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본문의 [가]와 [나]는 모두 『장자』 「제물론(齊物論)」 편에 실려 있는 글이다. ‘제물’이란 “만사만물은 모두 가지런하다”는 뜻으로 사랑, 미움, 화해, 갈등 같은 모든 일들을, 또 사람이나 온갖 동물, 식물, 미생물은 물론 광물 같은 무생물 등 모든 사물을 똑같은 것으로, 달리 말해 평등한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가령 장자가 말했듯이 유학자들이 말하는 성인군자는 소 똥, 말 오줌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제물론」에는 이러한 관점 아래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념과 사고, 지혜, 가치 판단과 시비 판단의 기준 등의 한계를 지적하는 단편적인 글들이 다수 담겨 있다. 장자는 이를 통해 고정된 사고방식, 세계관 등에 갇히지 말고 더 넓고 다면적 시각으로 세상과 만사만물을 바라볼 것을 촉구하였다. 고전본문도 그러한 글이며, [가]와 [나] 모두 전편을 인용하였다.
고전본문
[가] 만일 나와 네가 논쟁한다고 하자.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기지 못한다면 과연 네가 옳고 나는 정말로 그른 것인가?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과연 옳고 너는 정말로 그른 것인가? 그 한쪽이 옳은가, 아니면 다른 한쪽이 그른가? 모두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그른 것인가? 나와 너는 이를 알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물론 혼란스러워하니, 우리는 누구를 시켜 판단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너와 입장이 같은 자로 판단하게 한다면 그가 이미 너와 같은 입장이니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 입장이 같은 자로 가리게 하면 그가 이미 나와 같은 입장이니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하고 너와 입장을 달리하는 자로 판단하게 하면, 그가 이미 나와 너 우리 둘 다와 입장이 다른데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하고 너와 입장을 같이하는 자로 판단하게 하면, 그가 이미 나와 너와 입장이 같아졌는데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와 너와 다른 사람 모두는 누가 옳은지를 알 수 없는데도 너는 아직도 저들에게 기대하는가?
[나] 사물은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 것도 없다. 저것은 저것만 보면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부터 보면 곧 알게 된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이는 저것과 이것이 함께해야 비로소 이것은 이것으로, 저것은 저것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견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아감은 죽어감이고 죽어감은 살아감이며, 가능함은 불가능함이고 불가능함은 가능함이다. 옳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릇됨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릇됨으로 말미암는 것은 옳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또한 옳거나 그를 수 있고, 이것 또한 옳거나 그를 수 있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라는 구분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과 이것이라는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가] 旣使我與若辯矣, 若勝我, 我不若勝, 若果是也, 我果非也邪. 我勝若, 若不吾勝, 我果是也, 而果非也邪. 其或是也, 其或非也邪. 其俱是也, 其俱非也邪. 我與若不能相知也, 則人固受黮闇, 吾誰使正之. 使同乎若者正之, 旣與若同矣, 惡能正之. 使同乎我者正之, 旣同乎我矣, 惡能正之. 使異乎我與若者正之, 旣異乎我與若矣, 惡能正之. 使同乎我與若者正之, 旣同乎我與若矣, 惡能正之. 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 而待彼也邪.
[나]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출전]『장자』
토론하기
(1) [가]에서 장자는 누가 옳은지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한 장자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2) [나]에서 장자는 무언가를 ‘이것’ 또는 ‘저것’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한 장자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3) [가], [나]에 서술된 장자의 논리가 지니는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나와 친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가? 자신의 견해가 옳음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가, 아니면 자신의 견해가 잘못됐음을 시인하고 친구의 견해를 따르는가? 어느 경우든 나 또는 친구의 견해가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고전본문 [가]와 [나]는 누군가의 견해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가]에서는 서로 의견이 상반될 때, 그리고 둘 다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확신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제3자더러 누가 옳은지를 판정해달라고 하곤 하는데, 이러한 방도로는 옳고 그름을 근본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의견이 표명되어 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제3자라고 해서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현실이다. 제3자가 나와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나와의 관계에서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그가 행하는 판단이 100%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친구와 아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친구와 서로 아는 사이라면 결국 친구와의 이해관계에서 100%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그의 판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친구 둘 모두와 아무 관계도 없는 제3자로 판단을 하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장자는 이 또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이 또 다른 이유다. 장자는 제3자가 나와 친구 모두와 관계없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나와 친구가 상반된 판단을 하고 있는 그 일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지를 전혀 모를 수밖에 없으니 객관적인 판단을 아예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자기와 이해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고, 무지하기에 정확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장자의 이러한 관점은 [나]에서는 한층 근본적인 차원에서 표명된다. 장자는 아예 나와 너의 구분이 참된 것인지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가 없다면 너도 있을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결국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하게 되고 너도 나로 인해 존재하게 된다. 만약 태어날 때부터 무인도에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써서 가리킬 필요가 없다. ‘너’라고 부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너’가 없다면 굳이 자신을 ‘나’라고 가리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와 너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나와 너로 각각 나뉘어서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갖는 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따름이지 실질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누가 옳고 또 누구는 그르다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판정할 수 없게 된다. 장자는 이러한 이치를 ‘이것’과 ‘저것’ 사이의 구분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것과 저것은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규정될 수 있다. 볼펜이 두 개는 있어야 ‘이 볼펜’, ‘저 볼펜’ 식의 규정이 가능해지지 그저 하나만 있으면, 이를테면 “친구야, 볼펜 좀 줘”라고 하지 굳이 ‘이’나 ‘저’를 붙여 “친구야, 이/저 볼펜 좀 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언가를 이것으로 불렀다면 이미 그 속에는 저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고, 반대로 저것으로 불렀다면 그 속에도 이미 이것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이것 속에는 저것이 있고, 저것 속에는 이것이 있게 마련이니, 이것을 이것이라고만 하고 저것을 저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옳고 그름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무엇이 그르다고 판단되어야지 무언가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니, 결국 옳음 속에서는 그름이 들어와 있고 그름 속에는 옳음이 들어와 있는 셈이 된다.
이들 이야기는 한편으로 인간 인식의 근원적 한계를 환기한다. 인간이 행하는 판단의 상당 부분이 이렇듯 이원 대립적인 구도 아래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쉽다, 어렵다 같은 판단이 가능함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타당해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인간은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있어도, 또 형성되어 있지 않아도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으로 세상을, 만사만물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장자가 인용문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키워드
도가, 상대주의적 진리, 인식의 상대성, 장자, 제물론
전후맥락
고전본문의 [가]와 [나]는 모두 『장자』 「제물론(齊物論)」 편에 실려 있는 글이다. ‘제물’이란 “만사만물은 모두 가지런하다”는 뜻으로 사랑, 미움, 화해, 갈등 같은 모든 일들을, 또 사람이나 온갖 동물, 식물, 미생물은 물론 광물 같은 무생물 등 모든 사물을 똑같은 것으로, 달리 말해 평등한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가령 장자가 말했듯이 유학자들이 말하는 성인군자는 소 똥, 말 오줌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제물론」에는 이러한 관점 아래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념과 사고, 지혜, 가치 판단과 시비 판단의 기준 등의 한계를 지적하는 단편적인 글들이 다수 담겨 있다. 장자는 이를 통해 고정된 사고방식, 세계관 등에 갇히지 말고 더 넓고 다면적 시각으로 세상과 만사만물을 바라볼 것을 촉구하였다. 고전본문도 그러한 글이며, [가]와 [나] 모두 전편을 인용하였다.
고전본문
[가] 만일 나와 네가 논쟁한다고 하자. 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너를 이기지 못한다면 과연 네가 옳고 나는 정말로 그른 것인가? 내가 너를 이기고 네가 나를 이기지 못했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과연 옳고 너는 정말로 그른 것인가? 그 한쪽이 옳은가, 아니면 다른 한쪽이 그른가? 모두가 옳은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그른 것인가? 나와 너는 이를 알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물론 혼란스러워하니, 우리는 누구를 시켜 판단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너와 입장이 같은 자로 판단하게 한다면 그가 이미 너와 같은 입장이니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 입장이 같은 자로 가리게 하면 그가 이미 나와 같은 입장이니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하고 너와 입장을 달리하는 자로 판단하게 하면, 그가 이미 나와 너 우리 둘 다와 입장이 다른데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하고 너와 입장을 같이하는 자로 판단하게 하면, 그가 이미 나와 너와 입장이 같아졌는데 어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와 너와 다른 사람 모두는 누가 옳은지를 알 수 없는데도 너는 아직도 저들에게 기대하는가?
[나] 사물은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 것도 없다. 저것은 저것만 보면 알 수 없지만 이것으로부터 보면 곧 알게 된다. 그래서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 또한 저것으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이는 저것과 이것이 함께해야 비로소 이것은 이것으로, 저것은 저것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견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아감은 죽어감이고 죽어감은 살아감이며, 가능함은 불가능함이고 불가능함은 가능함이다. 옳음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릇됨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릇됨으로 말미암는 것은 옳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또한 옳거나 그를 수 있고, 이것 또한 옳거나 그를 수 있다. 과연 저것과 이것이라는 구분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저것과 이것이라는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가] 旣使我與若辯矣, 若勝我, 我不若勝, 若果是也, 我果非也邪. 我勝若, 若不吾勝, 我果是也, 而果非也邪. 其或是也, 其或非也邪. 其俱是也, 其俱非也邪. 我與若不能相知也, 則人固受黮闇, 吾誰使正之. 使同乎若者正之, 旣與若同矣, 惡能正之. 使同乎我者正之, 旣同乎我矣, 惡能正之. 使異乎我與若者正之, 旣異乎我與若矣, 惡能正之. 使同乎我與若者正之, 旣同乎我與若矣, 惡能正之. 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 而待彼也邪.
[나]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故曰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 而照之於天, 亦因是也.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출전]『장자』
토론하기
(1) [가]에서 장자는 누가 옳은지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한 장자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2) [나]에서 장자는 무언가를 ‘이것’ 또는 ‘저것’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러한 장자의 논리를 정리해보자.
(3) [가], [나]에 서술된 장자의 논리가 지니는 장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나와 친구가 어떤 일에 대하여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는가? 자신의 견해가 옳음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가, 아니면 자신의 견해가 잘못됐음을 시인하고 친구의 견해를 따르는가? 어느 경우든 나 또는 친구의 견해가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고전본문 [가]와 [나]는 누군가의 견해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회의한다. [가]에서는 서로 의견이 상반될 때, 그리고 둘 다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확신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제3자더러 누가 옳은지를 판정해달라고 하곤 하는데, 이러한 방도로는 옳고 그름을 근본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의견이 표명되어 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제3자라고 해서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현실이다. 제3자가 나와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나와의 관계에서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그가 행하는 판단이 100%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친구와 아는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다. 친구와 서로 아는 사이라면 결국 친구와의 이해관계에서 100%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그의 판단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친구 둘 모두와 아무 관계도 없는 제3자로 판단을 하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장자는 이 또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이 또 다른 이유다. 장자는 제3자가 나와 친구 모두와 관계없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나와 친구가 상반된 판단을 하고 있는 그 일이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는지를 전혀 모를 수밖에 없으니 객관적인 판단을 아예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자기와 이해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밖에 없고, 무지하기에 정확하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장자의 이러한 관점은 [나]에서는 한층 근본적인 차원에서 표명된다. 장자는 아예 나와 너의 구분이 참된 것인지를 되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가 없다면 너도 있을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결국 나는 너로 인해 존재하게 되고 너도 나로 인해 존재하게 된다. 만약 태어날 때부터 무인도에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써서 가리킬 필요가 없다. ‘너’라고 부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너’가 없다면 굳이 자신을 ‘나’라고 가리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나와 너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나와 너로 각각 나뉘어서 서로 상반된 견해를 갖는 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따름이지 실질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누가 옳고 또 누구는 그르다는 식으로 단정적으로 판정할 수 없게 된다. 장자는 이러한 이치를 ‘이것’과 ‘저것’ 사이의 구분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이것과 저것은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규정될 수 있다. 볼펜이 두 개는 있어야 ‘이 볼펜’, ‘저 볼펜’ 식의 규정이 가능해지지 그저 하나만 있으면, 이를테면 “친구야, 볼펜 좀 줘”라고 하지 굳이 ‘이’나 ‘저’를 붙여 “친구야, 이/저 볼펜 좀 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언가를 이것으로 불렀다면 이미 그 속에는 저것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고, 반대로 저것으로 불렀다면 그 속에도 이미 이것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이것 속에는 저것이 있고, 저것 속에는 이것이 있게 마련이니, 이것을 이것이라고만 하고 저것을 저것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옳고 그름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무엇이 그르다고 판단되어야지 무언가가 옳다고 판단할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니, 결국 옳음 속에서는 그름이 들어와 있고 그름 속에는 옳음이 들어와 있는 셈이 된다.
이들 이야기는 한편으로 인간 인식의 근원적 한계를 환기한다. 인간이 행하는 판단의 상당 부분이 이렇듯 이원 대립적인 구도 아래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쉽다, 어렵다 같은 판단이 가능함을 생각해보면 장자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타당해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인간은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있어도, 또 형성되어 있지 않아도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그러니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으로 세상을, 만사만물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는가? 장자가 인용문의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로 이것일 것이다.
키워드
도가, 상대주의적 진리, 인식의 상대성, 장자, 제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