의 차이점을 본문을 토대로 정리해보자.
(3) 정의라는 덕성의 특성에 비추어, 오늘날 통치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말해보자.
해설읽기
‘정의’라는 개념만큼 정의내리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논적이었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했고, 19세기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정의의 기본 원리로 삼았다.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서 정의, 다시 말해 올바름에 대한 이해 방식은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상식적인 철학을 제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정의에 대한 이해 방식에서도 이런 점은 잘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이 생각한 정의는 철학자 왕이 조화롭게 다스리는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 이런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은 뜬구름 잡는 말이다. 그는 각자가 세운 공적에 합당하게 지위를 부여한다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의 정의 개념은 인간 사회의 질서는 상호성의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그에게 정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원리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정의가 성품과 덕성이라는 점이다. 성품, 영어로 캐릭터(character)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새기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즉, 성품이란 마음에 새겨지는 성향을 말하고, 그러한 성향을 가진 상태를 덕성이라고 부른다.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로운 덕성은 우선 규범을 잘 지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령, 정의로운 사람은 교통 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통 법규를 잘 지키려면 한 번의 결심이나 판단만으로는 부족하다. 법규를 잘 지키는 습관을 들이면 생각하지 않고서도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이 정의로운 덕성을 갖춘자이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과 정의로움을 관련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이란 특정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다. 계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법이 있다고 하자. 만일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으면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사람들은 계약의 효력을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 법은 사람들에게 특정 행동, 본문에서 예시로 제시한 탈영, 간통, 악담과 같은 행동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는 늘 이웃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제라는 미덕은 우선 자기 자신을 위한 덕이다. 하지만 정의라는 덕목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모든 덕은 정의의 덕에 포함된다고 말했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품성을 기르는 것은 타인과 자신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별히 통치자가 정의의 품성을 갖추지 못할 경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 다시 말해 타인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이 되는 습관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렇게 훈련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동서양 고금의 이상주의자들이 꿈꾼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부언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성과 행복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행복은 돈이나 외모 권력과 같은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덕성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내면적 덕성은 외적인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유지되지만, 돈과 권력은 우리에게서 쉽게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행복한 사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이다.
키워드
정의, 품성, 덕성, 통치자
전후맥락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권에서 정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정의는 능력이나 지식이 아니라 성품과 덕성이다. 정의는 정의로운 것을 행하고 바라는 상태, 즉 특정한 성품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성품을 건강에 비유하한다. 그에 따르면, 건강한 사람은 건강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특정 성품을 가진 사람이 그 성품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는 정의로운 성품의 소유자는 법을 지키려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법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실정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내려온 규약을 의미한다. 그래서 정의라는 덕성에 대해서 고찰하는 아래 본문은 법과 정의를 연관시키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고전본문
법을 어기는 사람은 불의하고 법을 지키는 사람은 정의롭다. 따라서 법에 따르는 모든 행동은 정의로운 행동이다. 입법 절차에 의해 제정된 것은 합법적이기 때문에 법에 따르는 개개의 행동은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법은 어떤 사안들과 관련하든 모든 사람들의 이익, 귀족들의 이익 또는 통치자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과 행복을 이루는 요소들을 낳고 보전하는 것을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법은 용감한 사람이 용감하게 행동하도록 명령한다. 가령, 전열에서 이탈하거나, 탈영을 하거나 무기를 내던지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명한다. 또한, 간통이나 자신의 무분별한 욕망을 추구하지 않도록 절제 있는 삶을 명한다. 그리고 타인을 때리거나 악담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이 부드러운 태도를 취할 것을 명한다. 마찬가지로 덕과 악덕과 관련해서, 어떤 행동을 명령하고 다른 행동을 금지한다. 법이 올바로 제정된다면 이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지만, 조잡하게 만들어진 법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정의는 사실상 완전한 덕이지만,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웃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는 종종 덕 중에서 최고로 여겨진다. 저녁별이나 새벽별도 이에 비하면 놀랍지 않다. ‘정의 안에 모든 덕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도 전해 내려온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는 완벽한 덕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덕을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는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도 그의 덕을 실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완벽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는 덕을 실천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지도자가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난다.’는 비아스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통치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리고 한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덕 중에서 정의만이 타인의 유익을 위한 덕으로 여겨진다. 정의는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어서, 정의로운 자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향해서 사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덕성을 자기 자신에게 발휘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발휘하는 자는, 그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는 덕의 일부분이 아니라 덕 전체이다. 또한 그 반대로, 부정의는 악덕의 일부가 아니라 악덕 전체이다.
[출전]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4권
토론하기
(1) 본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법과 정의의 관계 그리고 법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말해보자.
(2) 여러 덕성과 정의라는 덕성 사이의 차이점을 본문을 토대로 정리해보자.
(3) 정의라는 덕성의 특성에 비추어, 오늘날 통치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말해보자.
해설읽기
‘정의’라는 개념만큼 정의내리기 어려운 말도 없을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논적이었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했고, 19세기 공리주의자들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정의의 기본 원리로 삼았다. 시대와 공동체에 따라서 정의, 다시 말해 올바름에 대한 이해 방식은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상식적인 철학을 제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정의에 대한 이해 방식에서도 이런 점은 잘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플라톤이 생각한 정의는 철학자 왕이 조화롭게 다스리는 아름다운 공동체에서 실현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 이런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은 뜬구름 잡는 말이다. 그는 각자가 세운 공적에 합당하게 지위를 부여한다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그의 정의 개념은 인간 사회의 질서는 상호성의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그에게 정의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원리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정의가 성품과 덕성이라는 점이다. 성품, 영어로 캐릭터(character)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새기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즉, 성품이란 마음에 새겨지는 성향을 말하고, 그러한 성향을 가진 상태를 덕성이라고 부른다.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로운 덕성은 우선 규범을 잘 지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령, 정의로운 사람은 교통 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통 법규를 잘 지키려면 한 번의 결심이나 판단만으로는 부족하다. 법규를 잘 지키는 습관을 들이면 생각하지 않고서도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이 정의로운 덕성을 갖춘자이다. 그런데 법을 지키는 것과 정의로움을 관련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법이란 특정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다. 계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법이 있다고 하자. 만일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으면 공동체의 삶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약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처벌함으로써 사람들은 계약의 효력을 신뢰하게 된다. 그래서 법은 사람들에게 특정 행동, 본문에서 예시로 제시한 탈영, 간통, 악담과 같은 행동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는 늘 이웃과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제라는 미덕은 우선 자기 자신을 위한 덕이다. 하지만 정의라는 덕목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위한 덕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모든 덕은 정의의 덕에 포함된다고 말했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의 품성을 기르는 것은 타인과 자신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별히 통치자가 정의의 품성을 갖추지 못할 경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람, 다시 말해 타인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이 되는 습관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렇게 훈련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동서양 고금의 이상주의자들이 꿈꾼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부언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성과 행복을 직접적으로 연결한다. 행복은 돈이나 외모 권력과 같은 외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덕성에 달려 있다. 그 이유는 내면적 덕성은 외적인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유지되지만, 돈과 권력은 우리에게서 쉽게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행복한 사회는 가장 정의로운 사회이다.
키워드
정의, 품성, 덕성, 통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