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19세기 말까지 영국 여성은 법적, 사회적으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모든 면에서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고, 자신이 낳은 자녀나 자신이 번 돈에 대해서도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여성이 자신이 상속받은 재산이나 돈에 대한 권리를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1882년 기혼여성재산법이 통과된 뒤였다. 영국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법률의 입안에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계속 항의해 왔고, 남성의 권력 독점에 조직적으로 도전해왔다. 19세기 몇 차례의 대규모 청원운동을 거치면서 남성의 참정권은 지주에서 중산층과 노동자, 농민으로 점차 확대되어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함께 싸운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경멸과 비웃음, 그리고 폭력뿐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도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참정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여성의 권리는 남편에 의해 충분히 대표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의 정치적 대표권은 필요 없다는 완고한 주장에 끈질기게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했다.
고전본문
1913년 2월에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전투적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즉, 개인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지속적이며 파괴력 높은 게릴라 전투가 그때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 이전에도 참정권 운동가들이 재산을 파괴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 공격은 산발적이었고, 운동의 노선으로 자리 잡기 이전에 행해진 일종의 경고였다. 그러나 1913년 우리는 정말로 횃불에 불을 붙였다.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길도 열려 있지 않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다른 모든 수단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증명했다고도 확신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고통을 겪고 희생한 세월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정부와 의회의 절대다수가 진실이나 정의에 항복하는 대신, 다른 정부들도 예외 없이 그랬던 것처럼 기회주의에 굴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정부가 여성의 정당한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정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국과 영국인의 삶의 모든 면을 불안하고 불 안정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영국법을 실패로 만들고, 법정을 익살극 무대로 만들고, 전 세계인의 눈에 영국 정부와 의회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영국의 스포츠를 망치고, 사업에 손해를 입히고, 귀중한 재산을 파괴하고, 사회 전반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영국 국교회에 망신을 주고, 영국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질서를 전복시켜야 했다.
즉, 우리는 영국민들이 참아낼 수 있을 정도까지 게릴라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영국 국민이 정부에게 “만일 영국 여성들에게 대의권을 주는 것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렇게 해서 이 일을 어서 끝내시오”라고 말하는 시점에 이르면, 우리는 횃불을 끌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패트릭 헨리는 지금은 고전이 된 그 연설에서 미국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대의의 요점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청원했습니다. 우리는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탄원했습니다. 우리는 왕좌의 발치에 엎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용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출전] 팽크허스트,『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토론하기
(1)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이 20세기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야기해보자
(2) 친구들과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시위를 조직한다고 상상해보자.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말해보자
(3) 대한민국 국회를 구성하는 여성의원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지만, OECD 국가들에 비해 여전히 최하위권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보자
해설읽기
1858년에 영국 여성 저널 <English Woman’s Journal>이 창간되고, 1872년에 전국여성참정권협회(National Society for Women's Suffrage)가 결성되면서 19세기 후반부터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한 운동이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펼쳐진다.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은 노동당이나 자유당 등 기존 정치세력과 제휴하면서 의원들에게 로비를 하고, 하원에 청원을 하는 등 평화롭고 합법적인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속된 활동에도 여성 참정권 획득에 진전이 없자, 1903년에 모든 정당과 손을 끊고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활동을 표방하는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WSPU)이 결성되었다. 여성사회정치연합회원들은 본부에서 일하거나 시위에 참여하거나, 돈을 내는 등 각자 역할을 자유롭게 결정했지만, 주요 결정은 모두 지도부가 정했다. 즉 이들은 조직을 군대로, 회원을 군인으로 간주했다. WSPU 회원들은 창문을 깨고 경찰을 폭행하는 등 신체적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팽크허스트와 그녀의 딸, 그리고 다른 활동가들은 반복적으로 징역형을 받았고, 더 나은 감옥환경을 확보하기 위한 단식투쟁을 벌였으며, 종종 강제로 식량을 공급받는 고문을 받았다. WSPU 그룹과 정부 간의 적대감은 커졌다. 결국 그룹은 전술로 방화를 채택했고 더 온건한 조직은 이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1913년에 팽크허스트의 딸인 아델라와 실비아를 포함하여 몇몇이 WSPU를 떠났다.
그러나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도래하자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크리스타벨은 독일의 위험에 맞서는 영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참정권을 위한 공격의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했다. 대신에 이들은 전쟁에 대한 여성의 공헌을 보여주기 위해 여성의 복무 권리 시위라는 대규모 행렬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국민대표법은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과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남녀 유권자 간의 이러한 불일치는 1차 세계대전 중 엄청난 수의 사망자로 인해 남성이 소수 유권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키워드
단식투쟁,서프러제트, 여성사회연합, 참정권
전후맥락
19세기 말까지 영국 여성은 법적, 사회적으로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모든 면에서 열등한 존재로 여겨졌고, 자신이 낳은 자녀나 자신이 번 돈에 대해서도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여성이 자신이 상속받은 재산이나 돈에 대한 권리를 처음으로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1882년 기혼여성재산법이 통과된 뒤였다. 영국 여성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법률의 입안에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오랫동안 계속 항의해 왔고, 남성의 권력 독점에 조직적으로 도전해왔다. 19세기 몇 차례의 대규모 청원운동을 거치면서 남성의 참정권은 지주에서 중산층과 노동자, 농민으로 점차 확대되어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함께 싸운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경멸과 비웃음, 그리고 폭력뿐이었다. 수많은 여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도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참정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여성의 권리는 남편에 의해 충분히 대표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의 정치적 대표권은 필요 없다는 완고한 주장에 끈질기게 이의를 제기하고 저항했다.
고전본문
1913년 2월에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전투적 여성 참정권 운동이 시작되었다. 즉, 개인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정부에 대항하는 지속적이며 파괴력 높은 게릴라 전투가 그때 시작된 것이다. 이 시기 이전에도 참정권 운동가들이 재산을 파괴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 공격은 산발적이었고, 운동의 노선으로 자리 잡기 이전에 행해진 일종의 경고였다. 그러나 1913년 우리는 정말로 횃불에 불을 붙였다.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길도 열려 있지 않다는 절대적인 확신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다른 모든 수단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증명했다고도 확신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고통을 겪고 희생한 세월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정부와 의회의 절대다수가 진실이나 정의에 항복하는 대신, 다른 정부들도 예외 없이 그랬던 것처럼 기회주의에 굴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정부가 여성의 정당한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을 정부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국과 영국인의 삶의 모든 면을 불안하고 불 안정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영국법을 실패로 만들고, 법정을 익살극 무대로 만들고, 전 세계인의 눈에 영국 정부와 의회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는 영국의 스포츠를 망치고, 사업에 손해를 입히고, 귀중한 재산을 파괴하고, 사회 전반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영국 국교회에 망신을 주고, 영국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질서를 전복시켜야 했다.
즉, 우리는 영국민들이 참아낼 수 있을 정도까지 게릴라 전투를 수행해야 했다. 영국 국민이 정부에게 “만일 영국 여성들에게 대의권을 주는 것이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렇게 해서 이 일을 어서 끝내시오”라고 말하는 시점에 이르면, 우리는 횃불을 끌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패트릭 헨리는 지금은 고전이 된 그 연설에서 미국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대의의 요점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청원했습니다. 우리는 항의했습니다. 우리는 탄원했습니다. 우리는 왕좌의 발치에 엎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용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출전] 팽크허스트,『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토론하기
(1)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이 20세기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야기해보자
(2) 친구들과 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시위를 조직한다고 상상해보자. 본인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말해보자
(3) 대한민국 국회를 구성하는 여성의원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지만, OECD 국가들에 비해 여전히 최하위권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말해보자
해설읽기
1858년에 영국 여성 저널 <English Woman’s Journal>이 창간되고, 1872년에 전국여성참정권협회(National Society for Women's Suffrage)가 결성되면서 19세기 후반부터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한 운동이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펼쳐진다. 당시 여성 참정권 운동은 노동당이나 자유당 등 기존 정치세력과 제휴하면서 의원들에게 로비를 하고, 하원에 청원을 하는 등 평화롭고 합법적인 활동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속된 활동에도 여성 참정권 획득에 진전이 없자, 1903년에 모든 정당과 손을 끊고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활동을 표방하는 여성사회정치연합(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WSPU)이 결성되었다. 여성사회정치연합회원들은 본부에서 일하거나 시위에 참여하거나, 돈을 내는 등 각자 역할을 자유롭게 결정했지만, 주요 결정은 모두 지도부가 정했다. 즉 이들은 조직을 군대로, 회원을 군인으로 간주했다. WSPU 회원들은 창문을 깨고 경찰을 폭행하는 등 신체적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활동으로 명성을 얻었다. 팽크허스트와 그녀의 딸, 그리고 다른 활동가들은 반복적으로 징역형을 받았고, 더 나은 감옥환경을 확보하기 위한 단식투쟁을 벌였으며, 종종 강제로 식량을 공급받는 고문을 받았다. WSPU 그룹과 정부 간의 적대감은 커졌다. 결국 그룹은 전술로 방화를 채택했고 더 온건한 조직은 이들에게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1913년에 팽크허스트의 딸인 아델라와 실비아를 포함하여 몇몇이 WSPU를 떠났다.
그러나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도래하자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크리스타벨은 독일의 위험에 맞서는 영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참정권을 위한 공격의 즉각적인 중단을 촉구했다. 대신에 이들은 전쟁에 대한 여성의 공헌을 보여주기 위해 여성의 복무 권리 시위라는 대규모 행렬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8년, 국민대표법은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과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남녀 유권자 간의 이러한 불일치는 1차 세계대전 중 엄청난 수의 사망자로 인해 남성이 소수 유권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키워드
단식투쟁,서프러제트, 여성사회연합, 참정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