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가]는 전편을 수록하였다. [나]는 「일유」의 전반부로 도를 깨닫는 것이 태어나 한 번도 해를 본 적이 없는 시각 장애인이 해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이후 후반부에서는 남방 지역의 잠수부를 예로 들어 도를 터득하는 방도를 서술하였다. 곧 태어나면서부터 늘 물과 더불어 살면서 수없이 물속을 드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물의 도를 체득하여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서, 이는 그 기술을 배운다고 하여 행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도를 깨닫는 것도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터득하게 되는 것이지, 가령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인위적 노력을 통해서 터득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였다.
고전본문
[가] 공자가 동쪽으로 가다가 두 아이가 말다툼하는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물었다. 한 아이가 대답하였다. “저는 해가 막 떠오를 때 해와 사람들과의 거리가 가깝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에는 그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아이는 해가 막 떠오를 때에는 멀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에는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얘기했던 아이가 말하였다. “해가 막 떠오를 적에는 크기가 수레 덮개와 같지만 해가 중천에 있으면 곧 둥근 쟁반과 같습니다. 이는 먼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아이가 말하였다. “해가 막 떠오를 때에는 쌀쌀하고 서늘하지만 해가 중천에 있으면 끓는 국처럼 뜨겁습니다. 이는 가까운 것은 뜨겁고 멀리 있는 것은 서늘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어느 말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자 두 아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누가 당신이 지혜롭다고 하던가요?”
[나]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자가 해를 알지 못하여 시력이 있는 자에게 해에 대해 물었더니 어떤 이가 그에게 말했다. “해의 모양은 구리 쟁반과 같지.” 그는 구리 쟁반을 두들겨보고는 그 소리를 기억하였고, 훗날 종소리를 듣고는 종을 해라고 여겼다. 또 다른 이가 말했다. “해의 빛은 촛불 빛과도 같지.” 그는 촛불을 어루만져보고는 그 형상을 기억하였고, 훗날 피리를 만지고는 헤아리기를 해라고 여겼다. 해는 종과 피리와는 또한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앞을 보지 못하는 이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으니, 이는 그가 해를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구하여 알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도를 알기 어려움은 앞 못 보는 이가 해를 알기보다도 더 심하여 사람이 깨닫지 못함은 또한 앞 못 보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깨달은 자가 일러줌에 비록 좋은 비유와 뛰어난 인도가 있을지라도 또한 구리 쟁반과 촛불보다 나을 바가 없다. 구리 쟁반으로부터 종으로 나아가고, 촛불에서 피리로 나아가듯이 이렇게 옮겨가며 서로의 생김새를 비교하니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러하니 세상에서 도를 말하는 자 중 어떤 이는 자신이 본 바에 나아가서 도라 이름하고 어떤 이는 도를 본 적도 없으면서 제멋대로 생각하니, 이 모두는 잘못 도를 구한 것이다.
[원문]
[가] 孔子東游, 見兩小兒辯鬪, 問其故. 一兒曰, “我以日始出時去人近, 而日中時遠也.” 一兒以日初出遠, 而日中時近也. 一兒曰, “日初出, 大如車蓋, 及日中則如盤盂. 此不爲遠者小而近者大乎.” 一兒曰, “日初出, 滄滄涼涼, 及其日中如探湯. 此不爲近者熱而遠者涼乎.” 孔子不能決也. 兩小兒笑曰, “孰謂汝多知乎.”
[나] 生而眇者不识日, 问之有目者. 或告之曰, “日之状如铜盘.” 扣槃而得其声, 他日闻钟, 以为日也. 或告之曰, “日之光如烛.” 扪烛而得其形, 他日揣樾, 以为日也. 日之與钟龠亦远矣, 而眇者不知其異, 以其未尝见而求之人也. 道之难见也甚于日, 而人之未达也, 無以異于眇. 达者告之, 虽有巧譬善导, 亦無以过于槃與烛也. 自盘而之钟, 自烛而之龠, 转而相之, 岂有既乎. 故世之言道者, 或即其所见而名之, 或莫之见而意之, 皆求道之过也.
[출전]『열자』(등)
토론하기
(1) [가]에서 아이들이 해의 가깝고 멂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나]에서 시각 장애인이 해를 이해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말해보자.
(2) [가]의 아이들, [나]의 시각 장애인의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무엇을 근거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토론해보자. 또한 정당화할 수 없다면 왜 그러한지에 대하여도 토론해보자.
(3) 나는 무엇을 근거로 안다고 믿었는지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나누어보자.
해설읽기
내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내가 그것에 대하여 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한자권에서도 이러한 물음과 관련하여 제법 오래전부터 깊이 성찰해왔다. 가령 공자의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논어)는 언급이 대표적 예다.
공자의 언급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어떤 것을 모르는지도 동시에 알아야만 그 무언가에 대하여 비로소 안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친구에 대하여 안다고 하려면, 내가 그 친구에 대하여 아는 것은 이러저러한 측면에서이고, 그것을 제외한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그 친구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는 전제 아래서 그 친구를 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그 친구의 학교생활 방면에서는 내가 그 친구를 잘 알지만, 그 친구의 학교생활 이외의 방면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전제 아래서 비로소 그 친구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고전본문의 두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안다고 할 때 과연 나는 무엇을 근거로 안다고 할 수 있는지, 그러한 근거를 벗어나면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간직한 이야기다. [가]에서 공자를 곤혹스럽게 만든 두 아이는 각자 자신의 경험 및 그와 연관된 이치에 근거하여 해와 인간 간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대하여 판단한다. 한 아이는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보인다”는 이치와 “아침 해는 크고 점심 해는 작다”는 경험을 결합하여 아침일 때 해와 사람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다. 이에 비해 다른 아이는 “멀리 있으면 서늘하고 가까이 있으면 뜨겁다”는 이치와 “아침 해가 뜰 때는 서늘하고 점심에 해가 중천에 있으면 뜨겁다”는 경험을 결합하여 점심 때 해와 사람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다. 두 아이 모두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는 이치와 자신의 경험만으로 판단하고 그것만을 기초로 자신의 앎을 주장했다. 둘 다 다른 이치와 다른 경험이 있음을 몰랐기에, 또는 수긍하려 않았기에 결국 다투는 지경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나]의 시각 장애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타인이 해를 설명한 것을 자신의 경험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만 이해했다. 해의 모양이 구리 쟁반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설명을 듣고는 구리 쟁반을 어루만졌다. 그 과정에서 구리 쟁반을 두들기게 되었고 그때 나는 소리를 듣고 해는 그러한 소리를 내는 존재라고 여겼다. 이러한 자신만의 이해와 경험을 토대로 한 앎은 결국 종소리를 듣고는 해가 종처럼 생겼다는 오판에 이르게 한다. 보통 종은 구리로 만들기 때문에 구리 쟁반을 두들겨 나는 소리와 종소리가 비슷했던 까닭이다. 이러한 오판은 해는 촛불처럼 밝게 비춰준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의 기능에 대한 설명임에도 그는 촛불을 만져보고는 해가 촛불처럼 긴 원통형으로 생겼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 판단했는지를 몰랐기에 훗날 피리를 만져보고는 해가 피리처럼 생겼다고 오판하게 된다.
두 아이나 시각 장애인 모두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어디까지만 알고 있는지를 헤아리지 않은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단지 어렸기 때문에, 또 시각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녔기에 그러한 오류를 범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만큼 경험이라는 것의 힘이 크며,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한 믿음의 힘이 크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무언가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은 옳다고 선뜻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른이든, 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사람이든 간에 자신의 경험과 기존의 앎에 가려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하여 무지하곤 한다. 우리는 저마다 이러한 한계를 지닌 채로 무언가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우를 범하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키워드
깨닮음, 도, 무지, 앎, 지식, 진리
전후맥락
[가]는 전편을 수록하였다. [나]는 「일유」의 전반부로 도를 깨닫는 것이 태어나 한 번도 해를 본 적이 없는 시각 장애인이 해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점을 서술하였다. 이후 후반부에서는 남방 지역의 잠수부를 예로 들어 도를 터득하는 방도를 서술하였다. 곧 태어나면서부터 늘 물과 더불어 살면서 수없이 물속을 드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물의 도를 체득하여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면서, 이는 그 기술을 배운다고 하여 행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도를 깨닫는 것도 이처럼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행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터득하게 되는 것이지, 가령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인위적 노력을 통해서 터득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였다.
고전본문
[가] 공자가 동쪽으로 가다가 두 아이가 말다툼하는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물었다. 한 아이가 대답하였다. “저는 해가 막 떠오를 때 해와 사람들과의 거리가 가깝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에는 그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아이는 해가 막 떠오를 때에는 멀고 해가 중천에 있을 때에는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얘기했던 아이가 말하였다. “해가 막 떠오를 적에는 크기가 수레 덮개와 같지만 해가 중천에 있으면 곧 둥근 쟁반과 같습니다. 이는 먼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아이가 말하였다. “해가 막 떠오를 때에는 쌀쌀하고 서늘하지만 해가 중천에 있으면 끓는 국처럼 뜨겁습니다. 이는 가까운 것은 뜨겁고 멀리 있는 것은 서늘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어느 말이 옳은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러자 두 아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누가 당신이 지혜롭다고 하던가요?”
[나]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했던 자가 해를 알지 못하여 시력이 있는 자에게 해에 대해 물었더니 어떤 이가 그에게 말했다. “해의 모양은 구리 쟁반과 같지.” 그는 구리 쟁반을 두들겨보고는 그 소리를 기억하였고, 훗날 종소리를 듣고는 종을 해라고 여겼다. 또 다른 이가 말했다. “해의 빛은 촛불 빛과도 같지.” 그는 촛불을 어루만져보고는 그 형상을 기억하였고, 훗날 피리를 만지고는 헤아리기를 해라고 여겼다. 해는 종과 피리와는 또한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앞을 보지 못하는 이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으니, 이는 그가 해를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구하여 알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도를 알기 어려움은 앞 못 보는 이가 해를 알기보다도 더 심하여 사람이 깨닫지 못함은 또한 앞 못 보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깨달은 자가 일러줌에 비록 좋은 비유와 뛰어난 인도가 있을지라도 또한 구리 쟁반과 촛불보다 나을 바가 없다. 구리 쟁반으로부터 종으로 나아가고, 촛불에서 피리로 나아가듯이 이렇게 옮겨가며 서로의 생김새를 비교하니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러하니 세상에서 도를 말하는 자 중 어떤 이는 자신이 본 바에 나아가서 도라 이름하고 어떤 이는 도를 본 적도 없으면서 제멋대로 생각하니, 이 모두는 잘못 도를 구한 것이다.
[원문]
[가] 孔子東游, 見兩小兒辯鬪, 問其故. 一兒曰, “我以日始出時去人近, 而日中時遠也.” 一兒以日初出遠, 而日中時近也. 一兒曰, “日初出, 大如車蓋, 及日中則如盤盂. 此不爲遠者小而近者大乎.” 一兒曰, “日初出, 滄滄涼涼, 及其日中如探湯. 此不爲近者熱而遠者涼乎.” 孔子不能決也. 兩小兒笑曰, “孰謂汝多知乎.”
[나] 生而眇者不识日, 问之有目者. 或告之曰, “日之状如铜盘.” 扣槃而得其声, 他日闻钟, 以为日也. 或告之曰, “日之光如烛.” 扪烛而得其形, 他日揣樾, 以为日也. 日之與钟龠亦远矣, 而眇者不知其異, 以其未尝见而求之人也. 道之难见也甚于日, 而人之未达也, 無以異于眇. 达者告之, 虽有巧譬善导, 亦無以过于槃與烛也. 自盘而之钟, 自烛而之龠, 转而相之, 岂有既乎. 故世之言道者, 或即其所见而名之, 或莫之见而意之, 皆求道之过也.
[출전]『열자』(등)
토론하기
(1) [가]에서 아이들이 해의 가깝고 멂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나]에서 시각 장애인이 해를 이해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말해보자.
(2) [가]의 아이들, [나]의 시각 장애인의 판단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무엇을 근거로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토론해보자. 또한 정당화할 수 없다면 왜 그러한지에 대하여도 토론해보자.
(3) 나는 무엇을 근거로 안다고 믿었는지에 대하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나누어보자.
해설읽기
내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내가 그것에 대하여 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한자권에서도 이러한 물음과 관련하여 제법 오래전부터 깊이 성찰해왔다. 가령 공자의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참되게 아는 것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논어)는 언급이 대표적 예다.
공자의 언급은 무언가를 안다고 할 때 어떤 것을 모르는지도 동시에 알아야만 그 무언가에 대하여 비로소 안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친구에 대하여 안다고 하려면, 내가 그 친구에 대하여 아는 것은 이러저러한 측면에서이고, 그것을 제외한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그 친구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는 전제 아래서 그 친구를 안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그 친구의 학교생활 방면에서는 내가 그 친구를 잘 알지만, 그 친구의 학교생활 이외의 방면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다는 전제 아래서 비로소 그 친구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고전본문의 두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안다고 할 때 과연 나는 무엇을 근거로 안다고 할 수 있는지, 그러한 근거를 벗어나면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물음을 간직한 이야기다. [가]에서 공자를 곤혹스럽게 만든 두 아이는 각자 자신의 경험 및 그와 연관된 이치에 근거하여 해와 인간 간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대하여 판단한다. 한 아이는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보인다”는 이치와 “아침 해는 크고 점심 해는 작다”는 경험을 결합하여 아침일 때 해와 사람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다. 이에 비해 다른 아이는 “멀리 있으면 서늘하고 가까이 있으면 뜨겁다”는 이치와 “아침 해가 뜰 때는 서늘하고 점심에 해가 중천에 있으면 뜨겁다”는 경험을 결합하여 점심 때 해와 사람의 거리가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다. 두 아이 모두 기존에 자신이 알고 있는 이치와 자신의 경험만으로 판단하고 그것만을 기초로 자신의 앎을 주장했다. 둘 다 다른 이치와 다른 경험이 있음을 몰랐기에, 또는 수긍하려 않았기에 결국 다투는 지경에 이르게 됐던 것이다.
[나]의 시각 장애인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타인이 해를 설명한 것을 자신의 경험 안에서, 자기 방식으로만 이해했다. 해의 모양이 구리 쟁반처럼 둥글게 생겼다는 설명을 듣고는 구리 쟁반을 어루만졌다. 그 과정에서 구리 쟁반을 두들기게 되었고 그때 나는 소리를 듣고 해는 그러한 소리를 내는 존재라고 여겼다. 이러한 자신만의 이해와 경험을 토대로 한 앎은 결국 종소리를 듣고는 해가 종처럼 생겼다는 오판에 이르게 한다. 보통 종은 구리로 만들기 때문에 구리 쟁반을 두들겨 나는 소리와 종소리가 비슷했던 까닭이다. 이러한 오판은 해는 촛불처럼 밝게 비춰준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의 기능에 대한 설명임에도 그는 촛불을 만져보고는 해가 촛불처럼 긴 원통형으로 생겼다고 여겼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 판단했는지를 몰랐기에 훗날 피리를 만져보고는 해가 피리처럼 생겼다고 오판하게 된다.
두 아이나 시각 장애인 모두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어디까지만 알고 있는지를 헤아리지 않은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단지 어렸기 때문에, 또 시각적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녔기에 그러한 오류를 범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만큼 경험이라는 것의 힘이 크며,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것에 대한 믿음의 힘이 크다 보니 사람들은 그것을 토대로 자신이 무언가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은 옳다고 선뜻 믿는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어른이든, 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사람이든 간에 자신의 경험과 기존의 앎에 가려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하여 무지하곤 한다. 우리는 저마다 이러한 한계를 지닌 채로 무언가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우를 범하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키워드
깨닮음, 도, 무지, 앎, 지식,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