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맥락
고전본문의 [가]는 『장자』, 「양생주(養生主)」 편에 실려 있는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전편 인용한 것이고, [나]는 『장자』, 「천도(天道)」 편에 실려 있는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전편 인용한 것이다. 각각 “포정해우(庖丁解牛, 포정이 소를 해체하다)”, “윤편착륜(輪扁斲輪,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다)”는 고사성어로 유명하다. 양생주란 ‘삶을 길러주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편에는 자기 삶을 길러주는 참된 주인이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아님을 일깨우는 글들이 실려 있다. 천도란 ‘하늘의 도’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편에는 주로 제왕의 도는 텅 비고 고요하며 무위(無爲)하여야 함을 논한 글들이 실려 있다. 포정해우와 윤편착륜의 이야기는 모두 경지에 오른 기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취지를 서술하고 있다.
고전본문
[가]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이 닿거나 어깨로 기대거나 발로 밟거나 무릎으로 누를 때마다 서걱서걱, 썩둑썩둑 하는 소리가, 칼질 할 때마다 쓱쓱싹싹 하는 소리가 음률에 들어맞아 탕왕의 상림이란 가락에 합치하고 요임금이 만든 경수라는 음악의 가락과도 들어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야!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하여 이 경지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으며 대꾸하며 말했다. “신이 좋아하는 것은 도로 기술보다 우월하지요. 처음에 신이 소를 잡을 때 보이는 것은 모조리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 전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신은 정신으로써 소를 대하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오관과 지각의 작용은 멈춰지고 정신의 작용만이 행해집니다. 천리에 의거하여 큰 틈을 쳐나가고, 큰 틈바구니를 따라 소의 원래의 구조대로 좇다보니 경락이 얽혀있는 곳과 살이 엉켜있는 곳에 부딪힌 적이 없는데,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솜씨 좋은 백정은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가르기 때문이요, 평범한 백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꾸니 이는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의 칼은 19년이 되었고 잡은 소만해도 수천 마리이나 칼날은 막 숫돌에 간 것 같이 쌩쌩합니다. 저 뼈마디 사이에는 틈새가 있고 제 칼날에는 무디어져 두꺼워진 곳이 없습니다. 무뎌진 곳 없는 칼로 뼈마디의 틈 사이로 들어간다면, 넓디넓어 또한 칼을 놀림에 틀림없이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19년이 되었지만 칼날은 막 숫돌에서 갈아 낸 듯합니다. 비록 이러하지만 뼈마디가 교차하며 모여 있는 것을 마주치게 되면 저는 그 하기 어려움을 보고는 조심조심 삼가며 시선을 모으고 행동을 천천히 합니다.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 털썩하는 소리가 나면 이미 분해되어 흙덩이가 땅위에 던져진 것처럼 됩니다. 칼을 든 채로 일어나서 이로 인해 주위를 둘러보고, 이로 인해 잠시 주저하다가는 흐뭇해하며 칼을 닦아 넣습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도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는 양생의 도리를 터득하였도다.”
[나] 제나라 환공은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가 망치와 끌을 놓고는 대청으로 다가와 환공에게 여쭸다.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에 무슨 내용이 써 있는지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환공이 답했다. “성인(聖人)들의 말씀이지.” “그 성인들은 지금 살아 계신 분입니까?” “이미 돌아가셨다네.” “그러면 임금님께서 지금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이겠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장이가 어찌 논란거리로 삼는가? 시비를 건 올바른 근거가 있으면 괜찮겠지만 근거가 없으면 죽여 버릴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저는 제가 늘 하는 일에 비추어 책 읽는 일을 바라본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느슨하게 깎으면 헐렁해져 견고하지 못하게 됩니다. 꽉 끼게 깎으면 빡빡해져서 서로 들어맞지 않게 됩니다. 느슨하지도 않고 꽉 끼지도 않게 하는 것은 제 손이 마음에 부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법도가 존재합니다만 저는 그것을 제 아들에게도 가르쳐 줄 수 없고, 제 아들도 그것을 저에게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이 70의 노인임에도 수레바퀴를 깎고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 사람과 그의 전할 수 없는 정신은 함께 죽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임금께서 현재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가]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 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枝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牛不知其死也, 如土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나] 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 公之所讀者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然則君之所讀者, 故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无說則死.” 輪扁曰, “臣也以臣之事觀之. 斲輪, 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得之於手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 古之人與其不可傳也死矣. 然則君之所讀者, 故人之糟魄已夫.”
[출전]『장자』
토론하기
(1) [가]와 [나]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나눠보자.
(2) 말로 다 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한 머릿속의, 마음속의 하고 싶은 말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가? 그것들을 왜 말로 다 전달하지 못했는지 그 까닭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3) [가]의 포정과 [나]의 윤편이 지닌 기술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관점이 지니는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동서를 막론하고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말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어 왔다. 한자권에서도 공자의 시대 이미 말의 한계가 거론되었다. 가령 “말은 마음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글은 말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와 같은 명제가 공자의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공자보다 선배 세대였다는 노자도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라며 이름의 임의성, 가변성을 지적하였다. 이는 곧 언어의 임의성, 가변성을 지적한 것으로써 노자는 이를 통해 언어의 한계를 환기하였다.
언어에 대하여 장자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지녔다. 그는 포정이라는 도축 전문가의 절정에 달한 도축 기술을 매개로, 또 윤편이라는 수레바퀴 제작 달인의 제작 기술을 예로 들어 언어에 담을 수 없는 바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고전본문 [가]에서 문혜군은 포정의 소 도축 솜씨를 지켜보다 크게 감탄하며 포정에게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포정은 자신은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도(道)에 근거하여 소를 도축했다고 답한다. 어떤 기술이든 그것을 토대로 도를 깨닫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포정은 도축 기술을 써서 소를 해체하면 소의 살을 베어내고 뼈마디를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칼이 무뎌질 수밖에 없지만, 자신은 소를 이루고 있는 도를 터득하고 그것을 따라 칼을 놀리기 때문에 칼날이 무뎌질 일이 없다고 한다. 벌써 19년째 한 번도 칼을 숫돌에 간 적이 없음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포정은 자신이 소의 도를 깨닫고 그것에 의해 소를 도축할 할 때의 자신의 동작에 대하여 진술했을 뿐 소의 도나 소를 도축하는 도 자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도는 말에 담길 수 없었기에 그렇다.
그래서 [나]의 윤편은 감히 군주 앞에서 책에는 그 책을 쓴 사람이 깨달은 정신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말이나 글에 담아낼 수 있는 앎이 있는가 하면 애초부터 그럴 수 없는 앎도 있다는 것이다. 윤편은 자신의 수레바퀴 제작 기술은 참된 앎, 곧 깨달음을 말이나 글에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나이가 이미 일흔 살임에도 여전히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으니, 자신만이 터득한 수레바퀴에 대한 정신적 깨달음은 아들에게도, 손자에게도 말이나 글을 통해 전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아뢴다. 윤편은 말이나 글로 전수할 수 있는 것은 비유컨대 찌꺼기에 대한 앎이라고까지 단언한다. 따라서 아무리 성인의 말이 담겨 있는 글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성인이 깨달은 앎 중에서 허접한 쓰레기 같은 것만 담겨 있을 뿐이니 그러한 글로 된 책을 읽을 필요는 전혀 없게 된다. 성인을 성인답게 만들어준 참된 깨달음은 정신적 깨달음인지라 말이나 글이 아닌 다른 방도로 전수된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포정이나 윤편 모두 정신적 깨달음이 말이나 글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전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장자의 다른 곳에는 그 방도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항상 자연을 따르고 만물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으며, 마음을 텅 비고 고요하게 하며 무위를 행하면 정신적 깨달음을 터득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러한 방도가 지금 여기의 현대사회에서도 가능한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말이다.
키워드
도가, 언어, 언어의 한계, 윤편착륜, 장자, 포정해우,
전후맥락
고전본문의 [가]는 『장자』, 「양생주(養生主)」 편에 실려 있는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전편 인용한 것이고, [나]는 『장자』, 「천도(天道)」 편에 실려 있는 여러 이야기 가운데 하나를 전편 인용한 것이다. 각각 “포정해우(庖丁解牛, 포정이 소를 해체하다)”, “윤편착륜(輪扁斲輪, 윤편이 수레바퀴를 깎다)”는 고사성어로 유명하다. 양생주란 ‘삶을 길러주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이 편에는 자기 삶을 길러주는 참된 주인이 자신의 몸이나 마음이 아님을 일깨우는 글들이 실려 있다. 천도란 ‘하늘의 도’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편에는 주로 제왕의 도는 텅 비고 고요하며 무위(無爲)하여야 함을 논한 글들이 실려 있다. 포정해우와 윤편착륜의 이야기는 모두 경지에 오른 기예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취지를 서술하고 있다.
고전본문
[가]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는데 손이 닿거나 어깨로 기대거나 발로 밟거나 무릎으로 누를 때마다 서걱서걱, 썩둑썩둑 하는 소리가, 칼질 할 때마다 쓱쓱싹싹 하는 소리가 음률에 들어맞아 탕왕의 상림이란 가락에 합치하고 요임금이 만든 경수라는 음악의 가락과도 들어맞았다. 문혜군이 말했다. “야! 훌륭하구나. 기술이 어찌하여 이 경지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포정이 칼을 내려놓으며 대꾸하며 말했다. “신이 좋아하는 것은 도로 기술보다 우월하지요. 처음에 신이 소를 잡을 때 보이는 것은 모조리 소뿐이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 전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신은 정신으로써 소를 대하지 눈으로 소를 보지 않습니다. 오관과 지각의 작용은 멈춰지고 정신의 작용만이 행해집니다. 천리에 의거하여 큰 틈을 쳐나가고, 큰 틈바구니를 따라 소의 원래의 구조대로 좇다보니 경락이 얽혀있는 곳과 살이 엉켜있는 곳에 부딪힌 적이 없는데, 하물며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겠지요. 솜씨 좋은 백정은 1년에 한 번씩 칼을 바꾸는데 이는 살을 가르기 때문이요, 평범한 백정은 한 달에 한 번씩 칼을 바꾸니 이는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신의 칼은 19년이 되었고 잡은 소만해도 수천 마리이나 칼날은 막 숫돌에 간 것 같이 쌩쌩합니다. 저 뼈마디 사이에는 틈새가 있고 제 칼날에는 무디어져 두꺼워진 곳이 없습니다. 무뎌진 곳 없는 칼로 뼈마디의 틈 사이로 들어간다면, 넓디넓어 또한 칼을 놀림에 틀림없이 여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19년이 되었지만 칼날은 막 숫돌에서 갈아 낸 듯합니다. 비록 이러하지만 뼈마디가 교차하며 모여 있는 것을 마주치게 되면 저는 그 하기 어려움을 보고는 조심조심 삼가며 시선을 모으고 행동을 천천히 합니다.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여 털썩하는 소리가 나면 이미 분해되어 흙덩이가 땅위에 던져진 것처럼 됩니다. 칼을 든 채로 일어나서 이로 인해 주위를 둘러보고, 이로 인해 잠시 주저하다가는 흐뭇해하며 칼을 닦아 넣습니다.” 문혜군이 말했다. “훌륭하도다!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는 양생의 도리를 터득하였도다.”
[나] 제나라 환공은 대청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가 망치와 끌을 놓고는 대청으로 다가와 환공에게 여쭸다. “임금님께서 읽고 계신 것에 무슨 내용이 써 있는지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환공이 답했다. “성인(聖人)들의 말씀이지.” “그 성인들은 지금 살아 계신 분입니까?” “이미 돌아가셨다네.” “그러면 임금님께서 지금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이겠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수레바퀴장이가 어찌 논란거리로 삼는가? 시비를 건 올바른 근거가 있으면 괜찮겠지만 근거가 없으면 죽여 버릴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저는 제가 늘 하는 일에 비추어 책 읽는 일을 바라본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느슨하게 깎으면 헐렁해져 견고하지 못하게 됩니다. 꽉 끼게 깎으면 빡빡해져서 서로 들어맞지 않게 됩니다. 느슨하지도 않고 꽉 끼지도 않게 하는 것은 제 손이 마음에 부응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법도가 존재합니다만 저는 그것을 제 아들에게도 가르쳐 줄 수 없고, 제 아들도 그것을 저에게 배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이 70의 노인임에도 수레바퀴를 깎고 있게 되었습니다. 옛날 사람과 그의 전할 수 없는 정신은 함께 죽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임금께서 현재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가] 庖丁爲文惠君解牛. 手之所觸, 肩之所倚, 足之所履, 膝之所踦, 砉然嚮然. 奏刀騞然, 莫不中音, 合於桑林之舞, 乃中經首之會. 文惠君曰, “譆, 善哉. 技蓋至此乎.” 庖丁釋刀對曰, “臣之所好者, 道也, 進乎技矣. 始臣之解牛之時, 所見无非牛者. 三年之後, 未嘗見全牛也. 方今之時, 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止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郤, 導大窾, 因其固然, 枝經肯綮之未嘗, 而況大軱乎. 良庖歲更刀, 割也. 族庖月更刀, 折也. 今臣之刀十九年矣, 所解數千牛矣, 而刀刃若新發於硎. 彼節者有閒,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閒,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 是以十九年而刀刃若新發於硎. 雖然, 每至於族, 吾見其難爲, 怵然爲戒, 視爲止, 行爲遲. 動刀甚微, 謋然已解, 牛不知其死也, 如土委地. 提刀而立, 爲之四顧, 爲之躊躇滿志, 善刀而藏之.” 文惠君曰, “善哉. 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나] 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 公之所讀者何言邪.” 公曰, “聖人之言也.” 曰,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曰, “然則君之所讀者, 故人之糟魄已夫.”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无說則死.” 輪扁曰, “臣也以臣之事觀之. 斲輪, 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得之於手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年七十而老斲輪. 古之人與其不可傳也死矣. 然則君之所讀者, 故人之糟魄已夫.”
[출전]『장자』
토론하기
(1) [가]와 [나] 각각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나눠보자.
(2) 말로 다 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또한 머릿속의, 마음속의 하고 싶은 말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가? 그것들을 왜 말로 다 전달하지 못했는지 그 까닭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자.
(3) [가]의 포정과 [나]의 윤편이 지닌 기술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관점이 지니는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논의해보자.
해설읽기
동서를 막론하고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말의 한계에 대한 지적이 있어 왔다. 한자권에서도 공자의 시대 이미 말의 한계가 거론되었다. 가령 “말은 마음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글은 말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와 같은 명제가 공자의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공자보다 선배 세대였다는 노자도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라며 이름의 임의성, 가변성을 지적하였다. 이는 곧 언어의 임의성, 가변성을 지적한 것으로써 노자는 이를 통해 언어의 한계를 환기하였다.
언어에 대하여 장자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관점을 지녔다. 그는 포정이라는 도축 전문가의 절정에 달한 도축 기술을 매개로, 또 윤편이라는 수레바퀴 제작 달인의 제작 기술을 예로 들어 언어에 담을 수 없는 바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고전본문 [가]에서 문혜군은 포정의 소 도축 솜씨를 지켜보다 크게 감탄하며 포정에게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포정은 자신은 기술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도(道)에 근거하여 소를 도축했다고 답한다. 어떤 기술이든 그것을 토대로 도를 깨닫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포정은 도축 기술을 써서 소를 해체하면 소의 살을 베어내고 뼈마디를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칼이 무뎌질 수밖에 없지만, 자신은 소를 이루고 있는 도를 터득하고 그것을 따라 칼을 놀리기 때문에 칼날이 무뎌질 일이 없다고 한다. 벌써 19년째 한 번도 칼을 숫돌에 간 적이 없음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포정은 자신이 소의 도를 깨닫고 그것에 의해 소를 도축할 할 때의 자신의 동작에 대하여 진술했을 뿐 소의 도나 소를 도축하는 도 자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도는 말에 담길 수 없었기에 그렇다.
그래서 [나]의 윤편은 감히 군주 앞에서 책에는 그 책을 쓴 사람이 깨달은 정신은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말이나 글에 담아낼 수 있는 앎이 있는가 하면 애초부터 그럴 수 없는 앎도 있다는 것이다. 윤편은 자신의 수레바퀴 제작 기술은 참된 앎, 곧 깨달음을 말이나 글에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나이가 이미 일흔 살임에도 여전히 수레바퀴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으니, 자신만이 터득한 수레바퀴에 대한 정신적 깨달음은 아들에게도, 손자에게도 말이나 글을 통해 전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아뢴다. 윤편은 말이나 글로 전수할 수 있는 것은 비유컨대 찌꺼기에 대한 앎이라고까지 단언한다. 따라서 아무리 성인의 말이 담겨 있는 글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성인이 깨달은 앎 중에서 허접한 쓰레기 같은 것만 담겨 있을 뿐이니 그러한 글로 된 책을 읽을 필요는 전혀 없게 된다. 성인을 성인답게 만들어준 참된 깨달음은 정신적 깨달음인지라 말이나 글이 아닌 다른 방도로 전수된다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포정이나 윤편 모두 정신적 깨달음이 말이나 글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전수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 장자의 다른 곳에는 그 방도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테면 항상 자연을 따르고 만물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으며, 마음을 텅 비고 고요하게 하며 무위를 행하면 정신적 깨달음을 터득할 수 있다는 식이다. 이러한 방도가 지금 여기의 현대사회에서도 가능한지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말이다.
키워드
도가, 언어, 언어의 한계, 윤편착륜, 장자, 포정해우,